국어문학창고

나오라 - 이병기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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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라 - 이병기


 요점 정리

 지은이 : 이병기

 갈래 : 현대 시조, 연시조,

 성격 : 의지적, 계몽적

 운율 : 4음보 외형률

 특징 : 장별 배행, 설득적이면서도 계몽적이고 선동적인 표현이 강함

 제재 : 조국의 해방

 주제 : 조국 광복의 기쁨과 새 조국 건설의 의지

 

 

 내용 연구

 일즉 님을 여희고 이리저리 헤매이다 : 님이라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불철주야 백방으로 뛰어다닌 모습을 형상화

 버리고 던진 목숨 이루 헬 수도 없다 : 독립 투쟁으로 희생된 애국 지사를 말함

 웃음을 하기보다도 눈물 먼저 흐른다 : 너무 벅찬 감격으로 웃음보다는 울음이 나온다는 말

 이 날 : 조국 광복

 낡은 터 : 일제 치하로 황폐화된 조국

 새 집을 이룩하자. :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자는 선동적인 의미

 손마다 연장을 들고 어서 바삐 나오라 : 조국 건설을 위해 건설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지고 조국 건설에 동참하라는 말

 

 

 이해와 감상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여 일제 강점하에서 벗어나 벅찬 감격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으로 1연에서는 조국 광복을 맞은 화자의 벅찬 감정 표현이 들어 있고, 2연에서는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자는 계몽적이고 선동적인 의지의 표현이 담겨 있다. 2연에서의 '직설적인 표현'인 ' 이룩하자, 나오라'와 같은 시어는 명령형 문체로 이 시조의 역동적인 느낌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병기(李秉岐)

 1891(고종 28)∼1968. 국문학자·시조시인.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가람(嘉藍). 전라북도 익산 출신. 변호사 채(汁)의 큰아들이다.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당대 중국의 사상가 량치챠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전주제2·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당시 수집한 서책은 뒷날 방대한 장서를 이루었는데, 말년에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여 중앙도서관에 ‘가람문고’가 설치되었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임경재(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다.

 

1928년 이를 ‘가요연구회(歌謠硏究會)’로 개칭하여 조직을 확장하면서 시조 혁신을 제창하는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한때 귀향하였다가 광복이 되자 상경하여 군정청 편수관을 지냈다.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6·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술복·문복·제자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1920년 9월 ≪공제 共濟≫ 1호에 발표한 〈수레 뒤에서〉이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산문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다분히 옛 것을 본받고 있었다.

 

그가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11.24.∼12.13.)·〈율격(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11.28.∼12.1.)·〈시조원류론 時調源流論〉(新生, 1929.1.∼5.)·〈시조는 창(唱)이냐 작(作)이냐〉(新民, 1930.1.)·〈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23.∼2.4.)·〈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11.)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이 무렵 ≪동아일보≫의 시조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 文章≫에 조남령(曺南嶺)·오신혜(吳信惠)·김상옥(金相沃)·장응두(張應斗)·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 嘉藍時調集≫(문장사)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 관조와 〈젖〉에 나타난 인정물 등 순수서정 일변도였다.

그 뒤 옥중작인 〈홍원저조 洪原低調〉 등에서 사회성이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은 6·25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다.

 

〈탱자울〉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비리의 고발, 권력의 횡포에 대한 저항이 후기의 특징으로 꼽히는데, 이것은 현대시조의 새로운 일면을 개척한 것이었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 있던 고전작품들, 〈한중록〉·〈인현왕후전〉·〈요로원야화기 要路院夜話記〉·〈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그는 이 밖에 많은 수필을 썼고, 특히 평생 동안 극명하게 쓴 일기는 놀랄 만하다. 주요 저서로는 ≪가람시조집≫을 비롯하여 ≪국문학개론≫·≪국문학전사≫·≪가람문선≫ 등이 있다.

 

전라북도 예총장(藝總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1960년 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62년 문화포장을 받았다. 전라북도 전주시 다가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참고문헌≫ 增補改訂時調詩學敍說(林仙默, 檀國大學校出版部, 1981), 近代時調集의 樣相(林仙默, 檀國大學校出版部, 1983), 李秉岐(張諄河, 週刊朝鮮, 1983.2.2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복 이후의 문학

 광복 이후의 문학은 한국 사회의 당대적인 요건과 직접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광복과 함께 반 세기에 걸쳐 발전해 온 오늘의 한국 문학은 민족과 국토가 분단된 상황 속에서 자라온 그 속성으로 인하여 한국인들에게는 하나의 경험적인 현실로 인식된다. 다시 말하면, 이 기간 동안의 문학은 역사적 사실로 고정되어 있다기보다는, 여전히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상황적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광복 이후에 전개된 한국 문학의 성격을 문학사적인 관점에서 규정한다는 것이 아직도 시기 상조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기의 한국 문학은 아직도 문학사 연구의 영역에서 종합적인 해석, 평가의 과정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문학사 연구를 보면, 광복 이후의 문학에 대해서는 문학적 사실에 대한 평가 작업이 상당 부분 문단적 관심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광복 이후 반 세기의 한국 문학은 체험적 현실의 영역에서 분리되어 문학사적 사실로 정리되어야 할 만큼 시간적인 간격을 지니고 있다. 이 기간은 햇수로 따져도 이전의 일제 강점기 역사를 훨씬 넘어서고 있으며, 한국 현대 문학의 전체적인 흐름 가운데에서 그 후반부를 거의 차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의 문학은 문학사 연구의 대상으로서 그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광복 이후의 문학은 한국 현대 문학사의 한 단계이며, 개화 계몽 시대의 문학, 일제 강점기의 문학에 이어지는 연속적인 실체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 현대사에서 광복은 역사적 상황 변화의 중요한 고비에 해당되지만, 그것이 문학사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기의 문학을 한국 현대 문학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한다는 방향에서 검토할 경우, 국토와 민족의 분단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근대화 과정에서 빚어진 혼란에 대응해 온 한국 문학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온 한국 민족의 정신적인 실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광복 이후 반 세기 문학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근본적인 상황은 일제 강점으로부터의 광복과 민족의 분단이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역사 체험이다. 광복은 일제 강점기의 노예적인 문학적 관습에 대한 비판과 민족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광복과 함께 문학 정신의 재정립이 가능했으며, 문단 자체의 정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문화적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민족 문학을 확립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광복 직후에 문학의 목표로 설정되었던 사실이 바로 이러한 상황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광복은 광복이라는 절대적인 가치 개념만으로 문학사적 의미가 규정되기는 어렵다. 광복과 함께 한국인들은 식민지 시대의 정치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지만, 열강의 대립 속에서 강요된 민족의 분단이 광복 이후 한국인들의 삶에 또 다른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민족과 국토의 분단이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저변에 깔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삶 전체가 이데올로기의 요구에 따라 그 문제적 범주를 한정받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미 민족 분단의 비극을 한국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절실하게 체험한 바 있고, 분단으로 인하여 야기된 문학의 파행적인 양상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에서 비롯된 전쟁의 절박한 상황은 문학의 영역에서 더욱 극적인 긴장을 수반하면서 형상화되어야 했고, 분단의 현실과 그 암울함에 대응하는 저항의 언어가 문학의 세계에 요구되었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광복 이후의 시대는 민족 분단의 시대에 해당된다. 광복 이후의 문학을 동일한 맥락에서 분단 시대 문학이라는 말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명칭은 일제 강점기 문학이라는 말과 같이 문학 외적인 시대적 상황성을 중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개화 계몽 시대 문학 - 일제 강점기 문학 - 분단 시대 문학이라는 현대 문학사의 단계를 놓고 볼 때에도, 문학의 본질적 요구보다는 역사적 조건이 그 기준이 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모든 논의가 문학의 독자적인 가치와 그 존재 의미를 구현할 수 있는 문학성의 발견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현실적 객관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문학이 기반을 두고 있는 상황적 여건을 포괄할 수 있는 통합적인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한 시대의 문학적 특성은 이른바 시대 정신의 향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그 시대의 문학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상황 자체에 대한 이해가 전제됨은 물론이다. 예컨대, 개화 계몽 시대 문학이 주체적인 근대 지향 의식의 문학적 형상화라는 점에서 그 문학사적 의미를 인정받을 수 있다면, 일제 강점기의 문학은 식민지 현실의 인식과 그 정신적 극복 의지의 문학적 구현에 문학사적 의미가 부여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분단 시대의 문학은 분단의 극복과 민족 전체의 삶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문제삼는 경우 더욱 의미 있는 문학적 현상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권영민의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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