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성품
by 송화은율나라의 성품
하 겸 진 지음
이 상 하 번역
나라에 성품이 있는 것이 사실인가? 그러하다. 무엇을 성품이라 하는가? 온나라 사람들이 숭상하는 바이다. 성품이란 하늘이 명(命)한 것을 이르는데, 온 나라 사람들이 숭상하는 바를 또한 성품이라 하는 것이 될 법이나 하겠는가? <<서경(書經)>> 이훈(伊訓)에, "습관이 성품과 하나로 어루러진다." 하였으니, 그 숭상하는 바에 습관이 들어 이를 대대로 지켜서 마치 고유한 듯하게 된 것을 역시 이름하여 성품이라 한다. 사람의 성품은 하나일 따름이니, 어찌 숭상하는 바가 다르다 하여 저마다 그 성품이 될 수 있겠는가?
나라란 사람이 있고서야 이루어지는데, 나라를 세울 당초에는 반드시 총명과 재지(才智)를 갖추고서 천하의 명망을 얻는 영웅 준걸이 앞장 서는 법이다. 그러한 사람 중에는 근검(勤儉)을 숭상하는 이도 있고, 무용(武勇)을 숭상하는 이도 있고, 문학을 숭상하는 이도 있으므로, 그 성품이 진실로 서로 다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각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저마다 그 사람을 천제(天帝)와 같이 보고 사시(四時)와 같이 믿고 엄부(嚴父)와 같이 친하여, 그 사람이 숭상하는 바를 따라서 흠모하고, 흠모하여는 이에 익히고 익히고는 이에 지키게 된다. 그리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다 함께 그 사직(社稷)을 아끼어 "이는 그 분이 건립한 것이다." 하고, 온 나라 사람들이 다 함께 그 종묘(宗廟)를 아끼어 "이는 그 분이 제사하던 곳이다." 하고, 온 나라 사람들이 다 함께 그 강토를 아끼어 "이는 그 분이 힘을 펴던 곳이다." 하면서, 오로지 두려운 마음가짐으로 자칫 잘못하여 그 사람을 저버릴까 걱정한다. 대저 이와 같다면 그 나라가 어찌 공고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 백성이 어찌 이산(離散)할 리 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그 성품을 지키면 그 나라가 보존되고 그 성품을 잃으면 그 나라가 망하나니, 이는 필연적인 천리(天理)이다.
그렇지만 혹 그 성품을 잃지는 않았으나 나라가 작고 병력이 적어 힘 있는 강국(强國)에 침략을 받아 마침내 쇠망하는 나라도 혹 있다. 그러나 군자는 이를 쇠망하지 않았다 하나니, 이미 쇠망하였는데 쇠망하지 않았다 하는 것을 뉘라서 믿겠는가. 나는 진실로 나라의 성품이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에 비유해 보면, 그 말이 서책에 실려 있고 그 끼친 가르침이 후세 사람에게 남아 있으면 그가 죽었을지라도 실은 죽지 않았다 하겠으니, 이른바 "요순(堯舜)은 수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훌륭하도다! 남화자(南華子)의 말에, "슬프기론 마음이 죽는 것보다 심함이 없으니, 몸이 죽는 것은 그 다음이다." 하였으니, 사람이 비록 살아 있더라도 마음이 죽으면 귀, 눈, 코, 입과 색상(色象)이 그대로 있다 할지라도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 따라서 나라가 비록 존재하더라도 그 성품이 없어지면 사직과 종묘와 강토는 변함이 없어도 나라 꼴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요순(堯舜)의 백성은 요순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으니 이는 그 성품을 지킨 것이며, 반면에 수(受)*는 억만의 신민(臣民)을 두었으나 억만의 마음이었으니 이는 그 성품을 잃은 것이다.
우선 오늘날 보고 들은 바로써 말해 보자. 예컨데 서구(西歐)와 북미(北美)가 능히 천하에 웅비하여 열강이 될 수 있는 것은, 어찌 유독 그 기술이 정교하고 영토가 광활하고 재력(財力)이 부유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하겠는가. 저들이 모두 그 성품을 잃지 않아 나라가 이와 더불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워싱턴이 미국에 있어서와 피오르트가 러시아에 있어서와 비스마르크가 독일에 있어서는, 모두 그 나라 사람들이 존숭하고 신봉하고 친애하여, 그들이 숭상하는 바를 익혀서 성품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중국은 복희씨(伏羲氏)와 황제(黃帝)가 있고 우리 나라는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있으니, 이러한 분들이야말로 그 사람됨이 신성(神聖)하고 예지(叡智)로워 천지와 그 높고 두터움이 같고 일월과 그 빛과 비춤이 같다. 어찌 워싱턴, 피오르트, 비스마르크 정도에 비하겠는가. 우리들은 모두 이러한 분들이 숭상하는 바를 익히고 지켜서 고유한 천성으로 삼아 천억 년이 지나도록 혹시라도 변한 적이 없었으니, 이것이 사람이 천지(天地)의 마음이요 중화(中華)가 이적(夷狄)의 주인이 되는 까닭이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인지 오늘날 세상의 학문하는 자들은 그렇지 못하여, "우리의 성품은 비루하다. 우리 나라가 숭상하는 것은 예의이니, 예의만로는 나라를 세울 수 없다." 하고서, 한 사람이 주창(主唱)하면 천 사람이 화답하여 자기의 할아버지를 욕하고 자기의 아버지를 꾸짖는다. 그리하여 육경(六經)을 버리고 공교한 문장을 배우면 식견이 높다 하고, 고향을 버리고 대서양을 돌아다니면 달관(達觀)을 갖췄다 하며, 머리털과 피부를 훼손하여 곱슬머리 서양인의 차림을 하면 선각(先覺)이라 한다. 혹자가 이러한 사람을 보고 "천상(天常)을 없애고 외세에 빌붙는다." 힐난하면 감히 큰 소리로 반박하기를,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강토를 회복할 날이 없고 노예를 면할 길이 없다." 한다.
슬프다! 이러한 방도로 강토를 회복하고 노예를 면한다면 그도 참으로 좋긴 좋겠다. 그러나 이미 그 성품을 잃고 오직 저들을 붙좇는다면 우리가 강토를 다시 보게 됨은 비록 다행일지라도 또 그들의 노예가 됨은 마찮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강토의 회복이 애당초 이러한 방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에랴. 맹자가 이르기를, "예(禮)가 없고 의(義)가 없으면 남에게 부림을 당한다." 하였으니, 남에게 부림을 당한다는 것은 바로 노예를 의미한다. 자신이 노예이면서 노예임을 수치로 여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야말로 너무도 사려(思慮)가 없다 하겠다.
예의(禮義)가 우리 나라의 성품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을 살면서 동서의 열강(列强)들이 가진 기술, 세리(勢利), 무력 없이 한갓 우리의 예의만 주장한다면 장차 어떻게 저들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는 간우(干羽)를 잡고 춤을 춤으로써 평성(平城)의 포위를 풀려는 것*과 비슷하지 않겠는가. 나 또한 우리가 저들을 대적할 수 없음을 잘 알거니와, 그러나 저들을 대적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더욱 예의를 닦지 않을 수 없으니, 저 기술, 세리, 무력, 세 가지는 저들로서는 유능한 것이요 우리로서는 무능한 것이며, 예의는 우리로서는 장점이요 저들로서는 단점이다. 무릇 천하의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고 나라마다 소장(所長)이 달라 모두 같을 수 없으니,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 따라서 사람이면서 아무런 능력이 없으면 제대로 사람 노릇을 할 수 없고, 나라이면서 아무런 소장이 없으면 제대도 나라 꼴이 될 수 없다. 비록 하나의 능력을 지녔을지라도 그것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역시 귀중한 존재라 할 것이며, 비록 하나의 장점을 지녔을지라도 천하의 모든 나라가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나라는 역시 소중한 존재라 할 것이다.
우리가 천하에 현능(賢能)하여 귀중하고도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은 이러한 예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저들을 대적할 수 없음을 가슴 아파한 나머지 우리의 능력과 장점마저 내던져 버린다면, 이는 물소와 코끼리가 범과 이리가 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스스로 그 어금니와 뿔을 없애고, 난새와 봉황이 올빼미와 수리가 되지 못함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그 털과 깃을 버리는 것과 같으니, 이야말로 이른바 스스로를 모독하고 또 스스로를 헐뜯는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모독하면 모독하는 자가 오고, 스스로를 헐뜯으면 헐뜯는 자가 오게 마련이니, 이와 같고서 그 몸이 위태하지 않고 그 나라가 망하지 않길 바란들 가능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저들을 대적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더우기 예의를 닦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예의를 닦지 않아서는 안 되는 줄 알아서 예의를 잃지 않고 지킨다면 이것이 바로 이른바 성품이다. 그 성품을 잃지 않으면 뭇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뭇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 그것이 모여서 성(城)을 이루고 모여서 성을 이루면 굳게 맺혀 풀리지 않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저들이 기술과 세리로 우리를 유혹하면 우리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예(禮)가 아님을 알아 따르지 않고 저들이 우리를 무력으로 위협하면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의(義)가 아님을 알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임금도 내 나라, 신하도 내 나라, 백성도 내 나라를 사랑하여, "저마다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의리 상 어떻게 내 나라를 남에게 줄 수 있으랴." 하면, 저들이 어찌 남의 나라를 죄다 비우고 남의 나라 사람의 목숨을 다 죽일 수야 있겠는가. 또한 저들 역시 우리의 예의에 감화된 나머지 지교(智巧)와 위력을 쓸 데가 없어 손을 거두고 물러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저자거리를 본 적이 없는가. 시끌벅적한 시장터에는 의당 예의란 아무 소용이 없을 듯하지만, 어떤 사람이 시선을 존엄히 가다듬고 의관(衣冠)을 단정히 차린 채 단정한 걸음걸이와 신중한 말투로 처신하면, 비록 평소에 난폭하기로 이름난 자라 할지라도 공경하는 자세로 예모(禮貌)를 갖추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나라도 역시 마찮가지이니, 옛날 자산(子産)이 정(鄭) 나라를 다스릴 적에 여러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침략을 당하지 않았던 것은 정 나라가 예의를 지녔기 때문이다. 예의란, 정미한 기술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기술이 이보다 정미할 수 없고, 강력한 세리(勢利)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세리가 이보다 강력할 수 없고, 위맹한 무력을 지니지 않았지만 무력이 이보다 위맹할 수 없으니, 이야말로 몸을 보호하는 갑주(甲胄)요 방패이며 나라를 지키는 대들보요 주춧돌인 것이다. 따라서 그 귀중함이 대체 어떠하겠는가.
오늘날에는 이러한 점을 모르고 우리의 고유한 성품을 스스로 버린 채 남의 신복(臣僕)이 되고 그들의 녹식(祿食)을 이롭다 여겨, 그들의 언어를 본받고 그들의 의복을 본뜨고 그들의 기물을 부러워한 나머지 부자(父子)가 서로 소송을 걸고 남녀가 서로 분별이 없어, 상도(常道)를 무너뜨리고 인륜을 어지럽히면서 오직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저들과 같이 되지 못할까 걱정하고는 어거지로 사람들에게 '문명(文明) 문명'이라 일컫는다. 오호라! 이와 같고서 문명이 된다면 반드시 성품이 없은 뒤에야 가능할 터이니, 또한 몹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개중에 혹 조국을 회복하기로 마음에 맹서한 채 서양에 몸을 의탁하여 학문을 세워 기술을 익히고 재물을 모아 무력을 쌓으면서 백 번 꺽여도 굽히지 않고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이러한 사람은 그 의리가 참으로 장하다 하겠다. 그러나 유독 예의가 나라의 성품이 되어, 성품이 존재하면 나라가 존재하고 성품이 멸망하면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은 혹 깊히 알지 못하는 듯하니, 너무도 애석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기술은 이용(利用)에 필요하고 병력은 국방에 필요한데, 이를 모두 없애도 된단 말인가? 어찌 그렇겠는가. 무릇 모든 일에는 근본과 지말(支末)이 있는 법이다. 예의가 근본이니 근본이 이미 선 뒤에 천하의 능력과 천하의 장점을 모두 거두어 들여 우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 되니, 이야말로 근본과 지말이 서로 돕는 것이다. 그러나 지말 중에서 어느 것이 좋은가를 알고 또 어느 것이 좋지 못한가를 알아, 모쪼록 잘 가려 실행에 옮겨야 할 것이다.
예의가 우리 나라 성품이 된 것은 언제부터 비롯하였는가? 신성(神聖)하신 단군과 기자(箕子)에서 비롯하여 진한(辰韓), 변한(弁韓), 삼국(三國) 시대에는 사라져 버렸다가 그 후 차츰 그 성품을 회복하여 우리 조선에 와서 크게 밝아졌으니, 조선에 와서 이렇게 크게 밝아진 까닭은 실로 공자를 숭배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다. 공자가 어찌 우리 나라 사람인가. 우리 나라 사람이 아닌데 숭배하는 것이 될 법이나 한가. 오늘날 신학(新學)하는 사람들은 이 때문에 공자를 섬기는 것을 보고 노예 근성을 가졌다고 욕하니, 그들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좋은 질문이다. 내가 그대에게 분명히 말해 주겠다. 대저 이른바 신학이란 무슨 학문인가. 이 어찌 우리 나라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겠으며 그 학문 역시 우리 나라 학문이겠는가. 우리 나라 학문을 배우고 싶다면, 어찌하여 우리 나라 사람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재물을 많이 실어다 주면서까지 외국 사람을 초빙하여 스승으로 삼으며, 또 어찌하여 굳이 고생스레 사방에 유학하여 일본에도 가고 상해에도 가고 영국에도 가고 독일에도 가고 이태리에도 가고 러시아에도 가고 파리에도 가고 워싱턴에도 가는가. 공자의 학문을 배우면 노예가 된다니, 서양과 일본의 학문을 배우면 유독 노예가 되지 않는단 말인가. 참으로 이와 같다면, 석가와 예수의 교리를 배우는 사람은 석가와 예수의 노예이고, 백륜강덕(伯倫康德)의 지식을 배우는 사람은 백륜강덕의 노예일 것이며, 범특의마두(凡特의瑪竇)의 기교를 배우는 사람은 범특의마두의 노예일 것이다. 이렇게 다 같이 노예일 바에는 공자의 노예가 되는 것은 그나마 말이 된다 하겠다. 그러나 저들은 모두 곱슬머리 붉은 수염하며 높은 코 우묵한 눈이 우리 민족과 전혀 닮지 않았고 강역도 매우 다른데 달갑게 저들의 노예가 됨을 사양치 않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공자는 중국에서 태어났으니 중국은 우리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연(燕)과 제(齊)의 땅이 우리 나라와 인접하니, 비록 강역이 같다 하더라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공자는 그저 한 나라 사람에 그치는 분이 아니다. 하늘이 덮는 곳 땅이 싣는 곳 해와 달이 비추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이면 누구고 친애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천하에 오직 한 분인 공자요, 천지 사이에 세워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 질정(質正)해도 의심할 바 없으며 백세(百世)를 지나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으니 만고(萬古)에 오직 한 분인 공자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해와 달 같으니, 해와 달은 동쪽에서 솟아 서쪽에서 지지만, 그러나 그 광휘는 사방에 두루 비추어 피차의 간격이 없다. 그런데 지금 혹 해와 달을 동쪽과 서쪽에 한정시켜 생각한 나머지 남쪽과 북쪽은 해와 달이 비치지 않는다 한다면 이 어찌 이치에 맞겠는가.
그리고 저 노예란 대관절 무슨 말인가. 우리가 존숭하는 것은 도(道)이니, 도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다. 굳이 우리 나라다 우리 나라가 아니다 따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공자 뿐만 아니라 일본이건 서양이건 막론하고 공자와 같은 분이 나오면 이 또한 성인이니, 나는 좇아서 스승으로 섬길 따름이다. 노예란 참으로 무슨 말인가.
공자가 쇠미하자 예의가 사라지고 예의가 사라지자 천지가 거의 꺼지게 되었으니, 슬프도다!
* 수(受) : 은(殷) 나라 마지막 임금인 폭군 주(紂)의 이름.
* 간우(干羽)를......풀려는 것 : 순(舜) 임금이 완악하여 복종하지 않는 유묘(有苗)를 무력으로 제압하지 않고 간우(干羽), 즉 무구(舞具)인 방패와 깃털을 잡고 춤을 춤으로써 문덕(文德)을 드러내어 복종케 한 고사와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삼십만 대군으로 평성(平城)에 포위되어 이레 동안 식량이 끊길 정도로 곤욕을 치렀던 고사를 차용하였다. 여기서는, 예의나 지키는 한가한 방법으로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하겸진(河謙鎭 1870-1946) : 구한말(舊韓末)과 일제를 살았던 유학자로, 자는 숙형(叔亨), 호는 회봉(晦峯)이며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면우(면宇) 곽종석(郭鍾錫)의 고족(高足)으로,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과 함께 근세 영남 문장의 양대 거벽(巨擘)으로 꼽힌다. 저서로는 유집(遺集)인 <<회봉집(晦峯集)>> 외에 우리 나라의 시화(詩話)를 모은 <<동시화(東詩話)>>, 우리 나라 유학사를 집대성한 <<동유학안(東儒學案)>> 등이 있다. 이 글은 <<회봉집>> 25권에 실려 있는 국성론(國性論)을 국역한 것으로, 저자의 작품 중 특히 유명하기에 뽑아 보았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수원교양강좌 자료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