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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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명제만큼 인간실존에서 이성의 중요함을 일깨워 준 것은 없다. '방법서설' (1637년) 의 설명처럼 이성이란 "올바르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 으로서 "천성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는 명제는 바로 현대적 인식민주주의의 초석이었다. 이로써 자유롭게 이성을 발휘하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이른바 '현대의 약속' 이 그 철학적 뼈대를 드러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이성적 동물' 이라고 말했을 때 동물과 자연적으로 구별하는 '속성' 으로서 이성은 일찍부터 인간실존의 특징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인식했다고 해서 고대 그리스 시대를 이성의 시대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은 지식인들이 힘써 연마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특출한 재능' 으로서 '무술' 처럼 갈고 닦아야 할 '덕 (德)' 이었으며, 결국에는 지식/비지식, 인간/인간을 차별 짓는 정신적 근거였다. 하지만 인간은 과연 지난 4백년 세월동안 이성을 사용하여 자유로워졌고 행복해져 왔는가. 그리고 인류가 진정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20세기만 돌이켜 보더라도 지난 한 세기는 '역사적' 진보가 '인간성' 의 진보가 아니라 도리어 '반인간성' 의 비약적 증대와 그에 비례한 인간성의 '퇴보' 임을 실증하는 철저한 배신의 한 세기였다. 무엇보다 20세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비롯한 각종 인종말살, 냉전시기의 핵전쟁 위협, 그리고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국지전들에 이르기까지 질과 양, 조직과 성능에서 유례없는 살상기술의 혁신적 진보를 경험했다.인간의 자기파괴술이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효율성과 합리화만을 핵심적으로 발전시켜온 현대적 이성의 운명적 귀결이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 했을 때 그 고독한 주체인 '나' 의 생각에는 당시까지 오직 하느님만 안다고 믿어졌던 우주의 전체적 모습을 수학적으로 다시 짜맞춘 조각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로부터 이성은 곧 새로운 주체의 상징이었으며 그것은 곧 진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데카르트의 엉성한 밑그림은 뉴튼에 의해 보다 완벽한 법칙체계로 그 윤곽이 뚜렷해졌다. 그러나 자유로운 이성은 자연을 수학의 도식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도리어 '인간의 욕망' 을 절제할 이성의 능력을 수학적 도식 안으로 위축시켰다.

20세기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자연을 착취하는 기술과 그것을 대량으로 적용한 산업은 각종 '상품' 을 무수히 쏟아내었다. 이럼으로써 인간의 관계는 이성의 다양한 가능성보다는 시장에서의 등가교환을 중심으로 공회전하는 악순환이 확대 재생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선전선동적인 구호인 경우를 제외하고 프랑스 혁명의 고귀한 이념이었던 인권과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현대인의 지도적 가치였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나 아렌트 (Hanna Arendt)의 비통한 고백처럼 이제 이성과 진보를 얘기한다는 것은 위선이 되어버렸다. 자연을 지배하고 수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됨으로써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은 많은 지식을 얻었으나 자기 운명의 불확실성은 더욱 증대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이성에 따라 판단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각자가 가진 지식은 결정적인 성격을 상실했다. 누구나 자기기준에 따라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함으로써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인지 누구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자유가 보편화함으로써 각자가 부자유스럽게 되고 이성이 보편화하여 정보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함으로써 아는 일보다 모를 일이 더 많아졌다. 진보의 추진력은 이젠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근대 이후 끊임없이 이성의 죽음이 예언되었고, 20세기 말 현재 이성에 대한 사망선고는 시간문제로 남아있다고 말하는 철학자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현대의 이성 기획은 애초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사업이었던가.

여기서 우리는 비극의 역설을 반전시킬 또 다른 차원의 역설을 감행해야 한다. 그것도 이젠 더 이상 기댈 것 없어 보이는 바로 그 이성의 힘으로 말이다.

현대의 약속은 오직 각 개인에게 그의 행복을 실감시키는 방식을 통해서, 그것도 기술적 합리화라는 측면에서만 그 좁디좁은 정당함을 인정받아 왔다. 이제 각 개인은 행복하지만 그 결과 모든 인간에게 불행한 사태가 닥치는 이 상황이 '올바른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누구나 그야말로 '올바르게' 판단한다.

상당히 비싼 대가를 지불하기는 했지만 현대가 시작된 이래 4백년간 누적시켜온 지금까지의 실책은 이성의 능력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던 인간에게 이성의 위력을 각성시키기 위해 그 누군가가 인류에게 베풀어준 긴 역사적 학습과정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이성은 도달해야 할 목적이라기보다 우리에게 이미 항상 확보되어 있는 삶의 조건이다. 조건이란 항상 그것을 활용할 이의 그야말로 '이성적인' 성찰력에 따라 악조건도 되고 그 반대도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자기의 유일한 존재만을 확신하는 '이성적이기만 한 자아(自我)'가 아니라 통째로 위협받는 종(種)으로서의 인류 전체의 생명이 자기 활동의 원천임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은 고립적이고 자아중심적인 욕망에 포로가 된 '세계의 주인' 이 아니라 '그 이성의 씀씀이가 훨씬 성숙한 책임 있는 이웃' 으로서 서로를 마주하는 '도덕적 연대의 주체' 여야 한다.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올바른 경험의 정확한 모습을 앞서 파악하는 것이 진정 이성의 힘이라면 1999년 현재의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실존과 지난 1만년을 돌아볼 9999년의 인간 운명을 연결시키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치열한 삶을 통해 바로 9999년의 인간에게 인간적인 연대 속에서 새로운 진보의 가능성을 열었던 우리의 새로운 정언명법을 기억하자. "나는 더불어 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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