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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소설 / 줄거리/ 통영/ 박경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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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김약국의 딸들'에 비친 통영의 모습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은 통영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소설의 제1장은 <통영>이란 소제목으로 되어 있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 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통영 주변에는 무수한 섬들이 위성처럼 산재하고 있다. 북쪽에 두루미 목만큼 좁은 육로를 빼면 통영 역시 섬과 별다름이 없이 사면이 바다이다. 벼랑 가에 얼마쯤 포전이 있고 언덕배기에 대부분의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들앉은 지세는 빈약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민들은 자연 어업에, 혹은 어업과 관련된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일면 통영은 해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통영 근처에서 포획하는 해산물이 그 수에 있어 많기도 하거니와 고래도 그 맛이 각별하다 하여 외지 시장에서도 비싸게 호가되고 있으니 일찍부터 항구는 번영하였고, 주민들의 기질도 진취적이며 모험심이 강하였다. 이와 같은 형편은 조상 전래의 문벌과 토지를 가진 지주층들 - 대개는 하동, 사천 등지에 땅을 갖고 있었다 - 보다 어장을 경영하여 수천금을 잡은 어장아비들의 진출이 활발하였고, 어느 정도 원시적이기는 하나 자본주의가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그 결과 투기적인 일확천금의 꿈이 횡행하여 경제적인 지배계급은 부단한 변동을 보였다. 실로 바다는 그곳 사람들의 미지의 보고이며, 흥망성쇠의 근원이기도 하였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타관의 영락된 양반들이 이 고장을 찾을 때 통영 어구에 있는 죽림고개에서 갓을 벗어 나무에다 걸어놓고 들어온다고 한다. 그것은 통영에 와서 양반행세를 해봤자 별 실속이 없다는 비유에서 온 말일 게다. 어쨌든 다른 산골 지방보다 봉건제도가 일찍 무너지고 활동의 자유, 배금사상이 보급된 것만은 사실이다.

 

어업 외에 규모가 작지만 특수한 수공업도 이곳의 오랜 전통의 하나다. 근래에 와서는 두메산골로 들어가도 좀처럼 갓 쓴 사람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이조왕실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최상품의 갓이라면 으례 통영갓이었고, 그 유명한 통영갓은 제주도의 말총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지금도 흔히 여염집에 들르는 뜨내기 소반장수가 싸구려 소반을 통영소반이라 사칭하고 거래하는 풍경 있는데 통영갓, 통영소반은 그 세공이 정묘하여 매우 값진 상품이었다. 이밖에도 소라 껍데기로 만든 나전 기물이 이름 높다. 원료를 바다에서 채집하는 관계상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진주빛보다 미려하고 표질이 조밀한 소라 껍데기, 혹은 전복 껍데기를 갖가지 의장으로 목재에 박아서 만든 장롱, 교잣상, 경대, 문갑, 자에 이르기까지 화려 찬란한 가구 제작은 일찍부터 발달되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 배나 찔러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수공업이 발달되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바닷빛이 고운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무렵의 통영 항구를 점묘해 보면, 고성반도에서 한층 허리가 짤리어져 부챗살처럼 퍼진 통영은 복장대 줄기를 타고 뻗은 안뒤산이 시가를 안은 채 고깃배가 무수히 드나드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뒤산 기슭에는 동헌과 세병관 두 건물이 문무를 상징하듯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시가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과 동문, 남문 중간에 있는 수구문을 합하여 모두 다섯 개의 문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동헌에서 남문을 지나면 고깃배, 장배가 밀려오는 갯문가, 둥그스름한 항만이다. 항만 입고 오른편이 동충이며 왼편이 남방산이다. 이 두 끄트머리가 슬며시 다가서서 항만을 감싸주며 드나드는 배를 지켜보고 있었다. 동충과 남방산 사이에는 나룻배가 수시로 내왕한다. 항구에 서면, 어떻게 솔씨가 떨어졌는지 소나무 한 두 그루가 우뚝 서 있는 장난감 같은 공지섬이 보이고 그 너머 한산섬이 있다. 여기서 거제도는 아득하다.

 

동헌에서 서쪽을 나가면 안뒤산 기슭으로부터 그 아래 일대는 간창골이란 마을이다. 간창골 건너편에는 한량들이 노는 활터가 있고, 이월 풍신제를 올리는 뚝지가 있다. 그러니까 안뒤산과 뚝지 사이의 계곡이 간창골인 셈이다. 간창골에서 얼마를 가파롭게 올라가면 서문이 있다. 그곳을 일컬어 서문고개라 한다. 서문 밖에는 안뒤산의 한 줄기인 뒷당산이 있는데, 그 뒷당산 우거진 대숲 앞에 충무공을 모신 사당 충렬사가 자리잡고 있다. 이 일대는 이곳의 성지라 할 만한 지역이다. 충렬사에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고, 아지랭이가 감도는 봄날 핏빛 같은 꽃을 피운다. 그 길 연변에 명정골 우물이 부부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음력 이월 풍신제를 올릴 무렵이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 뒷당산과 마주 보는 곳이 안산이다. 안산을 넘어가면 작은개, 큰개, 우룩개가 있어 봄이면 멸치떼가 시뻘겋게 몰려든다.

 

명정골 우물에서 서문고개로 가는 길을 되돌아 서면 대밭골이다. 이 대밭골에서 서문고개 가는 길과 갈라진 길을 접어들어 줄곧 나가면 판데로 가게 된다. 판데는 임진왜란 때 우리 수군에 쫓긴 왜병들이 그 판데목에 몰려서 엉겹결에 그곳을 파헤치고 한산섬으로 도주하였으나, 결국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는 곳이다. 그래서 판데라고 부른다. 판데에서 마주 보이는 미륵도는 본시 통영과 연결된 육로였는데 그러한 경위로 섬이 되었다. 미륵도에는 봉화를 올리는 고봉 용화산이 있고 그 아래에 봉수골, 더 내려오면 통영 항구가 바라보이는 해명나루가 있다. 바다에 가서 죽은 남편을 뒤따라 순사한 여인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용화산을 넘어서면 첫개와 그밖에 소소한 어촌이 있고, 넓은 바다를 한눈으로 굽어보는데, 대충 큰 섬만 추려도 사랑섬, 추도, 두미도, 욕지섬, 영화도 등 많은 섬들이 있다. 되돌아와서, 통영 육지도 막바지인 한실이라는 마을에서 보는 판데는 좁다란 수로다. 현재는 여수로 가는 윤선의 항로가 되어 있고 해저 터널이 가설되어 있다. 왜정시에는 해저 터널을 다이꼬보리라 불렀다. 역사상으로 풍신수길이 조선까지 출진한 일이 없었는데 일본인들까지 해저 터널을 다이꼬보리라 불렀으니 우습다.

 

동헌에서 비스듬히 동쪽으로 길을 건너 솟은 것은 당산이다. 당산은 동헌과 건너다보이는 곳이어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당산에 올라, 사또에게 그 억울한 사연을 외치며 호소했던 것이다. 당산 옆을 빠져서 돌아가면 동문이다. 동문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수구문이 있고 수구문 주변은 장터였다. 이 두 문 밖에도 막바지는 바다였다. 그 바닷가에 멘데 (아마 먼 곳이라는 뜻) 라는 가난한 어촌이 있어 밤낮 파도 소리를 들으며 어부들은 손바닥만한 통구멩이 (한둘이 탈 수 있는 작은 배)를 손질창하고 어망을 깁는다. 아낙들은 생선과 해초를 모래밭에 널면서 구름을 보고 바람 소리를 들으며 가슴 죄는 하루살이 살림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보이는 바다에 지도라는 섬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동헌 뒤켠으로 빠지는 북문, 이것만이 유일한 육로다. 섬의 신세를 면한 길목이다. 토성골을 지나 붉은 황톳길인 장대고개를 넘어서 가을이면 통영의 지주들이 당나귀를 타고 고성으로, 사천으로 추수를 거두어 가고, 봄이면 춘궁을 모면키 위하여 어촌의 아낙들이 마른 생선과 해초를 포대에다 꾸려서 이고 곡식 도붓길을 떠나는 슬픈 고개다. 장대고개에는 묘지가 있었다. 그리고 문둥이들이 떼거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 문둥이들은 봄 가을에 합동결혼식을 한다. 그들이 짝을 짓는 방법은 각자의 바가지를 엎어놓고 바가지를 집는 처녀문둥이가 바가지 임자인 총각문둥이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이 합동결혼식 때 일수 사나운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걸려들면, 문둥이들은 잔칫술 마시고 가라면서 잡아끄는 바람에 나그네는 진땀을 빼곤 한다. 문둥이들은 장대 근방의 황토 지역을 일궈 고구마, 감자를 심고 호박, 배추도 심어 장사치들에게 몰래 넘겨주는데, 황토에서 나는 고구마, 호박이 어떻게나 컸던지 사람들은 묘지에서 송장 썩은 물이 흘러서 그러느니, 문둥이의 거름이 걸어서 그러느니 하며 장터에서도 유별나게 큰 고구마, 호박 같은 것은 사기를 꺼려하였다.

 

<줄거리>

선비적 성품을 지닌 김봉제는 김약국의 주인으로 지방의 부유층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 아우 봉룡은 형과는 달리 충동적이고 격정적 성격을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그 아내 숙정이 출가 전 그녀를 사모한 송욱이 있음을 알고 극단적으로 시기하여 그를 살해한다. 숙정은 간부를 두었다는 누명을 벗으려고 자살한다. 이 격정적 사태로 스스로 책임을 느낀 봉룡은 탈가하여 자취를 감춘다. 그리하여 봉룡의 아들 성수가 봉제의 아내인 송씨의 손에 자라나게 되나, 죽은 동서 숙정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송씨는 성수를 심리적으로 괴롭힌다.

 

한편 봉제의 딸 연순은 미모이고 심성은 고왔으나 결핵환자라는 약점 때문에 몰락한 양반가의 강택진과 혼인한다. 강택진은 처가의 재산을 노리고 장모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나, 그 사실을 안 봉제영감은 사위를 경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봉제영감이 불행히도 사슴사냥 현장에서 독사에 물려 사망하게 되고, 그에 따라 상당한 재산이 사위 강택진에게로 돌아간다. 그의 처 연순은 간교한 강택진과는 애정도 없는 데다가, 강택진이 옥화라는 여인과 관계함을 알고 병이 더욱 악화되어 죽는다. 성수는 김약국을 이어받았고, 결혼도 하였다. 그러나 생소한 어장사업에 손을 댐으로써 가산이 조금씩 기울어간다.

 

그 장녀 용숙은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그녀의 아들 동훈을 치료하는 병원 의사와 정을 통하게 된다. 이 사단의 악화로 용숙은 고통을 받으나, 금전에 온갖 정신을 쏟아서 금전의 노예가 된다. 둘째딸 용빈은 영민하고 교육을 받아 지적이었지만, 그 애인 홍섭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고 교원생활을 한다. 셋째딸 용란은 미모이나 관능적이며 지적 헤아림이 없어 애욕에 빠지며, 급기야는 아편중독자에게 출가하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의 과정에서 김약국은 점점 몰락하고 보잘 것 없었던 정국주의 손으로 재산은 옮겨가기에 이른다. 넷째딸 용옥은 애정없는 남편과 별거하다, 시부의 겁간을 피하여 남편을 찾아가던 뱃길에서 죽게 된다. 용란도 그녀를 사모했던 머슴이 나타나 도망칠 것을 제의하였으나, 사단을 안 그 남편에 의하여 머슴과 그녀의 어머니 한실댁이 살해된다. 그 충격으로 용란은 정신이상자가 된다.

 

<해설>

1962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된 박경리의 전작 장편소설. 한말에서 민족항일기에 이르기까지 지방의 유족한 한 가정의 욕망과 운명의 얼킴으로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는 욕망의 엇갈림과 부()가 신흥세대로 이동하는 사회적 변동과 여성의 운명이 한데 어울려 주제화되어 있다. 한 집안의 몰락이 지닌 비극성이 사실적으로 조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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