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김만중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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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金萬重, 인조15-숙종18, 1637-1692, 서포·西浦, 자(字) 중숙·重叔, 시호 문효·文孝)

 

- 누구인가?

 

· 광산(光山) 김씨.

· 관계

- 증조부 :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 : 한국 예학(禮學)의 시발

- 종(從)조부 : 김집(金集, 1574-1656)

- 아버지 : 김익겸(金益兼, 1614-1636)

- 형 : 김만기(1633-1687)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 형 김만기의 딸 : 인경왕후(仁敬王后, 숙종妃)의 숙부(叔父)가 됨

- 모(母)부인 윤씨의 고조부 : 해원부원군 윤두수(尹斗壽, 1533-1601)

- 윤씨의 증조부 : 영의정 문익공 윤방(尹昉)

· 문집 :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 [지구고증(地球考證)], [주자요어(朱子要語)]

· 작품 : <구운몽>,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아버지 김익겸이 정축호란 때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함으로써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난 김만중은 부친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되어 자연 그의 교육적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준 모부인 윤씨에게로 쏠려 그의 원초적 마음이 되게 한 효도심에 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김만중은 조선 중기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늘 정의감에 앞장서서 왕에게 상소를 올려 여러 차례의 유배생활을 겪어야만 하였다. 거기서 그는 유배를 통해 그의 인간과 사상, 문학관과 학문관을 알 수 있게 하는 [서포만필]도 이루어졌고,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 통속소설도 창작되었다. <사씨남정기>는 숙종의 기사환국(己巳換局)의 비리적 처사를 상징적으로 풍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만중은 학문에서도 유·불·도의 이동(異同)은 물론 산수·율려·천문·지리·패설 등에까지 두루 통한 박학자였고, 당시 국가·사회의 강한 이데올로기로 지배됐던 주자학도 비판적 시각에서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천시했던 통속소설의 대중적 기능을 중요시하여 직접 창작도 했다.

 

김만중은 또한 당시 사회가 한문학권에 꽁꽁 묶여 있었을 때에, 인도·중국·한국 등 각 나라의언어적 특징을 일찍이 파악, 한국 사람은 한국 언어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소위 국민문학론을 제창한 선구자였다.

 

- 생애(生涯)

 

① 수학기(修學期, 1~28세)

그의 가족이 정축호란(丁丑胡亂) 때 강화도로 피난을 했지만 강화도가 청군에게 함락되자 그의 부친 충정공 김익겸은 순절하고 만삭(滿朔)이 된 모부인 윤씨는 서울로 귀향 중 강화와 김포를 잇는 강을 건너는 가운데 배 안에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그의 아명(兒名)을 ‘선생(船生)’이라 했다.

 

어린 시절 교육은 모부인 윤씨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윤부인은 명문거족의 출신으로 총명지혜로웠으니 윤씨의 유년시절 교육은 조모인 정혜옹주(貞惠翁主, 선조의 딸)로부터 받았다. 일찍이 남편을 잃은 윤부인은 만기, 만중 형제를 데리고 친정으로 데려와 부친 참판공 윤지(尹墀)를 섬기고 안으로는 모친 홍씨를 정성껏 섬긴 효부인이기도 하다.

 

모부인은 고금에 드문 현부인으로 부친인 참판공이 별세한 후로는 친정의 생활도 어려워 베틀과 수놓은 것으로 생애를 이어갔지만, 자식들의 학업에 방해가 될까 두려워 그들에게는 곤궁한 내색을 전연 감추었다고 한다. 특히 [소학], [사략(史略)], [당시(唐詩)] 등은 윤씨가 직접 가르쳤으며, 병자호란 후로 서적을 구하기가 어려워 [맹자], [중용] 등은 윤씨가 곡식을 많이 주고 사서 읽혔고, [죄씨전(左氏傳)] 一秩은 값이 너무 비싸 자식들이 감히 사달라고 하지 못하자, 윤씨가 베틀 가운데서 베를 끊어 사주었다한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에 비할 바 아니어서 재주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야 겨우 그들에게 비할 바 되나니, 너희들이 행실의 잘못이 있은즉, 반드시 과부(寡婦)의 자식이라 하리니 그러면 이후 내가 지하에서 어떤 면목으로 너희들의 부친을 뵈올 수 있겠느냐? ”

 

--- [先妣(선비) 貞敬夫人(정경부인) 行狀(행장)] 김만중의 술회 내용 중

 

② 사환기(仕宦期, 29~50세)

현종 6년(1667) 29세 때 문과에 급제, 15년 38세 때까지 10년간 정언(正言), 부수찬(副修撰), 사서(司書) 등 벼슬을 역임했다. 이 기간이 그의 일생 중 가장 평온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30세 때는 그의 형 김만기가 2품직에 오르고, 35세 때는 그의 질녀(姪女)인 김만기의 딸이 세자빈(숙종비 仁敬王后)에 책봉(冊封)되는 등 영광의 세월이었다.

 

이후 환해(宦海)의 풍파가 일어났던 것은 현종 초년의 첫번 째 예송(禮訟)이 서인(西人)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현종 15년 예송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해에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승하, 인조의 계비의 복제(服制)문제로 남인(南人)은 소위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고, 대신 서인은 소위 대공설(大功說)을 내놓았는데 왕은 서인의 설이 근거가 미약하다 하여 남인의 기년설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서인은 조락하기 시작, 숙종 초에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즉 서인의 영수(領首)인 송시열 등 일파는 유찬, 혹은 파직되었고, 김만중도 그 여파로 결국 삭직된다.

 

이때부터 5~6년간 남인의 집권 중에 영의정 허적(許積, 1610-1680)의 전횡(專橫)으로 숙종의 노여움을 사는 가운데 그의 서자(庶子) 허견의 역모가 탄로나자 허적은 사사(賜死)되고 남인의 대다수가 이지 연좌되어 찬배 또는 파직된다. 이를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 한다. 이로서 서인은 다시 집권하게 되었으니 김만중은 43세의 나이로 예조참판에 오르고 47세 때는 대사헌, 50세 때는 대제학에 오르고 그의 형 김만기는 노론(老論)의 중진이 되었다.

 

③ 유배기(流配期, 51~56세)

숙종 13년(1687) 言事사건으로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즉 숙종은 혈통을 이을 자식이 없어 걱정하던 중, 인경왕후의 승하로 계비를 맞이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閔)씨의 양해로 궁녀 장씨를 후궁으로 맞게 되었고 숙종 12년에는 장씨가 일약 숙의(淑儀)가 되었다. 이것이 2차 당쟁의 실마리이다.

 

이후 장숙의는 정사에 참여함에 따라 지위와 권세가 드세게 되고 이를 기화로 재야의 남인들이 재차 등용을 꾀했고, 그녀의 오라비 장희재(張希載)와 결탁, 득세를 시도했다. 여기에 장씨의 모는 일찍이 조사석의 비첩이었지만 조사석은 숙종 13년에 右相에까지 올랐고, 대신 영의정 김수항은 파직되었다.

 

이때 김만중은 숙종에게 조사석의 현달(顯達)과 김수항의 파직의 부당함을 상소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영의정 남구만(南九萬, 1629-1711)(--- 󰃫 < 남구만>, 예조판서 남용익을 비롯한 정원(政院), 옥당(玉堂)의 신원한 보람도 없이 드디서 숙종 13년 9월 12일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구운몽>은 바로 이 선천 유배지에서 쓴 것이다. 그런데 장씨로부터 왕자 균(畇, 훗날 경종)이 태어난 국경을 맞아 숙종 14년에 다행스럽게 특사(特赦)로 풀려났다.

 

그러나 숙종 15년 정월, 숙종은 균을 서둘러 왕자로 책봉하자 서인들은 한결같이 반대했다. 이에 숙종은 반대하는 모든 중신을 납관퇴거케 하고 송시열·김수항 등 서인의 영수들은 유배중 사사되고, 김만중은 보사공신(保社功臣)의 칭호를 삭탈당했으며, 이것이 소위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이에 김만중은 남해로 유배되고 거의 온 가족들이 절도(絶島)로 귀양가게 되니 윤씨는 우수 끝에 그해 겨울 12월 22일 세상을 뜬다. 효자 김만중은 모부인의 장례에도 참예치 못하고 애곡하다가 숙종 18년 4월 30일 56세를 일기로 외로이 숨을 거두었다.

 

만중의 남해 유배 3년의 시기에 비교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그의 저서 [서포만필]을 비롯, <구운몽>, <사씨~ >등의 소설을 완성했다. 아울러 모부인을 그린 애절한 사친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오늘 아침 사친시를 쓰고자 하여 (今朝欲寫想親語·금조욕사상친어)

몇 번이나 붓을 적시다가 다시 내던졌는가? (幾度濡毫還復擲·기도유호환부척)

글씨가 이루어지지 않아 눈물이 이미 적시니 (字未成時淚已濨·자미성시루이자)

쓰고자 하는 마음뿐, 사친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集中應缺海南詩·집중응결해남시)

己巳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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