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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 - 순수문학의 진의와 휴머니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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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순수문학의 진의와 휴머니즘

이태동

 

 

1

김동리는 한국 시에서의 서정주처럼 소설 분야에서 토착적이고 민속적인 소재를 완전한 현대적 소설 미학으로 수용해서 민족 문학의 전통을 확립하고 확대시킨 작가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그의 문학 작품 가운데서 신라 때부터 전승되어 온 민족 신화의 정신적인 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한국 문학 가운데 민족 문학의 특색을 강하게 지니면서 세계성을 띈 작품을 말하라고 하면, 우리는 서슴없이 김동리의 단편 <황토기>와 <무녀도>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비록 대부분의 그의 작품의 배경과 무대는 도시가 아닌 오지인 전원이며 작중 인물들은 인구 밀집 사회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형적인 소재를 사용해서 작품의 주제를 보편화시킴은 물론 민족 문학의 향취와 개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가 비록 원시적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현대적인 소재를 사용한 다른 어느 작가의 작품 못지 않게 현대적인 감각을 지니게 만든 것은 그의 예술적 재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작품의 소재가 원시적인 것의 범위에 머무르지 않고 원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작을 공부하는 사람은 물론, 진정한 한국 문학을 이해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그의 작품이 모두 사회 문제를 전혀 취급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의 데뷔작인 <화랑의 후예>와 <산화>를 비롯하여 <밀다원 시대>, 그리고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등신불>과 같은 작품 등은 사회성과 역사 의식이 짙은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 문제의 고발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프레임으로 해서 존재론적인 문제와 '인간 정신의 고향'으로부터의 추방과 회귀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다.

 

김동리는 1913년 민족 정신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경주시 성건리의 김임수씨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장형 김기봉씨는 당시 전국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한학자이자 대선비였다. 그의 나이 여덟 살 때 경주 제일교회 부속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기독교 계통 학교인 대구 계성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16세에 그는 서울로 올라와 같은 계통의 학교인 경신 고등 보통학교에 삼학년으로 전학을 했다. 그가 작가로서 명성을 얻은 후 발표한 <무녀도>와 <사반의 십자가> 등과 같은 작품에서 기독교적인 이야기를 한 것은 아마 이 때 공부한 지식이리라. 그러나 김동리는 경신 고등 학교로 전학한 그 다음해에 학교를 중퇴하고 창작 생활에 전념했다. 이 때 김동리는 서울에서 시인 서정주와 문우 관계를 맺으면서 맨 처음 <백조>란 시를 조선일보에 발표해서 입선을 했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인 재능은 시에서보다 소설에 있었다. 그래서 일제 때 조국을 잃고 유랑의 길을 걷도 있는 민족주의자들의 운명을 낙원에서부터 추방되어 유랑의 길을 걷고 있는 민족주의자들의 운명을 낙원에서부터 추방되어 유랑의 길을 걷고 있는 비극적인 인간의 운명과 상징적으로 결합시키면서 압축되고 스피디한 문장으로 쓴 <화랑의 후예>와, 압박과 착취로 굶주림에 시달린 민족적 현실을 화전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통해 리얼하게 고발한 <산화(山火)>를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각각 발표해서 그 당시 문단에 놀라운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 후 그의 대표작인 <무녀도>를 《중앙》에, <바위>를 《신동아》에 발표해서 24세의 젊은 나이에 벌써, 탁월한 신예 작가로서 문단의 시선을 한 몸에 모았다. 그 이듬해 그의 나이 25세 때 서정주, 김달진, 제씨들과 시 동인지 《시인부락》을 내어 문학의 본질을 '생명' 그 자체에서 구하자는 문학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다솔사 전도관을 빌려 광명 학원을 창설하고 불우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창작 생활에 정열을 태웠다. 유명한 <황토기>란 작품도 이 때 완성한 것이다. 이때 그는 문학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일제하의 어용 문화 단체인 문인 보국회, 국민 문학 연맹 등의 가입을 거부했다.

해방 후 그는 문단의 좌우익 투쟁에 개입해서 민족 문학을 옹호하기 위해, 전국 문필가 협회 결성에 가담해서, 서정주, 조연현 씨 등과 함께 한국 청년 문학가 협회를 결성해서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1947년 원산 문학 동맹에서 간행한 시집 《응향(凝香)》에 대한 북한 문예 동맹의 탄압이 가해지자 그들의 비문학적인 행동과 격문을 맹렬히 반박한 <문학의 자유와 옹호>를 《백민(白民)》에 발표하고 그 해 경향신문 문화부장이 되었다.

그 후에도 그는 이 나라의 어려운 사회적 환경 속에서 김병달, 김동석 등과 같은 좌익 평론가들과 논쟁을 벌이며 문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가 이렇게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의 지조를 끝까지 지킨 결과는 바로 그의 문학 작품에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그가 인간의 존재 문제를 초월적인 문맥과 연결지워 <등신불>, <까치 소리> 등과 같은 수준 높은 상징적 작품을 계속 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시대적 좌파의 질풍에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그가 42세의 젊은 나이로 학술원 회원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가 중앙 대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했었던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순수 문학을 지키기 위해서 일생을 바친 현대 한국 문학사의 거목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와 대립되는 문학관을 가진 몇몇 사람들은 그가 주장하는 순수 문학은 공리성이 없는 허위적이고 가공적인 관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김동리 문학은 과연 그러한가? 물론 그의 문학은 순수 문학의 영역에서 뻗어날 수 없다. 또 뻗어나가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그의 문학은 반드시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 정신의 창조와 인간 개발에 그 뿌리를 둔 이른바 '생명주의'--즉 휴머니즘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면 그의 문학 속에 나타난 휴머니즘적인 요소는 무엇이며, 그것은 그의 문학론과 어떠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2

김동리는 해방 이후 이 땅에서 난맥상을 보이면서 제창되었던 민족 문학론을 열거하면서 진정한 민족 문학의 일환이 될 수 있는 '인간주의적 민족 문학'이라야 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민족 문학이 세계성을 가져야 된다는 뜻은 그것이 민족 정신에 수직적으로 깊이 천착해야만 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민족 정신이란 '민족 단위의 휴머니즘'으로서 언어나 지역적인 장벽을 넘어서 세계 정신의 '바다'에 이어질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문학 정신의 본령(本領)인 인간성 옹호와 일치되고, 인간성 옹호가 요구하는 것은 '민족 단위의 휴머니즘', 즉 개성의 자유로운 발휘를 전제로 한 '인간성의 창조 의식'의 확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동리는 민족 문학이면서 세계 문학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서 '제삼 인간주의'를 천명하고, '제삼 인간주의의 본격적인 출발'은 동서 사상의 '창조적 지양(止揚)'이라 고 했다. 그러면 김동리 문학 세계에 있어서, 그의 문학관과 세계관 내지 역사관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제삼 인간주의'와 그것의 출발이 동서 정신의 변증법적인 발전에 있다는 뜻은 무엇이며 또 그것이 그의 작품 가운데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그는 《순수문학의 진의》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즉 1세기는 고대 휴머니즘이니 희랍계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대표로 하는 이성적 인간 정신이 그것이며 헤브라이계로는 기독을 대표로 하는 고차원적 영혼 생장의 인간 확립이 그것인데, 이 시기의 내용적 특징은 신화적, 미신적 궤변과 계율에 대한 항거와 타파로써 가장 원본적인 인간성의 기초가 확립되었던 것이요, 제2기는 르네상스로서 표현된 소위 신본주의에 대한 인본주의의 승리가 그것이다. 이 제2기는 휴머니즘의 특징은 신본주의에 대한 반발로써 시작되었으니만큼 제1기적 휴머니즘의 부흥이라고 해도 특히 헬레니즘계의 이성적 인간 정신이 위주되었던 것이며, 이 이성적 인간 정신의 개화로써 과연 오늘날의 난만한 과학 시대로 초래한 것도 사실이나 현대 과학 정신의 구경적 발달과 발화의 난숙은 다시 공식주의적 번쇄 이론과 과학주의적 기계관을 산출하게 된 것이니 고대의 신화적 우상, 중세의 계율화한 신성 등에 대치된 새로운 현대적 우상이 즉 '과학'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된 것이요, 특히 과학주의의 기계관의 결정체인 유물사관이 그것이다. 이리하여 철학에 있어 니이체, 하이데거, 딜타이, 문학에 있어 헤세, 만, 지이드, 헉슬리 등으로서 제3기 휴머니즘에의 지향이 선명되었고 오늘날 세계적으로 팽배한 데모크라시의 조류로 개선의 자유와 인간성의 존엄을 목적하는 휴머니즘의 세계사적 의욕의 일면으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위에서 동리가 니이체, 하이데거, 헤세, 토마스 만, 그리고 지드 등이 천명했다고 생각한 '제삼 인간주의'란 과학이라는 우상에 대한 숭배열로 황폐해진 인간 가치의 회복, 즉 그가 한국적 입장에서 말하는 '생명주의'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생명'에 대한 그의 개념은 현대 심리학에서 모든 인간 정신의 근본이 되는 '집단 무의식' 혹은 인간 정신의 가장 심충에 놓여 있는 창조적인 에너지와 동일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서양의 과학 정신인 이성적인 면'과 '동양 정신의 예지와 직관'을 포함한 새로운 차원의 무한한 샘인 유기체까지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융의 심리학을 김동리가 말하는 생명 의식에다 조명해 볼 때 그가 의도한 바는 더욱 명백하게 나타나게 된다. 융은 그의 분석 심리학적인 증거로써 서양적인 사고와 동양적인 비교 사이에 다리를 놓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구 문명에서 탁월한 기술로서 나타난 지성의 우월성은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분화된 이성이 본능적인 인간의 성격을 억누르거나 혹은 심리의 영원한 심층과의 단절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심리에 깊숙이 내재해 있는 영원한 창조적 힘의 도움을 얻고, 또 이 창조적 힘이 지니고 있는 권리를 행사하도록 회복시켜, 이것을 지성적인 차원의 높이로까지 끌어올림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은 단지 개개인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을 따름이다.

 

 

3

그러면 이러한 '제삼 인간주의' 내지 '생명주의'가 그의 작품 가운데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다소 거리가 먼 것 같지만 우선 김동리의 이해에 대한 출발점을 찾아보자. 조연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동리 문학을 '이해하는 데는 일제 말기의 현실적 절망감과 압박감을 잊지 말아야 된다'고 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술이란 역사의 산물'이라는 일면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떼느에 의하면 작가를 형성하는 데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민족과 풍토, 그리고 역사적 순간이다. 민족은 내면적인 주원인이고 풍토는 외부에서 오는 압력이며 역사적 순간은 이미 획득한 자극이다. 그래서 문학 작품 뒤에는 작가가 있고 그 작가 뒤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 즉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요인의 산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가 동리 문학을 꽃피우게 한 짙은 풍토이자 곧 '외부적인 압력'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외부적인 압력'이 그의 문학에 나타난 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고 여기서 나온 결과를 그의 문학 속에서 그가 말한 이른바의 '생명주의' 사상과 연결지어 보고자 한다.

 

첫째 김동리가 민족적이고 토속적인 색채가 짙은 소재를 찾아 작품을 쓰게 된 것은 '당시 일제의 질곡 속에서 얼어붙은 민족의 혼'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그는 민족의 고유한 것과 전통적인 것을 찾게 되고 마침내는 토속적인 풍습과 신화, 그리고 종교 이전의 민족 정신의 토양인 '샤머니즘'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면 민족 고유한 것과 전통적인 것, 그리고 신화와 샤머니즘을 소재로 작품을 써서 민족의 얼을 일깨울 수 있고 민족의 결속을 다질 수 있다고 생각한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현대 심리 분석, 특히 융의 심리학에서 밝힌 바와 같이 토속적이고 민족적인 요소와 신화 그리고 원시 종교는 그 기원을 '개인 무의식' 아래 있는 '집단 무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민족이라는 집단 무의식의 총체적 표현이며 조각품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의 조상들의 수없이 많은 공통된 경험들이 형상화된 것이며, 동일한 경험에 대한 심리적인 잔여이다. 그리고 그 근원은 개인적인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공통된 유산인 '집단 무의식'이란 정신적 세계에 있는 것이다. 샤머니즘에서 말하는 '신령님'이란 것도 이러한 '집단 무의식'의 하나의 표현으로 생각할 수도 있게 된다. 바로 이 점이 민족 정신을 작품으로 형상화시킬 수 있었던 근거이다. 즉 문학적으로, 또는 은유적으로 작가는 사제로서 이와 같은 민족적인 상징과 언어를 통해서 민족이란 집단을 묶고 있는 공통적, 정신적 요소를 환기시킨다. 왜냐하면 상징과 언어는 심리를 변형시키는 메카니즘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예술 작품은 자연 현상과 영적인 세계 가운데 위치하는 다리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이 이러한 작품을 읽을 때, 그 작품을 통해서 개아(個我)의 성향을 상실하지 않고 공감이라는 힘을 통해서 개별 정신을 초월하게 되는 '불타는 샘'인 민족혼의 바다에 머물 수가 있다.

 

그리고 신화를 창조하는 기능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적인 요소인 동시에 시간을 초월한 영속적인 바탕이기 때문에 이것은 어떠한 시대의 특징적인 것이 될 수도 없다. 그래서 신화를 통해서 이야기할 때 그 작품은 개인의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것이 되며 비록 그것이 고대의 신화일지라도 작가를 통해서 다시 기록되거나 혹은 새로운 독자를 통해서 다시 읽혀질 때 그것은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김동리 문학은 어느 평론가가 지적한 것처럼 김동리가 '한국적인 것에 대한 집념,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보다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추구한 것이 실제적인 현실을 외면하는 결과'를 빚은 것은 아니다.

 

둘째 김동리 문학이 상징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다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보기로 하자. 김동리 씨가 <무녀도>와 <황토기>의 작품을 쓸 때 우리 민족이 처해 있는 상황은 사회적 리얼리즘과 같은 직접적인 고발 문학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동리가 당시의 문학 사조의 흐름이 신화적인 상징주의적인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했을지도 모르나, 그가 상징적인 작품을 써야만 하는 것은 민족 신화를 사용해서 '민족의 혼'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징주의가 적절한 수단인 탓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적인 울분과 슬픔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표출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것에 대한 가장 뚜렷한 예를 김동리 자신이 '민족의 혼'을 나타내었다고 한 이 작품에 나타난 절맥설, 옛날 당나라에서 나온 장수가 여기에 이르러 가로되, 앞으로 이 산에서 동국의 장사가 난다면 감히 중원을 범할 것이다. 이에 혈을 자르니 이 산골에 피가 흘러내리고 이로 말미암아 이 일 대 황토 지대로 변하리라.

 

이와 같은 절맥설의 전설의 언외의 뜻은 당시의 비극적인 민족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토해 낸 것이다. 당시의 일본 사람들은 생명의 절규를 부르짖는 우리 조상들을 살해해서 이 강토를 선혈로 물들였다. 황토골은 다름 아닌 우리 나라의 상징적인 축도인 것이다. 힘이 있어도 힘을 쓸 수 없는 억쇠의 경우는 일제의 압박을 받고 있는 민족적 울분과 한의 투영이라고 해도 큰 잘못이 없을 듯하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남짓했을 때는 과연 솟는 힘을 제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다. 어떤 날 밤에는 혼자서 바위를 안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골짜기로 내려왔다 하는 동안 어느덧 밤이 새어 버리는 수도 있었다. 상투가 풀려 머리칼이 헝클어지고 두 눈에는 벌겋게 핏대가 서고 흡사 미친 사람 같았다. 밤 사이에는 또 이렇게 바위와 씨름이라도 할 수 있지만 낮이 되면 무엇이든지 때려 부수고 싶고, 메어치고 싶고, 온갖 몸부림과 발광이 치밀어 올라 잠시도 견딜 수가 없었다. 힘자랑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힘을 써보고 싶다는 욕망에서였다.

 

<화랑의 후예>의 작중 인물 '황진사'의 경우도 조국을 등지고 유랑의 길에 있으나 민족의 정신은 잃지 않고 있는 우리 민족의 모습의 생생한 축도이다. <동구 앞길>에서 순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순이가 오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제가 낳은 자식을 제 자식이라고 부를 수 있고, 자식들을 위해서 마음껏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또 성서상의 인물에 기초를 둔 <사반의 십자가> 또한 이러한 문맥 속에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작품 구성 동기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작품을 착상하게 된 것은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 우리는 일제의 질곡 속에 있었고, 우리의 모든 고유한 것, 전통적인 것이 다 그들의 쇠망치에 무너져 버리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우리의 숨통을 막는 것은 우리의 말과 글자를 빼앗으러 들었던 일이다. 그리하여 허무와 절망을 대표하는 사반보다는 희망과 구원에 결부된 예수를 주인공으로 삼아야 하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이 작품이 8.15 해방과 6.25 동란을 거친 뒤 그것의 주제가 다소 달라졌다 하더라도 유대땅을 점령한 로마인은 일제의 질곡이며 그것을 몰아내기 위해 비밀 행동대를 조직한 '사반'은 우리 민족을 말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김동리 문학의 서사시는 패배와 압박 그리고 오래된 분노의 토양에서 생성된 것이다. 그는 청년 시절에 일본 제국주의가 약소 국가의 인권 유린과 착취 그리고 전통적인 한국 사회의 구조를 파괴한 후 그 위에 세워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지극히 이기적인 이러한 일본의 침략주의를 그는 비인간적인 행위로써 생명을 살해하는 행위로 보았다. 그는 그 자신 피압박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또 작가로서 정의와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침략 행위를 슬퍼하고 또 표현했다.

 

 

4

그런데 김동리가 한국 문학이라는 지방주의를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민족적 과제에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 추적하는 그의 기본적인 과제와 결합되는 지점이다. 그는 민족이란 것은 '집단 의식'이나 앞에서 논의한 신화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생명체'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인류에 공통되는 '생명'을 탐구하게 되고 작품에서 취급한 모든 것은 생명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모든 문제를 현재에 있는 인간 가운데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래서 1937년 그와 뜻을 같이 하고 동인지 《시인부락》을 낸 서정주는 한국 현대시 약사에서 그들의 문학관을 집약적으로 다음과 같이 펴낼 수 있었다.

 

우리들의 중심과제는 늘 인간성 탐구와 이것의 집중적 표현에 있었다. 인간성! 그것은 늘 우리들의 뇌리와 심중을 떠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장환의 저 모든 육성의 통곡이나 필자의 고열한 생명 상태의 표백 등은 모두 상실되어 가는 인간 원형을 돌이키려는 의욕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잠재한 세계는 자연도 아니요, 언어 기교도 아니요. 다만 사람 그것 속이었다.

 

따라서 김동리가 '잠재한 세계가 자연도 아니요 다만 사람 그것 속'이란 주장을 생각해 볼 때 인간에 대한 이러한 김동리의 견해는 곧 그의 작품을 해결하는 지름길로 제시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의 이율 배반적인 양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또 이것은 곧 가시도 불가시를 연결시키는 집단 무의식의 마스크로 작품 속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니이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말하고 있는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원칙의 문맥 속에 두어,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정주처럼 그는 청년 시절에 니체의 저서를 많이 읽었다고 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은 원시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또한 건강을 증진시키는 요소인데 반해 아폴로적인 충동은 이와 반대로 자의식적이고 이성적이어서 궁극적으로 파괴적인 요소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아폴로적인 인물의 상징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적인 이성주의는 비겁한 기독교적인 도덕과 더불어 현대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은 '인간의 가장 깊은 심층'에서 쏟아나오는 것이다. 니이체는 이것을 유추하여 '어둡고 도취적인 상태'라 말했다. 그런데 이것이 확대될 때는 완전한 자기 상실의 상태가 온다. 그래서 독일 중세 때 노래 부르고 춤추는 군중들은 이 디오니소스적인 힘에 충동을 받은 것이라 한다. 이것은 St. john과 St. Vitus의 춤들 가운데서 우리들은 다시 희랍의 주신들을 지각할 수 있다고 니체는 말했던 것이다. 이러한 충동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프로이드와 융의 집단 무의식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다. 환언하면 영원히 '불타는 샘'인 생명의 원천으로 회귀하려는 충동인 것이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적인 번뇌는 이러한 생명의 천(泉)에서 단절된 개인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김동리 작품에 나타난 대부분의 인물들이 인간 정신의 고향으로 회귀하려는 데서 우리들은 그의 개별 작품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형이상학을 발견할 수 있다. 김동리 문학이 양면성을 띤 상징적인 가치를 가지게 된 것도 이러한 신화적 형이상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철 씨가 '김동리는 작가로서 자기의 작품 뒤에 어떤 관념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지적한 것과 조연현이 '씨가 씨의 모든 작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은 허무의 수락이나 복종이 아니면 허무에의 도전이나 반항이 아니면 그것의 초극이었던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다시 위에서 말한 형이상학적인 면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황토기>의 억쇠와 덕보, <역마>의 성기, 그리고 <무녀도>의 모화까지도 디오니소스의 마스크(그들이 술을 마시고 춤을 추거나 혹은 어디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는 현상계와 실체를 가로막고 있는 막을 찢고 생명의 본원적인 '총화'에로 귀속하려는 충동을 나타낸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그의 문학이 일제 암흑이라는 '벽'에서 출발한 것은 피할 수 없는 당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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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그가 니체와 같은 직관으로 인간에게 모든 조건을 부여하는 자, 즉 신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인간 가운데 있다고 하는 휴머니즘이다. 그래서 그는 <을화>를 발표한 이후, '신보다 인간을, 내세보다 현세를 택한 사람으로서 인간에게 충실하고, 현세에 충실하는 길을 통하여, 신과도 통하고 내세와도 통하는 철학이나 종교를 찾아볼 수 없겠느냐'고 물으면서 잡초 속에 묻혀 있는 '샤머니즘'에서 새로운 인간 종교의 발견을 제의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휴머니즘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그는 '신과 인간, 이승과 저승'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넘나들 수 있다는 '샤머니즘'의 문맥 가운데서 그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려고 했다. 김동리가 이성과 영혼이 단절되어 있지 않은 세계를 원시 종교의 모태인 이러한 토속적 샤머니즘과 같은 민간 신앙에서 찾은 것은 그것대로의 박진감이 있는 커다란 문학적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레비 브륄이 지적한 것처럼 '샤먼'과 같은 원시인들은 정신적인 지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영혼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연적인 현상과 초자연적인 현상 사이에 아무런 논리적 상응 관계가 필요치 않다. 그들은 현실에 대한 두 가지 질서, 즉 물질과 정신이 서로 접촉하며 삼투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하나가 있다는 것만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면 <무녀도>와 <을화>의 경우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무녀도>에서 모화는 '샤머니즘'의 얼굴인 무당이다. 그녀는 두 사람의 다른 사내들로부터 '욱이'라는 아들과 '낭이'라는 딸을 두고 있다. 그런데 어릴 때 집을 나가 평양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고 돌아온 '하느님'을 믿는 '욱이'가 영원한 생명의 바다인 '수국 용신님'을 믿는 어머니 모화의 신앙을 수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신'을 쫓기 위하여 식칼로 굿을 벌이다 접신을 한 끝에 자기 자신도 모르게 아들 '욱이'의 가슴을 찌르게까지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이 작품에서 모화가 강물에 몸을 던진 어느 읍내 부잣집 며느리를 위한 굿을 하는 장면이다.

 

모화는 김씨 부인이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물에 빠져 죽을 때까지의 사연을 한참씩 넋두리하다가는 화랑이들의 장고, 피리, 해금에 맞추어 춤을 덩실거렸다. 그녀의 음성은 언제보다도 더 구슬펐고 몸뚱이는 뼈도 살도 없는 율동으로 화한 듯 너울거렸고……취한 양 얼이 빠진 양 구경하는 여인들의 숨결은 모화의 쾌자자락 따라 오르내렸다. 모화의 쾌자자락은 모화의 숨결을 따라 나부끼는 듯했고, 모화의 숨결은 한많은 김씨 부인의 혼령을 받아 청승에 자지러진 채, 비밀을 품고 조용히 굽어돌아 흐르는 강물(얘기 속의)과 함께 자리를 옮겨가는 하늘의 별들을 삼킨 듯했다.

 

여기서 모화가 '김씨 부인'의 혼령을 받기 위해 마술적인 묘기로 춤을 추는 것은 인간의 경험 가운데서 느끼는 황홀경이 접신의 길로 열리는 신적인 도취와 같은 것이다. 또 밤중이 되어서 혼백을 못 건져서 모화가 '수국 용신님'이 사는 물속으로 몸을 완전히 잠겨 버리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칼날 위에서 춤을 추듯 인간이 자신이 처해 있는 실존적 상황과 극한적으로 대결함으로부터 오는 희열, 즉 접신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을화'의 경우도 '모화'의 경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또 모화와 을화가 신과 접촉할 수 있는 무당이지만 생명을 창조하고 그 흐름을 연결짓는 모성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모화는 '수국 용신님'의 딸은 물론 '하느님'의 사자가 되는 '욱이'를 낳았고, '을화'는 월회와 영술을 각각 다른 사내들 사이에서 낳았다.

 

모화와 을화는 표면적으로 볼 때 성적으로는 문란하게 보이지만, 상징적으로 볼 때 그것은 무당이 불타는 생명의 바다와 연결되어 있고 또 생명을 창조하는 모성의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다.

 

한편 김동리가 기독교와 불교를 상징 체계로 사용했을 때도 언제나 그것은 인간 가운데 신의 발견을 중심으로 했었다. 그래서 그는 <사반의 십자가>에서 인간 의식 가운데, 즉 생명 가운데서 인간을 구원하는 단서를 찾아보려고 했다. '사반'이 육체를 상징하는 동굴 속에서 암별과 숫별을 만나는 날까지 수련을 해야 한다든지, 그리고 예수의 이적을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차원에다 두려고 했다. 즉 <사반의 십자가>에서 작가는 <무녀도>에서처럼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대결시키면서 이적의 현상을 천상의 신이 아닌 인간적인 생명의 차원에서 수용하려고 했다. 그래서 <무녀도>에 나타난 '기독교가 서양의 그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김병익의 분석은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 그가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사용했을 때 역시 이러한 그의 견해에는 변함이 없었다. <등신불>에서 '만적이'가 부처님이 된 것은 해탈과 미소로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뇌와 슬픔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정연하고 단아하게 석대를 쌓고 추녀와 현판에 금물을 입힌 금불각 속에 안치되어 있음직한 아름답고 거룩하고 존엄성 있는, 그러한 볼상과는 하늘과 땅 사이라고 할까. 너무도 거리가 먼, 어이가 없는, 허리도 제대로 펴고 앉지 못한,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은 채 우는 듯한, 오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꽉 움켜잡는 듯한, 일찍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그러한 가부좌상이었다.

 

이와 같이 김동리는 신과 접촉하고 신과 통할 수 있는 사제로 행동하고 있는 모화와 을화, <등신불>의 만적, 그리고 예수마저도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인간 가운데 있는 영혼과 결부시켜 생각한 것이지, 지상의 현세를 떠나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인간, 즉 '생명'이란 개념은 이성을 중심으로 한 서양 정신의 의식 세계와 예지와 직관을 중심으로 한 동양적인 무아의 세계 내지 무의식의 세계를 복합한 완전하고 건전한 총체적인 인간 정신의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그의 문학인 '자유로운 개성, 존경받는 인간성'의 탐구를 목적으로 한 것은 기계적인 유물사관이 아니라,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세계를 창조적으로 융합하고 포괄한 유기적인 사관이다. <무녀도>와 <을화>의 비극은 결국 동서 정신의 창조적인 수용보다는 상호간의 단절을 주장한 데서 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김동리가 일생을 두고 추구해 왔던 주제는 김병익이 말한 '생명감과 조화 있는 인간', 즉 생명의 조화 있는 형성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개성의 자유와, 이것을 위해 무엇보다 분열되지 않는 건전하고 총체적인 인간성을 옹호하는 데 그 역점을 두고 있다.

 

우리들이 김동리 문학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공간적 그리고 시간적 한계를 초월한 '생명주의'를 강조하고, 황폐한 현대 문명 가운데서 퇴색되어 가는 인간 가치를 회복하려난 처절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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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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