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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풍수(禁風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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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풍수(禁風水)

풍수설이란 것이 삼대(三代)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진(晉)나라 곽박이 창시했고, 당·송이래에 와서 성해졌는데 오늘에는 혹하여 믿는 사람이 더욱 많다. 사람의 살고 죽는 것과 가난하고 부유한 것,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과 귀하고 천한 것을 하나같이 풍수에 맡겨 버린다. 혹 아무 땅이 크게 길해서 그 곳에 묘를 쓰면 그 후에 반드시 이렇게 될 것이라는 지사(地師)의 속이는 말을 들으며, 묏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의리도 염치도 돌보지 않고 남의 땅을 빼앗고 남의 선산을 해롭게 한다. 비록 형제와 숙질 사이라도 선친을 위한다는 핑계로 반드시 죽기를 작정하고 다툰다. 혹 묘를 쓰는 데에 예도(禮度)도 갖추지 않고 밤을 타서 허둥지둥하며, 혹은 무리를 거느리고 서로 싸워서 관을 깨뜨리고 널이 드러나도 예사로 여기며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복과 이익을 구하려는 것으로써 마음을 먹고, 선친의 신체를 편케 하려는 것으로 뜻하지 않는다. 한 지사의 기리는 말을 듣고 여기에 장사했다가, 또 한 지사의 나무라는 말을 들으면 저기로 옮겨서 장사한다. 한 번 옮기고 두 번 옮기기에 이르러도 그만두지 않으니, 그 인륜을 해치고 의리에 어긋나며 교화를 해치고 습속을 무너뜨리는 것이 이것보다 심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들은 모두 이치에 밝지 못한 사람들이다.

지사의 집에는 글이 가득하고, 실으면 무거워서 소가 땀을 흘릴 정도여서 천 마디 만 마디 말뿐이 아니나, 결국은 길한 사람이 길한 땅을 만난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 길한 땅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땅에 있는가, 하늘에 있는가? 대개 인생의 화와 복은 다만 하늘에 매였고 땅에 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록 길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얻지 못하도록 하는데, 그 사이에 사람이 힘을 써서 구한다고 어찌 얻을 수가 있겠는가.

또 사람의 집이 길한 땅에 있어 비록 복을 누렸더라도 그 자손으로서 딴 지방에 흩어져서 사는 사람까지도 그 아비와 할아비가 살던 땅의 덕을 어찌 누릴 수 있겠는가. 이로 볼 때 산의 풍수가 과연 길하면 그 신체는 비록 편하더라도 그 덕이 어찌 그 자손에게까지 미쳐서 능히 복되기도 능히 화되기도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제가 편안하면 나도 편안한데 그 이치인즉 그렇다' 한다. 이것도 또한 그렇지 않다. 사람의 골육이 이미 갈라졌으면 기맥(氣脈)이 서로 통하지 못해서 비록 아프고 가려움이 있어도 능히 서로 통하지 못한다.

대저 이와 같은 이유로 북적(北狄)은 시체를 불에 태우고, 남만(南蠻)은 시체를 물에 장사지내도 그 후손이 높은 지위에 오르고 부귀하며 오래 산다. 이처럼 수장하고 화장하여도 그 자손에게 능히 화가 미치지 않는다. 지금 사람으로서 물이나 불난리 또는 전장에서 죽어 시체가 있는 곳을 몰라도 그 자손을 보면 혹 복을 편케 누리는 사람이 있으니, 이것은 모두 풍수가 믿을 만한 것이 아님을 증험하여 주는 사례들이다.

요점 정리

작자 : 정상기

형식 : 수필, 논

성격 : 비판적

주제 : 풍수설의 문제점 비판

내용 연구

삼대 : 중국의 하, 은, 주의 세왕조를 가리킴

지사 : 풍수지리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를 가려잡는 사람. 지관

기맥 :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혈과 맥락

음양오행 : 음양과 오행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음양 : 우주 만물의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기운으로서 이원적 대립 관계를 나타내는 것. 달과 해, 겨울과 여름, 북과 남, 여자와 남자 등은 모두 음과 양으로 구분된다.

오행 :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를 이른다.

이해와 감상

 

이 글은 산의 형세와 물의 형세를 살피고 음양오행에 맞추어서 묘터나 집터의 길흉을 따지는 풍수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글로, 풍수설이 지닌 허구성을 지적해, 이는 인륜을 해치고 의리에 어긋나며 교화를 해치고 습속을 무너뜨린다며 극단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정상기(鄭尙驥) [1678~1752]

 

본관 하동(河東). 자 여일(汝逸). 호 농포자(農圃子). 이익(李瀷)의 문인. 일찍이 편모슬하에서 자라 병약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집에서 학문을 연구하다가 실학파의 지리학자로서 전국을 답사하였다. 과학적인 백리척(百里尺)을 이용,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하여 역대 국경(國境) 변천의 역사·지리학적 검토를 기도하였고 군현(郡縣)의 연혁, 산천도리(山川道里), 관방(關防)의 성곽, 해로(海路), 북간도강계(北間島疆界), 궁실(宮實) 등에 대한 역사적 변천을 기술하였고, 특히 산천의 기사(記事)는 정치적 관점을 벗어난 근대적 안목을 보여주었으며 토지개혁에서부터 병사(兵事)·산업·재정·의약 등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의 전반을 실용적인 이용면에서 연구하였다. 실학파 가운데 이익을 종조(宗祖)로 하는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가 그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만년에 아들 항령(恒齡)이 왕을 배종한 공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인자비감(人子備鑑)》 《농포문답(農圃問答)》 《심의설(深衣說)》 《도령편(韜鈴篇)》 등이 있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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