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성 / 조정권 / 해설
by 송화은율근성 ― 조정권 |
배추를 뽑아 보면서 안쓰럽게 버티다가
뽑혀져 나온 뿌리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여지껏 뿌리들이 흙 속에서 악착스럽게 힘 을 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뿌리는 결국 제 몸통을 따라올 수밖에 없다 는 생각이 든다.
배추를 뽑아 보면서 이렇게 많은 배추들이 제각기
제 뿌리를 데리고 나옴을 볼 때
뿌리들이 모두 떠난 흙의 숙연(肅然)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배추는 뽑히더라도 뿌리는 악착스러울 이만큼 흙 의 혈(血)을 물고 나온다.
부러지거나 끊어진 배추 뿌리에 묻어 있는 피
이놈들은 어둠 속에서도 흙의 육(肉)을 물어 뜯 고 있었나 보다.
이놈들은 흙 속에서 버티다가 버티다가
독하게 제 하반신을 잘라 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 다.
나는 뽑혀지는 것은 절대로 뿌리가 아니라는 생 각이 든다.
뽑혀지더라도 흙 속에는 아직도 뽑혀지지 않은
그 무엇이 악착스럽게 붙어 있다.
흙의 육(肉)을 이빨로 물어뜯은 채.
※조정권(1949~) ; <현대 문학>을 통해 등단. 70년대 시인. 이미지의 개성적 표출이 뛰어나며 감각적인 시풍을 지니고 있다.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등이 있다.
<해설> 뿌리가 뽑혀진 배추의 이미지와 강한 생명력이라는 의미가 잘 융합된 작품으로, 배추를 의인화하여 비록 뿌리가 뽑혀지기는 했지만 악착스럽게 흙에 붙어 있으려는 강한 생명력을 통해 사물과 생명의 근성은 그대로 흙에 남아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라는 생각이 든다’, ‘~ 있었나 보다’라는 설유적인 어조와 선명하고 감각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 주제 ; 사물과 생명의 강한 근성
☞ 1~4행 ; 배추 뿌리가 몸통을 따라 서서히 뽑혀 올라오는 과정을 그리고 있음.
☞ 5~7행 ; 뽑힌 배추의 뿌리와 흙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시인 자신의 숙연한 감정을 그리고 있음
8~9행 ; 배추를 인격화함.
10~12행 ; 의인화의 고조
13~16행 ; 사물과 생명의 근성 ⇒ 주제 부분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