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閨怨) -무어별(無語別)
by 송화은율규원(閨怨) -무어별(無語別)
十五越溪女 (십오월계녀)
羞人無語別 (수인무어별)
歸來掩重門 (귀래엄중문)
泣向梨花月 (읍향이화월)
열다섯 살의 아리따운 아가씨
사람이 부끄러워 말도 못 하고 이별했네.
돌아와 겹문을 닫아 걸고는
배꽃처럼 하얀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열다섯 아리따운 아가씨
님이 부끄러워 말 못하고는 헤어졌는데
돌아와 중문을 닫고서는
배꽃 사이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요점 정리
지은이 : 임 제(林悌)
갈래 : 한시, 오언절구
연대 : 조선 중기
성격 : 애상적, 관찰적
구성 :
기 : 아름다운 아가씨
승 : 부끄러워 말을 못함
전 : 이별의 안타까움
결 : 안타까움에 흘리는 눈물
제재 : 임과의 이별
주제 : 여인의 이별의 한 또는 안타까움, 임과 이별한 여인의 애틋한 마음
특징 : 간결한 표현과 환상적 분위기
출전 : 백호집
내용 연구
월계녀(越溪女) : 아름다운 미인. 중국의 월(越)나라 약야계(若耶溪)의 여인 곧 서시(西施)를 말함. 즉 서시같이 '아름다운 여인'을 지칭함
수인(羞人) : 他人을 부끄러워함.
사람이 부끄러워 말도 못 하고 이별했네 : 화자는 관찰자의 시점에서 소녀의 행위를 살피고 있다. 남녀 유별하던 시대에서 절실한 사랑을 간직한 소녀의 심정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중문(重門) : 겹문, 덧문.
이화월(梨花月) : 배꽃에 걸린 달, 하얀 배꽃을 비추는 달.
배꽃처럼 하얀 달 : 순백색의 색채감을 통해 애상적인 분위기를 고조
배꽃 사이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 달은 만단정회를 불러 일으키는데 임이 떠난 후에 슬픔이 복받쳐 달을 보고 울고 있는 모습이 더욱 애처롭게 보인다.
이해와 감상
'규원'이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어린 소녀의 애틋한 사랑을 절제된 언어를 통해 표현한 작품으로 섬세한 여인의 심정을 감각적이고 심미적인 형상으로 엮어 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보듯 작가는 여성적인 섬세한 감각으로 이별을 당한 여인의 슬픔을 효과적으로 포착해 내고 있다. 사랑하는 임과 헤어지면서도 남이 부끄러워 이별의 말 한 마디 못하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이 작품에서 배꽃처럼 흰 달(梨花月)은 이 작품의 배경의 구실을 하면서 동시에 임의 모습을 더욱 생각나게 하는, 그래서 작중 화자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하는 작품 내적 기능을 하는 소재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유분망한 낭만주의적 경향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권위와 법도가 중시되던 봉건주의적 시대의 남녀 사랑이란 절실한 마음 속에만 간직될 수밖에 없는 것을 표현한 작품이다. 임제는 송순(宋純)·정철(鄭澈) 등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風靡)했던 풍류 남아요, 재사(才士)였다. 그는 '수성지(愁城誌)'라는 뛰어난 소설을 썼을 뿐만 아니라 시조의 작가로도 탁월한 재주를 보였고, 한시의 창작에서도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
심화 자료
임제
1549(명종 4)∼1587(선조20). 조선 중기의 시인.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 본관은 나주(羅州). 절도사 진(晉)의 맏아들이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여 스승이 따로 없다가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을 사사하였다. 교속(敎束)에 얽매이기보다는 창루(娼樓)와 주사(酒肆)를 배회하면서 살았다.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에 창루와 주사를 그만두고 한때는 글공부에 뜻을 두어 몇 번 과거에도 응시하였다. 그러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창루와 주사에서 벗어나 현실세계로 뛰어든 그의 눈에는 부조리와 당쟁만이 가득 찼다.
임제가 22세 되던 어느 겨울날 호서(湖西)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우연히 지은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로부터 3년간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 때에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임제는 1576년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진사에 합격하였다.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서도병마사·북도병마사·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그러나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면서 편당을 지어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몰골들이 그의 호방한 성격에 용납되지 않았다. 벼슬에 대한 선망과 매력, 흥미와 관심은 차차 멀어져 가고 환멸과 절망과 울분과 실의가 가슴속에 사무쳤다. 그러기에 10년 간의 관직생활은 아무런 의의가 없었다.
임제는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하였다.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남겼다. 사람들은 임제를 기인이라 하고 또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였다. 그래서 임제의 글은 취하되 사람은 사귀기를 꺼렸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임지에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한 것과 기생 한우(寒雨)와 주고받은 시조의 일화,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로맨스도 유명하다.
성운이 세상을 등진 이래로 지기(知己 ; 친구 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가 끊어지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39세로 죽었다. 운명하기 전에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 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에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칼과 피리를 좋아하고 방랑하며 술과 여인과 친구를 사귀었다.
임제는 호협한 성격과 불편부당을 고집하는 사람이다. 〈수성지 愁城誌〉·〈화사 花史〉·〈원생몽유록 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이 있다.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이밖에 시조 3수와 ≪임백호집≫ 4권이 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白湖集, 林悌의 初期詩에 대하여(심호택, 백강서수생박사화갑기념논총 한국시가연구, 형설출판사, 1971), 林悌論(蘇在英, 한국문학작가론, 형설출판사, 1980).(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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