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국어와 우리 문화의 관계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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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와 우리 문화의 관계

 

  국어를 배우고 안다는 것은

  언어에 대해 잘 알고, 언어를 잘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휘를 많이 알고 문장을 잘 구사할 줄만 알면 언어를 잘 사용하는 것이라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어휘를 예로 들어 보자. 단어를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가령, 󰡐남자󰡑란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굳이 사전을 찾아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피드 퀴즈 게임에서 󰡐남자󰡑란 단어가 나오면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여자󰡑말고! 󰡐여자󰡑의 반대말!󰡓이라고 함이 가장 빠른 길일 것이다. 󰡐남자󰡑의 사전적 의미가 정확히 무엇이냐고 물으면 딱히 답하기가 힘들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것이 󰡐여자󰡑의 상대어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남자󰡑의 의미를 󰡐여자󰡑의 상대어, 곧 대등적인 관계에서 의미만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옳을지 몰라도 우리의 언어 현실로 볼 때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의 언어 현실을 보면, 󰡒남자니까 네가 참아라.󰡓 하는 말과 󰡒여자니까 네가 참아라.󰡓 하는 말은 그 내포1)하는 의미가 현저히 다르다. 전자가 󰡒남자는 우월한 존재이니 그만한 일은 참아야 한다.󰡓는 의미, 곧 참으면 더 좋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면, 후자는 󰡒여자는 열등한 존재이니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의미, 곧 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의 의미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이 과연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여기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를 모르고 언어를 사용하면, 한국어를 잘 아는 것이라 할 수 없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이는 마치 만원 버스에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오면서 누군가가 󰡒내립시다.󰡓라고 말할 때, 그 청유형에 이끌려 따라 내리는 자에게 한국어를 안다고 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어를 안다는 것은 적어도 이러한 언어 현실과 문화에 익숙해지고 그에 걸맞게 사고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어를 배우는 까닭은

  그렇다면 언어는 사회를 반영하기만 할 뿐인가? 언어는 사회의 약속이므로 사회가 변하기 전까지는 언어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가?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기존의 체계에 순응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없는가?

 

  아직까지도 󰡐여교수󰡑라는 말은 있어도 󰡐남교수󰡑란 말은 없다. 󰡐여류 작가󰡑는 있어도 󰡐남류 작가󰡑는 없다. 남성 우위의 시대에서 교수나 작가는 대부분이 남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언어학에서는 이런 것을 유표화(有標化)라 한다. 친족 호칭도 그렇다. 모계의 친족 명에는 모두 󰡐외󰡑라는 표지가 따로 붙는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외󰡑 할머니라 불러야 하지만, 아버지의 어머니 곧 친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할머니를 유표화하여 󰡐친󰡑할머니라고 한다는 것은 부계 중심 사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시아버지에게 아버님이 아니라 󰡐시󰡑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 어법에는 그릇된 것이 된다.

 

  그러나 요즘은 󰡐여류 작가󰡑란 말이 의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라지는 추세이다. 그런데 이것이 여류 작가가 양적으로 늘어난 데 따른 결과만은 아니란 점을 고려해 볼 때, 언어란 사회를 반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임을 알 수가 있다. 󰡐간호원󰡑이나 󰡐청소부󰡑란 명칭이 그들의 의식적 노력의 결과로 󰡐간호사󰡑, 󰡐환경 미화원󰡑으로 바뀌게 된 사실도 같은 예에 속한다. 만일 이 같은 의식적이며 의도적인 노력 일체를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돌린다면, 국어 순화 운동 역시 설자리를 잃을 것이다. 언어의 사회성이 반드시 언어의 불가역성(不可易性)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에 담긴 그리고 그 언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문화까지 이해하고 비판하며 창조할 수 있는 사고와 능력을 기르는 것이어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언어와 언어 문화의 이해와 전수에만 주된 관심을 가져왔다. 물론, 그 목적도 충분히 달성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언어와 언어 문화에 대한 이해와 전수를 넘어서서 그것을 비판하고 새로운 언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사고력을 함양하고 이를 통해 창조적인 언어 문화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있다.

 

  우리의 언어 문화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언어가 문화와 긴밀한 함수 관계에 있다면, 그리고 문화는 집단의 사고가 이루어 낸 결정체라면, 언어는 집단적 사고를 반영하고, 아울러 집단적 사고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이 자명하다.

  언어 문화의 정수라 불리는 시를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은 호수(湖水)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玉)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호수는 우리 나라 사람들에겐 평화롭고 고요하며 안온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며, 그러기에 이 시는 많은 이들에 의해 낭만적인 연가(戀歌)로 사랑받아 왔다. 하지만 만일 이 시를 그대로 직역해 미국의 오대호 근처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들려 주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까? 그 크기가 한반도의 몇 배에 달하며, 그로 인해 조수가 일고 일기의 변화가 일어나는 그 광대한 호수에 자신을 비겨 표현한 것인즉, 이것은 호연지기를 노래한 시가 되지나 않을까? 혹은 그 넓고 거친 호수에 연인더러 조각배 타고 노를 저어 오라 하고서는, 그러면 흰 그림자를 안은 호수의 물결이 뱃전에 부서지리라 한 것인즉, 이것은 정사(情死)를 노래한 시이거나, 혹은 위협과 저주에 가까운 시가 되지는 않을까?

 

  이처럼 언어의 함축2)이라든가 언어 미학 등 우리의 문화의 관습, 그리고 그에 따른 사상과 감정을 다른 집단에 고스란히 전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다른 민족이 우리의 독특한 정서와 생활 풍습을,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특수성을, 그것을 머리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공감하고 감동하기란 실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민족이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느냐의 여부를 떠나 우리가 민족의 언어 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국어가 민족 문화 유산의 전승과 창조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우리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연결되고, 문화를 창조하는 능력을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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