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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생전(麴先生傳)​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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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생전(麴先生傳)

국성(麴聖)의 자는 중지(中之)요, 관향(貫鄕)은 주천(酒泉)이다. 어렸을 때에 서막(徐邈)에게 사랑을 얻어, 그의 이름과 자(字)는 모두 서씨가 지어 주었다.

그의 조상은 애초에 온(溫)이라고 하는 고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었는데, 정(鄭)나라가 주(周)나라를 칠 때에 포로가 되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였으므로, 그 자손의 일파가 정나라에서 살게 되었다. 그의 증조는 역사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고, 조부 모(牟)는 살림을 주천으로 옮겨, 이 때부터 주천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 차( )에 이르러서 비로서 벼슬길에 나아가 평원 독우(平原督郵)의 직을 역임하였고, 사농경(司農卿) 곡씨(穀氏)의 따님과 결혼하여 성(聖)을 낳았다.

성은 어렸을 때부터 도량이 넓고 침착하여, 아버지의 친지들이 그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래서 항상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의 도량이 만 이랑의 물과 같아서, 가라앉히더라도 더 맑아지지 않으며, 흔들어 보더라도 탁(濁)해지지 않으니, 우리는 자네와 이야기하기보다는 이 아이

와 함께 기뻐함이 좋네."

성이 자라서, 중산(中山)에 사는 유영(劉怜), 심양( 陽)에 사는 도잠(陶潛)과 벗이 되었다. 이들은 서로 말하기를,

"하루라도 이 친구를 만나지 못하면 심중에 물루(物累)가 생긴다."

라고 하며, 만날 때마다 저물도록 같이 놀고, 서로 헤어질 때는 항상 섭섭해하였다.

 

나라에서 성에게 조구연(糟丘椽)을 시켰지만 부임하지 않자, 또 청주 종사(靑州從事)로 불렀다. 공경(公卿)들이 계속하여 그를 조정에 천거하니 임금께서 조서(詔書)를 내리고 공거(公車)를 보내어 불러 보고는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주천의 국생인가? 내가 그의 명성을 들어온 지 오래다."

라고 하셨다.

이보다 앞서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주기성(酒旗星)이 크게 빛을 낸다 하더니, 얼마 안되어 성(聖)이 이른지라 임금이 또한 이로써 더욱 기특이 여기었다.

곧 주객 낭중(主客郎中) 벼슬을 시키고, 이윽고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올리어 예의사(禮儀使)를 겸하니, 무릇 조회(朝會)의 잔치와 종조(宗祖)의 제사·천식(薦食)·진작(進酌)의 예(禮)에 임금의 뜻에 맞지 않음이 없는지라, 위에서 기국이 둠직하다 하여 올려서 후설(喉舌)의 직에 두고, 우례(優禮)로 대접하여 매양 들어와 뵐 적에 교자(轎子)를 탄 채로 전(殿)에 오르라 명하여, 국선생(麴先生)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임금의 마음이 불쾌함이 있어도 성(聖)이 들어와 뵈면 임금은 비로소 크게 웃으니, 무릇 사랑받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중략>

 

[중간 줄거리] 국성은 미천한 존재로서 출세하나, 국정을 어지럽힌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이 일로 죄를 입어 그의 세 아들은 자살하고 성도 연좌(連坐)되어 서인(庶人)이 되기까지 한다. 성은 야인(野人)으로 있으면서도 국란(國亂)이 일어나자 출정(出征)하여 희생 정신을 발휘하고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벼슬을 받으나, 상소하고 물러나와 제 본분을 지킨다.

사신은(史臣)은 말한다.

국씨는 원래 대대로 농사짓는 집안이었는데, 성이 유독 넉넉한 덕이 있고, 맑은 재주가 있어서 당시 임금의 심복이 되어 국가의 정사에까지 참예하고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 주어 태평스러운 시절의 공을 이루었으니 장한 일이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이 극도에 달하자 마침내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화(禍)가 그 아들에게까지 미쳤다. 하지만 이런 일은 실상 그에게는 유감이 될 것이 없다 하겠다. 그는 만절(晩節)이 넉넉한 것을 알고 자기 스스로 물러나서 마침내 천수(天壽)로 세상을 마쳤다. 주역(周易)에 '기미를 보아서 일을 해 나간다[見機而作]고 한 말이 있는데, 성이야말로 거의 여기에 가깝다 하겠다.

요점 정리

연대 : 고려 중엽

작가 : 이규보

갈래 : 가전 또는 의인체 전기

구성 : 전기적 구성

성격 : 교훈적, 풍자적

특징 : 의인화 기법

주제 : 우국 충절의 교훈, 위국 충절과 신하로서의 올바른 처신에 대한 권계

내용 : 술을 의인화한 가전. 시대 배경은 위·진. 주인공 국성(술)의 조상은 원래 농사를 짓고 살았다. 아버지는 차, 어머니는 곡씨의 딸, 국성은 총명하고 뜻이 커서 당시 도잠·유영과 사귀고 임금의 총애를 받아 벼슬도 높아졌다. 그의 아들 삼형제가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방자히 굴다가 모 영(붓)의 탄핵을 받아, 아들들은 자결하고 국성은 탈직되어 서민으로 떨어진다. 뒤에 다시 기용되어 도둑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우고,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가 폭병으로 죽는다. 이 작품은 안으로 무신의 반란과 밖으로 몽고군의 침입에 희생된 고려 의종·고종 연간의 난국에 처하여 분수를 망각한 인간성의 결함과 비정을 풍자한 계세징인을 목적으로 쓰여진 가전이다.

출전 : 동문선

내용 연구

 

국성(麴聖:맑은 술, 술을 의인화한 호칭) 의 자(字)는 중지(中之:곤드레)니 , 관향(시조가 난 땅)은 주천(酒泉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주나라에 있던 땅 이름)고을 사람이다.(이는 고대 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으로서 이야기가 시작되기 앞 서, 인물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제시하는 요약적 제시이다. 이러한 전기적(傳記的) 형식이 고대 소설에서는 상투적으로 사용되었다.)어려서 서막(徐邈 : 중국 진나라 사람, 술을 좋아하여 국법에서 금하는 밀주를 만들어 마셨다고 함)에게 사랑을 받아, 막(邈)이 이름과 자를 지어 주었다.(성을 서막이 지어주었다고 한 것은 태평광기(太平廣記)〉의 서막 설화 중 淸酒爲聖人 濁酒爲賢人'에서 연유하였으며 자 중지는 '국순전'의 '以其聖人之德 時復中之'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의 먼 조상은 본시 온(溫)이라는 고장의 사람으로 항상 힘써 농사를 지으면서 자급(自給)하면서 살고 있었는데(누룩은 따뜻한 온도에서 잘 뜨기 때문에, 온(따뜻할 온)이라는 고장에서 살았다는 말) , 정(鄭)나라가 주(周)나라를 칠 때에 포로가 되어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였으므로, 그 자손의 일파가 정나라에서 살 게 되었다. 그의 증조(曾祖)는 역사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고, 조부 모(牟 : 보리의 의인화)는 살림을 주천(酒泉)으로 옮겨, 이때부터 주천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 차(흰 술의 의인화)에 이르러서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 평원독우(平原督郵 : 郵(우)를 '憂로 바꾸면 '근심없이 하는 벼슬'이란 뜻이며, '청주 종사의'靑州를 '淸酒'로 바꾸면, '술마시는 것을 일삼아서 한다의 뜻이 된다. 평원도 격현에 있으므로, '평원독우'란 격상(명치 위치)에 머물러 숨이 막히는 좋지 못한 술을 의미하며, 청주는 제군에 있으므로 '청주종사'는 제하(배꼽 밑)까지 시원하게 잘 넘어가는 술을 말한다.)의 직을 역임하였고, 사농경(司農卿 : 한나라 때 구경의 하나로 미곡과 전적을 관장하던 관저) 곡(穀)씨의 딸과 결혼하여 성(聖)을 낳았다.

성(聖)은 어렸을 때부터 도량이 넓고 침착하여, 아버지의 손님이 그 아비를 보러 왔다가도 성을 유심히 보고 그를 사랑하였다(괴임을 받았다). 손님들이 말하기를 "이 아이의 도량(마음과 그릇)이 출렁출렁 넘실넘실 만경(萬頃)의 물결과 같아서, 가라 앉히더라도 더 맑아지지 않으며, 뒤흔들어도 탁해지지(흐리지) 않으니 우리는 그대와 더불어 이야기하기보다는 성(聖)과 함께 기뻐함이 좋네(즐기는 것이 낫겠소.)"

 

성이 자라서, 중산에 사는 유영(위진 시대의 죽림칠현 중의 한 사람. '주덕송(술의 덕을 찬양)'을 지음), 심양에 사는 도잠(도연명의 본명)과 벗이 되었다. 이들은 서로 말하기를,

 

"하루라도 이 친구를 만나지 못하면 심중에 물루(몸을 얽매는, 세상의 온갖 괴로움)가 생긴다(술을 좋아하여 매일 마신다). " 라고 하며, 만날 때마다 해가 저물도록 같이 놀고, 서로 헤어질 때는 항상 섭섭해하였고, 기쁨을 잊고 문득 마음에 취(醉)하고야 돌아왔다.

국가에서 조구연(糟丘椽)을 시켰으나, 미처 나아가지 못하였고, 또 나라에서 청주 종사로 불러, 공경들이 계속하여 그를 조정에 천거했다. 위에서 명하여 공거(公車)를 보내어 불러서 보고 목송(目送 : 눈짓)하여 말하기를,

"저 군이 주천(酒泉)의 국생(麴生)인가. 짐(朕)이 그대의 향기로운 이름을 들은 지 오래다."

 

이보다 앞서 태사(太史)가 임금께 아뢰기를, "지금 주기성(酒旗星)이 크게 빛을 낸다 하더니." 이렇게 아뢰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성(聖)이 이른지라, 임금이 또한 이로써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임금은 즉시 곧 주객 낭중(主客郎中)벼슬을 시키고, 이윽고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올려 예의사(禮儀使)를 겸하게 되었다.

무릇 조회(朝會)의 잔치와 종조(宗朝)의 제사, 천식(薦食), 진작(進酌)의 예(禮)에 임금의 뜻에 맞지 않음이 없는지라. 이에 임금은 그의 그릇(기국)이 듬직하다 하여 승진시켜 승정원 재상으로 있게 하고 (후설 (喉舌: 목구멍과 혀)의 직에 두고), 우례(優禮 : 융숭한 대접)로 하여 매양 들어와 출입할 적에도 교자(轎子)를 탄 채로 전(殿 : 대궐)에 오르라 명하며(술이 상에 차려져 황제의 연희에 올려짐을 은유적으로 표현), 이름을 부르지 않고 국선생(麴先生)이라 일컬었다. 임금의 마음이 불쾌함이 있어도 성(聖)이 들어와 뵈면 임금은 비로소 크게 웃으니 무릇 사랑받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원래 성은 성질이 구수하고 아량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과 친근해졌고 특히 임금과는 조금도 스스럼없이 가까워졌다. 자연 임금의 사랑을 받게 되어 항상 따라다니면서 잔치 자리에서 함께 놀았다.

성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혹(酷)과 폭과 역이다. 혹은 독한 술, 폭은 진한 술, 역은 쓴 술이다. 이들은 그 아비가 임금의 사랑을 받는 것을 믿고 방자하게 굴었다. 중서령 모영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탄핵했다. 모영은 곧 붓이다. 그 글은 이러했다.

"행신이 폐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을 천하사람들은 모두 병통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국성이 조그만 신임을 받고 조정에 쓰이고 있어 요행히 벼슬 계급이 3품(여기서는 술 중에서 3품 벼슬의 격에 올랐다는 뜻으로 쓴 것)에 올라서, 많은 도둑을 궁중으로 끌어들이고 사람들을 휘감아서 해치기를 일삼고 있사옵니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분하게 여겨, 소리치고 반대하며 머리를 앓고 가슴 아파합니다. 이자야말로 국가의 병통을 바로잡는 충신이 아니옵고, 실상 만백성에게 해독을 주는 도둑이옵니다. 더구나 성의 자식 셋은 제 아비가 폐하께 총애받는 것을 믿고, 제 마음대로 세상에 횡행하고 방자하게 굴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괴로워하고 있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이들에게 모두 사형을 내리셔서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으시옵소서."

 

이에 성의 아들 셋은 즉시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성도 죄를 받아 서인으로 폐해졌다. 한편 치이자(말가죽으로 만든 주머니, 술을 넣는 데 쓴다. 모양이 올빼미 배처럼 생긴 데서 만들어진 말)도 성과 친하게 지냈다 해서 수레에서 떨어져 자살했다.

처음에 치이자는 우스갯소리를 잘해서 임금의 사랑을 받았다. 자연 국성과 친하게 되어, 임금이 출입할 때에는 항상 수레에 실려 다녔다. 어느 날 치이자는 몸이 곤해서 누워 있었다. 성은 희롱하여 물었다.

"자네는 배는 크지만 속이 텅 비었으니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 치이자가 대답했다.

"자네들 수백 명은 넉넉히 용납할 수가 있지."

이들은 이렇게 항상 서로 우스갯소리를 하며 지냈다.

성의 이미 벼슬을 그만두자 제 고을과 격 마을 사이에는 도둑들이 떼지어 일어났다(배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 제는 배꼽, 격은 가슴을 뜻한다. 이에 임금은 이 고을의 도둑들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적임자가 쉽게 물색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성을 기용해서 원수로 삼아 토벌하도록 했다. 성은 부하 군사를 몹시 엄하게 통솔했고, 또 모든 고생을 군사들과 같이했다(동고동락). 수성(근심을 말함)에 물을 대어 한 번 싸움에 이를 함락시키고 나서 거기에 장락판(장락이란 길이 즐거워한다는 뜻)을 쌓고 회군하였다. 임금은 그 공로로 성을 상동후에 봉했다.

"신은 본래 가난한 집 자식이옵니다. 어려서는 몸이 빈천해서 이곳 저곳으로 남에게 팔려다니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폐하를 뵙게 되자, 폐하께서는 마음을 놓으시고 신을 받아들이셔서 할 수 없는 몸을 건져 주시고 강호의 모든 사람들과 같이 용납해 주셨습니다. 하오나 신은 일을 크게 하시는데 더함이 없었고, 국가의 체면을 조금도 더 빛나게 하지 못했습니다(자신의 행동에 대한 겸손한 표현). 저번에 제 몸을 삼가지 못한 탓으로 시골로 물러나 편안히 있었사온데, 비록 엷은 이슬은 거의 다 말랐사오나 그래도 요행히 남은 이슬 방울(자신의 사용 가치)이 있어, 감히 해와 달이 밝은 것을 기뻐하면서 다시금 찌꺼기와 티를 열어 젖힐 수가 있었나이다. 또한 물이 그릇에 차면 엎어진다는 것은 모든 물건의 올바른 이치옵니다(뒤의 '임금의 사랑이 극도에 달하자 마침내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화가 그 아들에게까지 미쳤다'와 관련이 있다). 이제 신은 몸이 마르고 소변이 통하지 않는 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사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명령을 내리시와 신으로 하여금 물러가 여생을 보내게 해주옵소서."

그러나 임금은 이를 승낙하지 않고 중사를 보내어 송계, 창포 등의 약을 가지고 그 집에 가서 병을 돌봐주게 했다. 성은 여러 번 글을 올려 이를 사양했다. 임금은 부득이 이를 허락하여 마침내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그는 천수를 다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우는 현(賢)이다. 현은 즉 탁주다. 그는 벼슬이 이천 석에 올랐다. 아들이 넷인데 익(색주), 두(중양주), 앙(막걸리), 람(과주)이다. 익은 색주, 두는 중양주, 양은 막걸리, 남은 과주다. 이들은 도화즙을 마셔 신선이 되는 법을 배웠다. 또 성의 조카들에 주미(골만지), 만(골만지), 염(신술)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적을 평씨에게 소속시켰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국씨는 원래 대대로 내려오면서 농가 사람들이었다. 성이 유독 넉넉한 덕이 있고 맑은 재주가 있어서 당시 임금의 심복이 되어 국가의 정사에까지 참여하고,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주어, 태평스러운 푸짐한 공을 이루었으니 장한 일이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이 극도에 달하자 마침내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화가 그 아들에게까지 미쳤다. 하지만 이런 일은 실상 그에게는 유감이 될 것이 없다 하겠다. 그는 만절(늦게까지 지키는 절개)이 넉넉한 것을 알고 자기 스스로 물러나 천수를 다하였다. "주역"에 '기미를 보아서 일을 해나간다.(見機而作 - 견기이작 : 사태나 현상을 미리 짐작하여 파악한 뒤에 행동과 실천을 수행해 나간다.)'고 한 말이 있는데 성이야말로 거의 여기에 가깝다 하겠다. (사기열전의 형식을 본뜸)

국성 : 술을 의인화하여 높인 말. 술을 누룩으로 빚기 때문에 '국성'이라고 함.

관향 : 조상이 태어난 본관

주천 :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주나라에 있던 땅 이름. 이곳에서 나는 물로 술을 빚으면 술맛이 좋았다고 함.

서막 : 중국 진나라 사람. '태평광기' 서막설화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춘추곡량전'에 주를 달았다.

중조 : 가운데의 조상

모 : 보리를 의인화한 말

차 : 백주를 의인화한 말

출사 : 벼슬길에 오름

사농경 : 한나라 때 구경의 하나로, 미곡과 적전(임금의 친경전)을 맡아보던 관아

괴임 : 사랑을 받음

이랑 : 논 밭의 한 두둑과 한 고랑을 합하여 이르는 말

유영 : 진나라 때 시인. 죽림칠현의 한 사람. '주덕송'을 지음

심양 : 지금의 강서성 구강의 땅. 도연명의 고향

도잠 : 도연명, 중국 동진의 시인으로 술을 좋아했으며, '귀거래사'를 지음

물루 : 몸을 얽매는 듯한 세상의 온갖 괴로움

조구연 : 조구라는 아전. 원래는 술지게미가 처마까지 닿았다는 뜻

평원독우와 청주종사 : 평원독우(平原督郵 : '郵(우)'를 '憂(우)'로 바꾸면 '근심없이 하는 벼슬'이란 뜻이며, '청주 종사의 '靑州'를 '淸酒'로 바꾸면, '술마시는 것을 일삼아서 한다의 뜻이 된다. 평원도 격현에 있으므로, '평원독우'란 격상(명치 위치)에 머물러 숨이 막히는 좋지 못한 술을 의미하며, 청주는 제군에 있으므로 '청주종사'는 제하(배꼽 밑)까지 시원하게 잘 넘어가는 술을 말한다. 옛날 환온에 술을 식별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맛이 좋은 술은 청주 종사라 하고, 나쁜 것은 평원독우라 지칭하였다.

청주종사 : 질이 좋은 술. 원래는 무반 잡직의 벼슬.

공거 : 병거. 전쟁에 쓰는 수레

목송 : 작별한 사람이 멀리 갈 때까지 바라보며 보냄

연좌 : 남의 범죄에 관련됨.

야인 : 벼슬하지 않는 사람

짐 : 임금이 자신을 부르는 말

국자좨주 : 나라의 제사에 올리는 술. 여기서는 벼슬 이름('제'는 이 벼슬 이름에 쓰일 때에는 '좨'로 읽음)

예의사 : 예의 범절을 관장하는 관리

우레 : 두터운 대우

입시 : 대궐 안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는 일

전상 : 궁전, 전각의 자리 위

천식 : 천신할 때 올리는 음식. 철을 따라 새로 난 과일이나 농산물을 신에게 바치는 일을 천신이라 함.

진작 : 임금께 나아가 술잔을 올림

기국 : 사람의 도량과 재간

후설 : 목구멍과 혀. 여기서는 벼슬

교자 : 고관들이 타는 가마

기미를 보아서 일을 해 나간다 : 사태나 현상을 파악한 뒤에 행동과 실천을 수행해 나간다.

이해와 감상

 

고려 때의 학자이면서 문신인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술을 의인화한 국성을 위국충절의 대표적 인물로 등장시켜 분수를 모르는 인간성의 비정을 풍자한 가전체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자는 주인공인 국성을 신하의 입장으로 설정하여, 유생의 삶이란 신하로서 군왕을 모시고 치국의 이상을 바르게 실현하는데 있다는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국성은 일시적인 시련을 견딜 줄 아는 덕과 충성심이 지극한 긍정적인 인물로 서술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술을 소재로 하면서도 아첨을 일삼는 정계나 방탕한 군주를 풍자한 '국순전'과는 대조를 이루는 작품이다.

이해와 감상2

 

고려 후기에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가전 작품. 술을 의인화하여 지은 것이다. 작자의 문집 ≪동국이상국집≫ 전집(前集) 권20과≪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주인공인 국성(麴聖 : 맑은 술)은 주천(酒泉) 고을 사람으로 아버지는 차(釗)이고 어머니는 곡씨(穀氏)의 딸이다. 서막(徐邈)은 어린 국성을 사랑하여 국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국성은 어려서부터 이미 깊은 국량(局量)이 있었다.

 

손님이 국성의 아버지를 찾아왔다가 국성을 눈여겨보고 “이 아이의 심기(心器)가 만경(萬頃)의 물과 같아서 맑게 해도 더 맑지 않고, 뒤흔들어도 흐려지지 않는다”고 칭찬하였다. 국성은 자라서는 유령(劉伶)·도잠(陶潛)과 더불어 친구가 되었다., 임금도 국성의 향기로운 이름을 듣고 그를 총애하였다. 그리하여 국성은 임금과 날로 친근하여 거슬림이 없었고, 잔치에도 함부로 노닐었다.

국성의 아들 삼형제 혹(酷 : 텁텁한 술맛의 형용)·포(誌 : 一宿酒·鷄鳴酒)·역(耗 : 쓰고 진한 술)은 아버지의 총애를 믿고 방자히 굴다가 모영(毛穎 : 붓을 의인화한 .)의 탄핵을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아들들은 자살했고, 국성은 탈직되어 서인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국성은 뒤에 다시 기용되어 난리를 평정함에 공을 세웠다. 그 뒤 스스로 분수를 알아 물러나, 임금의 허락을 받아 고향에 돌아가 폭병(暴病)으로 죽었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국씨는 대대로 농가출신이다. 국성이 순후한 덕과 맑은 재주로 임금의 심복이 되어 나라 정사를 짐작하고, 임금의 마음을 윤택하게 함에 있어 거의 태평한 경지의 공을 이루었으니 장하도다!”고 하였다.

이규보는 이 작품을 통해 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덕과 패가망신의 인과관계를 군신 사이의 관계로 옮겨놓고, 그 성패를 비유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주인공 국성을 신하의 입장으로 설정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러한 설정은 유생의 삶이란 근본적으로 신하로서 군왕을 보필하여 치국의 이상을 바르게 실현하는 데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라 하겠다.

신하는 군왕으로부터 총애를 받게 되면 자칫 방자하여 신하의 도리를 잃게 된다. 그러면 신하는 한때 유위유능(有爲有能)한 존재에서 국가나 민생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전락하기 쉽다.

 

마침내는 자신의 몰락까지 자초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국선생전≫은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굳게 지켜나감으로써 어진 신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때를 보아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참고문헌≫ 東國李相國集, 韓國假傳文學選(金昌龍, 正音社, 1985), 韓國擬人文學의 史的系譜와 性格(金光淳, 語文學 16·17, 1967), 麴醇傳과 麴先生傳(金鉉龍, 국어국문학 65·66, 197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국선생전(麴先生傳)의 줄거리

 

고려 고종(高宗) 때 지헌(止軒)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지은 가전체설화(假傳體說話). 이 작품의 등장인물과 지명 등은 모두 술과 연관된 한자(漢字)를 골랐으며, 누룩[麴] 등을 의인화하여 당시의 문란한 정치·사회상을 비판하였다. 《동문선(東文選)》 제100권에 실려 있는 설화이다. 국성(麴聖)의 할아버지 모(牟:보리)는 주천(酒泉)에서 살았는데, 아들 차(:흰 술)는 곡씨(穀氏)의 딸과 혼인하여 성(聖)을 낳았다. 성의 벼슬이 높아지고 임금의 총애를 받자 사람들은 그를 국선생이라 불렀다.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힘을 믿고 방자하여 비난을 받았으며, 이로 인하여 국성은 서민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다시 기용되어 공을 세우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국순전(麴醇傳)'과 '국선생전(麴先生傳)'과의 관계

1. 영향 관계 :

관련 인물과 지명, 서술 방식 등에 있어 많은 유사성이 발견된다. 이규보의 '국선생전'은 이보다 앞서 나온 임춘의 '국순전'에서 제목, 관련 인물, 지명, 서술 방식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2. 주제상의 차이점 :

'국순전이' 요사하고 아부하는 정객들을 꾸짖고 방탕한 군주(君主)를 풍자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면, '국선생전'은 미천한 몸으로 성실히 행동했기 때문에 관직에 등용되었고, 총애가 지나쳐서 잘못을 저질렀지만 물러난 후 반성하고 근신할 줄 아는 인간상을 그렸다. 즉, 국난을 당해서 백의종군(白衣從軍)까지 하는 위국 충절의 대표적 인간상을 등장시켜 사회적 교훈을 강조하였다.

3. 본을 삼은 작품 :

송나라때의 <태평광기(太平廣記)>의 '서막(徐邈)'설화에서 많은 본을 받았으며, '청화선생전(淸和先生傳)'에서 직접 본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4. 술을 소재로 한 작품들

조선조의 '수성지', '천군연의', '천군본기' 등도 술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계승되었다.

가전체의 문학사적 의의

 

가전체는 사물을 의인화하여 일대기로 꾸민 것이다. 따라서 작품 속의 주인공은 어떤 사물이 의인화된 것이며, 그 주인공의 행동이나 처지는 그 사물과 관련된 고사나 역사적 사실을 차용하여 그려진 것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이러한 가전체라는 양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고려 말 신흥 사대부들에 의해서이다.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중요시했던 이들의 의식이 가전체라는 양식을 창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양식은 아직 상당한 정도의 교술성을 지니고 있지만 점차 허구적인 서사 문학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에 있었다는 점이 인정된다. 이러한 문학사적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춘을 비롯하여 이규보, 이곡, 이첨 등이 창작한 가전체 작품들을 두루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동문선(東文選)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의 시문(詩文)을 모은 책. 154권 45책. 서거정(徐居正) 등의 편저. 고활자본(古活字本)과 목판본이 있다. 내용은 목록 3권, 정편(正篇) 130권, 속편(續編) 21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편은 1478년(성종 9)에 성종이 서거정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것이고, 속편은 1518년(중종 13)에 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이 편찬한 것을 1713년(숙종 39)에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 등이 개편한 것이다. 정편은 신라 때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시문을 모은 것이고, 속편은 그 이후부터 숙종 때까지의 시문을 수집 정리한 것이다. 1914년에는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출판하였으나 속편이 누락되어 있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68∼70년 12책으로 번역,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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