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구운몽 해설 및 줄거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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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九雲夢)

 

[해제]

 

<구운몽>의 이해를 위하여 작가 김만중(金萬重)의 생애와 인간, 그리고 문학과 사상 등을 언급하고 나서, <구운몽>의 대체적인 줄거리와 사상적 배경, 원전비평과 이본상의 문제, 비교문학적인 문제, 그리고 본서에 사용된 텍스트의 문제를 차례로 기술하기로 하겠다.

 

김만중(김만중, 16371692)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로 본관은 광산(光山), 아명은 선생(船生),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이다.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이고, 충렬공 익겸의 유복자이며,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만기의 아우로서, 숙종대왕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그의 어머니 해평 윤씨는 인조의 장인인 해남부원군 윤두수의 4대손이고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방()의 증손녀이며, 이조참판 지()의 따님이다.

김만중은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 교육에 힘입어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 익겸이 일찍이 정축호란(丁丑胡亂, 1637) , 강화도에서 순절하였으므로 형 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여,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유달랐던 것이다. 실은 그의 대작 <구운몽>도 귀양지에서 어머니의 외로움을 덜기 위해 지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는 만년에 어머니를 술회한 글에서, 어린 시절 가난하고 외로운 환경 속에서도 그의 어머니가 많은 책을 이웃의 홍문관 서리를 통해 빌려 와 손수 등사하여 읽게 하였고, 때로는 베틀에 짜고 있는 피륙을 팔아 독서물을 충당하였을 뿐 아니라, 소학, 사략, 당시(唐詩) 등을 손수 가르쳤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어머니 윤씨가 만기, 만중 형제의 교육을 위해 얼마나 고심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김만중은 위와 같이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16세에 진사에 장원급제하였으며, 그 뒤 1655년에 정시문과에도 급제하여 관료로 발을 내딛기 시작, 1666년에 정언(正言), 1667년에 지평(持平), 수찬(修撰)을 역임하였으며, 1668년에는 경서 교정언, 교리가 되었다. 아울러 1671년에는 암행어사로 경기 및 삼남 지방의 진정득실을 조사하기 위해 부교리가 되는 등 1674년까지 헌납, 부수찬, 교리 등을 지냈다. 그러다가 1675년 동부승지로 있을 때, 인선왕후의 상복 문제로 서인(西人)이 패배하자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1688년에 남인인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의 죄로 연루되어 추국(推鞫)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이 선천 유배지에서 어머니 윤씨를 위해 <구운몽>을 지었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1년이 지난 168811월에 드디어 선천 유배지에서 풀려났으나, 3개월 뒤인 16892월 이른바 을사환국(乙巳換局)을 계기로 다시 남해로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유배가 계속된 것은 숙종의 계비(繼妃)인 인현왕후 민씨의 여화(餘禍) 때문이었다. 그가 남해 유배지에 있는 동안 그의 어머니 윤씨는 그의 안위를 걱정한 끝에 세상을 떴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식에도 참석치 못하고 1692년 남해 유배지에서 56세를 일기로 외로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만중의 사상과 문학은 조선조에 있어서 이전의 여느 문인과도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 그의 사상은 주자학적 유교 사상권에 있으면서도 불교와 도교의 세계를 자유로이 드나들었을 뿐 아니라, 산수, 음률, 천문, 지리 등 구류(九流)의 여러 방기(方技)에까지 능통한, 말하자면 다분히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하였다. 그는 문학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기었다. ‘조선 사람은 조선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소위 국민문학론을 제창한 바 있고, 아울러 통속소설의 문학적 효용을 깊이 인식하여 직접 통속소설을 많이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구운몽><남정기>뿐이다.

 

이제 <구운몽>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일찍이 이재가 <구운몽>의 주지(主旨)인생의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라고 파악한 바와 같이, <구운몽>의 주제는 역시 대승불교의 중심인 <금강경>의 공관(空觀)에 있다. 공관은 표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헛것으로 부정하는 데 있는 것 같지만, 이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역설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구운몽>은 결국 <금강경>의 주제를 소설화한 대작이라고 볼 수가 있다. 문학 내적으로는 인도, 중국 등에서 이루어진 환몽구조(幻夢構造)의 이야기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결과가 <구운몽>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구운몽>은 진작부터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체코어 등으로 번역되어 서양인들에게까지 소개되었다.

<구운몽>의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중국 당나라 때 남악 형산 연화봉에서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전하러 온 육관대사가 법당을 짓고 불법을 베풀었는데, 동정호의 용왕도 이에 참석한다. 육관대사는 제자인 성 진을 용왕에게 사례하러 보낸다. 이때 형산의 선녀인 위부인도 팔선녀를 육관대사에게 보내 모처럼의 법회에 참석하지 못함을 사과한다. 용왕의 후대(厚待)로 술에 취하여 돌아오던 성진은 마침 돌아가던 팔선녀와 석교에서 마주치자 잠시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희롱을 꾀한다. 선방에 돌아온 성진은 팔선녀의 미모에 도취되어 불문(佛門)의 적막함에 회의를 느끼고, 대신 유가(儒家)의 입신양명을 꿈꾸다가 육관대사에 의해 팔선녀와 함께 지옥으로 추방된다.

 

성진은 회남 수주현에 사는 양처사의 아들 양소유로, 팔 선녀는 각기 진채봉계섬월적경홍정경패가춘운이소화심요연백능파로 태어난다. 양처사는 곧 신선이 되려고 집을 떠나고, 아버지 없이 자란 양소유는 15세에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던 중, 화음현에 이르러 진어사의 딸 진채봉을 만나 서로 마음이 맞아 자기들끼리 혼약한다. 그때 구사량이 난을 일으켜 양소유는 남전산으로 피난하였는데, 그곳에서 도사를 만나 음률을 배운다. 한편 진채봉은 아버지가 죽은 뒤 관원에게 잡혀 서울로 끌려간다. 이듬해 다시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오던 양소유는 낙양 천진교의 시회(詩會)에 참석하였다가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는다. 서울에 당도한 양소유는 어머니의 친척인 두련사의 주선하에 거문고를 탄다는 구실로 여관(女冠)으로 가장하여 정숙하기가 이를 데 없는 정사도의 딸 정경패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사도의 사위로 정해지는데, 정경패는 양소유가 자신을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준 모욕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비 가춘운으로 하여금 선녀처럼 꾸며 양소유를 유혹하게 하여 결국 두 사람은 인연을 맺는다.

 

이때 하북의 세 왕이 역모하여 양소유가 절도사로 나가 이들을 다스리고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을 만나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는데, 이튿날 다시 보니 하북의 명기 적경홍이었다. 두 여자와 후일을 기약하고 상경한 양소유는 예부상서가 된다. 진채봉은 서울로 잡혀온 뒤 궁녀가 되었는데, 어느날 황제가 베푼 환선시(紈扇詩)에 차운(次韻)하여 애를 태우게 된다. 까닭을 물어 진채봉과 양소유의 관계를 알게 된 황제는 이를 용서하고, 황제의 누이인 난양공주는 후에 진채봉과 형제의 의를 맺는다. 양소유는 어느날 밤 난양공주의 퉁소 소리에 화답한 것이 인연이 되어 부마로 간택되지만, 양소유는 정경패와의 혼약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다가 투옥된다.

 

그때 토번왕(吐蕃王)이 침범해 오자 양소유는 대원수가 되어 출전한다. 진중(陣中)에서 토번왕이 보낸 여자 검객 심요연과 인연을 맺게 되고, 심요연은 자신의 사부에게 돌아가면서 후일을 기약한다. 그동안 난양공주는 양소유와의 혼약이 물리침을 당하여 실심에빠진 정경패를 비밀리에 만나보고, 그 인물에 감복, 의형제가 되어 정경패를 제1공주인 영양공주로 삼는다.

 

토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양소유는 위국공에 봉하여지고, 영양공주, 난양공주와 혼인을 하며, 진궁녀와 다시 만나는 가운데 그녀가 진채봉임을 확인하게 된다. 양소유는 고향으로 돌아가 노모를 서울로 모시고 오다가 낙양에 들러 계섬월과 적경홍을 데리고 오니 심요연과 백능파도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양소유는 26첩을 거느리고 일가 화락한 가운데 부귀와 영화를 마음껏 누린다. 어느날 생일을 맞아 종남산에 올라가 여덟 미인과 가무를 즐기던 양소유는 역대 영웅들의 황폐한 무덤을 보고 문득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비회에 잠긴다. 이에 인생의 무상과 허무를 논하며 장차 불도를 닦아 영생을 구하고자 할 때, 호승(胡僧 : 육관대사)이 찾아와 문답하는 가운데 긴 꿈에서 비로소 깨어나 육관대사의 앞에 있음을 알게 된다. 꿈의 양소유에서 본래의 성진으로 돌아오자, 성진은 이전의 죄를 뉘우치고 육관대사의 후계자가 되어 열심히 불도를 닦아 팔선녀와 함께 극락세계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구운몽>은 대승불교의 중심 경전인 [금강경]이 바탕된 공관(空觀)을 주제로 하면서, 내용과 형식상의 조화의 극을 이루어 한국 서사 문학 사상 인도중국한국일본 등 범동양을 휘감을 대작을 매듭 지었던 것이다. 더욱이 근자에 <구운몽>이 중국으로 역수출되어 청대에 <구운루(九雲樓)>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구운몽>은 환몽구조(Fantasy Structure)의 소설로서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대작임이 한층 더 극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이 문제는 한중문학의 비교에 있어서 '중국에서 한국으로'라는 식의 단향(單向)의 관계가 아니라 쌍향(雙向)의 관계에 눈을 돌려야 할 필요성을 밝혀준 것으로, <구운몽>이 지닌 의의를 극명히 보여준 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구운몽>의 원전비평적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종래 <구운몽>의 원전이 국문소설로 인식되고 있지만, 현재는 노존본(老尊本) 두 종이 발견됨으로써 원전이 한문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더욱 뚜렷이 밝혀지게 되었다. , 한문본 계열이 노존본에서 을사본(乙巳本)으로, 을사본에서 다시 계해본(癸亥本)으로 전승되어 온 것 같이 국문본도 노존본 계통의 국역본, 을사본 계통의 국역본, 계해본 계통의 국역본 등으로 이루어져 왔다(정규복의 [구운몽 원전의 연구] 참고). 근자 <구운몽> 노존본의 한 이본(강전섭 교수 소장본)이 출현함으로써 노존본이 이분화됨에 따라 강전섭본을 B본이라 하고, 종래 필자에 의해 재구된 재구본을 A본 이라 할 경우, B본이 A본의 텍스트가 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던 것이다. 결국 B본이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니면서도 <구운몽>의 최고본이 되는 셈이다(정규복, [구운몽 노존본의 이분화], [동방학지] 59, 연세대 국학연구원, 1988, 참조.

 

, <구운몽> 중요 이본의 전승 과정을 도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노존 B-------> 노존 A-------> 을사본 -------> 계해본

(1725년 이전) (1725년 이전) (1725) (1803)

 

노존 B본은 본서 주석본의 텍스트가 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뒤에서 언급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구운몽>의 원전이 한문으로 된 노존본임을 재차 밝혀두는 바이다.

 

<구운몽>의 근원 사상은 유교불교도교 등 소위 삼교사상의 대화합을 이루는 가운데 대숭불교의 중심 경전인 <금강경>의 바탕인 공관(空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금강경>의 공관이 갖는 요체는 '무릇 상()은 모두 허망하지만, 이와 대칭되는 불법(佛法)도 역시 허망하므로 상과 불법, 이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끊고 머무는 데 없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런 <금강경>의 공관이 <구운뭉>의 사상을 기본적으로 이루면서, <구운몽>에서 현실의 주인공인 성진과 꿈의 주인공인 양소유, ()과 몽(), 또는 장주(莊周)와 호접(蝴蝶) 등 현실과 이상의 이분법적 경계를 뛰어넘은 대오(大悟)의 경지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렇듯 공관의 실제적 풀이가 이루어지게 하였다는 점에서 <구운몽>[금강경]을 허구화한 소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구문몽>의 비교문학적 문제는 <구운몽>의 골격 구조인 환몽구조(幻夢構造)에서 접근할 수 있다. 환몽구조는 주인공이 이룰 수 없는 입신양명과 부귀공명을 간절히 원하다가 그것이 극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 원망이 꿈의 형상으로 드러나고,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그 입신양명과 부귀공명의 허망함을 깨닫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현실 -> -> 현실'이라는 골격을 유지한다. <구운몽>이 지닌 이런 환몽구조의 원천은 인도의 불경 <잡보장경(雜寶藏經)><사라나비구>에 있고, 이것이 중국으로 전래되어 당대(唐代)<침중기(枕中記)>,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 <앵도청의(櫻桃靑衣)> 등 전기소설로 수렴되었으며, 이것들이 한국으로 전래되어 조선시대에 <구운몽>이라는 대작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한편 <구운몽>은 일본으로 전해져 명치시대의 <무겐:夢幻>으로 서투르게 번안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환몽구조의 이야기를 통하여 동북아시아 문학의 흐름이 인도에서 시발되어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한국에서 다시 일본으로 이어져 온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구운몽>이 환몽구조의 이야기로서 동북아시아 문학을 휘감는 엄청난 대작의 모형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구운몽>이 지닌 비교문학적 의의인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최근 더욱 주목을 끌게 한 것은 중국소설의 영향으로 성립된 I구운몽b이 다시 중국으로 역수출되어 대장편소설인 청대(淸代)<구운루(九雲樓)>로 이루어졌다는 뚜렷한 문헌이 출현하였다는 점이다(정규복, 구운몽의 동아시아에서의 위상,모산학보(慕山學報)16, 대구모산학회, 1994 참조). 이는 앞서 말했듯이, 종래 한중문학비교 연구의 큰 흐름이었던, 한국이 일방적으로 중국문화를 받아만 왔다는 소위 단향성(單向性)에서 벗어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소위 쌍향성(雙向性)이 성립될 수 있는 가능성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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