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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九雲夢) 해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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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九雲夢)

요점 정리

작자 : 김만중(金萬重 ; 1637∼1692) 호는 서포(西浦)

연대 : 조선 숙종 15년(1689) 남해 유배시(당년 53세 작)

갈래 : 국문소설, 한문소설, 염정(艶情)소설, 전기(傳奇)소설, 몽자류(夢字類) 소설, 양반소설, 적강(謫降)소설, 영웅(英雄)소설, 편력(遍歷)소설

배경 : (시간) 당나라 때, (공간) 중국 남악 형산의 연화봉과 중국 일대(꿈)

근원설화 : 조신설화

성격 : 귀족적 성격으로 이 소설에서는 여자들 스스로 일부다처주의를 자인하는 언사가 많다는 점이 많다. 이는 당시 유교 사회의 귀족이나 양반들의 생활이념의 산물이다.

문체 : 산문체 역어체. 문어체

시점 : 전지적 작가

주제 : 주제 : 인생무상(人生無常), 인간적 욕망의 절제

아류작 : 옥루몽(玉樓夢), 옥련몽(玉蓮夢)

의의 : 양반 소설의 대표작. 夢字類 소설의 효시, 몽환구조의 비범성

표현상의 특징 : 구성은 복잡하나, 평면적인 구성법

전기성과 우연성의 남발, 인물이나 장면 묘사 부분은 비유를 사용, 한문을 번역한 듯한 문투가 엿보이고,현실인 선계와 꿈인 인간계라는 잊우 공간에다 다시 꿈 속에서 현실 세계와 선계 또는 용왕계라는 복합구조를 가지고 있다.

판본 : '한문본, 국문본이 있음.

창작 동기

개인적 동기 :

노모(老母)를 위로하기 위해 창작.(김만중의 어머니는 청춘과부로서 가난한 살림살이를 이끌어 나가면서도 오직 두자 식에 마음을 붙여 정성껏 길러 여생을 즐기려 했는데, 그 장자 만기를 잃어버리고 또 만중조차 유배지로 자주 귀향가게 되어 허무한 삶을 한탄하며 살았다. 김만중은 그 같은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 즐겁게 하는 글을 쓰고 싶었을 것이고, 이 작품 역시 작가 자신의 생명의 원천인 그의 어머니를 향하여 내면화된 결과라 하겠다. 즉 이 작품은 어머니를 위해서 쓰면서 어머님께 지금 현실의 고통은 한 순간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고 싶었고, 한편으로 삶의 유한성과 허망함을 극복하는 영생의 길을 갈망하여 자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

문학적 동기 :

한국인은 한국어(韓國語)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민족자주문학론'을 내세운 그는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창작에 임함

사상 : 유·불·선 사상이 혼합되었으나 불교사상이 주가 되고, 김만중이 바라던 이상의 세계를 묘사

1) 불교적인 부분: 핵심적 주제를 이루는 사상으로 유복자로 태어나서 한 번도 부친의 얼굴조차 못한 것을 전생의 죄악이라고 보는 데는 인과응보사상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서의 구절 "보살 대도를 얻어 모두 극락세계로 갔더라" 라는 것에서 불교적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유교적인 부분: 입신양명, 부귀공명 (당시 양반 사회의 이상적 인생관)은 자기를 길러 준 어머니의 은혜와 스스로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있는 데는 유교적인 효사상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일부다처제의 모순을 안고 있으며, 조선조 귀족 사회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3) 도교적인 부분: 작품의 비현실적 내용을 이루는 신선 사상은 부귀 영화 끝의 허무감을 그린 것은 도교적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구성 : 이원적 환몽 구조를 지닌 일대기 형식,

곧 액자소설(환몽세계 부분) 현실세계 → 환몽세계 → 현실복귀

'구운몽'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조신 설화와 그 구조를 같이 하고 있다. 성진이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해서 회의를 품고 형이하학적 세계로 내려가 온갖 욕망을 성취하였으나, 그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고 형이상학적 세계로 복귀하는 꿈의 구조로 되어 있다. 즉, 현실과 꿈의 세계를 이중(二重)으로 그리고 있는 이 구조는 결국 인생의 무상함, 삶의 덧없음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작품 구조상 꿈의 세계로 되어 있는 양소유의 일생은 오히려 현실적이고, 현실 세계로 되어 있는 선계(仙界)는 오히려 신비로운 꿈의 세계이다.

현실 세계(선계)

 

성진과 8선녀

천상 세계 수도자로서의 의지(불교적). 8선녀에 미혹되어 불도 수련에 회의함

파계(天上)

 

환몽 세계(인간계)

 

양소유와 8부인

지상 세계 영웅으로서의 생애(유교적), 세속적 욕망의 성취 단계. 입신 양명, 일부다처의 향락적 생활

환생(地上)

 

현실 세계로 복귀(형이상학적 세계)

 

미혹과 환몽을 거쳐 대각(大覺)의 경지로 이룸

각성(天上)

① 1 단계 :

육관 대사가 제자 5, 6백 명을 거느리고 서역천축국으로부터 형산(衡山)의 연화봉(蓮華 峰)에 수도할 즈음에 남악(南岳) 위부인(魏夫人)이 상제의 명에 따라 선동 옥녀를 거느리고 머문다. 그 때 수부에 갔다가 산으로 돌아오던 육관 대사의 수제자와 위부인의 명을 받고 육관 대사에게 문안드리고 돌아가던 팔 선녀가 만나게 된다. 그 후 여덟 개의 명주로서 인연을 맺고 산문으로 돌아온 성진이 팔 선녀와 인간 세계를 동경한 때문에 육관 대사의 노여움을 사서 중국 회남도(淮南道) 수주현(秀洲縣)의 양씨집에 환생하기까지의 과정.

② 2 단계 :

속세에 환생한 성진, 즉 양 소윤는 과거에 응시하려고 가는 길목에서 규수 진채봉을 만나 혼인하려 했으나 구사량의 수해로 진소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노모에게 이를 얘기했더니 도인 두연사에게 혼처를 부탁한다. 소유는 그곳에 찾아가서 제일부인 정경패와 그의 몸종 가춘운을 맞는다. 그러니까 팔 선녀 중 네 선녀가 인간으로서 양소유를 만나기까지의 행동 단계.

③ 3 단계 :

양소유가 사신, 원수로 활약하면서 팔 선녀를 모두 만나게 되기까지의 행동 단계.

④ 4 단계 :

양소유가 승상이 되어 팔 선녀 중 여섯 명은 첩이 되고 두 공주는 부인이 되어 모두 궁중에 모여 단란한 세월을 보내는 시기.

⑤ 5 단계 :

인간 양소유가 속세에서 불도로 소생하여 팔 선녀와 더불어 다시 극락 세계로 귀의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데까지. 대부분의 우리 나라 고대소설이 한결같이 그렇듯이 "구운몽"도 중국을 무대로 했다. 하지만 "구운몽"의 세계는 당나라처럼 광활한 무대가 아니며 그 많은 등장 인물들의 활동을 자유자재로 표현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그 무대가 선계와 인간 세계 등 두 세계에 걸쳐 있어서 더욱 흥미롭다. 흡사 단테의 "신곡"처럼 이차원의 세계를 일차원의 세계로 구성시키고 있는 구성의 묘를 거두고 있는 점은 참으로 흥미롭다. 언뜻 보면 이율배반적인 것 같으면서도 수긍되는 점이 많고, 산만한 듯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의 작가적 역량을 과시하는 점이라 하겠다.

인물 : '구운몽'의 '구(九)'는 성진과 팔선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간세상의 인물들은 이 아홉 사람의 후신(後身)들이다.

양소유(楊少游) : 성진의 후신. 양처사와 유씨 부인의 아들. 성진은 전생의 이름임. 성진은 양소유의 전신으로 성진은 육관 대사의 제자로서 결국 크게 깨달아 불도를 이루었다. 대승 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하나의 부처가 된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크게 깨달을 수 있는 이상적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꿈에 들어 새 삶으로 태어난 이래 그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이상적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당연히 세간에서 최상의 부귀 공명을 누리면서 오직 사랑의 복종, 신망과 존경만을 받았다. 그에게는 악의에 찬 저항과 실질적인 가해(加害)가 없으므로 그는 늘 즐겁고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와 백성, 가족과 그 아래의 모든 중생들에게 그의 전부를 자비로 베풀었으므로 다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인물이 아니라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존재다.

② 정경패(鄭瓊貝) : 정사도의 딸. 양소유의 제1부인. (左夫人, 正夫人)

③ 이소화(李簫和) : 황제의 여동생. 난양 공주. 양소유의 제2부인.(右夫人)

④ 진채봉(秦彩鳳) : 진어사의 딸. 양소유의 1첩.(淑人)

⑤ 가춘운(賈春雲) : 정경패의 몸종. 양소유의 2첩.

⑥ 계섬월(桂蟾月) : 낙양의 명기. 양소유의 3첩.

⑦ 적경홍(狄驚鴻) : 낙양의 명기. 양소유의 4첩.

⑧ 심요연(沈 煙) : 토번의 자객. 양소유의 5첩.

⑨ 백능파(白凌波) : 동정 용왕의 막내딸. 양소유의 6첩.

이 작품 가운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등장 인물들은 55명이나 된다. 이처럼 많은 등장 인물의 배치가 잘 되어 있고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제대로 부각되고 있다. 즉 인물의 특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물론 인물 묘사에 있어서 보다 고차원적인 표현 기교인 간접적 수법을 쓰지 못하고 인물의 외형 위주로 특별한 직접적인 방법을 썼다는 점과 '문장은 이 백같고...', '칼 쓰는 법이 귀신 같아서...', 등 매너리즘에 젖은 표현이 없지는 않으나 여타의 고대 소설에 견준다면 표현 기교 역시 뛰어나다.

 

주제와 사상적 배경

인간의 부귀공명(富貴功名)이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 즉 이는 불교적인 '제행무상관(諸行無常觀)'에서 온 것이므로 이 소설은 또한 인생의 무상함을 독자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구운몽"은 불교 사상을 중심으로 한 불교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소설의 주요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은 불교 사상만이 아니라 유, 불, 선(儒佛仙)사상의 융합 상태를 이루고 있다. 그가 유복자로 태어나서 한 번도 부친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것을 전생의 적악이라고 보는 데는 불교적인 인과응보 사상이 깃들어 있고, 자기를 길러 준 어머니의 은혜와 스스로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고 후회하고 있는 데는 유교적인 효 사상이 있으며 영화 끝의 허무를 그린 것은 도교 사상의 영향이라 하겠다. 유가적인 부귀영화는 사실상 김만중에 있어서는 자신의 이상이었고, 선망의 적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욕망이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이상의 삶을 갈망한 끝에 한바탕 꿈을 꾸어 본 것이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 보니 그것은 분명히 꿈이었고 따라서 허무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이 처해 있던 환경과 현실이란 확실히 그 꿈과는 같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그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고, 스스로의 처지는 더욱 허망함을 절감했던 것이다. 이에 몸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그는 종교심을 발휘하여 평소에 잘 이해되고 있던 불교에라도 귀의해 볼까 하는 심정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인간 생명의 근원은 과연 무엇일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는 이상의 낙원이란 과연 없는 것일까? 김만중은 이와 같이 꿈의 세계보다도 더 이상적인 세계를 갈망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극락 세계를 동경하여 천상으로의 영생의 길을 떠났다. 이렇게 볼 때 "구운몽"은 불교 위주의 소설이기도 하지만 유교적인 이상세계는 언제나 서포의 염두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소설에는 또한 여성들의 생활 해방을 갈구하는 구절도 있지만 여자들 스스로가 일부 다처주의를 자인하는 언사가 많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그 당시 유교 사회의 귀족이나 양반들의 생활 이념에 따르는 일부다처주의의 옹호가 어느 만큼 깃들어 있어 보인다.

주제 :

인생 무상과 불법에의 귀의

인생 무상 불교적 인생관 자각으로 성진의 선불계와 양소유가 택한 현세라는 두 세계를 놓고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주제로 보는 견해와 불교적인 깨달음 ,즉 인간의 부귀영화는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이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때 저자(김만중)는 관직에 올라 있었다가 유배를 당한 몸이었다. 즉 그는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갑자기 모두 잃었기 때문에 부귀영화의 허와 실 을 잘 알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부귀 영화의 허무함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구운몽'은 주제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는 작품이다.

유교, 불교, 도교에서 온 요소가 두루 들어 있지만,육관 대사의 제자 성진이 남악 연화봉에서 계속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가 욕망 추구가 허망한 줄 깨달았다는 몽유소설(夢遊小說)로서의 기본 설정은 전편이 불교적인 의미를 가졌음을 말해 준다.

육관 대사가 언제나 '금강경(金剛經)'으로 가르침을 삼았다는 점까지 보태서, 작품의 주제가 '금강경'의 공(空) 사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성진은 꿈 속에서 양소유로 태어나, 시골 출신이 서울 가서 정원 급제를하고, 나아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가면 정승이 되어 온갖 부귀를 누리면서 연화봉에서 만났던 팔 선녀를 두 아내 여섯 첩으로 맞이하는 과정을 자상하고도 묘미있게 다루었다. 세속의 욕망이 허망하다는 것은 작품의 결말에서나 강조되어 있을 따름이고,부귀를 획득하고 애정을 성취하는 데 더욱 절실한 관심을 보였다.

성진의 길과 양소유의 길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하는 진퇴의 문제를 주제로삼고 독자도 각자의 성향에 따라서 생각이 달라질 수 있게 했다 하겠는데,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찾는 사람이라면 으레 자기를 성진, 또는 팔선녀 가운데 누구와 동일시해 공감을 얻었을 것이다. [조동일, {한국 문화 통사 3}(제3판 , 지식 산업사, 1994)에서]

구운몽적 환상의 의미

인간 의식의 내부에 소용돌이치는 상충적 갈등, 즉 욕망의 내향 운동과 외향운동의 부단한 반복은,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환희와 고뇌, 광명과 암흑, 천국과 지옥 등 모든 상충적 이미지 패턴을 낳는데 이 순간에 느끼는 좌절과 상실의 심연에서 재생하는 이미지로부터 인간은 신(神, God)의 모습을 창안하였다. 서양에 있어서, 신의 이미지는 이러한 인간 욕망의 상충적 양면성의 중간에 서서, 이를 화해시키는 조정자 내지 중개자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동양에 있어서는 수 천 년 동안이나 이 재생 또는 구원의 이론이, 어떤 조정자로서의 인격을 심상화(心像化)하지 않고, 오직 인간 자신이 스스로 희구하는 '전인격으로서의 자기' 속에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구운몽에서 성진의 마음 속에 소용돌이친 번뇌는 그 양극성을 화해할 인격적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만 이는 오로지 자기 실현에의 노력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대사 이르되,

"네 스스로 가고자 할새 가라 함이니, 네 만일 있고자 하면 뉘 능히 가라 하리오? 네 또 이르되, '어디로 가리오?' 하니, 너의 가고자 하는 곳이 너의 갈 곳이라."

 

위에서, "스스로 가고자 하기에 가라 함이니, 있고자 하면 뉘 능히 가라 하겠느냐?"는 말은 인간의 이변적(二邊的) 상극성의 극복 또는 화해는 오로지 자기 실현을 통해서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진리의 단적인 표현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러한 모순된 현실을 극복하여 자기 자신을 궁극적인 목표에까지 실현하려면, 우선 생사고락의 현실이란 그 자신이 보기에 따라서는 한낱 꿈에 돌릴 수 있어야 하며 그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서의 현실을 스스로 자각하여 깨어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줄거리

내용은 당(唐)나라 때 천축(天竺)으로부터 육관 대사(六觀大師)라는 고승(高僧)이 중국에 와서 큰 절을 세우고 제자를 모아 불도(佛道)를 강론(講論)한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가 성진(性眞)이었다. 어느날 성진은 대사의 심부름으로 용궁에 가게 되었는데, 용왕의 융숭한 대접에 술을 몇 잔 마시고 돌아온다. 한편 선녀 위진군(魏眞君)은 팔선녀(八仙女)를 대사에게 보내 약간의 보물을 선사한다. 길 중간에서 팔선녀와 성진이 만나게 되어 서로 희롱하다 돌아온다.

절에 돌아온 성진은 선녀들을 그리워하며 속세의 부귀 영화만 생각한다. 끝내 그는 죄를 얻어 지옥에 떨어지고 다시 인간 세상에 환생하여 양소유(楊少遊)가 된다. 한편 팔선녀도 같은 죄로 지옥에 떨어졌다가 각각 다시 세상에 환생한다. 양소유는 차례로 그들 여덟 여인과 인연을 맺게 된다. 드디어 벼슬은 승상에 이르고 두 부인과 여섯 낭자를 거느린 양소유의 화려한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회남 수주현 양처사의 아들로 태어난 성진[양소유(楊少遊)]은 15세에 과거를 보러 가던 중 어사의 딸 '진채봉'을 만나 혼약하고, 난을 피해 있다가 과거를 보러 올라가던 중 낙양의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고, 경사에 이르러 거문고를 타는 여자로 가장하여 정사도의 딸 '정경패'를 만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경패의 시비인 '가춘옥'과도 인연을 맺는다.

하북의 왕이 역모하려 아니 양소유는 절도사로 나가 이를 다스리고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인 줄 알고 만난 여자가 하북의 명기 '적경홍'이었다. 상경하여 예부상서가 된 양소유는 황제의 누이인 '난양 공주'의 퉁소 소리에 화답한 인연으로 부마로 간택이 되는데. 양소유는 정경패와의 혼약을 이유로 이를 물리치다가 옥에 갇힌다.

토번왕이 쳐들어 오자 대원수가 되어 출전한 양소유는 토번왕이 보낸 여자 자객 '심요연'과 인연을 맺고, 백룡담에서는 용왕의 딸인 '백릉파'를 도와 주어 인연을 맺는다. 그 동안에 난양 공주는 양소유와의 혼약을 이루지 못하여 실심한 정경패를 만나 보고 그 인물에 감복하여 제 1 공주인 '영양 공주'를 삼는다.

토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양소유는 위국공의 벼슬에 오르고, 영양 공주 난양 공주 2처와 진채봉, 계섬월, 가춘옥, 적경홍, 심요연, 백릉파의 6첩을 거느리게 된다. 작품의 제목에 나오는 '아홉'이라는 숫자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상징한다.

그러나 세월은 유수(流水)와 같아 이제는 승상의 벼슬에서도 물러나 한가히 그의 여생을 즐기던 양소유는 어느 가을날 두 부인과 여섯 낭자를 거느리고 뒷동산에 올라갔다가 문득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 이때 한 노승을 만난다. 때마침 찾아온 어느 고승에게 불도(佛道)에 귀의할 것을 말하자 그 도승은 쾌히 승낙하고 짚고 온 지팡이로 난간을 두드린다. 그러자 모든 것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손에 백팔 염주를 들고 있고 까칠까칠한 중의 머리를 한 자기(성진) 뿐이었다.

당황한 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귀 영화는 하룻밤 꿈이었고 자기는 분명히 연화 도량(蓮花道場)의 성진이었다. 꿈을 깬 성진은 황망히 대사 앞에 뛰어가 엎드린다. 팔선녀도 이어 들어와 제자되기를 청한다.

후에 대사는 도(道)를 성진에게 물리고 천축으로 돌아가고 팔선녀는 성진이 앞에서 계속 도를 닦아 후에 아홉 사람은 모두 극락 세계로 갔다고 한다.

이해와 감상

조선 숙종 때 김만중 ( 金萬重 )이 지은 고전소설. 이본에 따라 1책부터 4책까지 분량이 다양하다. 1725년(乙巳年, 영조 1)에 간행된 금성판(錦城板) 한문목판본을 비롯하여 국문방각본 · 국문필사본 · 국문활자본 · 한문필사본 · 한문현토본 등 50여종이 넘는 많은 이본이 전한다.

김만중은 노론 벌열층(閥閱層)의 일원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당시로서는 이단시되던 불교나 패서(稗書) 등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점이 소설을 지을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작자의 종손인 춘택(春澤)은 김만중이 속언(俗言)으로 많은 소설을 지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 남정기 南征記 〉 만 뚜렷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규경 ( 李圭景 )의 ≪ 오주연문장전산고 ≫ 의 〈 소설변증설 小說辨證說 〉 에 의하면,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씨부인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소설을 사오라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돌어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지어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의 집안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 경우에도 어머니를 위하여 속성으로 지었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이규경은 특히 이 작품이 김만중이 귀양갔을 때 지어졌다고 하였는데, 그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었다. 즉 그가 장희빈(張嬉嬪)의 아들 균( 悠 )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다 선천에 귀양간 숙종 14년(1688)인지, 아니면 장희빈이 인현왕후 ( 仁顯王后 ) 대신 왕후로 책봉된 기사환국으로 숙종 15년에 남해로 귀양갔을 때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근래에 ≪ 서포연보 西浦年譜 ≫ (일본 天理大學 소장)가 출현함으로써 일단 선천 귀양시기로 확실해지고 그 완성은 남해 귀양시기로 추정된다.

 

이재 ( 李縡 )가 〈 구운몽 〉 의 대지(大旨)를 인생의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라는 데 둔 바와 같이 〈 구운몽 〉 의 주제는 역시 대승불교의 중심인 금강경의 ‘ 공(空) ’ 에 있다.

공은 표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 같지만 이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역설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 구운몽 〉 은 ≪ 금강경 ≫ 이 소설화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당나라 때 남악 형산 연화봉에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전하러 온 육관대사가 법당을 짓고 불법을 베풀었는데, 동정호의 용왕도 이에 참석한다. 육관대사는 제자인 성진을 용왕에게 사례하러 보낸다. 이때 형산의 선녀인 위부인이 팔선녀를 육관대사에게 보내 인사드렸다.

용왕의 후대로 술이 취하여 돌아오던 성진은 연화봉을 구경하며 돌아가던 팔선녀와 석교에서 만나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희롱한다. 선방에 돌아온 성진은 팔선녀의 미모에 도취되어 불문의 적막함에 회의를 느끼고 속세의 부귀와 공명을 원하다가 육관대사에 의하여 팔선녀와 함께 지옥으로 추방된다.

 

성진은 회남 수주현에 사는 양처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양처사는 신선이 되려고 곧 집을 떠났다. 아버지 없이 자란 양소유는 15세에 과거를 보러 경사로 가던 중 화음현에 이르러 진어사의 딸 채봉을 만나 서로 마음이 맞아 자기들끼리 혼약한다.

그때 구사량(九士良)이 난을 일으켜 양소유는 남전산으로 피신하였는데, 그곳에서 도사를 만나 음률을 배운다. 진채봉은 아버지가 죽은 뒤 관원에게 잡혀 경사로 끌려간다.

 

이듬해 다시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던 양소유는 낙양 천진교의 시회(詩會)에 참석하였다가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는다. 경사에 당도한 양소유는 어머니의 친척인 두련사의 주선으로 거문고를 탄다는 구실로 여관(女冠)으로 가장하여 정사도의 딸 경패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사도의 사위로 정해졌는데, 정경패는 양소유가 자신에게 준 모욕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비 가춘운으로 하여금 선녀처럼 꾸며 양소유를 유혹하여 두 사람이 인연을 맺도록 한다.

 

이때 하북의 세 왕이 역모하려 하니 양소유가 절도사로 나가 이들을 다스린다.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을 만나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었는데, 이튿날 보니 하북의 명기 적경홍이었다. 두 여자와 후일을 기약하고 상경하여 예부상서가 되었다.

한편 진채봉은 서울로 잡혀온 뒤 궁녀가 되었는데, 어느날 황제가 베푼 주석에서 양소유를 보고 그 환선시(紈扇詩 : 흰 깁 부채에 쓴 시)에 차운(次韻 : 남이 지은 시의 운자를 써서 시를 지음)하여 애타게 된다. 까닭을 물어 진채봉과 양소유의 관계를 알게 된 황제는 이를 용서하고, 누이인 난양공주는 후에 진채봉과 형제의 의를 맺는다.

양소유는 어느날 밤에 난양공주의 퉁소소리에 화답한 것이 인연이 되어 부마로 간택되지만, 양소유는 정경패와의 혼약을 이유로 이를 물리치다가 옥에 갇힌다.

 

그 때 토번왕이 쳐들어와서 양소유가 대원수가 되어 출전한다. 진중에서 토번왕이 보낸 여자자객 심요연과 인연을 맺게 되고, 심요연은 자신의 사부에게 돌아가면서 후일을 기약한다.

 

양소유는 백룡담에서 용왕의 딸인 백릉파를 도와주고 그녀와 또 인연을 맺는다. 그 동안 난양공주는 양소유와의 혼약이 물리침을 당하여 실심에 빠진 정경패를 만나보고, 그 인물에 감탄하여 형제가 되어 정경패를 제1공주인 영양공주로 삼는다.

토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양소유는 위국공에 봉하여지고, 영양공주 · 난양공주와 혼인한 후, 진궁녀와 또 만나 동침하는 가운데 진채봉임을 확인하게 된다.

 

양소유는 고향으로 노모를 찾아가 경사로 모시고 오다가 낙양에 들러 계섬월과 적경홍을 데리고 오니, 심요연과 백릉파도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 양소유는 2처6첩을 거느리고 일가 화락한 가운데 부귀공명을 누리며 살아간다.

생일을 맞아 종남산에 올라가 가무를 즐기던 양소유는 역대 영웅들의 황폐한 무덤을 보고 문득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비회에 잠긴다.

 

이에 9인이 인간세계의 무상과 허무를 논하며, 장차 불도를 닦아 영생을 구하자고 할 때, 호승이 찾아와 문답하는 가운데 꿈에서 깨어나 육관대사의 앞에 있음을 알게 된다.

본래의 성진으로 돌아와 전죄를 뉘우치고 육관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팔선녀가 찾아와 대사의 가르침을 구한다. 이에 대사가 설법을 베푸니, 성진과 팔선녀는 본성을 깨우치고 적멸(寂滅 : 번거로움을 떠난 열반의 경지를 이르는 말)의 대도를 얻어 극락세계에 돌아갔다.

이 작품의 기본설정은 주인공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꿈 속에서 실현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꿈 속의 일이 허망한 한바탕의 꿈인 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김시습 ( 金時習 )의 〈 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 〉 같은 몽유소설(夢遊小說)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꿈 속에서 이룬 욕망성취가 오히려 허망하고, 꿈에서 깨어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화합이 이루어진다고 한 점은 다른 몽유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몽유소설과는 달리 꿈 속의 주인공인 양소유의 삶이 ‘ 영웅의 일생 ’ 에 따라 전개되는데, 투쟁이 약화되는 대신 남녀의 만남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점은 영웅소설의 일반적인 양상과는 거리가 있다. 결국, 〈 구운몽 〉 은 몽유소설과 영웅소설을 변형시켜 결합한 작품이라 하겠다.

한편, 〈 구운몽 〉 은 현실-꿈-현실로 바뀌는 과정이나 양소유가 8명의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묘미있게 꾸며 독자를 사로잡았다. 또한, 8명의 여인이 각기 개성을 갖추도록 배려를 하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환경 · 인물 · 심리를 우아하고 품위있는 문체를 활용하여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것에서 작자의 뛰어난 창작력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소설적 흥미를 유지하고, 품격을 높이며, 사상적 깊이를 가지도록 하여 유식한 계층까지도 독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 구운몽 〉 은 이후의 소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 구운몽 〉 자체를 늘리거나 축소하여 개작한 작품이 계속 나왔을 뿐만 아니라, 〈 구운몽 〉 과 같은 설정을 하면서 다른 사건을 결합시킨 작품들도 대거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 구운몽 〉 은 고소설 창작에 전형적인 모범을 제시하여 소설사의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어, 〈 춘향전 〉 과 더불어 고소설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 구운몽 〉 에 관한 연구는 여러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는데, 원본을 확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었다. 김태준(金台俊 〉 은 〈 구운몽 〉 도 〈 남정기 〉 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김만중이 국문으로 창작한 것을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하였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정규복(丁奎福)은 국문 원작설에 의문을 제기하여, 한문 ‘ 을사본 ’ 의 모본이며 최고본(最古本)이라는 한문 ‘ 노존본(老尊本) ’ 을 발견하였다.

 

이에 의해 이전까지 원본에 가깝다고 추정해 온 국문 ‘ 서울대학본 ’ 및 국문 ‘ 노존본 ’ 이 한문 ‘ 노존본 ’ 과 같은 계통이며 이의 번역본임을 증명하고 한문 원작설을 주장하였다.

더구나 〈 구운몽 〉 은 텍스트의 연구에서, 한문본이 노존본(1725년 이전)에서 을사본(1725)으로, 을사본은 다시 계해본(癸亥本, 1803)으로 형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국문본도 노존본 계통의 국역본(國譯本), 을사본 계통의 국역본, 계해본 계통의 국역본 등으로 분류된다. 아울러 서포문중설화(西浦門中說話)가 밑받침되어 〈 구운몽 〉 의 한문 원작설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런데 〈 구운몽 〉 의 한문본과 국문본의 비중이 거의 같다는 점은 계층과 성별의 구분을 넘어서 〈 구운몽 〉 이 수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 구운몽 〉 은 어느 부류의 독자층이라도 인정할 수 있는 공동의 소설적 규범을 개발하는 데 선구적인 구실을 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 구운몽 〉 의 주제 또는 사상에 관하여는 여러 연구에서 논란이 거듭되었다. 우선 주장된 바는 〈 구운몽 〉 에는 삼교화합사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게일(Gale,J.)이 〈 구운몽 〉 을 영역할 때 서문을 쓴 스콧(Scott,R.)은 〈 구운몽 〉 에는 “ 유교 · 불교 · 도교 사상이 섞여 있다. ” 고 하였다.

김태준은 작품의 여러 장면에서 나타나는 민간신앙에서 유 · 불 · 선 삼교의 화합사상을 엿볼 수 있다고 하였다. 주왕산 ( 周王山 )은 유교의 현실주의, 불교의 은둔사상, 도교의 향략주의가 나타나 삼교가 “ 혼연히 일치된 소설 ” 이라고 하였다.

또, 이명구(李明九)는 양소유는 유교를, 성진은 불교를, 팔선녀는 도교를 각기 표상하고 있어, 〈 구운몽 〉 에는 “ 유 · 불 · 선 세가지의 인생관이 나타나 있다. ” 고 하였다.

 

이러한 삼교화합설에 대하여 김만중의 불교에 대한 심취나 작품에 나타나는 불교적 성향을 들어 〈 구운몽 〉 에 나타난 사상은 오로지 불교사상뿐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박성의(朴成義)는 〈 구운몽 〉 이 불교적인 제행무상관(諸行無常觀)을 사상적 배경으로 “ 인생무상을 주제로 한 ”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 구운몽 〉 이 나타내는 사상은 불교사상 중에서도 공사상(空思想)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정규복에 따르면, 성진은 팔선녀로 인하여 미(迷)하였다가 유교적인 부귀공명의 환(幻)을 통하여 육관대사 앞에서 각(覺)한 성진으로 되돌아갔으니, 이는 미에서 환을 통하여 각인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중심으로 한 공사상과 대응된다. ” 는 것이다.

 

성현경(成賢慶)은 “ 넓게는 불교사상, 좁게는 공사상이 서포적으로 변용, 굴절되어 나타났다. ” 고 하였다. 정주동(鄭柱東)은 “ 불교사상 중에서도 ≪ 금강경 ≫ 의 공사상, 곧 공즉시색(空卽是色) ·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진공묘유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 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설성경은 “ 〈 구운몽 〉 에서는 대승불법이 강조되고, 이는 금강경의 공사상을 통하여 구현된다. ” 고 하여 성현경, 양주동과 마찬가지로 정규복의 금강경이 바탕이 된 공사상을 되풀이하고 있다.

 

공사상설에 대하여 김일렬(金一烈)은 〈 구운몽 〉 이 금강경의 중심사상인 공사상을 투영하려 하였으나, 그 결과는 “ 공사상의 본격적인 차원 ” 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였다.

〈 구운몽 〉 의 현실부정은 각자의 관념적인 도피이며, 이는 공사상의 한 단계로서 공사상만의 것이 아니고, 불교사상 일반의 것으로 그 초보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동일(趙東一)은 “ 성진이 금강경 사상의 높은 차원의 것을 실행하지는 않았고, 다른 방법으로 그 사상이 작품에 나타나 있는 것도 아니다. ” 라고 하면서 공사상설을 비판하였다. “ 상(相)이 있는 것은 허망하다라는 정도의 생각은 불교의 기본적인 전제이기에 불교사상설이 오히려 실상에 부합된다. ” 는 것이다.

그러나 정규복은 〈 구운몽 〉 의 종결 부분에 등장하는 육관대사가 성진과의 문답에서 성진의 꿈(양소유)과 인간(성진)의 2분법을 깨뜨리고 성진과 양소유, 몸과 꿈, 장주와 호접의 1분법으로 되돌리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 구운몽 〉 의 주제와 사상은 다시 ≪ 금강경 金剛經 ≫ 이 바탕이 된 공관(空觀)의 미학임을 재확립하였다.

〈 구운몽 〉 을 비교문학적 시각에서 다룬 연구로는 정규복의 업적이 대표적이다. 〈 구운몽 〉 에 나타나는 환몽구조(幻夢構造)는 가장 오래된 것이 인도에서 형성된 ‘ 사라나비구(娑羅那比丘) ’ (雜寶藏經)이다. 이것이 육조시대에 중국에 들어와 당나라 때에 나온 〈 침중기 枕中記 〉 · 〈 남가태수전 南柯太守傳 〉 · 〈 앵도청의 櫻桃靑衣 〉 등과 같은 전기소설(傳奇小說)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작품이 다시 우리나라에 수용되어 〈 구운몽 〉 창작의 배경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 구운몽 〉 은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시대(明治時代)에 고미야마(小宮山天香)에 의하여 〈 무겐 夢幻 〉 으로 번안되기도 하였다. 즉 환몽구조는 인도에서 중국 · 한국 ·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도불경의 ‘ 사라나비구 ’ 는 설화형태에 지나지 않고, 당대의 전기소설은 소설의 초기형태에 불과하나, 〈 구운몽 〉 은 완전한 소설이라는 점이 다르다. 일본으로 건너간 〈 구운몽 〉 은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번안물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 구운몽 〉 이 동양문학권 내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 구운몽 〉 은 ≪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 나 ≪ 태평광기 太平廣記 ≫ 및 ≪ 서유기 西遊記 ≫ 의 영향도 받았다.

 

한편, 국내의 다른 작품과의 대비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상택은 〈 구운몽 〉 이 초월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한다면, 〈 춘향전 〉 은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하였다.

성현경은 〈 구운몽 〉 이 〈 옥련몽 玉蓮夢 〉 (옥루몽)을 낳게 한 모태가 된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 외에 〈 구운몽 〉 의 ‘ 여장탄금(女裝彈琴)이야기 ’ 로도 그 이야기를 기조로 한 〈 임호은전 〉 · 〈 장국진전 〉 · 〈 김희경전 〉 · 〈 옥선몽 〉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김병국(金炳國)은 분석심리학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작품의 내면에 감추어진 의미를 찾고자 하였고, 이능우(李能雨)는 작품 속의 성적(性的) 상징물들을 분석하였다. 김열규(金烈圭)는 기호론적 방법론으로 작품에 나타난 ‘ 이산(離散) ’ 과 ‘ 회동(會同) ’ 이라는 구조를 시도하였다.

≪ 참고문헌 ≫ 九雲夢硏究(丁奎福, 고려대학교출판부, 1974), 西浦小說硏究(金戊祚, 螢雪出版社, 1974), 九雲夢原典의 硏究(丁奎福, 一志社, 1977), 韓國小說의 理論(趙東一, 知識産業社, 1977), 金萬重硏究(金烈圭 · 申東旭 編, 새문社, 1983), 韓中文學比較의 硏究(丁奎福, 高麗大學校出版部, 1987), 韓國古小說史의 硏究(丁奎福, 韓國硏究院, 1992), 九雲夢硏究-그 幻想構造의 心理的 考察-(金炳國, 서울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68), 九雲夢의 比較文學的 考察(丁奎福, 高麗大學校論文集 16, 1970), 李朝夢字類小說硏究-특히 九雲夢과 玉樓夢을 中心으로-(成賢慶, 국어국문학 54, 1971), 九雲夢과 雲英傳의 比較硏究(金一烈, 어문논총 9 · 10합병호, 경북대학교, 1975).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김만중(金萬重)

1637(인조 15) ∼ 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 소설가. 본관은 광산(光山). 아명은 선생(船生),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조선조 예학 ( 禮學 )의 대가인 김장생 ( 金長生 )의 증손이다. 충렬공(忠烈公) 익겸(益謙)의 유복자이다.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아우로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 ( 仁敬王后 )의 숙부이다. 그의 어머니는 해남부원군(海南府院君) 윤두수 ( 尹斗壽 )의 4대손이다.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文翼公) 방(昉)의 증손녀이고, 이조참판 지( 猩 )의 딸인 해평윤씨이다.

[생 애]

김만중은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에 힘입어 성장하였다. 아버지 익겸은 일찍이 정축호란(1637)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형 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며 살았다. 윤씨부인은 본래 가학(家學)이 있어 두 형제들이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항상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한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

궁색한 살림 중에도 자식들에게 필요한 서책을 구입함에 값의 고하를 묻지 않았다. 또 이웃에 사는 홍문관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내어 손수 등사하여 교본을 만들기도 하였다.

≪ 소학 ≫ · ≪ 사략 史略 ≫ · ≪ 당률 唐律 ≫ 등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연원 있는 부모의 가통 ( 家統 )과 어머니 윤씨의 희생적 가르침은 훗날 그의 생애와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만중은 그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세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뒤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관료로 발을 디디기 시작하였다. 1666년에 정언 ( 正言 ). 1667년 지평 ( 持平 ) · 수찬 ( 修撰 )을 역임하였다.

1668년에는 경서교정관(經書校正官) · 교리 ( 校理 )가 되었다. 1671년에는 암행어사로 신정 ( 申晸 ) · 이계(李稽) · 조위봉 ( 趙威鳳 ) 등과 함께 경기 및 삼남지방의 진정득실(賑政得失)을 조사하기 위해 분견(分遣)된 뒤에 돌아와 부교리가 되었다. 1674년까지 헌납 · 부수찬 · 교리 등을 지냈다.

 

1675년 동부승지 ( 同副承旨 )로 있을 때에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상복문제로 서인이 패배하자 관작을 삭탈당했다. 30대의 득의의 시절이 점차 수난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에 그의 형 만기도 2품직에 올라 있었고 그의 질녀는 세자빈에 책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2차 예송 ( 禮訟 )이 남인의 승리로 돌아가자, 서인은 정치권에서 몰락되는 비운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680년(숙종 6) 남인의 허적 ( 許積 )과 윤휴(尹 頊 ) 등이 사사(賜死)된 이른바 경신대출척에 의해 서인들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그는 이보다 앞서 1679년 예조참의로 관계에 복귀하였다. 1683년에는 공조판서로 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에 사헌부의 조지겸 ( 趙持謙 ) · 오도일 ( 吳道一 ) 등이 환수(還收)의 청(請)이 있자 이를 비난하다가 체직(遞職 : 직무가 바뀜.)되었다. 3년 뒤인 1686년에 대제학이 되었다.

 

1687년에 다시 장숙의(張淑儀)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의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추국(推鞠 : 특명으로 중죄인을 신문함.)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1년이 지난 1688년 11월에 배소에서 풀려 나왔다.

그러나 3개월 뒤인 1689년 2월 집의 ( 執義 ) 박진규(朴鎭圭), 장령 ( 掌令 ) 이윤수(李允修) 등의 논핵(論刻)을 입어 극변(極邊)에 안치되었다가 곧 남해 ( 南海 )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같이 유배가게 된 것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의 여화(餘禍) 때문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의 어머니인 윤씨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로 1692년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98년 그의 관작이 복구되었다. 1706년에는 효행에 대하여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활동상황]

김만중의 사상과 문학은 이전의 여느 문인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말년에 와서 불운한 유배생활로 일생을 끝마쳤따. 그러나 생애의 전반부와 중반부는 상당한 권력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득의의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총명한 재능을 타고났다.

그리고, 가문의 훌륭한 전통 등으로 인해 그의 학문도 상당한 경지를 성취하였다. 그가 종종 주희(朱熹)의 논리를 비판했다든지 아니면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든지 하는 점은 결코 위와 같은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만중의 사상의 진보성은 그의 뛰어난 문학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정한 한계는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 국문가사예찬론 ’ 은 주목받아 마땅한 논설이다. 그는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한문은 ‘ 타국지언(他國之言) ’ 으로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철 ( 鄭澈 )이 지은 〈 사미인곡 〉 등의 한글가사를 굴원(屈原)의 〈 이소 離騷 〉 에 견주었다. 이러한 발언은 그의 개명적 의식(開明的意識)의 소산으로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김만중이 ‘ 국민문학론 ’ 을 제창하였다고 할 만큼 그의 문학사조상의 공로는 매우 큰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용어 사용이 적절한 것인지는 재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만중이 살던 시대는 분명 중세의 봉건질서가 붕괴된 시대는 아니었던 만큼 국민문학이라는 용어도 성립할 수 없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적어도 ‘ 국민문학론 ’ 이 제창되는 것은 조선왕조가 끝나고도 한참 뒤에나 가능할 노릇이기 때문이다.

김만중의 우리말과 우리 글에 대한 일종의 ‘ 국자의식(國字意識) ’ 은 충분히 강조될 만하다. 더구나 그가 〈 사씨남정기 〉 와 같은 국문소설을 파다하게 창작했다는 점과 관련해 보면 허균 ( 許筠 )을 잇고 조선 후기 실학파 문학의 중간에서 훌륭한 소임을 수행한 것으로 믿어진다.

 

김만중은 시가와 소설에 대해서 상당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김만중은 소설의 통속성에 대하여 진수(陳壽)의 ≪ 삼국지 ≫ 나 사마광(司馬光)의 ≪ 통감 通鑑 ≫ , 그리고 나관중(羅貫中)의 〈 삼국지연의 三國誌演義 〉 를 서로 구별하여 통속소설에 대한 예술적 기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김만중은 한시 시학의 표준으로 고악부(古樂府)와 ≪ 문선 文選 ≫ 의 시를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율시 ( 律詩 ) 이전의 시를 배울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 점은 주희의 학시관(學詩觀)과 상통하면서도 인간의 정감과 행동을 중요시하는 연정설(緣情說)을 시의 본질로 본 것으로 특징적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363수에 이르는 그의 시편들의 주조를 형성하는 단서로 작용하였다.

김만중의 많은 시들에서 그리움의 정서가 자주 표출되고 있는 점은 그의 생애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고시 계열의 작품을 애송하였던 것과도 맥이 닿고 있다. 장편시인 〈 단천절부시 端川節婦詩 〉 는 그의 주정적(主情的) 시가관(詩歌觀)에서 지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그 밖에 그의 소설이나 시가에서 많은 인물이 여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도 흥미있는 현상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의 낭만주의적 정감의 전달 대상으로 선택된 것 같다.

국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주로 〈 구운몽 〉 · 〈 사씨남정기 〉 등과 같은 소설이었다. 그러다가 근년에 들어와서 그의 시가에 대한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

김만중은 비교적 다른 인물보다 많은 연구논문들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새롭게 고찰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의 생애를 완벽하게 재구성해 보는 문제와 소설과 시가 사이의 관계, 또는 그의 사상의 진보성과 한계 등에 대한 정밀한 탐색이 계속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방면에서의 축적된 연구성과 위에 김만중과 그의 문학이 문학사적 전망 속에서 보다 뚜렷한 모습으로 비추어지기를 기대한다.

≪ 참고문헌 ≫ 西浦文集, 西浦漫筆, 金萬重(李明九, 韓國의 人間像, 新丘文化社, 1967), 九雲夢硏究(丁奎福, 高麗大學校出版部, 1976), 西浦小說硏究(金戊祚, 螢雪出版社, 1976), 西浦家門行狀(宋百憲, 형설출판사, 1982), 金萬重硏究(丁奎福, 새문社, 1984), 西浦年譜(金炳國 외 번역, 서울대학교출판부, 1992), 金萬重文學硏究(丁奎福 外, 국학자료원, 1992), 金萬重論(朴晟義, 思潮 2 思潮社, 1958), 金萬重硏究(金茂祚, 동아논총 5, 동아대학교, 1969), 西浦의 漢詩考(金戊祚, 又軒丁仲煥博士回甲紀念論集, 1974), 西浦評論硏究(金周漢, 嶺南語文學 3, 1976), 金萬重論(丁奎福, 한국문학작가론, 螢雪出版社, 1977), 西浦漢詩硏究(趙鍾業, 語文硏究 9, 1976), 金萬重(趙東一, 韓國文學思想史試論, 지식산업사, 1979), 西浦漫筆에 나타난 批評의 特性(崔信浩, 韓國學報 25, 一志社, 1981), 西浦의 생애와 한문학에 대한 재조명(尹浩鎭, 민족문화 10, 민족문화추진회, 1984). (자료 출처 : 인터넷 자료 재구성 및 국어국문학사전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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