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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토실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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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토실설

10월 초하루에 이자(李子)가 밖에서 돌아오니, 종들이 흙을 파서 집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무덤과 같았다. 이자는 어리석은 체하며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집 안에다 무덤을 만들었느냐?”

하니, 종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무덤이 아니라 토실입니다.”

하기에,

“어찌 이런 것을 만들었느냐?”

하였더니,

“겨울에 화초나 과일을 저장하기에 좋고, 또 길쌈하는 부인들에게 편리하니, 아무리 추울 때라도 온화한 봄 날씨와 같아서 손이 얼어 터지지 않으므로 참 좋습니다.”

하였다.

이자는 더욱 화를 내며 말하기를,

“여름은 덥고 겨울이 추운 것은 사시(四時)의 정상적인 이치이니, 만일 이와 반대가 된다면 곧 괴이한 것이다. 옛적 성인이, 겨울에는 털옷을 입고 여름에는 베옷을 입도록 마련하였으니, 그만한 준비가 있으면 족할 것인데, 다시 토실을 만들어서 추위를 더위로 바꿔 놓는다면 이는 하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사람은 뱀이나 두꺼비가 아닌데, 겨울에 굴 속에 엎드려 있는 것은 너무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길쌈이란 할 시기가 있는 것인데, 하필 겨울에 할 것이냐? 또 봄에 꽃이 피었다가 겨울에 시드는 것은 초목의 정상적인 성질인데, 만일 이와 반대가 된다면 이것은 괴이한 물건이다. 괴이한 물건을 길러서 때 아닌 구경거리를 삼는다는 것은 하늘의 권한을 빼앗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내가 하고 싶은 뜻이 아니다. 빨리 헐어 버리지 않는다면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하였더니, 종들이 두려워하여 재빨리 그것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땔나무를 마련했다. 그러고 나니 나의 마음이 비로소 편안하였다.

 

요점 정리

작자 : 이규보

갈래 : 고전수필, 설(說)

성격 : 경험적, 자연친화적, 교훈적

제재 : 토실

주제 :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의 추구

구성 : 대답-반박의 2단 구성

하인들

 

이자

저장성, 방한 효과가 있어 생활에 편리함

토실

겨울이 추운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임

인간의 이기적 태도 - 실용적 태도

 

자연친화적 태도

줄거리 : 어느날 이규보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ㅈ오들이 토실을 만들면 겨울에도 화초나 과일을 저장하기에 좋고 오랜 시간 동안 별 움직임 없이 일을 해야 하는 길쌈 일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규보는 네 계절의 정상적인 이치를 역행하는 것은 하늘의 권한을 빼앗는 것이라며 토실을 허물이라고 한다.

출전 : 동국이상국집

내용 연구

10월 초하루에 이자(李子 : 이씨 성을 가진 사람 이규보 자가 자신을 가리킴)가 밖에서 돌아오니, 종들이 흙을 파서 집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무덤과 같았다. 이자는 어리석은 체하며[작가의 성격의 한 단면을 엿 볼 수 있음]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집 안에다 무덤을 만들었느냐?”

하니, 종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무덤이 아니라 토실[종의 입장에서는 실용성이 있는 것이고 작가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인간의 이기적 심성을 상징]입니다.”

하기에,

“어찌 이런 것을 만들었느냐?”

하였더니,

“겨울에 화초나 과일을 저장하기에 좋고, 또 길쌈하는 부인들에게 편리하니, 아무리 추울 때라도 온화한 봄 날씨와 같아서 손이 얼어 터지지 않으므로 참 좋습니다.[인간의 실용에 비추어 현상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음]”

하였다. - 하인들이 토실을 지은 이유를 밝힘

이자는 더욱 화를 내며 말하기를,

“여름은 덥고 겨울이 추운 것은 사시(四時)의 정상적인 이치이니, 만일 이와 반대가 된다면[자연의 순리를 거스른다면 / 종들과 다른 관점] 곧 괴이한 것이다. 옛적 성인이, 겨울에는 털옷을 입고 여름에는 베옷을 입도록 마련하였으니, 그만한 준비가 있으면 족할 것인데, 다시 토실을 만들어서 추위를 더위로 바꿔 놓는다면 이는 하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사람은 뱀이나 두꺼비가 아닌데, 겨울에 굴 속에 엎드려 있는 것은 너무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길쌈이란 할 시기가 있는 것인데, 하필 겨울에 할 것이냐? 또 봄에 꽃이 피었다가 겨울에 시드는 것은 초목의 정상적인 성질인데, 만일 이와 반대가 된다면 이것은 괴이한 물건이다. 괴이한 물건을 길러서 때 아닌 구경거리를 삼는다는 것은 하늘의 권한을 빼앗는 것이니, 이것은[하늘의 권리를 빼앗는 것] 모두 내가 하고 싶은 뜻이 아니다. 빨리 헐어 버리지 않는다면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하였더니, 종들이 두려워하여 재빨리 그것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땔나무를 마련했다. 그러고 나니 나의 마음이 비로소 편안하였다. - 자연의 섭리를 들어 토실을 허물 게 함

이 글을 쓴 지은이의 자연관과 같은 시조는?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과 무위자연의 조화로운 삶

 

읽기 후 활동

 

1.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자(李子)는 다름 아닌 이규보 자신이다. 이규보가 고려시대에서 오늘날로 걸어나와 다음 글의 저자와 대면하여 대화를 나누었을 때 어떤 내용이 오갔을까 가정하여 말해 보자.

인간의 사회 관계가 그대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에 반영된다는 의미에서 생태학의 문제도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정치적이라는 것은 인간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겸손하게 수용하는 의식의 대전환, 즉 일종의 개종(改宗)에 인도되는 정치라야 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궁극적으로 부인할 수 없고, 인간성의 피폐와 환경 악화를 막을 수도 없다. 사실상 인간이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일찍이 해월(海月)선생[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천지 만물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지 않은 것이 없고, 따라서 생물이 살기 위해 다른 생물을 먹는 행위는 한울이 한울을 가지고 자기를 먹여 살리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담겨 있는 것은 약육강식의 잔인한 폭력성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모든 생명이 다른 생명에 대하여 공양의 관계, 즉 희생과 헌신, 사랑의 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이 우주의 근본 짜임새라는 생각인 것이다. 여기에 강조되어 있는 것은 그러니까 내가 먹어 치우는 이 물건과 이 생물이 그 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거룩한 존재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 김종철 ‘환경 위기의 내면 구조’에서

2. 토실을 만든 종들의 처지에서 이규보에게 건의 혹은 주장할 수 있는 말을 써 보자.

 

이상한 오이

 

신광한 지음

조동영 번역

 

신묘년(1531) 7월에 여종이 와서는,

"제가 서쪽 채마밭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습니다. 한꼭지에 달린 오이 두 개가 붙어서 하나가 되었는데 붙은 모양이 뚜렷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상서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버렸습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그 오이를 가져다 살펴보니 과연 그 아이 말대로 매우 이상하게 생겼다. 장자(莊子)가 '과일이나 오이에도 이치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 오이가 이렇게 된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옛날에도 두 줄기에 한 이삭이 달린 벼와 두 갈래로 나누어진 보리이삭, 그리고 두 나무가 가지에서 서로 이어진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들이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오이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오이는 셋으로 나누어지는 이치가 있다. 그러므로 쉽게 쪼갤 수 있는 사물을 가르쳐 '과분(瓜分)'이라고 한다. 오이는 셋으로 나누어지는 물건인데 지금 이 두 개가 합하여 하나가 되었으니, 이것은 둘이 하나가 되어 육위(六位)가 화합하는 현상이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음양(陰陽)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는 것이고 육위가 화합한다는 것은 상하 사방이 다같이 화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오이만이 상서롭지 못할 까닭이 있겠는가 했었는데, 얼마후에 다시 '한이삭이 두 가지에 달린 벼나, 두 갈래로 나뉘어진 보리이삭, 또는 나뭇가지가 서로 합쳐서 하나가 된 것은 훌륭한 정치나 훌륭한 덕화에 감응되어서 나타난 현상이다. 지금 내가 세상에 쓰여지지 못하고 야인이 되었으므로 시골에 살면서 정원을 가꾸고 오이를 심는 일을 배우고는 있지만 그것도 이미 공자가 하찮게 여겼던 일이며, 길상(吉祥)을 불러들일 만한 훌륭한 덕도 없는데, 두 개가 한데 붙은 오이가 나의 밭에서 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스스로 해석하기를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상하와 사방이 똑같은 은택을 받게 하는 것은 진실로 야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훌륭한 사람이 나타나서 임금을 잘 보필하고, 인심을 순후하게 하여 사방이 한결같아지게 하려는 자가 있는지 모르겠다. 임금을 잘 보필하면 순조로움이 아래에서 일어난다. 상하가 순조로와지면 음양이 순조로와지고 음양이 순조로와지면 나누어졌던 것이 합해질 뿐만 아니라 사방도 따라서 순조로와진다. 이제 그 순조로움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풍요롭고 태평스런 세상이 되어 배불리 먹고 즐거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야인(野人)의 상서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와 감상

"괴토실설(壞土室說)"은 '토실'과 관련된 일상 생활의 체험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편리를 위해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교훈적인 생각을 담고 있는 한문 수필로 일상의 체험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자연의 섭리를 역행하면서까지 편리함을 추구하려는 인간들의 이기적인 심성을 비판하고 있다.

작가의 말을 통해서 자연의 섭리를 중시하는 자연친화적 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작가는 '토실'로 상징되는 '인간의 이기적 심성'을 비판하고,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고 순응하며 살 것을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들이 토실을 만든 행위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지배를 행사하려는 인간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편리함과 실용성에 바탕을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이자가 관념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그 부당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종들은 실용성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는 바로 토실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가치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인인 '이자'의 생각이 관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지배 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의사소통의 단절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지배 계급이 피지배계급의 애로점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판을 받을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이 글이 지닌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너무 실용성만을 강조하다 보면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는 글이기도 하다.

 

 

심화 자료

이규보

1168(의종 22)∼1241(고종 28). 고려 후기의 문신·재상. 본관은 황려(黃驪 : 지금의 경기도 여주). 초명은 인저(仁泗),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만년에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호부시랑(戶部侍郎)을 지낸 윤수(允綏)의 아들이다.

9세 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했고, 문재가 뛰어났다. 14세 때 사학(私學)의 하나인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 : 여름철에 절을 빌려 행한 과거시험준비를 위한 학습)에서 시를 빨리 지어 선배 문사로부터 기재(奇才)라 불렸다. 이때 그는 장차 문한직(文翰職)에 벼슬해서 문명을 날리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엽적 형식주의에 젖은 과시의 글(科擧之文) 등을 멸시하게 되었고, 이것은 사마시(司馬試)에 연속 낙방하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16세부터 4, 5년간 자유분방하게 지내며, 기성문인들인 강좌칠현(江左七賢)과 기맥이 상통해 그 시회(詩會)에 출입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오세재(吳世才)를 가장 존경해 그 인간성에 깊은 공감과 동정을 느끼곤 하였다.

1189년(명종 19) 유공권(柳公權)이 좌수(座首)가 되어 실시한 사마시에 네 번째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지공거(知貢擧) 임유(任濡), 동지공거(同知貢擧) 이지명(李知命) 등이 주관한 예부시(禮部試)에서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관직을 받지 못하자, 25세 때 개경의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장자(莊子)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 세상의 번거로움이 없는 허무자연의 樂土)의 경지를 동경하기도 하였다. 백운거사라는 호는 이 시기에 지은 것이었다. 26세(1193 : 명종 23)에 개경에 돌아와 빈궁에 몹시 시달리면서 수년 동안의 무관자(無官者)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한편 왕정(王廷)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관기의 문란, 민의 피폐, 그리고 10여 년 동안의 남부지방의 농민폭동 등은 그의 사회·국가의식을 크게 촉발시켰다. 이때 지은 것이 바로 〈동명왕편 東明王篇〉·〈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 등 이었다. 또한 혜문(惠文)·총수좌 (聰首座)·전이지(全履之)·박환고(朴還古)·윤세유(尹世儒) 등과 특별한 친분을 유지하였다.

1197년(명종 27) 조영인(趙永仁)·임유·최선(崔詵) 등 최충헌(崔忠獻) 정권의 요직자들에게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거기에서는 그 동안 진출이 막혔던 문사들이 적지 않게 등용된 반면, 자신은 어릴 때부터 문학에 조예를 쌓아왔음에도 30세까지 불우하게 있음을 통탄하고 일개 지방관리로라도 취관시켜줄 것을 진정하였다. 이 갈망은 32세 때 최충헌의 초청시회(招請詩會)에서 그를 국가적인 대공로자로서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이에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서 전주목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봉록 액수가 적으며 행정잡무가 번거롭고, 상관·부하는 태만하였으며 동료들의 중상을 받는 등 그 생활을 고통스럽게 여겼다. 결국 동료의 비방을 받아 1년 4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처음에는 자조(自嘲)를 하다가 다음은 체념하고 결국 타율적으로 규제받는 것을 숙명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202년(신종 5) 동경(東京 : 경주)과 청도 운문산(雲門山) 일대의 농민폭동진압군의 수제원(修製員)으로 자원종군하였다. 현지에서 각종 재초제문(齋醮祭文)과 격문(檄文), 그리고 상관에의 건의문 등을 썼다. 1년 3개월 만에 귀경했을 때, 상(賞)이 내려질 것을 기대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문필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해 깊이 회의하였다.

1207년(희종 3) 이인로(李仁老)·이공로(李公老)·이윤보(李允甫)·김양경(金良鏡)·김군수(金君綬) 등과 겨루었던 〈모정기 茅亭記〉가 최충헌을 만족시켜 직한림(直翰林)에 권보(權補)되었다. 그리하여 문필을 통한 양명과 관위 상의 현달이 함께 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다시 자신을 갖기 시작하였다.

1215년(고종 2) 드디어 우정언(종8품) 지제고(知制誥)로서 참관(參官)이 되었다. 이때부터 출세에 있어서 동료 문사들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쾌적한 문관생활을 만끽하였다. 금의(琴儀)를 두수(頭首)로 하여 유승단(兪升旦)·이인로·진화(陳捷)·유충기(劉食基)·민광균(閔光鈞), 그리고 김양경 등과 문풍(文風)의 성황을 구가하였다.

1217년(고종 4) 2월 우사간이 되었으나, 가을에 최충헌의 한 논단(論壇)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하는 부하의 무고로 받아 정직당하고, 3개월 뒤에는 좌사간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집무상 과오를 범한 것으로 단정, 좌사간마저 면직되었다.

이러한 돌변사태는 그때까지 전통적인 왕조적 규범에 의해 직무를 수행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태도를 관리의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그에게 큰 충격과 교훈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관념이 최충헌의 권력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파탄되어버리자 또다시 자신의 사고(思考)와 태도를 바꾸어 보신(保身)에 특별히 마음을 두게 되었다.

1219년(고종 6) 최이(崔怡)의 각별한 후견 덕분으로 중벌은 면하게 되어 계양도호부부사병마검할(桂陽都護府副使兵馬黔轄)로 부임하였다. 만 1년간의 재임 중, 박봉인데다 직장환경은 열악하고, 민의 생활모습은 추하고 참혹해 불쾌감을 일으키는 등 이곳으로부터 일각이라도 빨리 달아나고 싶어하였다. 중앙에서의 풍족하고 쾌적하던 문관생활이 그립기만 하였다. 그는 경륜가(經綸家)가 못됨을 자처한 셈이다.

다음해 최충헌이 죽자 최이에 의해 귀경하게 되면서, 최이에의 절대적 공순관계(絶對的恭順關係)에 들어서게 되었다. 일체의 주견 없이 다만 문필기예의 소유자로서 최씨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충실히 집행하는 것만이 택할 길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뒤 만 10년간은 최씨 정권의 흥륭기이기도 하거니와 그가 고관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진 기간이었다.

보문각대제지제고(寶文閣待制知制誥)·태복소경(太僕少卿)·장작감(將作監)·한림학사시강학사(翰林學士侍講學士)·국자좨주(國子祭酒) 등을 거치면서, 1228년(고종 15) 중산대부 판위위사(中散大夫判衛尉事)에 이르렀고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230년 한 사건에 휘말려 문죄되어 위도(蝟島)에 유적되었다.

그는 이때까지 권력에 심신을 다 맡겨왔던 터였는데 자기를 배제하는 엄연한 별개의 힘으로 존재하는 사실에 새롭게 놀랐다. 보신을 잘못하는 자신이 부덕한 사람으로 통감되었다.

 

8개월 만에 위도에서 풀려나와 이 해 9월부터 산관(散官)으로 있으면서 몽고에 대한 국서의 작성을 전담하였다. 국서는 최씨의 정권보전책으로 강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고, 그는 이 정책에 적극 참여한 셈이다.

65세 때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지제고(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로 복직되었고, 1237년(고종 24)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郎平章事)·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대보(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大保)로서 치사(致仕)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그는 문관으로서의 전생애가 훌륭하게 완결되었음을 자인하고 승리감에 잠긴다. 이로써 자손들은 그의 음덕으로 장차 사회적 위치가 높아질 것이며, 관운에 혜택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71세 이후 하천단(河千旦)·이수(李需) 및 승통(僧統) 수기(守其) 등과 사귀었고, 최씨의 문객인 김창(金敞)·이인식(李仁植)·박훤 (朴暄)과도 교제가 잦았다. 만년에 몸의 허약함과 반록(半祿)의 두절 등에 불편을 느꼈으나, 이 점은 최이의 특별한 가호를 받았다. 또한, 몽고의 침략에 대해 괴로워했으나 결국 불평 이상의 것이 못되었다.

병으로 누워있는 그에게 감격적이었던 것은 최이에 의해 그의 문집이 발간되었던 일이었다. 문필로서 양명하고 관리로서 현달하고 그의 문집이 후세에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게 되었으니 그의 생애의 기본목적은 달성이 된 셈이었다. 최이에게 바쳐진 그의 시들이 최이의 은의에 대해 충심에서 감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문한(文翰)의 관직자이며, 양심적이나 소심한 사람이었다. 학식은 풍부하였으나 작품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나타낸 자기표현이 아니라 그때 그때 의식에 떠오르는 바가 그대로 표출되었다. 그는 본질상 입신출세주의자이며 보신주의자였다. 그렇게 된 근본이유는 가문을 올려세우고, 고유의 문명을 크게 떨치고자 하는 명예심에서였다. 그는 최씨정권하 일반 문한직 관리층의 한 전형이었다.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이 있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참고문헌≫ 西河集, 破閑集, 補閑集, 東國李相國集, 東文選, 錦南集, 梅湖集, 英雄敍事詩-東明王-(張德順, 人文科學 5, 1960), 高麗中期의 民族敍事詩(李佑成, 成均館大學校論文集 7, 1963), 李奎報의 東明王篇詩(朴菖熙, 歷史敎育 11·12 合輯, 196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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