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관조(觀照)의 예지(叡智)

by 송화은율
반응형

관조(觀照)의 예지(叡智)

박지원 지음

정기태 번역

 

난하(난河)는 두 산 사이로 소용돌이치면서 흐른다. 감돌아 흐르는 거센 물결이 돌에 부딪치면서 울려나는 성난 울부짖음은 천지를 뒤흔들어 금방이라도 만리장성을 무너뜨릴 기세다. 만 대의 전차, 만 명의 기병, 만 문의 대포, 만 개의 북이 일시에 움직이고, 치닫고, 쏘고, 두드린다 해도 저 거센 물결이 울부짖는 소리에 견주기엔 부족하다.

난하를 가운데 두고 이쪽 모래사장엔 큰 바위가 우뚝 서 있고 저쪽 제방엔 울창한 버들숲이 뒤덮고 있었다. 이는 마치 두 개의 건강한 수신(水神)이 나아와 좌우로 벌려 서서 성나 요동치는 길고 큰 이무기를 끌어당기고 있는 모습과 흡사했다. 이 곳은 옛날의 전쟁터였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물소리를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집은 산골에 있는데 문 앞에 큰 시내가 있다. 해마다 여름철에 큰 소나기가 내린 다음이면 갑자기 시냇물이 엄청나게 불어난다. 그에 따라 움직이고, 치달리고, 쏘고, 두드리듯 노호하는 물소리를 늘 들었기 때문에 드디어 귀에 젖어 버렸다.

내가 방에 누워 들리는 소리와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대한 관계를 따져 보았다. 솔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리고 계곡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노호하듯 들리고 개구리들이 우는 소리가 교만하게 들리고 얼크러진 피리 소리가 성난 듯이 들리고 천둥치는 소리가 놀랍게 들리고 차 끓이는 소리가 고아하게 들리고 거문고 곡조가 애절하게 들리고 문풍지 소리가 의아스럽게 들리는 것은 모두 소리를 정상적으로 들은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이 품고 있는 마음에 의해 그렇게 들리는 것일 뿐이다.

내가 한밤중에 난하를 아홉 번이나 건넜다. 이 난하는 새외(塞外)에서 흘러와 만리장성을 뚫고 유하(楡河)·조하(潮河)·황하(黃河)·진천(鎭川) 등의 물과 합친다. 이 물이 밀운성(密雲城) 밑을 지나면서 백하(白河)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내가 어제 배로 건넌 백하는 바로 이 만리장성 밑에서 노호하며 흐르는 난하의 하류이다.

이에 앞서 요하(遼河)를 건널 때는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은 볼 수 없었고 모든 신경이 물소리에만 집중되었는데, 그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일었다.

내가 그제야 그 이치를 깨달았다. 마음이 깊은 사람은 보고 듣는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반대로 보고 듣는 것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은 보고 듣는 것이 분명하면 할수록 그것이 도리어 병통이 되는 것이다.

지금 내 말을 몰던 어부가 말발굽에 발을 채여 뒷수레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고삐를 잡고 말을 난하 위에 띄운 다음 말 안장 위에 다리를 오그리고 올라앉았다. 아차 한번 떨어지는 날엔 물고기 밥이 되는 판이다. 그러나 나는 넘실거리는 난하를 땅바닥인 것처럼, 입고있는 옷인 것처럼, 내 몸뚱이인 것처럼, 나의 성정(性情)인 것처럼 여겼더니 드디어 태연해지면서 무서움은 사라지고 거센 물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 아홉 번 건너는 동안 마치 의자 위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상황은 모두 외물(外物)인 것이다. 이런 외물이 늘 눈과 귀를 혼란시켜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 들음의 평정을 잃게 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더구나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이 난하를 건너는 것보다 더 험난하고 위태로운 것이어서 보고 듣는 것에 빠져 정당한 삶을 해치기가 일쑤인 데야 말할 게 뮈 있겠는가.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 다시 집 앞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이를 증험해 보리다. 또 교묘한 방법으로 일신의 영달을 꾀하면서 자신의 총명을 자랑하는 자에게도, 이를 들어 경고하고자 한다.

박지원(朴趾源) : 1737-1805.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본관은 반남(潘南).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실학의 거두이다. 이 글은 <熱河日記> 권5 산장잡록(山莊雜錄)에 들어 있는 [一夜九度河記]를 초역한 것이다.

 

심화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수원교양강좌 자료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