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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허전(管子虛傳)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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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허전(管子虛傳)

관씨의 본성은 죽씨(대나무)인데, 그의 선조가 황제에게 발탁되어 황종의 음률을 만들게 되었다. 후손 고죽군이 자허를 낳았는데, 그는 속이 비고 외모는 고결하였다. 마침 황제가 인재를 구하는 명을 내리자 생성옹은 자허를 천거한다. 이에 황제는 상림원에서 그를 빈(賓)으로 맞았으나, 자허는 오히려 인사도 없이 뻣뻣하고 거만하였다. 황제는 그의 오만한 절개를 높이 사서 "가슴 속 서말이나 되는 가사를 없앨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자허는 뒤에 아들 여덟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곧 붓·화살· 퉁소· 제기·죽간·낚싯대·지팡이·발 그리고 기춘현부인이다. 관자는 그뒤 60세에 두심( 心)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 후손들은 대대로 위천에 봉해져 뭇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요점 정리

연대 : 조선시대

작자 : 이덕무

형식 : 가전체

주제 : 관자허 (대나무) 예찬

출전 : '청장관전서' 중 '영처문고'에 수록되어 있음.

내용 연구

두심병 : 해충이 갉아 먹는 병

이해와 감상

 

대나무를 의인화한 가전체 작품으로 고죽군의 아들 자허가 생성옹에 의해 황제에게 천거되어 크게 쓰임을 받고 자손들이 번창하였다는 내용이다. 황제의 조서에는 화왕(모란)과 초제(파초)를 물리치고 굼에 동군이 보낸 한 신하의 형상을 문여가(송대의 서화가)에게 명하여 화상으로 그려 전국에 구하다가 얻은 인물이 관자허라 하였다. 관자허는 속이 비고 밖은 꿋꿋의 여덟 아들은 모두 죽구(竹具) 들이며, 외딸은 부채를 형상화하였다. 결말에는 '사기'의 필법을 빈 찬(贊)이 붙어 있다. 대나무의 절개를 의인화한 최식의 '죽존자전', '이곡의 '죽부인전', 정수강의 '포절군전' 등으로 창작 기교가 뛰어나다.

이해와 감상1

 

조선 후기에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가전체소설(假傳體小說).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 중 ≪영처문고 叛處文稿≫에 실려 있다. 〈관자허전〉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관씨(管氏)의 본성은 죽씨(竹氏 : 대나무)이다. 그의 선조가 황제에게 발탁되어 황종의 음률을 만들게 되었다. 후손 고죽군(孤竹君)이 자허(子虛)를 낳았다. 그는 속이 비고 외모는 고결하였다. 마침 황제가 인재를 구하는 명을 내리자 생성옹(生成翁)은 자허를 천거한다. 이에 황제는 상림원(上林苑)에서 그를 빈(賓)으로 맞았다.

그러나 자허는 오히려 인사도 없이 뻣뻣하고 거만하였다. 황제는 그의 오만한 절개를 높이 사서 “가슴속 서 말이나 되는 가시를 없앨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자허는 그 뒤에 아들 여덟과 딸 하나를 두었다. 곧 붓(筆 필)·화살(箭 전)·퉁소(簫 소)·제기(頭 변)·죽간(簡 간)·낚싯대(竿 간)·지팡이(莖 공)·발(簾 렴) 그리고 기춘현부인(菫春縣夫人)이다. 관자허는 그 뒤 60세에 두심병(亘心病)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손들은 대대로 위천에 봉해져서 뭇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관자허전〉은 고죽군의 아들 자허가 생성옹에 의해 황제에게 천거되어 크게 쓰임을 받고 자손들이 번창하였다는 것으로서 대나무를 의인화한 가전체작품이다.

 

황제의 조서에는, 화왕(花王 : 모란)과 초제(草帝 : 파초)를 물리치고 꿈에 동군(東君)이 보낸 한 신하의 형상을 문여가(文與可 : 宋代의 書怜家)에게 명하여 화상으로 그려 전국에 구하다가 얻은 인물이 관자허라 하였다.

관자허는 속이 비고 밖은 꿋꿋하여 고인의 풍도와 군자의 절개가 있다고 추천되었다. 그의 여덟 아들은 모두 죽구(竹具)들이며 외딸은 부채를 형상화하였다.

 

〈관자허전〉의 결말에는 ≪사기 史記≫의 필법을 빈 찬(贊)이 붙어 있다. 대나무의 절개를 의인화한 최식(崔寔)의 〈죽존자전 竹尊者傳〉, 이곡(李穀)의 〈죽부인전 竹夫人傳〉, 정수강(丁壽崗)의 〈포절군전 抱節君傳〉등과 더불어 창작기교가 뛰어난 작품이다.

≪참고문헌≫ 管子虛傳의 假傳的性格(蘇在英, 語文論集 23, 高麗大學校國文學硏究會, 198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본관 전주(全州). 자 무관(懋官). 호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 정종(定宗) 별자(別子) 무림군(茂林君)의 후손. 통덕랑(通德郞) 성호(聖浩)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얼(庶孼) 출신으로 빈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박람강기(博覽强記)하고 시문에 능하여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성대중(成大中) 등과 사귀고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냈으며 이것이 청나라에까지 전해져서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778년(정조 2) 중국 여행 기회를 얻어 청나라의 문사들과 교류하고 돌아왔으며, 1779년에 정조(正祖)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여기에 서얼 출신의 우수한 학자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수위(首位)로 뽑혔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규장각에서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典通編)》 《무예도보(武藝圖譜)》 《규장전운(奎章全韻)》 《송사전(宋史筌)》 등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하였으며, 많은 시편(詩篇)도 남겼다. 서울 지도인 <성시전도(城市全圖)>를 보고 읊은 백운시(百韻詩)가 정조로부터 ‘아(雅)’라는 평가를 받아 호를 아정(雅亭)이라 새로이 칭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검서를 겸한 채 외직에도 나가서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등을 거쳤으며 1791년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가 되었다가 《홍문관지(弘文館志)》를 교감한 공로로 적성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다.

1793년 병들어 돌아가자, 3년 뒤 그의 재주를 아끼던 정조가 내탕전(內帑錢) 오백 냥을 하사하여 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 8권 4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문자학(文字學)인 소학(小學), 박물학(博物學)인 명물(名物)에 정통하고, 전장(典章) ·풍토(風土) ·금석(金石) ·서화(書畵)에 두루 통달하여, 박학(博學)적 학풍으로 유명하였다.

따라서 북학을 고창하지는 않았으나 명(明)과 청(淸)나라의 학문을 깊이 이해하고 고염무(顧炎武) 이래 청조 고증학의 성과를 수용하여 실질적으로는 북학을 함으로써 후배들의 청조 고증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로는 이만운(李萬運)의 책을 보완한 역사서 《기년아람(紀年兒覽)》, 사(士)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사소절(士小節)》, 고금의 시화(詩話)를 수록한 《청비록(淸脾錄)》, 명나라 유민(遺民)의 인물지인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 십여 종이 있고, 이들은 《아정유고》 등 문집과 함께 아들 광규(光葵)에 의해 망라되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71권 33책으로 편찬되었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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