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곽학송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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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내면 세계의 사실화

李洧植

 

 

 

1. 작가 프로필

  곽학송은 1953년 <안약(眼藥)>과 <독목교(獨木橋)>로써 ≪문예≫(誌)의 추천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이듬해 그의 대표작 <철로>가 발표됨으로써 그의 문학적 재능은 일찍부터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5년에는 데뷔 이후 계속적으로 발표된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독목교≫란 표제의 단편집을 세상에 내놓은 바 있다.

 

  사실 그가 신문 연재 소설에 힘을 쓰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순수 문학 활동에서 차츰 후퇴하기 이전, 그의 일련의 활동에서 그는 같은 세대의 몇 작가와 함께 각광을 받은 문제 있는 작가로서 기대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근년에 그는 다시 본격 문학 활동으로 돌아와 몇몇 문제 있는 작품을 선보여 주기도 했는데, 그의 초기의 저력과 그간의 긴 인생 경험의 완숙미가 관연 어떠한 조화를 이룰지 한마디로 그의 후기 작품의 행방은 아직 장담할 수 없지 않나 싶다.

  그런 점을 고려하고 또 한편 본 전집에 수록되는 그의 대표작이 초기 작품들인만큼 여기서는 그의 초기작들을 통해 수록 대표작 <철로>의 얘기로 접근시켜 보기로 하겠다.

 

 

2. 초기 작품 세계

  그의 초기 작품의 강렬한 인상은 근대 소설의 지평 위에 있다는 점이다. 실험 소설적 성격이 아니라 근대 사실주의의 전통을 작가 나름으로 소화시켜 보려는 경향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은 스토리의 전개 방식이나 작품의 구조, 시간성, 인물의 성격 창조 및 스타일 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더욱 눈에 띄는 사실은 카메라의 렌즈와도 같은 그의 빠짐 없을 정도로 세밀하고 철저한 묘사 정신에서일 것이다. 가령 <안약>이나 <녹염(綠焰)>을 보면 아주 조그마한 장면 하나하나까지 묘사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사실주의에서 볼 수 있는 묘사의 철저성이라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모파상에게는 <비계덩어리>라는 작품이 있다. 이 소설의 어느 대목에 가면 마차가 출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작가는 친절하게도 거기에 탄 사람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직업·신분·성격·위치·체격·표정·행동 등을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묘사의 충실성이 곧 곽학송의 작품 도처에 보이는데 따라서 그는 근대 소설의 전통 위에 서 있었던 작가라는 점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가 체험한 독특한 시대적 감각을 부여하고 있었다는 점일 거이다. 말하자면 6·25를 치르면서 체험한 현실의 국면-전쟁이나 그에 따른 여러 사실-이 어느 정도 담겨져 있다는 얘기다.

 

  다음 그의 작품은 두 개의 현장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곧 ‘가정의 내부’와 ‘가정의 외부’가 곧 그의 작품 현장이다. 〈안약〉〈환영(幻影)〉〈귀환 후(歸還後)〉〈석양〉이 가정을 무대로 거기서 빚어지는 인간 관계를 그리고 있다면,〈독목교〉〈지구전(持久戰)〉〈녹염〉〈바윗골〉은 가정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 보여지는 공통적인 특색은 심리주의적 경향이다. 그는 미세한 인간 심리의 구석구석을 들추어 내고 있으며, 행동을 통하여 인물의 성격을 창조하기보다 심리 분석을 통하여 인물 창조에 역점을 두고 있다 하겠다. 그리고 비록 스토리 중에서 행동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행동의 동기를 그는 심리 탐구를 통해 조명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심리적 사실주의 작가의 면모를 지니고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린 그의 작품에서 ‘기억의 연금술’이나‘의식의 흐름’같은 신심리주의적 수법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근대적인 심리주의의 수법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편집 《독목교》전편은 통해 확인될 수 있다. 가령 〈독목교〉와〈지구전〉에 모두 전쟁이 나오고 있다. 만약 그가 심리적 요소가 강한 작가가 아니었다면 이 작품들에서 그는 전쟁을 주제로 택했을 것이고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비비드한 행동의 드라마를 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심리주의적 요소가 강했으므로 전쟁은 단지 이 작품들의 배경으로서 이용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그의 작품 〈지구전〉을 살펴보자. 얼핏 제목만 본다면 전쟁의 어느 한 단면을 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사실은 오래도록 계속되어 온 두 인간이 심리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전쟁이 배경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주인공인 ‘나’이상사와 상대역으로 김상사가 등장하는데 왜 주인공 이상사가 김상사를 죽이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른바 심리의 지구전이 그려지고 있다. 그것은 경쟁 심리의 지구전이다. 이러한 콤플렉스의 형성이 주인공 나에게 있게 된 동기를 작가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그들은 학창 시절에 수위를 다투었다는 것, 하사관 교육대를 거쳐 지금까지의 군대 생활을 통하여 늘 주인공 이상사가 경쟁에서 고배를 마셨다는 것-그래서 그 패배 의식에 대한 강한 집념이 주인공인 나에겐 김상사와의 경쟁 의식으로 나타나 일종의 강박 관념으로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쟁은 민소위라는 한 여자를 두고도 일어났으며, 가열한 전투로 전 중대원이 흩어져 버린 후 어느 산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그 극한 상황에서도 그런 심리전은 계속된다. 김상사가 동사(凍死)나 아사(餓死)나 포로보다 자결이 낫다고 주장하자 그것을 마음속으로 시인하면서도 주인공은 우선 살고 보아야 한다고 맞섰다. 이렇게 그들은 언제나 감정의 평행선 위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결국 <지구전>은 이런 경쟁 심리가 빚는 비극의 일면을 전쟁이란 상황을 통해 그려 준 작품이었다. 아무튼 이 작품에서 대충 짐작할 수 있듯이 곽학송의 주제의 하나가 심리주의적 수법을 통한 내면 세계의 콤플렉스의 탐구에 있었기도 하다. 이런 점은 <환영>에서도 다소 보였고, <유성>에서도 나타났던 바다.

 

  그 다음 그의 작품은 대개 일인칭 소설이 많았다는 점도 그 특징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단편집《독목교》에 수록된 작품의 태반이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환영> <지구전> <유성> <석양> 등이 바로 그렇다. 이런 점은 주인공의 심리 표출을 위해 작가가 직접 작품 속에 개입할 수 있는 유리점이 될 수도 있다. 즉 삼인칭 소설일 경우 아무래도 작가와 인물들이 거리를 두게 되므로 객관적 관찰밖에 할 수 없다는 점에 비추어 일인칭 소설은 주인공 '나'와 작가가 동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주관적 관찰을 할 수 있는 편리성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작품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특징은 인정의 세계가 아닐까 한다. 이러한 계열의 작품으로는 <안약> <바윗골> <환영> <귀환 후> <석양>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런 점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작품은 <안약>이다. 이러한 세계는 주지하다시피 우리 나라의 산문 문학에 꾸준히 흘러내려온 일면이 아닐까도 여겨진다.

 

  이런 점의 좀더 구체적 현장을 보기 위해 다음을 보기로 하자.

 

 

3. 선악(善惡)의 작중인물(作中人物)들

  오영수의 작중 인물들이 선하고 착하기만 하듯이 곽학송의 작중 인물 중에서도 그런 인물들이 많다. 그리고 이 인물들의 그 심혼의 깊이 속에서 우리는 곧 앞에서 말한 인정의 세계를 느낄 수 있다.

 

  <안약>의 주인공은 종수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불화로 어머니는 참다 못해 그가 두 살 때 우물에 빠져 죽었고, 그 뒤 홀아비가 된 아버지도 할머니와의 불화로 세상을 비관한 나머지 철도 자살을 했다. 그가 이렇게 일찍 양친을 여읜 것이 바로 할머니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종수와 할머니와의 관계란 보통 상식의 입장에서 본다면 원수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종수는 본바탕이 미움을 모르는 선량하고 착한 인물이다. 그가 군에서 휴가를 얻어 할머니 댁에 들렀을 때 삼촌과 그 집안 식구들에 의해서 할머니가 푸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그는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가냘픈 할머니의 소원을 풀기 위해서 안약을 샀다가 다시 그대로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심경의 추이-이런 데서 우리는 약을 모르는 한 인가의 전형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석양>은 어머니와 아내와의 불화로 아내가 집을 나가게 된 데서 온 한 소시민의 비애의 단면도를 서정화시킨 작품이다. 잔잔한 감정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미움도 분노도 모르는 선의의 한 인물을 영상화시킬 수 있다.

 

  <귀환 후>는 상이 군인 윤호와 동창인 진수와의 우정 관계를 그리고 있다. 변변치 않은 샐러리맨인 진수가 끝까지 자기 집에 기식시키며 보살펴 주려는 부드러운 손길에서 우리는 심원한 인정〔우정〕의 깊이를 잴 수 있다.

 

  이러한 작품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작품이 <바윗골>인 동시에 거기에 나오는 인물의 면모도 차이가 있다. <안약> <귀환 후> <석양>에 등장하는 선의의 인물들에게서 선의 체질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바윗골>의 김인수에게서는 체질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어렴풋한 인식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6·25 동란 중 이북의 마을에 있었던 전쟁을 측면담식으로 엮어 본 작품이다. 아군이 그곳을 점령하자 공산 도배가 물러났고 주인공 김인수는 '바윗골'의 자치대 대장이 되었다. 여기에 문호영감과 그 가족이 등장한다. 문호영감의 아들 종기는 해장이 되자 열렬한 공산 당원이 되어 인수네의 토지를 빼앗는 데 앞장섰고, 그 후 줄곧 양민을 괴롭혔고, 인수네를 괴롭혀 왔으며, 아군이 쳐들어오자 드디어 자취를 감추어 버린 인물로서 나온다. 그러니 문호염감과 그 가족은 인수에겐 적의 가족이요 원수의 가족이다. 이들을 마땅히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의 밑바닥에는 인간 생명에의 존엄성에 대한 신봉이 있었다. 부대장이 그놈의 가족도, 씨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그는 종기가 죽은 것만 확실하다면 구태여 식구들까지 없앨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그는 마을의 자치를 담당하고 있다 해서 인간을 마음대로 죽일 권리가 없다고 자문해 보는 인간형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자치대장 김인수의 정신적 구경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천성이 선할 뿐 아니라 사려 깊고 어떤 주어진 상황에 고민할 줄 아는 인텔리겐차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4. 철로(鐵路)의 세계

  <철로>는 6·25사변이 발발한 날부터 수고된 직후까지의 약 백여 일 동안 수색역에서 근무하던 한 평범한 철도 전신원 현수가 겪는 일을 서술해 나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현수라는 특이하고 독자적인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그 한계성 그리고 개인의 자유가 조직과의 충돌에서 오는 그 비극성 그리고 인간 존재의 어떤 원초적 의미에까지 접근을 시도해 본 작품이다. 주인공 현수는 자기와 상관이 없는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남이 나를 알아주거나 그렇지 않거나 나는 어디까지나 나대로 있는 것'이라는 특출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의 생활 철학이란 '나에게 마련된 영토 안에서, 나에게 부여된 시간 위에서 가장 타당한 해동을 취하면 그만인 것이며' 그 결과가 자기에게 도는 타인에게 어떠하든 아무 뜻이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이다. 어느 의미에서 그는 가장 철저한 에고이스트이다. 역사는 미리 정해진 어떤 궤도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지금 이 시간에 있어서 어쩔 수없이 내킨 행동'만이 중요하다. 전쟁이 발발했다. 다른 사람들은 피난을 간다 야단들이었지만, 그는 별다른 동요를 하지 않는다. 그는 '전쟁이라는 것과 전쟁이라는 윤곽을 나 자신과 격리'시키고 전쟁 전의 자기 생활 그대로를 영위하는 그에겐 포소리가 따뜻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주인공 현수에겐 철도 통신선은 벌서 그의 생명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여기를 떠나서 하루 세 번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아무런 재주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보다도 그는 여기를 떠난 자기의 생활을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이것'의 사실상의 주인이다. 어떤 권력이 개입하여도 그를 '이것'과 떼어놓을 수는 없다. 사실 그에게 달라진 것이라곤 공습이 있다는 것뿐인데 그것도 이젠 무슨 습관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비록 적 치하의 3개월이긴 하지만 현수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만 충실해 왔다.

 

  그런데 수복이 되고 보니 어이없게도 그에겐 부역죄가 씌워졌다. 치안대 요원들은 그가 적 치하에서 당원 이상의 역할을 했다는 것 그리고 전신원인 현수가, 말하자면 통신 현장 종사원이 아닌 현수가, 전주에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진 사실을 들었고 그밖에 용산역 구내와 한강 철교 복구 작업대의 대장이 되어 무지한 사람들을 끌어다가 혹사를 시켰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옛날의 애인이었던 순이가 공산당의 최고 기관의 지령을 받고 현수를 찾아 간 사실 그리고 현수집 방공호에서 시체로서의 발견 - 이 때문에 그는 부역죄가 씌워졌다.

 

  그러나 사실은 이 모든 일이 자기에게 충실해 보려는 행동에서 취해졌을 뿐이다. 그는 국군의 입성을 누구보다도 반가워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의 행위가 반역 행위나 부역 행위로 오인되었던 것이다. 자기에게 충실해 보려 했던 순수한 행위가 사회적인 범죄일 수 있다는 이 모순 그리고 개인의 자유가 조직이나 집단의 힘에 무참히 짓밟혀야 하는 이 현실-작가는 여기에 역점을 두고 있다. 나의 자유 의사의 행동이 남의 눈에 엉뚱하게 비치고 또 엉뚱하게 해석되는 삶의 부조리성, 이에 작가는 존재론적 고민을 보여 주었다. 괴뢰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을 무렵 현수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작업에 동원되었들 때 그는 추위를 잊어버리겠다는 단순한 목적으로 열심히 삽을 놀렸다. 그런데 게으르게 서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작업에 능률을 올리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어쩔 수없이 작업에 열을 올렸다는 이 우화스런 현실, 부역의 죄명으로 취조를 받을 때, 취조원의 '빨갱이놈들 앞에서 뭘 해먹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대답할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내일이나 생활의 양식이 달라질 아무런 이유도 발견 못했던 것이다.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우연한 기회에 철도에 종사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수년간 같은 일을 하여 오는 사이에 어느새 그 일에 익숙해졌으며, 다행히도 그 대가로 굶지 않고 살 수 있었고 또 살아 왔을 뿐이다. 전쟁이 일어나고 공산군이 들어오고 그리하여 나의 주위는 소란해졌으나, 어느새 나는 또 그러한 환경에 완전히 익숙해졌으며 그러한 생활을 석 달 동안 계속한 끝에 다시 그 이전의 상태인 오늘을 맞이하였을 뿐'이라는 것이 현수의 입장이요, 항변이다.

 

  그런데 사회는 현수에게 어떤 책임을 묻고 있다.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의 부조리 앞에 주인공은 속수무책이라 그저 인내로 자기 운명을 수용할 차비를 한다는 것이 마지막 내용이다. 아무튼 이 장편은 곽학송의 다른 작품에 비하여 어떤 문제성을 던져 준 작품이며 이 작품에서 보이고 있는 심리적 통찰은 그의 어느 작품에서나 공통적으로 보였던 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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