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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의 비교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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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의 비교

 

김 문 환 ( 서울대, 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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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 기술과 예술이라는 개념 연합은 대체로 새로운 기술 공학을 조형예술에 적용하는 방식과 연관하여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술과 과학의 상호작용에 비해 예술과 기술 공학의 상호작용이 좀더 눈에 띈다는 점에서 이는 놀라운 일이 못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가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세계에 관한 통찰력과 함께 세계와 관계 맺는 방법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통찰력은 과학적 결과이나 개념들뿐 아니라 과학이 만들어지는 방법에 그 기초를 두기도 한다.

 

예술과 과학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직면 내지 파악하도록 해준다. 따라서 이 둘이 그러한 가능성을 발휘하는 방법들을 비교해 보는 작업이 있음직하다. 그 최종 결과가 예술작품이든 과학이든, 창조 행위는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두 분야 간의 차이들은 이 둘의 본성에 관해 많은 것을 드러내 준다. 물론 예술가가 과학자의 마음 속을 헤아리는 일은 과학자가 예술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나 예술가와 과학자의 창조적인 작업에 대한 기술(記述), 다시 말해서 작업을 주도 또는 동반하는 생각과 감성에 대한 일차적인 설명은 두 분야의 실천자들에게 등불 구실을 할 수 있다. 이때 창조적 작업은 철학적인 관심으로부터 분석될 수 있으므로, 일종의 학제간 연구가 있음직하다.

 

나아가 과학적 개념들 자체가 예술의 어떤 국면들에 대한 이해를 기술하고 보존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개념들은 과학의 제재 또는 작업의 기초로서 활용하는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촉발할 수도 있다. 과학자들이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넘어선 현실(예컨대 아주 작은 것이거나, 우주 또는 굉장히 빠른 속도 등)을 기술 또는 이해하고자 할 때, 그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에 호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직관이란 우리가 일상적 규모에서 대상들을 경험하는 동안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화학자들은 종종 수학적으로밖에는 정확히 표현될 수 없을 만한 새로운 개념들을 발견 또는 창안해내기 위해, 아니면 과학에만 특수한 것은 아닐 터이지만 과학이 빛을 비춰 주어온 새로운 사고방식들을 발견해 내기 위해 새로운 직관을 획득해야만 한다.

 

새로운 과학적 개념들은 그것들이 지닌 시적인 호소력에 덧붙여 예술가의 상상력과 예술적 어휘를 확대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예술적 관심을 자동적으로 보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천진한 생각이라 할 만하다. 이는 새로운 기술공학의 활용이 첨단적인 예술작품의 창조를 보증해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술의 목적이 과학을 예시하는 것이 아님은 세잔의 사과가 원예학의 카탈로그를 예시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술가는 그의 (과학적) 경험을 그의 총체적인 인간적 체험의 일부로 포괄할 수도 있는데, 이 때 그는 고립된 과학적 개념들을 활용하는 대신 과학적 문화를 표현해 내는 것이다.

 

과학적 그리고 기술공학적 세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 중세가 종교와 연관하여 예술을 자리매김했던 것처럼, 과학과 연관하여 예술을 자리매김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으로 예술과 과학의 비교는 양자에 대한 좀더 나은 이해를 이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예술과 과학이라는 개념 복합은 여러 가지로 고찰될 수 있겠다. 첫째로 예술과 과학에서의 창조적 과정의 유사성과 차이성에 주목하면서 분석하고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로 과학적 개념들에 비추어 예술을 점검하거나, 과학자들의 눈을 통해 예술과 과학이 대조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술이 어떻게 과학적 속성들의 직관적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를 보일 수도 있다. 셋째로 과학적 개념들이 예술을 촉발하거나 예술을 위해 필요한 구조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될 수도 있다. 또한 그 반대로 예술이 과학적 탐구에 박차를 가하는 방법이 예시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주로 첫째 고찰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2

 

예술과 과학에서의 작업 과정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들을 고려함에 있어서, 실험과학자들과 조형예술가들을 비교하는 것이 쓸모가 있음직하다. 실험과학자는 그 자신의 자료로부터 출현할 정합적인 패턴을 구한다. 이 패턴은 자연 속에 항상 있어온 것처럼 보이는 자기 지속적인 통일성을 드러낸다. 화가의 작업과정도 아주 비슷하다. 왜냐하면 그 역시 캔버스 위에 그려진 붓자국들 속에 전시된 의미를 구하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창조 과정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최종적 예술작품 속에 영구히 보존된다. 이렇게 해서 실험과학자들과 조형예술가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장인으로서의 특징을 지닌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자료들의 산출과정을 통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현실을 발견해내기 위해 그 자료들을 지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각이 감각적인 입력들로부터 수동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앞선 지식과 개인적인 가정들이 새로운 지각 가능한 신호들의 손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지각과 상상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비슷한 역할들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실 안의 실험과학자와 화실 안의 예술가를 한 번 유심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실험과학자는 앞선 가설들의 예견들 중 일부가 옳은지 그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그것들을 반드시 점검하고 있다는 부정확한 가정을 불식하기 위해 그의 작업과정을 되돌아본다.

 

이러한 관념은 가설의 제안과 그 후속적 실험 점검이 아주 다른 시간에 일어났던 초기 과학의 경우 온당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오늘날에도 똑같은 이유로 대과학(예컨대 우주탐색과 고에너지 물리학)’에서는 온당하다. 오늘날 우리는 가설에 대한 실험적 답이 , 아니오가 아니라 지금까지 예측할 수 없는 어떤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실험과학자는, 좋은 가설이란 자신의 자료들을 근거로 해서 그 자신에 의해서만 제안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관찰자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제공하는 관념들에 의하지 않고서는 사실이 사실로서 관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저명한 실험주의학자인 피터 메더워가, ‘순진한 또는 결백한 관찰이라는 생각은 철학자의 가정에 불과하며, 나아가 과학적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

 

 

능동적인 지각이 과학적 발견에서 갖는 타당성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과학적 지식에 대한 글들로 유명하기도 한 금세기의 뛰어난 화학자인 마이클 폴라니가 제공한다. 그에 따르면, 발견은 초점적으로 특수화할 수 없는 분자들의 재조직화를 통해 일어난다. “그것이 미리 숨어서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함으로써만 우리는 그것을 열정적으로 찾아 들어갈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지각과 상상작용이 실험주의자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능동적인 과정의 존재를 잘 보여준다. 이 과정은 너무나 개별적이어서 밖에 머물고 있는 예술비평가나 자연철학자들은 거의 탐지할 수 없다. 이 개인적 과정은 생생하게 지켜져야 한다. 이러한 언명은 실험적 탐색에서 발견을 현실의 새로운 단편을 개성적으로 인식케 하는 과정으로 간주하는 견해를 뒷받침해 준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경험, 깨달음의 느낌은 시간과 더불어 증진한다. 이러한 느낌은 발견된 사실의 객관적인 가치와 관계되기보다, 자연을 이해하려는 학자의 태도에 의존한다는 인상을 준다.

 

예술적 작업에서 능동적인 지각이 지니는 타당성은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브라크, 미로, 그리고 클레 같은 화가들은 최초의 생각과는 달라진 초점을 향해 시행착오를 거듭한다. 그들의 작업은 현실의 새로운 단편이 그에게 나타났을 때, 그러면서도 일관성이 나타날 때 완성된다. 이 화가들에 의해 예술작업에 고유한 것으로 언급된 생동감은 이러한 자율적인 일관성의 지속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이는 과학자에 의해 발견되어 현실의 단편에서 유래된 언제나 거기 있어온 것의 감정과 평행되는 느낌이라 할 만하다. “예술적 과정을 거치면서 작품은 예술가를 형성해가는 방식으로 형태를 갖추면서 자신을 예술가에게 지시한다.”는 현상학적 미학의 언명은 발견자를 매혹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진리에 관한 앞에서의 언급과 평행을 이룬다. 프랑스의 현상학자 뒤프렌 역시 예술가는 그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중에 자신을 창조한다고 말한 바 있다. 단순히 그것을 꿈꾸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창조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일차적인 요구는 그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으로서, 이는 우리가 보아온 대로 진정한 학자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3

 

이상에서 우리는 실험과학자들과 조형예술가들의 발견과정이 다 함께 능동적인 지각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물론 예술과 과학 또는 좀더 일반화해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대립적인 문화들을 대표한다는 생각은 상당히 뿌리깊다. 그러기에 좀더 다각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과 과학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몇몇 항목들을 좀더 분석적으로 점검해 보도록 한다.

 

첫째, 예술에 적용된 것으로서의 창조의 개념과 과학에 적용된 것으로서의 발견의 개념의 직접적 관련이 별로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 볼 만하다. 무엇보다도 과학은,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했다고 가정되듯이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구성이요, 다른 말로 하면 창조이다. 프랑스 철학자 바슐라르는 이를 화학의 예를 들어 예시한 바 있다. 화학은 그 자체로는 자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 순수함을 정교한 절차들의 결과인, 순수한 요소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도 아주 작위적인 것은 아니지만, 인간정신의 피조물들인 개념들을 연결한 것임에 틀림없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술은 구성, 창조일 뿐 아니라 발견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시대들과 장소들로부터 나온 논리들 사이에 발견되는 유사성들은 비슷한 원형의 발견을 보여주고자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인간의 마음과 손이 해낸 공통작업의 증거이다. 형태들과 색채들의 어떤 상상적인 배열들을 다른 배열들과는 달리 옳다고 보는 보통으로 경험되는 감정은 그러한 배열들이 창조라는 단어가 함축코자 할지도 모르는 것처럼 작위적이지 않고, 발견될 수 있는 무엇인가에 상응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예술가들이 형태들을 상상해내고 옳게 느껴질 때까지 그것들을 수정해 가는 절차는 상징적인 실험들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모든 과학자들은 그들의 사고가 가장 깊은 수준들에서는 비언어적임을 아마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것은 형태, , 상호작용과 더불어 수행되는 상상적인 실험이다. 예술가의 마음속에 살아남은 형태들의 이 적자생존에다 흥미로운 다윈주의적 해석을 가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예술과 과학에 적용된 것으로서의 창조와 발견이라는 단어들이 지닌 작위성 때문에, 양자역학에서 소립자와 파장이라고 구별되는 개념들이 파장-입자라는 개념 속에 짜여지듯이, ‘창조-발견이라는 말로 대체하자는 제안까지도 있다.

 

둘째, 동화와 조정의 문제를 생각해 볼 만하다. 예술가들은 종종 그들이 사용하는 재료들과의 투쟁에 관해 이야기하고, 재료가 예술작품을 제작해 가는 중에 때때로 그림을 떠올리는 방법에 대해 기술한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적합하도록 재료를 형태짓지만, 반대로 재료와의 연계가 그들의 생각을 수정한다. 극단적인 경우, 예술가의 생각은 사용된 재료로부터 유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은 그것이 생각을 지웠을 때 완성된다는 브라크의 말은 바로 이를 뜻한다. 대부분의 서양화가들은 그림을 만들어가고 있는 동안 그들의 회화적 생각이 진보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들은 그 절차가 예술에만 특유한 것처럼 볼지 모른다.

 

그러나 재료와 생각 간의 이러한 투쟁은 과학에서 실험적 방법의 특색인 이론과 실험 사이의 투쟁과 원리상 다르지 않다. 과학적 제작을 기술하기 위해 도입된 인식론적인 개념들인 동화 조정의 메커니즘이라는 말이 여기에 잘 들어맞는다. 그림을 제작하는 중에 예술가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재료가 자신의 회화적 생각에 들어맞도록 동화시키거나, 반대로, 생각을 재료에 맞춰 조정한다. 같은 방법으로, 과학자들은 실험들을 이론에 동화시키거나, 반대로 최초의 이론에 들어맞을 수 없는 실험적 사실에 맞춰 이론을 조정한다.

 

이념(생각)과 물질(재료)의 상호작용은 과학에서보다 예술에서 더욱 원초적이고 본능적이지만, 전반적인 메커니즘들은 동일하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가 사용하는 생각과 재료의 이중적 상호작용은 회화적 생각들의 다윈주의적 선택이라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실상 동화 조정이라는 이중적 메커니즘은 진화를 연구하는 생물학자가 자신의 경험을 따르는 인식론에 도입한 것이다.

 

셋째, 동일시와 형상적 사고의 문제를 생각해 볼 만하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처럼 일부의 과학자들은 언어들로 생각하지 않고 정신적 형상들과 근육적 긴장들로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과학적 생각들이 그에게 이러한 형식들로 다가오는 방법에 대해 기술한 바 있다. 이 형상들을 그의 매우 진전된 추리단계에까지 이용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언어와 공식으로 번역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곤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그 초기 단계에서 사고의 가장 충실한 표현인 셈이다.

 

예술의 언어는 특정한 질서 속에 조립된 기호들로 구성되며, 예술가는 그가 재현코자 하는 대상과의 내적, 근육적 동일시에 의해 기호들을 창조한다. 예컨대, 마티스는 나 자신을 나무와 동일시한 이후에, 나는 나무와 닮은 대상을, 나무의 기호를 창조한다.”고 쓴 바 있다. 중국의 소동파도 비슷한 글을 남겨놓고 있다. “대나무를 그리기 전에, 그것을 안에서 키워야 한다. 그러면 손에 든 붓과 더불어, 응시하는 두 눈과 더불어, 대나무의 그림이 네 앞에 나타난다. 그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것을 잡아채야 한다. 사냥꾼이 나타나면 산토끼가 도망치듯이, 빠르게 그것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거의 환상적인 이러한 동일시가 예술에만 특유한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형태, , 상호작용으로서 수행되는 상상적 실험에 온전히 집중할 때, 자신을 단백질의 분자구조와 동일시한다는 기록이 이를 보증한다.

 

요컨대 과학은 대부분 논리적 및 분석적 사고에 기초하고, 예술은 주로 상상적 및 종합적 사고에 기초한다는 구별이 제법 널리 통용되는데, 이러한 구별은 실로 인위적이며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은 그들이 해내고자 한 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두 종류의 사고 모두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해서 예술과 과학이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는 신념은, 예술이 감각지각들의 잠재의식적 영역으로부터 유래하는 반면, 과학은 합리적인 숙고로부터 유래한다고 고려되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러나 과학적 창조도 예술적 창조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인 것에 의해 촉발된다. 또한 어떤 예술작품도 궁극적으로는 과학자가 과학적 연구에서 채용하는 합리화에 이르는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객관화된다.

 

물론 예술과 과학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들은 방법들에서, 결과에서 그리고 개인적 참여들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들을 통일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존재에서 샘솟고 인간존재에 전달되는 정신이다.

 

예술과 과학의 실천가들 사이에는 많은 유사성이 존재한다.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은 모두 고전적 또는 아폴로적’, 아니면 낭만적 또는 디오니소스적으로 구별될 수 있다. 전자는 의식적인 사고에 의해 이끌리는 한편, 디오니소스적 유형은 잠재의식적인 것으로부터 샘솟는 직관에 의해 주도된다. 예술가들과 과학자들 속에서 잠재의식적인 원천들로부터 기원하는 창조성은 가르쳐질 수 없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 전망들 속에 형성된 새로운 예술적 이념들 안에, 그리고 자연 또는 우주의 특정한 국면들에 관한 과학적 이념들 속에 자신을 드러낸다. 예술가들과 과학자들 가운데 아폴로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예술과 과학의 실천들 가운데 좀더 철저하고 체계적인 방법들을 찾을 필요를 제각기 충족시킨다. 그들은 디오니소스적 사람들이 예술과 과학에서 모두 세계 속으로 옮겨 놓은 것을 강화시키면서 안정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의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생활들을 기초로 그의 세계에 관해 은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고, 그 자신의 창조적 경험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은유는 기호와는 달리 형식을 창조하여 단순히 다른 것을 대표하거나 유용한 소통 수단으로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내재적 현실과 외재적 현실의 의식적, 무의식적 일치로부터 샘솟는다. 만일 자아와 세계의 변형을 통해 삶의 긍정이 창조적이라면 창조성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많은 활동 속에서 가장 적절한 요소라 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이름 없이 되어감 때문에 추적해 가는 것이 궁극적 사고라 한다면, 이는 예술가와 과학자는 물론 그들의 작업과 맞선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것이어야 한다.물론 예술과 과학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술가들이 기호들 사이에 또는 그들이 사용하는 재료에서 수립하는 질서와 과학자들이 자연에서 발견하는 질서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재료에서 질서를 발견하는 과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술가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재료 또는 기호들 위에 질서를 부여한다. 과학자들이 발견하는 자연 법칙들과 예술가들이 부여하는 다소간 작위적인 규칙들(예컨대 황금분할) 사이에 존재하는 대조가 예술가들에게 자유라는 교과를 배울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자유는 부분적으로, 이른바 추상과 관련된다. 예컨대 1893년 벨기에의 건축가 헨리 반 데 벨데는 비구상적 회화를 그린 바 있는데, 그 제목이 바로 추상이었다. 그림을 바깥 세계를 재현시켜야 하는 의무로부터 풀어놓으면, 추상은 화가에게 회화적 진리를 정의해야 할 의무를 부과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야는 이성이 잠들면, 마음은 괴물들을 만들어낸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 구절을 달리 푼다면, 우리는 마음이 깨어날 때 그것이 매혹적인 자유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진리는 명상을 통해 이루는 미적 확신이다. 따라서 과학적인 정당화 방법은 예술가의 작업에 대해 일견 위협적이다. 인간의 밖을 보는 과학자에게 진리는 일반적인 증명 형식을 사용해서 보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증명의 규칙은 과학자들의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 무언의 동의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새로운 개념은 기존하는 개념 개체와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일관성의 형식이 발견될 때까지 모든 것이 시험되어야 한다. 이러한 증명 대신, 예술가는 그의 작품의 일관성과 형식적 질들에 기초한 진리의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술가는 외적 강제들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진보해야 하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내적 강제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이 진보는 무가치하다.

< 과학과 사상 13, 1996년 여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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