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전(孔方傳)
by 송화은율공방전(孔方傳) / 임춘
공방(孔方)의 자(字)는 관지(貫之)다. 공방이란 구멍이 모가 나게 뚫린 돈, 관지는 돈의 꿰미를 뜻한다. 그의 조상은 일찍이 수양산 속에 숨어 살면서 아직 한 번도 세상에 나와서 쓰여진 일이 없었다.
그는 처음 황제(黃帝) 시절에 조금 조정에 쓰였으나 워낙 성질이 굳세어 원래 세상일에는 그다지 세련되지 못했다. 어느 날 황제가 상공(相工)을 불러 그를 보았다. 상공은 한참 들여다 보고 나서 말한다.
"이는 산야(山野)의 성질을 가져서 쓸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그러하오나 폐하께서 만일 만물을 조화하는 풀무나 망치를 써서 그 때를 긁어 빛이 나게 한다면, 그 본래의 바탕이 차차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원래 왕자(王者)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그릇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 사람을 저 쓸모 없는 완고한 구리쇠와 함께 내버리지 마시옵소서." 이리하여 공방은 차츰 그 이름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뒤에 일시 난리를 피하여 강가에 있는 숯 굽는 거리로 옮겨져서 거기에서 오래 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천(泉)은 주나라의 대재(大宰)로서 나라의 세금에 관한 일을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천(泉)이란 화천(貨泉)을 말한다.
공방은 생김새가 밖은 둥글고 구멍은 모나게 뚫렸다. 그는 때에 따라서 변통을 잘 한다. 한번은 한나라에 벼슬하여 홍려경(鴻 卿)이 되었다. 그 때 오왕(吳王) 비(妃)가 교만하고 참람(僭濫)하여 나라의 권리를 혼자서 도맡아 부렸다. 방은 여기에 붙어서 많은 이익을 보았다. 무제 때에는 온 천하의 경제가 말이 아니었다. 나라 안의 창고가 온통 비어 있었다. 임금은 이를 보고 몹시 걱정했다. 방을 불러 벼슬을 시키고 부민후(富民侯)로 삼아, 그의 무리인 염철승(鹽鐵丞) 근(僅)과 함께 조정에 있게 했다. 이 때 근은 방을 보고 항상 형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방은 성질이 욕심이 많고 비루(卑陋)하고 염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재물을 맡아서 처리하게 되었다. 그는 돈의 본전과 이자의 경중을 다는 법을 좋아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질그릇이나 쇠그릇을 만드는 생산 방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백성으로 더불어 한 푼 한 리의 이익이라도 다투고, 한편 모든 물건의 값을 낮추어 곡식을 몹시 천한 존재로 만들고 딴 재물을 중하게 만들어서, 백성들이 자기들의 본업인 농업을 버리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맨 끝인 장사에 종사하게 하여 농사짓는 것을 방해했다.
이것을 보고 간관(諫官)들이 상소를 하여 이것이 잘못이라고 간했다. 하지만 임금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방은 또 권세 있고 귀한 사람을 몹시 재치 있게 잘 섬겼다. 그들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자기도 권세를 부리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등에 업고 벼슬을 팔아, 승진시키고 갈아치우는 것마저도 모두 방의 손에 매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한다 하는 공경(公卿)들까지도 모두들 절개를 굽혀 섬기게 되었다. 그는 창고에 곡식이 쌓이고 뇌물을 수없이 받아서 뇌물의 목록을 적은 문서와 증서가 산처럼 쌓여 그 수를 셀 수 없이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상대하는 데 잘나거나 못난 것을 관계하지 않는다. 아무리 시정 속에 있는 사람이라도 재물만 많이 가졌다면 모두 함께 사귀어 상통한다. 때로는 거리에 돌아 다니는 나쁜 소년들과도 어울려 바둑도 두고 투전도 한다. 이렇게 남과 사귀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을 보고 당시 사람들은 말했다.
"공방의 한 마디 말이 황금 백 근만 못하지 않다."
원제(元帝)가 왕위에 올랐다. 공우(貢禹)가 글을 올려 말한다.
"공방이 어려운 직책을 오랫동안 맡아 보는 사이, 그는 농사가 국가의 근본임을 알지 못하고, 오직 장사꾼들의 이익만을 두호(斗護)해 주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쳐서 국가나 민간 할 것 없이 모두 곤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위에 뇌물이 성행하고 청탁하는 일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대체로 '짐을 지고 또 타게 되면 도둑이 온다[負且乘 致寇至].' 한 것은 '주역'에 있는 분명한 경계입니다. 청컨대 그를 파면시켜서, 모든 욕심 많고 비루한 자들을 징계하시옵소서."
그 때 정권을 잡은 자 중에는 곡량(穀梁)의 학문을 쌓아 정계에 진출한 자가 있었다. 그는 군자(軍資)를 맡은 장군으로 변방을 막는 방책을 세우려 했다. 이에 방이 하는 일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를 위해서 조언했다. 임금은 이들의 말을 들어서 마침내 방은 조정에서 쫓겨나는 몸이 되었다.
그는 자기 문인들에게 말했다.
"내가 전일에 폐하를 만나 뵙고, 나 혼자서 온 천하의 정치를 도맡아 보았었다. 그리하여 장차 국가의 경제가 넉넉하고 백성들의 재물이 풍족하게 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제 까닭 없는 죄로 내쫓기고 말았구나. 하지만, 나가서 조정에 쓰이게 되거나 쫓겨나 버림을 받는 것이 내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손해될 것이 없다. 다행히 나의 이 목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 아주 끊어지지 않고 이렇게 주머니 속에 감추어져 아무말도 없이 용납되고 있다. 이제 나는 부평과 같은 행색으로 곧장 강회(江淮)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가련다. 약야계(若冶溪) 위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낚아 술을 마시며, 때로는 바다 위의 장사꾼들과 함께 배를 타고 떠돌면서 남은 인생을 마치련다. 제 아무리 천 종의 녹이나 다섯 솥의 많은 음식인들 내 어찌 조금이나 부러워해서 이것과 바꾸겠느냐. 하지만 내 심술이 오래 되면 다시 발작할 것만 같다."
진(晋)나라에 화교(和嶠)란 사람이 있었다. 공방의 풍도를 듣고 기뻐하여 사귀어 여러 만 냥의 재산을 모았다. 이로부터 화교는 공방을 몹시 좋아하는 한 가지 버릇을 이루고 말았다. 이것을 본 노포(魯褒)는 논(論)을 지어 화교를 비난하고, 그릇된 풍속을 바로잡기에 애썼다.
화교의 무리 중에서 오직 완적(阮籍)만은 성품이 활달해서 속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의 무리와 어울려 술집에 다니면서 취하도록 마시곤 했다. 왕이보(王夷甫)는 한 번도 입으로 방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없었다. 방을 가리켜 말하려면 그저 '그것'이라고 했다. 맑은 의논을 하는 사람들에게 방은 이렇게 천대를 받았다.
당(唐)나라 세상이 되었다. 유안(劉晏)이 탁지판관(度支判官)이 되었다. 재산을 관리하는 벼슬이다. 당시 국가의 재산이 넉넉지 못했다. 그는 다시 임금께 아뢰어 방을 이용해서 국가의 재용(財用)을 여유 있게 하려고 했다. 그가 임금에게 아뢴 말은 식화지(食貨志)에 실려 있다.
그러나 그 때 방은 죽은 지 이미 오래였다. 다만 그의 제자들이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을 국가에서 불러서 방 대신으로 쓰게 되었다. 이리하여 방의 술책이 개원(開元)·천보(天寶) 사이에 크게 쓰여졌고, 심지어는 국가에서 조서를 내려 방에게 조의대부소부승(朝議大夫少府丞)을 추증하기까지 하였다.
남송 신종조(神宗朝) 때에는 왕안석(王安石)이 정사를 맡아 다스렸다. 이 때 여혜경(呂惠卿)도 불러서 함께 일을 돕게 했다. 이들이 청묘법(靑苗法)을 처음 썼는데, 이 때 온 천하가 시끄러워 아주 못 살게 되었다.
소식(蘇軾)이 이것을 보고 그 폐단을 혹독하게 비난하여 그들을 모조리 배척하려 했다. 그러나 소식도 도리어 그들의 모함에 빠져서 쫓겨나 자신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의 모든 선비들은 그들을 감히 비난하지 못하였다.
사마광이 정승으로 들어가자 그 법을 폐지하자고 아뢰고, 소식을 천거하여 높은 자리에 썼다. 이로부터 방(方)의 무리는 차츰 세력이 꺾이어 다시 강성하지 못했다.
<생략 부분의 줄거리 : 남송 때에 소식에 의하여 돈은 다시 배척되었고, 방의 아들은 윤은 경박하여 세상의 욕을 먹었고, 뒤에 수형령이 되었으나 장물죄가 드러나 사형되었다고 한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서 두 마음을 품고 큰 이익만을 좇는 자를 어찌 충성된 사람이라고 하랴. 방이 올바른 법과 좋은 주인을 만나서, 정신을 집중시켜 자기를 알아 주어서 나라의 은혜를 적지 않게 입었었다. 그러면 의당 국가를 위하여 이익을 일으켜 주고, 해를 덜어 주어서 임금의 은혜로운 대우에 보답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도리어 비를 도와서 나라의 권세를 한몸에 독차지해 가지고, 심지어 사사로이 당을 만들기까지 했으니, 이것은 충신이 경계 밖의 사귐이 없어야 한다는 말에 어긋나는 것이다.
방이 죽자 그 남은 무리들은 다시 남송에 쓰여졌다. 집정한 권신(權臣)들에게 붙어서 그들은 도리어 정당한 사람을 모함하는 것이었다. 비록 길고 짧은 이치는 저 명명(冥冥)한 가운데 있는 것이지만, 만일 원제(元帝)가 일찍부터 공우(貢禹)가 한 말을 받아들여서 이들을 일조에 모두 없애 버렸던들 이 같은 후환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만 이들을 억제하기만 해서 마침내 후세에 폐단을 남기고 말았다. 그러나 대체 실행보다 말이 앞서는 자는 언제나 미덥지 못한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출전 :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요점 정리
작자 : 임춘
갈래 : 가전체
성격 : 전기적(傳記的 : 한 사람의 일생 동안의 행적을 적은 기록), 풍자적, 우의적(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인 뜻을 나타내거나 풍자함. 또는 그런 의미), 교훈적
구성 : 공방의 가계에 대한 약전
가전체의 구성 |
사물의 가계 |
사물의 성격 및 특성 |
사신의 평가 |
공방전의 구성 |
공방의 가계 |
공방의 성격 및 특성 |
공방에 대한 사신의 평가 |
수양산에 살던 조상과 공방의 아버지 천을 소개/ 황제가 상공을 불러 공방의 조상을 세상에 쓰도록 함 |
욕심 많고 비루하고 염치가 없는 공방은 부정을 일삼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함 / 공방이 탐욕스러운 성품으로 처세를 잘해 권세를 잡게 됨 |
이利를 좇은 공방은 충신이 아니며 미리 없앴다면 후환을 없앨 수 있었을 것임 / 간관들이 공부의 치부 행위를 비난하여 조정에서 쫓겨남 |
수사법 : 의인법
제재 : 돈(엽전)
주제 : 경세(經世 : 세상을 다스림)에 대한 비판 , 돈을 탐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 배금주의(拜金主義 :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숭배하여 삶의 목적을 돈 모으기에 두는 경향이나 태도) 혹은 황금만능주의 비판
인물 : 겉은 둥글고 속은 모나고 욕심이 많고 염치가 없는 부정적 성격의 소유자로 투기와 오락을 일삼고 권세를 빙자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중적 인물로 공방의 외양을 통해 '돈'이 가진 이중성을 우의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즉 '돈'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지만, 그 돈 때문에 인간이 탐욕스러워질 수 있다는 교훈을 드러내고 있다.
모양 |
성품 |
쓰임새 |
겉은 둥글지만 속은 모가 남(겉은 긍정적이지만 속은 부정적임) |
때에 따라 변통을 잘 하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돈만 있으면 사귐. |
잘 쓰면 국익에 도움이 되지만, 잘못 쓰면 나를 좀먹고 백생을 해침 |
내용 : 수양산에 은거하다가 황제 때부터 기용된 공방의 조상 이야기가 발단을 이룬다. 방의 인품은 둥글고 가운데 구멍이 네모나고 추시(趨時 : 시속(時俗 : 그 시대의 풍속)을 따름)로 웅변을 잘 하여 역대에 출사(出仕 : 벼슬을 하여 관청에 출근함)를 잘 하였으나, 탐욕하고 절조(절개와 지조)가 적고 백성과 이익을 다투며 물가를 오르내리게 하고 곡식을 천히 여기는 등 행실이 나빠 후일에는 뇌물받은 죄로 죽임을 당했다.
의의 : '국순전'과 함께 우리나라 문헌상의 최초의 가전체 작품으로 '공방전'은 돈을 의인화한 작품이기 때문에 현대의 삶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특히,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여 여러 가지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도 '돈'이 사회적 폐단을 낳을 것이며, 이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도 지배를 받게 될 것이므로 이를 경계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특징 : 동전을 의인화하여 돈의 내력과 그 흥망성쇠를 이야기함으로써 돈이나 재물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경계하고 있는 가전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돈이 생겨난 유래와 인간 생활에 미치는 이득과 폐해를 보여 주면서 돈을 바르게 사용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출전 : 동문선
내용 연구
공방(孔方 : 밖은 둥글고 안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는 엽전, 돈의 모양을 보고 공방이라고 이름을 붙임 / 돈을 의인화)의 자(字)는 관지(貫之 : 꿰뚫음, 엽전 안쪽이 뚫려 있고, 여기에 끈을 관통해서 사용한 데서 따온 명칭)다. 공방이란 구멍이 모가 나게 뚫린 돈, 관지는 돈의 꿰미를 뜻한다. 그의 조상은 일찍이 수양산 속에 숨어 살면서 아직 한 번도 세상에 나와서 쓰여진 일이 없었다.[돈은 아직은 썩 필요하지 않은 단계였음을 말하고 있는 우의적 표현, 화폐경제 시대가 아니었음]
그는 처음 황제(黃帝 :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인 헌원씨로 신농씨, 복희씨와 함께 삼황으로 불림) 시절에 조금 조정에 쓰였으나 워낙 성질이 굳세어 원래 세상일에는 그다지 세련되지 못했다[성격이 완고하여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느 날 황제가 상공(相工 : 관상을 보는 사람. 대장장이를 벼슬아치에 비유한 표현)을 불러 그를 보았다. 상공은 한참 들여다 보고 나서 말한다.
"이는 산야(山野)의 성질[거칠며 세련되지 못한 성질]을 가져서 쓸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그러하오나 폐하께서 만일 만물을 조화하는 풀무(불을 피우기 위해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나 망치를 써서 그 때를 긁어 빛이 나게 한다면[주변에서 도움을 준다면, 돈을 주조하여 만드는 과정], 그 본래의 바탕이 차차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원래 왕자(王者)[왕이란 존재]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그릇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 사람을 저 쓸모 없는 완고한 구리쇠와 함께 내버리지 마시옵소서.[산야의 성질이 ~ 구리와 함께 내 버리지 마옵소서 : 돈의 재료인 구리나 철은 원래 투박하지만, 다듬어서 쓸모 있게 만들어 써야 함을 말하고 있음. 돈의 주조·유통 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돈을 주조하여 유통시키면 유용함이 있을 것이라는 말]" 이리하여 공방은 차츰 그 이름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돈의 유통, 화폐 경제가 시작되었다는 말)
그 뒤에 일시 난리를 피하여 강가에 있는 숯 굽는 거리로 옮겨져서 거기에서 오래 살게 되었다.(돈은 속성상 쇠이기에 쇠는 숯 등의 열을 가하여 광석에서 만들어짐)그의 아버지 천(泉)은 주나라의 대재(大宰 : 위대한 재상)로서 나라의 세금에 관한 일을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천(泉)이란 화천(貨泉 : 중국 신나라 때 왕망이 주조한 동전)을 말한다. - 공방의 가계와 출현 배경
공방은 생김새가 밖은 둥글고 구멍은 모나게 뚫렸다[방(方)의 위인이 밖은 둥글고 안은 모나며 : 돈의 생김새를 표현한 것이며,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 공방의 모순적 성격을 우의적으로 잘 드러낸 표현]. 그는 때에 따라서 변통을 잘 한다[처세에 능함]. 한번은 한나라에 벼슬하여 홍려경[鴻 卿 : 한(漢)의 관직 이름· 외국의 빈객(賓客)을 접대하는 벼슬)]이 되었다. 그 때 오왕(吳王) 비(妃)가 교만하고 참람(僭濫 : 분수에 넘쳐 외람함)하여 나라의 권리를 혼자서 도맡아 부렸다. 방은 여기에 붙어서 많은 이익을 보았다. 무제 때에는 온 천하의 경제가 말이 아니었다. 나라 안의 창고가 온통 비어 있었다. 임금은 이를 보고 몹시 걱정했다. 방을 불러 벼슬을 시키고 부민후(富民侯 : 백성을 잘 살게 하는 일을 담당하는 벼슬아치)로 삼아, 그의 무리인 염철승[鹽鐵丞 : 소금과 쇠를 가리키는 관직명(의인화)] 근(僅)과 함께 조정에 있게 했다. 이 때 근은 방을 보고 항상 형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는 말로 당시에 소금과 쇠가 아무리 중요해도 돈보다는 아래라는 의미임. 동양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리고 있음) - 공방의 외양과 행적
방은 성질이 욕심이 많고 비루(卑陋 : 더럽고 추하다, 천하고 품위가 없음)하고 염치가 없었다[돈이 욕심이 많고, 염치가 없다는 뜻이나, 문맥적으로는 사람들이 돈맛을 알 게 되어 더욱 탐욕스럽게 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체면도 가리지 않음을 우의적으로 드러낸 말]. 그런 사람이 이제 재물을 맡아서 처리하게 되었다. 그는 돈의 본전과 이자의 경중을 다는 법을 좋아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질그릇이나 쇠그릇을 만드는 생산 방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백성으로 더불어 한 푼 한 리의 이익이라도 다투고, 한편 모든 물건의 값을 낮추어 곡식을 몹시 천한 존재로 만들고 딴 재물을 중하게 만들어서, 백성들이 자기들의 본업인 농업을 버리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맨 끝(여기서는 '상업'을 일컬음)인 장사에 종사하게 하여 농사짓는 것을 방해했다.[돈이 한번 쓰이게 되자 그로 인한 폐해가 속출하게 되었는데,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농사보다 장사에 매달리는 경향을 낳은 것임을 말하고 있다. 돈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 인식이 드러나는 부분] - 공방의 품성
이것을 보고 간관[諫官 : 임금에게 정치적 문제를 간하는 신하로 조선 시대에는 사간원·사헌부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들이 상소(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 또는 그 글. 주로 간관(諫官)이나 삼관(三館)의 관원이 임금에게 정사(政事)를 간하기 위하여 올렸다]를 하여 이것이 잘못이라고 간했다. 하지만 임금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방은 또 권세 있고 귀한 사람을 몹시 재치 있게 잘 섬겼다[돈과 권력은 서로 결탁하기 쉬운 속성을 가졌음을 의인화하고 있다.]. 그들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자기도 권세를 부리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등에 업고 벼슬을 팔아, 승진시키고 갈아치우는 것마저도 모두 방의 손에 매이게 되었다(돈이 나쁜 일에 쓰이는 모습, 돈과 권력의 관계 / 호가호위 : 여우가 호랑이 가면을 쓰고 위세를 부림. 남의 힘을 빌어 헛위세를 부림.). 이렇게 되니, 한다 하는 공경(公卿 :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고위 고관 대작)들까지도 모두들 절개를 굽혀 섬기게 되었다. 그는 창고에 곡식이 쌓이고 뇌물을 수없이 받아서 뇌물의 목록을 적은 문서와 증서가 산처럼 쌓여 그 수를 셀 수 없이 되었다.[돈과 권력은 서로 자연스럽게 결탁하는 속성이 있음을 풍자하는 말]
그는 모든 사람을 상대하는 데 잘나거나 못난 것을 관계하지 않는다[사람을 사귀는 기준이 도덕성에 있지 않고 이해 관계에 있음을 의미함]. 아무리 시정[인가가 모인 곳. 중국 상대(上代)에 우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속에 있는 사람이라도 재물만 많이 가졌다면 모두 함께 사귀어 상통한다(돈의 속성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재물이나 돈을 모으기 위하여 어떤 일도 서슴지 않음을 이르는 말로 사람들이 돈 때문에 체면이나 도덕성마저 버리게 되었음을 이르는 말). 때로는 거리에 돌아 다니는 나쁜 소년들과도 어울려 바둑도 두고 투전도 한다[돈이 가치 평가의 기준이 되어 버린 세태를 풍자 - 배금주의, 물신주의 비판]. 이렇게 남과 사귀는 것을 좋아한다[돈이 널리 유통되어 쓰임을 말함]. 이것을 보고 당시 사람들은 말했다.
"공방의 한 마디 말이 황금 백 근만 못하지 않다."( 공방의 권세가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정도에 이름을 말한다. 무소불위의 권력, 지록위마[(指鹿爲馬) : ①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함을 이르는 말. 중국 진(秦)나라의 조고(趙高)가 자신의 권세를 시험하여 보고자 황제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②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서 남을 속이려는 짓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공방의 권세와 악행
원제(元帝)가 왕위에 올랐다. 공우(貢禹 : 한나라 때에 청렴하고 정직했던 벼슬아치.)가 글을 올려 말한다.
"공방이 어려운 직책을 오랫동안 맡아 보는 사이, 그는 농사가 국가의 근본임을 알지 못하고, 오직 장사꾼들의 이익만을 두호(斗護 : 남을 두둔하여 보호함)해 주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쳐서 국가나 민간 할 것 없이 모두 곤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위에 뇌물이 성행하고 청탁하는 일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대체로 '짐을 지고 또 타게 되면 도둑이 온다[負且乘 致寇至 부차승 치구지 : 재물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그 재물을 탐내는 자가 나타나게 된다는 말].' 한 것은 '주역'에 있는 분명한 경계입니다. 청컨대 그를 파면시켜서, 모든 욕심 많고 비루한 자들을 징계하시옵소서."
그 때 정권을 잡은 자 중에는 곡량(穀梁 : 경제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는 책으로 유교 경전 '춘추'의 주석서인 '곡량전'을 쓴 곡량적을 가리킴)의 학문[경제에 대한 공부]을 쌓아 정계에 진출한 자가 있었다. 그는 군자(軍資 : 군의 자금 운용을 담당)를 맡은 장군으로 변방(국경 주변 지역을 지키는 일)을 막는 방책을 세우려 했다. 이에 방이 하는 일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를 위해서 조언했다. 임금은 이들의 말을 들어서 마침내 방은 조정에서 쫓겨나는 몸이 되었다['공방'이 만들어 내는 폐해를 두고 볼 수만은 없다 / 돈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 태도가 담겨 있음.]. - 공우의 상소로 조정에서 쫓겨난 공방
그는 자기 문인들에게 말했다.
"내가 전일에 폐하를 만나 뵙고, 나 혼자서 온 천하의 정치를 도맡아 보았었다. 그리하여 장차 국가의 경제가 넉넉하고 백성들의 재물이 풍족하게 되게 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제 까닭 없는 죄로 내쫓기고 말았구나. 하지만, 나가서 조정에 쓰이게 되거나 쫓겨나 버림을 받는 것이 내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손해될 것이 없다. 다행히 나의 이 목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 아주 끊어지지 않고 이렇게 주머니 속에 감추어져 아무말도 없이 용납되고 있다. 이제 나는 부평(부평초를 이르는 말로 개구리밥을 가리키는 식물인데,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를 비유하는 말) 과 같은 행색으로 곧장 강회(江淮)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가련다. 약야계[若冶溪 : 월나라 근방의 지명(地名)으로 야계(耶溪)라고도 한다. 월(越)나라에는 자연 그대로의 미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서시는 아름다운 여인의 대표로 꼽고 있고, 이백의 월녀사에도 약야계라는 말이 들어 있다.)]위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낚아 술을 마시며, 때로는 바다 위의 장사꾼들과 함께 배를 타고 떠돌면서 남은 인생을 마치련다. 제 아무리 천 종의 녹(천종록, 많은 양의 봉록으로 벼슬아치들의 급료)이나 다섯 솥의 많은 음식인들 내 어찌 조금이나 부러워해서 이것과 바꾸겠느냐. 하지만 내 심술이 오래 되면 다시 발작할 것만 같다."(자신이 권력으로부터 떠나 자유롭게 살 것임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심술이 오래되면 다시 발작할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서 그가 욕스러운 성격을 떨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 공방의 성쇠
진(晋)나라에 화교(和嶠)란 사람이 있었다. 공방의 풍도를 듣고 기뻐하여 사귀어 여러 만 냥의 재산을 모았다. 이로부터 화교는 공방을 몹시 좋아하는 한 가지 버릇을 이루고 말았다. 이것을 본 노포(魯褒)는 논(論)을 지어 화교를 비난하고, 그릇된 풍속을 바로잡기에 애썼다.
화교의 무리 중에서 오직 완적(阮籍)만은 성품이 활달해서 속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의 무리와 어울려 술집에 다니면서 취하도록 마시곤 했다. 왕이보(王夷甫)는 한 번도 입으로 방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없었다. 방을 가리켜 말하려면 그저 '그것'이라고 했다. 맑은 의논을 하는 사람들에게 방은 이렇게 천대를 받았다.
당(唐)나라 세상이 되었다. 유안(劉晏)이 탁지판관(度支判官)이 되었다. 재산을 관리하는 벼슬이다. 당시 국가의 재산이 넉넉지 못했다. 그는 다시 임금께 아뢰어 방을 이용해서 국가의 재용(財用)을 여유 있게 하려고 했다. 그가 임금에게 아뢴 말은 식화지(食貨志)에 실려 있다.
그러나 그 때 방은 죽은 지 이미 오래였다. 다만 그의 제자들이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을 국가에서 불러서 방 대신으로 쓰게 되었다. 이리하여 방의 술책이 개원(開元)·천보(天寶) 사이에 크게 쓰여졌고, 심지어는 국가에서 조서를 내려 방에게 조의대부소부승(朝議大夫少府丞)을 추증하기까지 하였다.
남송 신종조(神宗朝) 때에는 왕안석(王安石)이 정사를 맡아 다스렸다. 이 때 여혜경(呂惠卿)도 불러서 함께 일을 돕게 했다. 이들이 청묘법(靑苗法)을 처음 썼는데, 이 때 온 천하가 시끄러워 아주 못 살게 되었다.
소식(蘇軾)이 이것을 보고 그 폐단을 혹독하게 비난하여 그들을 모조리 배척하려 했다. 그러나 소식도 도리어 그들의 모함에 빠져서 쫓겨나 자신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의 모든 선비들은 그들을 감히 비난하지 못하였다.
사마광이 정승으로 들어가자 그 법을 폐지하자고 아뢰고, 소식을 천거하여 높은 자리에 썼다. 이로부터 방(方)의 무리는 차츰 세력이 꺾이어 다시 강성하지 못했다.
<생략 부분의 줄거리 : 남송 때에 소식에 의하여 돈은 다시 배척되었고, 방의 아들은 윤은 경박하여 세상의 욕을 먹었고, 뒤에 수형령이 되었으나 장물죄가 드러나 사형되었다고 한다.>
사신(史臣 : 관이 기록하여 둔 사기의 초고를 사초라 하고, 사초를 쓰던 신하를 사신이라함.)은 말한다.(사기 열전을 본뜸)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서 두 마음을 품고 큰 이익만을 좇는 자를 어찌 충성된 사람이라고 하랴. 방이 올바른 법과 좋은 주인을 만나서, 정신을 집중시켜 자기를 알아 주어서 나라의 은혜를 적지 않게 입었었다. 그러면 의당 국가를 위하여 이익을 일으켜 주고, 해를 덜어 주어서 임금의 은혜로운 대우에 보답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도리어 비를 도와서 나라의 권세를 한몸에 독차지해 가지고, 심지어 사사로이 당을 만들기까지 했으니, 이것은 충신이 경계 밖의 사귐이 없어야 한다는 말에 어긋나는 것이다.
방이 죽자 그 남은 무리들은 다시 남송에 쓰여졌다. 집정한 권신(權臣)들에게 붙어서 그들은 도리어 정당한 사람을 모함하는 것이었다. 비록 길고 짧은 이치는 저 명명(冥冥 : 겉으로 나타남이 없이 아득하고 그윽한)한 가운데 있는 것이지만, 만일 원제(元帝)가 일찍부터 공우(貢禹)가 한 말을 받아들여서 이들을 일조에 모두 없애 버렸던들 이 같은 후환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만 이들을 억제하기만 해서 마침내 후세에 폐단을 남기고 말았다(공방의 일대기는 과거에 해당하는데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작가가 살고 있는 당시에까지 돈으로 인한 폐해가 남아 있음을 암시). 그러나 대체 실행보다 말이 앞서는 자는 언제나 미덥지 못한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 공방에 대한 평가
공방 : 밖은 둥글고 안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는 엽전
관지(貫之) : 꿰뚫음, 엽전 안쪽이 뚫려 있고, 여기에 끈을 관통해서 사용한 데서 따온 명칭.
굴혈 : 동굴
풀무 : 불을 피우기 위해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
상공 : 관상을 보는 사람. 대장장이를 벼슬아치에 비유한 표현
산야의 성질이 ~ 구리와 함께 내 버리지 마옵소서 : 돈의 재료인 구리나 철은 원래 투박하지만, 다듬어서 쓸모 있게 만들어 써야 함을 말하고 있음.
부세(賦稅) : 세금을 매겨서 부과하는 것
응변 : 임기응변
화천 : 왕망이 주조한 동전
홍려경(鴻?卿) : 한(漢)의 관직 이름· 외국의 빈객(賓客)을 접대하는 벼슬
참월 : 분수에 넘쳐 외람함. 참람함.
염철승 : 소금과 쇠를 가리키는 관직명(의인화)
분리(分厘) : 돈·저울·자 따위의 단위인 분과 리
근본(根本) : 여기서는 '농업'을 일컬음
끝 : 여기서는 '상업'을 일컬음
간관(諫官) : 간선 시대에 사간원·사헌부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
권귀(權貴) : 벼슬이 높고 권세가 있는 사람
문권(文卷) : 땅·집 등의 소유권이나 그 밖의 어떤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
불초(不肖) : 못나고 어리석음
공우 : 한나라 때에 청렴하고 정직했던 벼슬아치.
두호 : 남을 두둔하여 보호함
시정 : 평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
연낙(然諾) : 쾌히 허락하는 것
극무 : 극심하게 분주한 사무
회뢰 : 뇌물
청알 :청탁
대역 : 주역
곡량 : 자하의 제자인 곡량적을 이르는 말로 그는 유교경전인 '춘후'의 주석서 '곡량전'을 썼음.
약야계 : 중국 남부의 지명으로 큰 부자인 도주공이 여기에서 돈을 모았다고 함.
해고 : 바다 장사,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
천종의 녹 : 천종록. 많은 양의 봉급
녹 : 벼슬아치에게 봉급으로 주던 곡식, 옷감 등의 총칭
오정 : 다섯 솥
장물죄 : 부당하게 남의 물건을 취득한 죄
은우 : 고마운 대우
경외 : 어떤 경계의 밖. 범위를 벗어남.
명명 : 사정이 분명하지 않음. 겉으로 나타남이 아득하고 그윽한
재억 : 제재하여 억누르는 것.
방(方)의 위인이 밖은 둥글고 안은 모나며 : 돈의 생김새를 표현한 것이며,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 공방의 모순적 성격을 우의적으로 잘 드러낸 표현
그 조상은 - 적이 없었다 : 돈은 아직은 썩 필요하지 않은 단계였음을 말하고 있다.
산야의 성질이 - 마옵소서 : 돈의 재료인 구리나 철은 원래 투박하고 보잘것없지만 달구고 다듬어서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어 써야 함을 말하고 있다. 돈의 주조·유통 과정을 가리킨다.
방(方)의 성질이 욕심 많고 더러워 염치가 없었다 : 돈이 욕심이 많고, 염치가 없다는 뜻이나, 문맥적으로는 사람들이 돈맛을 알 게 되어 더욱 탐욕스럽게 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체면도 가리지 않음을 우의적으로 드러낸 말
방의 성질이 - 방해를 끼쳤다 : 돈이 한번 쓰이게 되자 그로 인한 폐해가 속출하게 되었는데,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농사보다 장사에 매달리는 경향을 낳은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는 사람을 - 사귐이란 것이다 : 재물이 모든 행동거지의 기준이 될 정도로 악용되고 있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가리키고 있다.
공방의 말 - 근만 하다 : 공방의 권세가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정도에 이름을 말한다.
이해와 감상
주인공의 이름인 '공방'은 네모난 구멍이 뚫린 엽전을 형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전체의 서술은 역사 기록의 열전을 본떴다. 그러나 열전은 실제로 있었던 인물의 실제 사실을 기록한 것임에 반하여 이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이므로 가전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작품이 허구적 소설로 나아가는 문학사의 한 단계를 보여 준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감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방에 성격을 부여하여 실제 인물처럼 그리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성격이 거칠고, 겉은 둥글며 속은 모나고, 욕심이 많고 염치가 없으며, 권세를 빙자하여 제 멋대로 행동하고, 생산보다는 축재에 관심을 가지며, 투기와 오락을 일삼는 등의 인물 특성은 돈이 가진 본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돈 자체는 그런 성격과 무관하겠지만, 돈을 가진 사람이나 돈을 많이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 특성이 여기에 함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공방은 이러한 속성의 상징적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이야기는 돈의 실상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임금을 섬기는 신하의 도리에 대한 함축도 지니고 있다. 공방이 권세를 가졌을 때 어떤 행동을 하였는가, 그 결과가 어떠한가, 또 임금된 사람은 신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등의 암시도 던져 준다.
이해와 감상1
이 작품은 돈(엽전)을 의인화하여 '돈의 폐해'를 비판하려 한 가전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공방'은 욕심이 많고 염치가 없는 부정적 성격의 소유자로 백성들로 하여금 오직 이익을 좇는 일에만 종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일반 선비들과 달리 천하게 여겼던 시정의 사람들과 사귀기도 하는데, 이는 '공방'이 단순하게 '돈'을 드러내어 탐욕스러운 한 전형적 인간을 표상한다기보다는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하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하여 돈의 내력과 성쇠를 보여 줌으로써 사회상을 풍자하고 자신의 경세관을 드러내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삶에서 돈이 요구되어 만들어져 쓰이지만 그 때문에 생긴 인간의 타락상을 역사적으로 살피고 있다. 작가는 마지막 부분에서 사신(史臣)의 입을 빌어 자신의 경세관을 피력하고 있다 하겠는데, 작가는 공방의 존재가 삶의 문제를 그릇되게 하므로 후환을 막으려면 그를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난세를 만나 참담한 가난 속에 지내다 일찍 죽고 만 임춘의 개인적 삶과도 연관된다 하겠다. 그는 무신란을 만나 겨우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극도로 빈한한 처지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친 귀족의 후예였는데, 돈이 벼슬하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자기와 같은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삶을 더욱 어렵게 한다고 생각하며 세상의 그릇된 방향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보여 주었다. (출처 : 김병국 외 4인공저 한국교육미디어 문학)
이해와 감상2
고려 후기 임춘(林椿)이 돈을 의인화하여 지은 가전작품으로 공방(孔方)의 자(字)는 관지(貫之)이며 그 조상은 일찍이 수양산에 숨어 살아 세상에 쓰여진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아버지 천(泉)에 이르러 비로소 주(周)의 대재(大宰)로 나라의 부세(賦稅)를 맡게 되었다. 공방의 사람됨은 밖은 둥글고 안은 모가 났으며, 임기응변에 능해 한나라 때 벼슬을 하여 홍로경(鴻卿)이 되었다. 욕심이 많고 염치가 없는 그가 재물과 씀씀이를 도맡게 되니 백성들이 화(貨)를 중하게 여겨 근본인 농업을 버리고 상업만을 좇게 되는가 하면, 벼슬을 팔고 사는 것이 손바닥에 있으므로 벼슬하는 자들이 모두 절개를 굽히게 하는 등 폐단이 심했다. 이에 원제(元帝) 때, 공우(貢禹)가 상소를 올려 그 폐단을 간해 드디어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술(術)이 얼마 되면 다시 일어날 것이라며 태연했다. 그리고 당(唐) 때 유안(劉晏)이 탁지판관(度支判官)이 되어, 나라의 씀씀이가 넉넉하지 못한 것을 보고 임금께 청하여 다시 공방의 술을 써서 나라의 씀씀이를 편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공방이 죽은 뒤여서, 그의 문도(門徒)들을 찾아 써서 다시금 개원(開元)·천보(天寶) 연간에는 크게 그 술(術)이 성행하게 되고, 그는 조의대부소부승(朝議大夫少府丞)에 추증되었다. 뒷날 소식·사마광이 그 법을 폐할 것을 아뢰어 세력이 조금 줄어들고, 공방의 아들 윤(輪)은 경박하여 세상의 욕을 먹었는가 하면 장물죄(贓物罪)가 드러나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돈의 사용과 유통을 둘러싼 고사들을 흥미있는 인간사로 의인화한 이 작품은 단순히 돈에 얽힌 일화를 평면적으로 진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겉은 원만한 듯 보이지만 속은 모가 나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신하를 풍자하고 있다. 평결부에서 "만일 원제가 진작 공우가 한 말을 용납하여 하루 아침에 다 죽여버렸던들 가히 후환을 없앴을 터인데, 오직 억제만 해서 후세에 폐단을 끼치게 했다"고 하여 벼슬자리에 올라 나라를 망치고 있는 무리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비판의식은 무신집권기 때 무신들에 의해 심한 배척을 받아 정치적·경제적으로 소외되었던 지은이의 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임춘의 유고집 〈서하선생문집 西河先生文集〉과 〈동문선 東文選〉에 실려 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심화 자료
임춘 林椿 [?~?]
자 기지(耆之). 서하(西河) 출생. 과거에 수차 낙방하였으며, 1170년(의종 24) 정중부의 난 때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 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한문과 당시(唐詩)에 능하였으며, 이인로가 그 유고(遺稿)를 모아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6권을 엮었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시문(詩文)이 기록되어 있고, 두 편의 가전체소설이 전한다. 예천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고, 저서에 '국순전(麴醉傳)' '공방전(孔方傳)' 등이 있다.
임춘은 돈의 폐해를 보여 주면서 돈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이는 난세를 만나 참담한 가난 속에서 살았던 그의 개인적 삶과 연관된다. 그는 극도로 빈한한 처지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친 귀족의 후예였는데, 돈이 벼슬하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자기와 같은 불우한 처지에서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는 세태를 비판하고, 벼슬을 해서 나라를 망치는 무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이라고 하겠다. 결국 공방의 존재가 삶의 문제를 그릇되게 하므로 후환을 막으려면 공방을 없애야 한다는 그의 인식은 참담한 가난 속에서 지내다 일찍 죽고만 임춘의 돈의 폐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표출일 것이다.
'공방전'에 반영된 현실 의식
인간 생활에서 돈이 요구되지만 돈 때문에 인류가 간사해지고 말썽이 생겼다. 따라서, 돈이 두통거리이니 후환을 막으려면 그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작품은 돈의 사회적 역할과 폐해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돈의 용도가 바르게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경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공방전의 주제적 의미
이 작품의 주인공인 '공방(둥근 모양에서 '孔'이라 하고 구멍난 모양에서 '方'이라 함)은 욕심이 많고 염치가 없는 부정적 성격의 소유자로 백성들로 하여금 오직 이익을 좇는 일에만 종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일반 선비들과 달리 천하게 여겼던 시정의 사람들과도 사귀기도 하는데, 이는 '공방'이 단순하게 '돈'을 드러낸다든다가 탐욕스러운 한 전형적 인간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하기 위한 작자의 의도가 반영된 사물로 여기질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작자는 이 작품을 통하여 돈의 내력과 성쇠를 보여줌으로써 사회상을 풍자하는 경세의 효과를 나타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비판적 현실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돈에 인간적인 품격을 부여하는 방식을 통해, 돈의 속성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각성을 의도하고 있으며, 돈의 폐해를 부각하고, 타락한 관료를 비판하고 있으나, 작가의 당시대는 화폐가 활성화가 되었던 시대가 아니라, 결국은 '공방전'은 현실적 경험의 독창적 표현이라기보다 관념적인 수준에 머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전과 소설
전은 대체로 인물의 행적과 그 해석을 포함하여 기술하는 한문학의 양식이었다. 그런데 전은 사실의 기록이면서 그에 대한 해석을 내포하기 때문에 사실의 진실을 추구하는 역사와 허구의 진실을 추구하는 소설의 두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실제의 일을 기술하는 실전에서 사물을 사람에 의탁하는 가전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도 전의 이러한 이중성 때문이다. 고소설 작품 가운데 ' 전' 이라는 제목이 많은 내력도 전의 이런 특성과 관련된다.
이해하기
1. 이 작품에서 '공방'의 가계(家系)와 그의 생애에 대해서 간추려 보자.
교수ㆍ학습 방법 :
작품을 차분히 읽고 공방의 가계를 재구성해 보도록 지도한다. 특히, 가전은 의인화된 대상의 전기이므로 대상의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함을 강조한다.
예시 학생 활동 :
공방의 집안은 수양산 굴혈(掘穴)에 숨어 지내다 황제 때에 등용되어 세상에 처음으로 나왔다. 아버지 천(泉)은 주나라 대재(大宰) 일을 맡았었다. 공방은 잠시 난리를 피해 강가에 있는 숯 굽는 거리에 있다가 한나라 때 홍려경으로 등용되어 오왕 비의 비호 아래 큰 이익을 보았다. 무제 때는 부민후를 지냈다. 간관들이 그를 비난하였음에도 임금이 그를 후히 썼다. 원제 때 공구가 상소하여 조정에서 쫓겨났다. 한때 다시 등용되었으나 뇌물을 즐기다가 다시 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없애지 못하고 다만 억제하기만 하여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2. 이 작품에서 '공방'은 실제 인물처럼 그려져 있다. 이런 표현 방식을 신화의 인물 형상화 방법과 비교하여 설명해 보자.
교수ㆍ학습 방법 :
가전과 신화는 같은 서사 문학에 속하지만 시대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서사 문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인물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는데, 신화와 가전 사이의 시대 차이를 고려하면서 인물 형상화 방법의 차이를 발견해 보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신화는 인물을 천손하강(天孫下降)의 존재로 신이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묘사한다. 이에 비해 가전은 현실 세계의 미미한 물건들을 의인화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이나 현실의 모순을 비판한다. 신화는 대상 인물에 대한 숭고한 태도를, 가져온 대상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차이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3. 이 작품과 같은 가전이 고려 시대에 창작된 배경을 말해 보자.
교수ㆍ학습 방법 :
가전 형식은 그릇된 세태에 대한 풍자와 비판의 태도를 많이 보여 준다. 이 같은 작품 성향이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은 무엇일지, '공방전'등이 창작된 시기의 사회적 상황을 찾아 발표해 보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가전 작품들이 창작된 고려 명종 이후의 시기는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무신란이 발생하여 사회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몽골의 침입 등이 있어 고려 사회 전반은 내우외환에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고, 교술 갈래로서 교훈적ㆍ비판적 성향을 띠는 가전 작품들의 창작은 그러한 혼란을 바로잡고자 하는 지식인 문학의 한 시도였다 하겠다. 또한 고려 후기에 관계에 진출한 신진 사류들은 사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경기체가 '한림별곡'에서 사물을 열거하는 표현 방식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사물에 대한 관심이 가전과 같은 문학 작품을 낳게 한 것이다.
4. 이 작품에서 '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중심으로 다음 활동을 해 보자.
교수ㆍ학습 방법 :
'공방'은 '돈'을 의인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공방'에 대한 진술은 곧 '돈'에 대한 진술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하여, '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학생들로 하여금 재구성해 보고 다음 활동을 하도록 지도한다.
(1) 작가는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보자.
예시 학생 활동 :
작가는 작품의 초반에 '공방'의 성품이 욕심이 많고 비루하다 하였고, 말미에 사관(史官)의 입을 빌려서는, 일찍이 그를 없애버리지 못한 것이 후세에 폐단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이 점으로 보아 작가는 '공방=돈'에 대해 매우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즉 돈을 멀리해야 한다고, 사농공상의 본래의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 작가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평가해 보자.
예시 학생 활동 :
작가의 생각은 '사농공상'의 질서를 운운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봉건적이란 점에서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요소로서 '돈'의 올바른 활용법은 제시하지 못한 채, 감정적으로 그것의 가치를 폄하하는 모습을 보여 한계가 있다. 물질 만능주의나 뇌물로 인한 공직 질서의 혼란 등은 '돈'을 바르게 활용하지 못한 것이지, '돈' 자체에 그런 본질이 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다. 국민과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데 농업만이 능사는 아니다. 건전한 시장의 질서가 확립되어 있다면 '돈'도 역시 국민과 부강하게 하는 데 아주 요긴한 것이다. '돈'을 부정만 할 것이 아니라 '돈'의 바른 쓰임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확장하기
1. 가전(假傳)과 실제 전기의 관계, 그리고 가전과 소설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해 보자.
교수ㆍ학습 방법 :
가전은 '전(傳)'의 양식을 차용한 형태란 점, 그리고 설화에서 소설로 발전하는 서사 문학의 과도기적 형태란 점을 중심으로 가전과 실제 전기, 소설의 관계를 파악하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가전은 사물을 의인화했다는 점에서는 실제 전기와 다르지만, 내용의 기본 구성원리로는 전기의 구성법을 활용하였다. 또 인간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사물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 교술적 성격이 강해 서사 문학의 갈래인 소설과는 차이를 지닌다.
2. 주위에 있는 사물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교수ㆍ학습 방법 :
현대 사회의 세태나 본질과 연관되어 현대 사회의 모순이나 특징을 함축하고 있는 사물을 선택, 그 사물의 유래를 정확히 파악한 후 가전의 형식을 빌려 그 사물에 대한 가전을 써 보도록 지도한다.
(1) 그 사물의 특성을 다양하게 생각해보자.
예시 학생 활동 :
ㆍ휴대 전화
- 언제 어디서나 통화를 가능하게 해 주는 사물
- 현대 문명의 상징물
- 최신 기종 모델로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물건 등
(2) 그 사물을 의인화한다면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말해 보자.
예시 학생 활동 :
날마다 세련되고 예뻐지려는 욕심이 많은 사람
(3) 이 활동을 토대로 한 편의 가전을 써 보자.
예시 학생 활동 :
ㆍ제목 : 휴 전(傳)
휴의 원래 이름은 휴대 전화였다. 그의 조상은 무전기였다. 대대로 군대에서나 살고 있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는 좀처럼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중략>
휴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부를 때에는 톤을 높여서 불러 줘. 너무 처지게 부르면 한숨 쉬는 것 같잖아."
그러던 어느 날 휴는 거울 앞에서 이렇게 탄식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투박하고 못 생겼을까?"
그는 그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기보다 더 귀엽고 앙증스러운 애들 사이에서 늘 열등감을 느끼던 그는 자신이 고물 취급을 받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은행에서 돈을 융자해서 성형 수술을 받았다. 그 덕택에 그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볼품이 있었다. 그러나 은행 융자금을 매달 상환해야 하는 부담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카드로 많은 악세 사리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귀고리, 팔찌 등 많은 악세 사리를 사들여서 자신을 치장했다. 할부금 때문에 그는 늘 허덕였다. 그래도 그는 다른 친구들에게 빠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를 악물고 살았다.
공방전
고려 후기에 임춘(林椿)이 지은 가전체 작품. 전(傳)의 형식을 빌어 돈을 의인화한 것이다. ≪서하선생집 西河先生集≫ 권5와 ≪동문선≫ 권100에 실려 있다. 제목의 ‘공방’은 엽전의 둥근 모양에서 공(孔)을, 구멍의 모난 모양에서 방(方)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공방의 조상은 수양산 굴 속에 숨어 살았고 세상에 나와 쓰여진 적이 없었는데, 황제(黃帝) 때 처음 채용되었다. 그의 아버지 화천(貨泉)은 주나라의 재상으로 나라의 세금을 담당하였다. 공방은 그 생김이 밖은 둥글고 안은 모나며, 임기응변을 잘하여 한(漢)나라의 홍로경(鴻豈卿)이 되었다.
그러나 공방의 성질이 탐욕스럽고 더러워, 돈을 중하게 여기고 곡식을 천하게 여기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근본(농사)을 버리고 장사 잇속만을 좇게 하였다. 또, 인물을 대함에도 어질고 불초함을 묻지 않고 재물만 많이 가진 자면 가까이 사귀었다.
그러다가 그것을 미워하는 이의 탄핵을 받고, 드디어 쫓겨나게 되었다. 당나라·송나라 때 다시 그의 무리와 아들이 채용되었으나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임춘은 무신란을 만나 겨우 도망하여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극도로 빈한한 처지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따라서 돈을 소재로 취한 것은 그의 곤궁했던 삶과 관련이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인간의 생활에 돈이 요구되어 만들어져 쓰이지만, 그 때문에 생긴 인간의 타락상을 돈의 속성과 관련이 있는 역대의 고사를 동원하여 결구(結構)하였다.
작자가 작품의 말미에서 사신(史臣)의 말을 빌려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이익을 좇는 자를 어찌 충신이라 이를 것인가. 공방이 때를 만나고 주인을 만나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으니, 응당 이익을 일으키고 해가 됨을 덜어 그 은덕에 보답해야 할 것이거늘, 권세를 도맡아 부리고 사사로운 당(黨)을 만들었으니, 충신은 경외(境外)의 사귐이 없다는 것에 어그러진 자이다.”라고 한 평결(評結)은 이 글의 주제이다.
즉, 공방의 존재가 삶의 문제를 그릇되게 하므로 후환을 막으려면 그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다. 난세를 만나 참담한 가난 속에 지내다 일찍 죽고 만 작자의 돈의 폐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참고문헌≫ 西河先生集, 假傳體文學論에 對한 批判(李相翊, 국어교육 14, 1968), 假傳體의 장르規定(趙東一, 池憲英先生華甲紀念論叢, 弘文閣, 1971), 假傳體에 對한 異見散攷(安秉卨, 明知語文學 7, 1974), 高麗後期擬人文學의 形成과 文學史的意義(金光淳, 高麗時代의 言語와 文學, 螢雪出版社, 1975), 高麗時代 假傳體文學 硏究(高敬植, 檀國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81), 韓國假傳文學硏究(安秉烈, 高麗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86).(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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