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의 모든 것3 / 공룡을 쫓는 사람들
by 송화은율 제3부 공룡을 쫓는 사람들
1장 공룡연구의 역사
공룡시대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룡과 원시인이 함께 등장하는 일은 터무니없는
영화 속에서만 가능하다. 지구상의 최초의 인류가 나타나기 훨씬 이전인 6500만년 전에
공룡들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룡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지 불과 150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공룡은
과학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무엇때문에 우리는
공룡에게 그다지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왜 당신은 지금 이 책을 읽는 중인가? 이러한 질
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룡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공룡화석은 수천만년 동안이나 암석 속에 존재해 왔다. 고대 중국인들은 공룡뼈를 용뼈
라 생각해 뼛가루를 주술과 의학용으로 사용했다. 공룡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AD 300
년쯤에 나오는데, 지근의 쓰촨 지역에서 용뼈가 발견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영국에는 지
금 우리가 공룡뼈라고 알고 있는 사진과 설명이 실린 많은 책과 박물관 표본들이 남아 있
다. 당시에는 단지 이런 뼈를 공룡뼈로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1802~60년 사이
에 엄청난 수의 공룡 발자국도 발견되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거대한 새의 발자국으로 해석
되었다.
이러한 실제적인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당시 과학자들은 공룡의 존재를 인식
하지 못했을까? 당시 유럽과 미국의 대부분 사람들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신봉했으며
종이 멸종한다는 것은 그들의 종교적인 해석에 맞지 않았다. 왜 신은 그토록 어렵게 창조
한 생명을 멸종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구의 나이가 성경이 제시하는 것보다
수십억년이나 더 오래 되었고 암석속에 화석화된 동물 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믿기 어려웠
을 뿐더러 입증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대한 파충류가 수천만년 전 지구에 살
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초창기 공룡학자들은 당시
팽배했던 비과학적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큰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1. 이구아나의 이빨과 맨텔부부
거대한 파충류가 먼 과거에 존재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은 밴텔(GIDEON
MANTELL) 이었다. 영국의 루이스라는 도시의 왕진의사 맨텔은 열성적인 아마추어 고생
물학자였다. 1822년 어느 봄날 맨텔은 아내 메어리와 함께 왕진을 나갔다. 그가 집안에서
환자를 돌보는 동안 메어리는 집 주위를 산착하고 있었는데 마침 일꾼들이 길을 보수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공사장에서 파헤쳐진 돌무더기 속에 무엇인가 반짝 빛나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집어들고 살펴보니 이상하게 생긴 화석 이빨이었다. 그것을 남편에게 보여
주자 그는 곧 이것이 매우 중요한 화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생 파
충류의 이빨보다 수백배나 더 큰 이빨이었기 때문이다. 맨텔은 그 이빨의 정체를 밝히려
노력하단 중 런던의 헌터리안(HUNTERIAN) 박물관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는데, 그
것은 다름아닌 남미에서 온 현생 이구아나의 골격이었다. 이구아나의 작은 턱에는 맨텔이
발견한 이빨과 매우 흡사한 이빨들이 솟아 있었다. 실제 이 화석 이빨은 파충류의 것이며
거대한 이구아나 같은 도마뱀의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드디어 1825년 그의 아내가 처
음 이빨을 발견한 지 3년이 지나 맨텔은 이구아노돈(IGUANODON, 이구아나의 이빨) 이
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발표하게 된다.
이로부터 9년 후 이구아노돈에 대한 더 확고한 증거가 발견되었다. 1834년 다량의 이
구아노돈 골격이 메이드스톤 채석장에서 발견된 것이다. 마침내 맨텔은 그가 이름붙인 이
구아노돈의 크기와 형태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를 얻게 되었다. 채석장에서 산출된 뼈에 기
초하여 맨텔이 스케치한 이구아노돈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구아노돈의 실제 모양
과 전혀 다르게 네 발을 땅에 짚고 코에 뿔이 난 도매뱀으로 묘사되어 있다 (제3부 2장
참조)
2. 무서운 도마뱀과 오언
공룡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기재되고 명명된 생물이 활자화 되
어 논문으로 출판되었을 때가 학명이 공식 인정받는 순간이다. 이러한 법칙에 의하여 실제
공룡 (당시 공룡이란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을 처음으로 기재하고 이름을 붙여 논문
으로 발표한 사람은 맨텔이 아니라 버클랜드(WILLIAN BUCKLAND) 였다. 그는 맨텔의
이구아노돈이 출판되어 나오기 1년 전인 1824년 한 동물의 턱을 기재하고 '거대한 도마
뱀' 이라는 뜻의 메갈로싸우루스(MEGALOSAURUS) 라 명명하였다.
맨텔과 버클랜드의 발표가 있은 후 영국과 유럽의 중생대 지층에서 다른 거대한 파충류
화석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1840년대까지 9개의 파충류가 이름이 붙여졌다. 이 시점에
서 오언의 존재가 등장한다. 오언(RICHARD OWEN) 은 당시 동물해부학 분야에서 세계
적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수많은 단체와 학회의 일원으로서 빅토리아
여왕과도 가까운 친구로 지냈으며 런던자연사박물관의 최고책임자였다. 그의 임무중 하나
는 런던동물원에서 죽은 동물들을 해부하는 일이었는데 직접 다양한 동물들을 해부함으로
써 여러가지 동물의 몸구조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습득했다.
오언은 당시 수집된 거대한 화석들이 현생 파충류와는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동물이라
는 결론에 도달했다. 만약 이들이 과거에 살던 악어나 도마뱀이 아니라면 과연 이들은 무
엇일까? 앞에서 밝혔듯이, 그는 메갈로싸우루스와 이구아노돈에 대해 그리스어로 ;무서운'
이라는 뜻의 'DEINOS' 와 '도마뱀' 이라는 뜻의 'SAUROS' 를 합성해 공룡
(DINOSAURIA)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1841년 영국 필모스에서 있었던 영국과학
협회 총회에서 처음으로 그 이름을 알렸다.
이 일은 실로 오언의 중요한 업적이다. 오늘날 과학자가 어떤 새로운 동물그룹의 이름을
제안하기 위해서는 수백 개체의 표본들을 연구한 후에나 가능하다. 오언은 단지 세 가지의
동물화석을 가지고 이러한 일을 해냈다. 그는 이러한 동물들이 실제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으며 이것은 1854년 그가 감독한 공룡의 복원모델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모델들은
지금도 런던 수정궁공원에서 볼 수 있는데 공룡은 코끼리나 코뿔소 처럼 육중한 네 다리
를 가진 동물로 묘사되어 있다.
3. 사족보행설 대 이족보행설
코끼리 같은 공룡이 런던 수정궁공원에 전시된 직후 미국 뉴저지주에서 발견된 한 공룡
은 오언의 해석에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1858년 포울키 (WILLIAM FOULKE) 는
하돈필드의 한 농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뼈를 발굴해 필라델피아대학의 레이디 (JOSEPH
LEIDY) 에게 보냈다. 레이디는 몇 개월의 연구를 통해 하드로싸우루스
(HADROSAURUS) 라는 이름을 붙여 발표하였다. 장 보존된 다리뼈를 보고 레이디는 이
공룡이 이구아노돈과 매우 유사하며 오언이 제시한 것처럼 네 발로 걷는 것이 아니라 두
발로 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후 20년동안 이러한 의견차이에 의한 각 진영사이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날렵한 육식
공룡 콤프쏘그나투스 같은 골격은 공룡이 두 다리로 걸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좋은 예
로 사용된 반면 검룡류나 두꺼운 갑옷으로 무장한 쎌리도씨우르스에 대한 오언의 연구는
이들이 네 발로 걸어다닌 동물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했다. 물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듯이
두 발과 네 발로 걷는 공룡이 다 존재하므로 이들 양쪽 의견은 모두 옳다.
4. 베르니싸르의 대발견과 돌로
이러한 논쟁을 포함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단숨에 해결한 중요한 발견이 있었다. 1878
년 4월 벨기에 베르니싸르 지방의 어느 탄광에서 광부들이 땅속 322미터 지점에 커다란
화석뼈 수백개가 함께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즉시 브뤼셀의 자연사 박물관
과학자들에게 연락되어 곧 발굴이 시작되었다. 광부들이 발견한 것은 바로 이구아노돈의
무덤이었는데 약 30개체의 이구아노돈이 거의 손상없이 죽은 그 자리에 묻혀 있었던 것이
다.
더욱 놀라운 것은 화석들이 한 층면을 따라 보존된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30미터가 넘
게 석탄층을 가로질러 묻혀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했을까? 3년에 걸친 조심
스러운 작업을 통해 과학자들이 이곳이 과거에는 깊고 좁은 협곡지역이었음을 알아냈다.
뼈들이 서로다른 깊이에서 산출되었기 때문에 이구아노돈이 한꺼번에 빠져 죽은 것이 아
니라 오랜 시간에 한두 마리씩 빠져 쌓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조각 한조각 수백개의 뼈들이 발굴되어 브뤼셀로 옮겨진 후 박물학자 돌로에 의해 복
원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이전에 가능하지 않았던 새로운 공룡연구의 기회였으며 그후로도
이러한 일은 흔치 않았다. 돌로는 단 한마리가 아니라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수십개의 완전
한 표본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이구아노돈이 두 발로 걸었으며 맨텔과 오언이 코에다 붙였던 뿔이 사
실은 엄지 앞발톱이며 마름모꼴로 얽혀 있는 골힘줄은 척추와 꼬리뼈를 강화하기 위한 구
조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는 이구아노돈이 움직이는 방법과 근육의 위치 및 크기를 밝히기
위해 많은 화석증거를 이용했다. 동시에 브뤼셀 박물관에 이들을 전시하기 위한 작업도 병
행했다. 이들 화석중 30개체의 이구아노돈을 현재에도 브뤼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베르니싸르의 이구아노돈에 대한 돌로의 연구는 많은 점에서 공룡을 실제 환경에 살아
있는 동물로 바라보는 기초를 제공했다. 공룡뼈 자체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그는 이구아노
돈이 발굴된 장소의 연구도 병행해그곳에서 서너종류의 악어와 거북을 포함한 다양한 동
물들을 찾아냈다. 그는 또한 식물연구를 수행했으며 퇴적암이 암석화되는 작용도 연구함으
로써 공룡이 살던 환경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복원하고 어떻게 이들이 살았는가를 알아내
려고 시도했다.
5. 공룡사의 영원한 맞수, 코프와 마시
베르니싸르에서 대규모로 공룡화석이 발견될 무렵 미국의 공룡연구는 코프와 마시 두사
람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특출한 두 학자는 공룡화석을 찾고 기재하는 데 엄청나게 열성
적이었으며 또한 서로를 미워했다. 그들의 경쟁관계는 공룡학 역사중 가장 큰 사건으로 알
려져 있으며 이들의 활동은 서부개척시절 황금을 찾아 서부로 나선 대사건처럼 미국의 공
룡찾기 열풍을 야기했다.
1868년 후반까지 그들의 관계는 아주 좋아 실제 서로 협력하며 함께 공룡탐사를 한 적
도 있었다. 그러나 2년후 그들은 서로를 헐뜯는 관계가 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코프는 엘라스모싸우르스로 명명된 새로운 수장룡을 기재하고 그것의 커다란 척추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시가 이 새로운 화석을 보기위해 찾아왔고 그 자리에서
그는 코프가 머리뼈를 꼬리끝에 붙여 잘못 복원한 것을 지적하였다. 코프는 물론 대단히
자존심이 상했으며 그때의 굴욕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이유가 어떻든 그들의 경쟁은 1877년부터 시작되어 두 학자에 의해 조직된 팀들은 독
립적으로 콜로라도 지역에서 새로운 공룡화석을 발견하였다. 코프팀은 초반기에 더 크고
좋은 화석들을 발견하였지만 1877년 후반에 마시는 이 공룡발굴 경쟁에서 확고히 앞설
수 있는 행운을 맞는다. 두 명의 철도인부가 와이오밍의 비밀장소에서 거대한 뼈들을 발견
했다고 제보한 것이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연합태평양철도를 따라 코모블럽지역에 약 12
키로미터나 뻗어있는 쥐라기의 화석층이었다. 마시는 곧 그들과 계약을 맺어 수천톤의 뼈
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를 알아차린 코프는 그 지역에서 더 좋은 공룡뼈를 찾기위해
발굴에 뛰어들었고 두 사람의 경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들이 콜로라도와 와이오밍의 후
기 쥐라기 지층에서 찾아낸 공룡들은 알로싸우르스, 케라토싸우르스, 카마라싸우르스, 아파
토싸우르스, 디플로도쿠스, 스테고싸우르스, 캄프토싸우르스 등이다.
1880년 들어 마시와 코프는 북미 서부지역에 분포된 백악기 지층으로 관심을 돌렸다.
사실 그들 모두는 초창기 시절 이 지역에서 탐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마시는 이 지역에
서 트리케라톱스와 노도싸우르스 같은 새로운 공룡을 찾아냈고 코프는 1876년 몬테나 지
역을 탐사했다.
공룡에 관한 어떤 책을 보더라도 이들의 이름은 꼭 나온다. 분명 서로간의 경쟁심으로
두 사람은 거의 완전한 골격을 바탕으로 130종의 새로운 공룡을 기재했으며 공룡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돌로가 한 종의 공룡을 철저히 연구하여 살아있는 동물로서 공룡을
연구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면 코프와 마시는 공룡세계가 얼마나 다양한가를 알려주었다.
이들 세 사람이 공룡연구에서 남긴 업적은 결코 다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것이다.
6. 카네기의 공룡과 복제품
미국 대사업가이자 자선가인 카네기에 의해 설립된 피츠버그의 카네기 자연사박물관은
공룡화석을 수집하는 데 매우 열성적이었다. 카네기가 공룡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중부지역에서 새로운 공룡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신문기사는 카네기
의 주위를 끌었고 그는 곧 박물관 소장 홀랜드에게 박물관에 전시할 거대한 공룡을 발견
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카네기의 지원금을 받아 홀랜드는 1899년 탐사대를 와이오밍
주로 보낸다. 탐사대는 두달만에 엄청난 발견을 했는데 그것은 두마리의 디플로도쿠스였
다. 두개체 모두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홀랜드는 두개체를 조합해 완전한 하나의 디플로
도쿠스를 전시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가장 큰 공룡 전시였으며 공룡은 카네기의 이름을
따서 디플로도쿠스 카네기아이라 명명되었다.
이 디플로도쿠스의 그림이 스코틀랜드의 카네기 저택에 걸리게 된는데 1903년 그의 집
을 방문한 영국왕 에드워드 7세는 그 그림을 보고 영국도 그러한 공룡을 가졌으면 한다고
카네기에게 요청했다. 카네기는 이딸리아 기술자들을 고용해 2년 동안 복제품을 만들어 영
국에 제공하고 1905년 비로소 영국자연사박물관에 완전한 복제 디플로도쿠스가 공개되었
다. 이 행사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카네기는 그후에도 몇개의 복제품을 더 만들어 전세계의
자연사박물관에 전달하였다.
7. 새로운 대륙의 공룡발견
캐나다에서는 알베르토싸우르스의 머리뼈가 알버타주 레드디어강 계곡에서 발견된 188
4년이 최초로 공룡이 발굴된 때이다. 그후 이 지역에서 여러번의 탐사 시도가 있었지만 1
910년에 이르러서야 미국의 브라운이 거룻배를 사용한 최초의 대규모 탐사대를 구성하였
다. 이 거룻배로 강을 타고 이동하면서 화석이 있을만한 곳에 멈춰 탐사를 하였다. 거룻배
는 발굴된 화석을 운반하는 아주 이상적인 수단이었다. 기차나 말등에 실어 화석을 운반하
는 일은 손상의 위험이 많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계곡을 따라 몇해를 보내면서 극히 잘 보
존된 코리토싸우르스, 스티라코싸우르스, 켄트로싸우르스 같은 공룡을 발굴해냈다.
1907년 한 독일인 기술자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작업을 하다가 텐더그루라는 마을
옆에서 거대한 공룡뼈를 우연히 발견하였다. 이 소식은 곧 독일의 배를린박물관 소장에게
전해졌고 그는 대규모의 원정탐사를 준비했다. 텐더그루는 해안에서 64키로나 떨어진 곳
이어서 정글을 가로지르자면 꼬박 4일이 걸렸다. 길도 운반수단도 없었다. 발굴장소에는
가족을 동반한 500명이상의 그 지역 일꾼들이 생활해야만 했다. 따라서 그곳에는 자연스
럽게 음식, 물, 위생시설, 집, 의약품이 완비된 하나의 완전한 마을이 형성되었다. 탐사기
록에 따르면 1909~11년의 첫 3년간 4300개의 뼈화석이 발굴되어 린디 항구로 보내졌
다. 운반을 맡은 수많은 일꾼들은 발굴된 뼈를 운반하기 위해 산지와 항구 사이를 5400번
씩 왕복해야만 했다. 결국 250톤의 화석과 암석들이 텐더그루에서 베를린으로 옮겨졌다.
이 발굴은 분명 대규모적이고 성공적이었다. 여기서 발굴된 화석은 지금까지 발굴된 것중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브라키오싸우르스, 켄트로싸우르스, 그리고 이족보행의 초식공룡
드리오싸우르스이다. 특히 베를린 박물관에 전시된 브라키오싸우르스는 높이가 12미터, 길
이가 22.5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큰 전시공룡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옆에 나란히 전시된
카네기의 디플로도쿠스 복제품이 매우 작게 보일 정도이다.
몽골에서의 공룡발견은 매우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1922년 미국자연사박물관은 인류의
기원과 원시 포유류 화석을 찾기 위해 고비사막을 탐사하는 원정대를 결성하였다. 이 탐사
의 책임자 앤드루즈는 수톤의 식량과 장비, 휘발유를 실은 150마리의 낙타떼와 함께 천천
히 사막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그들은 매일 수백킬로미터를 지그재그로 진행하며 화석탐사
를 시작하였다. 탐사는 잘 진행되었으나 중생대 포유류의 화석을 찾는데는 실패하였다. 그
대신 1922년에서 1925년까지 매년 계속된 원정에서 이들은 새롭고도 매우 중요한 오비
랍토르와 벨로키랍토로 같은 공룡과 프로토케라톱스의 둥지와 알을 찾아냈다. 이로써 공룡
이 알을 낳는다는것이 확인되었다.
중국에서의 공룡탐사는 1917년 러시아팀이 오리주둥이 공룡 길모레오싸우르스를 발굴
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1933년에 이르러 양중젠이 40년에 걸쳐 중국공룡탐사를 주도하
게 된다. 실제 모든 그룹의 공룡들이 중국에서 발견되었는데 그중에는 놀랍도록 목이 긴
마멘키싸우르스와 투우지앙고싸우르스, 그리고 서너종류의 오리주둥이공룡이 있다.
오늘날 공룡탐사 작업은 전세계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실제 모든 대륙에서 공룡이 발견
된다.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에서 커다란 뿔을 가진 수각류 카르노타우르스와 갑옷돌기
가 있는 용각류 쌀타싸우르스를 포함하여 많은 수의 공룡뼈들이 산출되고 있다. 후기 백악
기 수각류들이 인도의 데킨고원지역에서 발견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다른지역에서 발
견된 적이 없는 새로운 수각류와 조각류 공룡들이 산출되고 있다. 심지어 이구아노돈의 발
자국이 알래스카에서 발견되기도 하며 남극에서는 갑옷공룡과 힙쓸로포돈 같은 작은 초식
공룡들이 최근 발견되었다. 이전에 공룡화석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한국과 일본에서도
최근에 단편적이나마 공룡뼈들이 발견되기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발견들은 머나먼 오지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택가 근처 공터에서
중요한 화석이 발견되기도 한다. 동시에 기존에 알려진 화석지를 재조사함으로써 새로운
발견을 이루기도 하고 신기술을 사용해 수십년 동안 박물관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화석들
로부터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기도 한다. 새로운 해석이 계속 발표되고 있으며 새로운 연
구가 수행되고 새로운 이론이 토의된다. 공룡탐사는 여러가지 형태로 수행되는데 야외에서
실험실의 현미경 아래에서 그리고 박물관의 전시관에서 모두 가능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러한 연구의 성공은 공룡의 실체에 좀더 다가가기 위해 계속되는 고생물학자와 아마츄
어들의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2장 공룡학자
공룡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훌륭한 공룡학자는 동물
기관 각각의 구조와 역할에 관한 상세한 지식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탐험가, 고고학자,
탐정, 그리고 예술가의 능력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공룡학자들은 어떤 일을 하며 또한 어
떤 식으로 공룡을 연구하는 것일까?
1. 화석의 발굴과 처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물론 화석을 찾는 일이다. 화석은 퇴적암에서만 발견되기 때문
에 공룡화석을 포함할 수 있는 중생대 퇴적암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장
소는 세계 각국에 퍼져 있으며 때로는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오지에 분포하기도 한다. 다
행스러운 것은 새로운 공룡화석을 포함한 퇴적암들이 바람과 물에 의해 계속 풍화되어 노
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츄어 화석 수집가가 오래된 화석산지나 새로운 곳을 조사하
다 우연히 공룡뼈를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박물관이나 대학의 탐
사팀들이 주의깊게 선택된 장소에서 대규모로 탐사작업을 행하는데 이 경우 트럭, 발전기,
수많은 발굴도구와 탐사장비 및 운반장비를 갖추어야 한다.
탐사의 목적은 새로운 공룡화석을 발굴하고 연구를 위해 이를 실험실로 가져오는 것이
다. 화석이 반쯤 풍화되었더라도 화석 자체는 가장 철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굴착기로
화석을 포함한 암석을 파헤친 후 칼과 부드러운 붓을 사용해 화석에 접근한다. 마지막 단
계에서 화석이 묻힌 암석을 잘라 분리해내고 운반하기 위해 석고로 싼다. 분리된 표본은
보통 트럭에 실어 실험실로 운반하는데 오지에서는 낙타, 노새, 심지어 코끼리가 사용될
때도 있다. 그러나 운반작업에 앞서 현장에서 세심한 야외조사가 수행되어야만 한다. 각각
의 뼈가 발견된 정확한 위치가 기록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기록은 후에 공룡의 화석화 과
정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실험실로 돌아와 공룡학자겸 탐험가는 공룡학자겸 화석처리가로 역할을 바꾸어 화석을
싸고 있는 암석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화석화 과정에서 뼈는 부서지거나 짓눌려지기 때문
에 뼈를 감싸고 있는 암석을 제거할 때 뼛조각들을 잃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따라
서 공룡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암석은 쉽게 제거될 수 있는 부드러운 것이다.
실험실로 옮겨진 암석덩어리는 본격적인 뼈추리기 작업에 들어간다. 뼈 주위를 두껍게
싸고 있는 암석을 우선 망치난 정, 다이아몬드톱으로 제거하여 최대한 뼈 가까이 접근해
간다. 이제부터 여러 가지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는데 만일 암석이 석회암이면 뼈가 부식되
지 않을 정도로 엷은 산성용액에 넣어 서서히 석회암을 용해시킨다. 이러한 방법은 특히
조그맣고 섬세한 화석을 다루는데 유용하지만 진행속도가 매우 느린것이 단점이다. 만일
암석이 매우 단단하거나 산성용액에 용해되지 않는 종류라면 압축공기로 작동하는 공기파
쇄기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필크기의 공기파쇄기를 사용해 암석을 좁쌀만큼 조금
씩 떼어낸다. 이렇게 뼈를 상하지 않게 하면서 조심스레 암석조각을 분리해 내는 것은 대
단한 주의력과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다. 미세한 작업이 필요한 때에는 치과용 드릴이나
바늘이 동원된다. 일단 뼈가 드러나면 PVA를 칠하여 뼈의 강도를 높힌다.
그러나 공룡뼈들은 이러한 일을 쉽게 수행할 수 있게 매끄럽거나 똑바르지 않다. 많은
구멍과 틈이 있고 휘어져 있거나 또는 조그만 부분들이 돌출되어 있어 작업을 어렵게 만
든다. 현미경 아래에서 일주일 내내 작업해도 단 하나의 척추뼈도 처리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따라서 만일 디프로도쿠스처럼 척추가 90개가 넘는 커다란 공룡뼈를 처리하자면 몇
년이 걸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수많은 박물관에는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채
석고에 쌓여 있는 뼈들이 수장고에 가득히 쌓여 햇빛 볼 때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 공룡의 복원
이제부터 공룡학자들은 다시 역할을 바꿔 화석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맨
처음 할일은 각각의 화석조각들이 무슨 뼈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하나의 공룡에 속한 모
든 뼈가 올바른 위치에서 함께 발견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동물의 시체는 다른 동물에 뜯
기거나 강물에 씻겨 운반되면 수백만년 동안 암석속에서 재배치되거나 파괴된다. 그 결과
많은 뼈조각이 없어지고 부서진 상태에서 어떠한 안내도면도 없이 복원을 해야한다.
퍼즐게임처럼 공룡뼈도 중요한 조각부터 맞추기 시작하는데 고유한 특징들을 가장 많이
가진 머리뼈와 이빨이 가장 중요한 조각이다. 공룡들은 서로 다른 머리뼈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그만 머리뼈 조각에서도 새로운 특징을 발견할 가능성이 흔히 있다. 이빨은 공룡
의 식성에 대한 정보를 주며 척추 또한 각 그룹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떠한 공룡인
지를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다음단계에서 공룡학자의 작업은 매우 더디고 조심스럽게 진행되는데 각 뼈를 자세히
기재하고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뼈 하나를 기재할 때 다음과 같이 서슬
한다. '전악골은 콧구멍아래에서 약간 확장되어 주둥이 앞으로 가면서 서서히 좁아진다. 이
뼈의 윗부분은 콧구멍의 안쪽면과 만나 뒤와 위쪽으로는 사다리꼴의 코골편과 만난다. 얇
은 앞쪽 모서리는 전악골 치열까지 아래쪽으로 휘어져 얕게 파인 전악골 입천장을 형성한
다. 각 전악골의 앞쪽 모서리에는 거칠고 조그만 구멍들이 나있다...' 이 일은 특히 기재해
야 할 뼈가 300개가 넘는 큰 표본일 때 매우 힘든 작업이다.
뼈를 그리는 기술은 펜과 잉크를 사용하던 1800년대에서 크게 변하지 않는다. 공룡학자
들은 자기가 연구하는 뼈의 그림을 직접 그리거나 전문가에 의뢰해 여러 각도에서 관찰한
그림을 완성시킨다. 더 정교한 사진기록을 위해서 때로는 입체사진을 찍기도 한다. 이렇게
각뼈를 기재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은 공룡학자에게 해답을 주는 만큼이나 많은 질문을 야
기시킨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질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과학적 원리, 유추, 다른 뼈와의 비
교, 혹은 현생동물과의 비교등 모든 가능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때로는 추측에 의존할 때도
있다.
만일 운이 좋다면 반 정도 완전한 조각을 가지고 복원을 할 수도 있다. 없어진 부분은
가지고 있는 뼈를 모델링하여 채운다. 예를 들어 오른쪽 갈비뼈를 통해 똑같은 모양으로
대칭되게 왼쪽 갈비뼈를 만들수 있다. 만약 오른쪽 다리에서 세개의 발가락 뼈가 존재하고
왼쪽 다리에 오른쪽에는 없는 한 개의 발가락 뼈가 있다면 이 모두를 함께 조합하여 완전
한 두 다리를 만들수 있다. 그러나 만일 많은 뼈가 보존되지 않았다면 각 뼈가 실제발견되
었을 당시 어떻게 놓여 있었나를 보기 위해 발굴장소에서 만든 발굴지도를 사용하거나 가
장 비슷한 공룡의 골격과 비교하여 그와 유사한 모양으로 채워 넣을 수도 있다. 현장조사
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는데 발굴이 부주위하게 진행되면 복원단계에서
터무니 없는 실수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한 장소에 두 종류의 다른 공룡뼈가 함께 섞여 있
거나 서로 관계가 없는 뼈들이 완전히 잘못된 위치에 붙어있는 경우가 있다.
만일 발견된 뼈가 이미 기재된 종류라면 이전의 연구논문이 매우 유용할 수 있다. 그러
나 이는 단지 참고용으로 사용될 뿐이지 전적으로 그 논문을 따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
재의 표본이 이전 표본에는 없던 새로운 뼈를 포함할 수 있고 때로는 그 공룡의 생태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과거 100년 동안 이
구아노돈에 대한 복원이 얼마나 변화되어 왔는지 알고 있다. 심지어 매우 잘 알려진 공룡
에서도 늘 새롭게 해석할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으며 이는 공룡학자의 참신한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만약 발견된 화석이 새로운 종류라면 복원은 더욱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며
비교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화석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새로운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림 그리기 작업과 병행하면서 뼈들을 조합하면 다음 일은 각각의 뼈에 맞는 근육을
입히는 것이다. 물론 화석화된 근육은 없다. 먹이를 씹는것 같은 간단한 움직임에도 많은
근육들이 함께 작용하므로 공룡의 복잡한 근육구조를 파악하려면 현생 동물과 비교하는
것, 즉 비교 해부학적 지식을 이용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따라서 현생동물에 대한 세밀한
해부학적 지식은 모든 공룡학자들에게 필수적이다. 이렇게 3차원적 퍼즐이 완성되고 각 뼈
의 위치가 확인되어 없어진 부분이 채워지면 공룡의 크기와 형태에 대한 기본적인 윤곽이
분명해진다. 여기까지 오는 데 몇년이 걸릴 수도 있다. 이제부터 좀더 추론적인 작업이 가
능하며 공룡이 살았을 때 실제 어떠했는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탐정에게나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가장 좋은 장소는 사체가 발견된 현장이다. 화석
이 발견된 주변의 암석을 철저히 조사해보면 때로 사체가 모래, 펄 혹은 강의 진흙에 의해
덮였는지 또는 죽은 장소가 범람원이었는지 강가였는지 등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실마리들
은 과거 그 장소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며 공룡이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도 알려
준다. 때로 암석이 보존하고 있는 증거는 매우 극적이다, 미국 유타주의 한 장소에서 많은
알로싸우루스의 뼈들이 스테고싸우르스와 카마라싸우루스의 잔해와 함께 발견된 적이 있
다. 뼈를 포함하고 있던 암석은 당시 이 지역이 자연적 수렁에서 형성되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갇힌 초식공룡을 잡아먹기 위해 알로싸우루스가 수렁으
로 뛰어들었을 수도 있다. 또다른 알로싸우루스가 먹이를 한입 베어물기 위해 들어갔다가
차례로 수렁에 갇혀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인 위험은 몇년
간 계속 존재했을 것이고 계속해서 수많은 공룡들이 죽음으로써 많은 양의 뼈가 한꺼번에
산출되는 장소가 된 것이다.
3. 공룡의 분류와 기재
공룡학자가 필히 해야 할 다음 일은 각 공룡들이 계통발생학적으로 어디에 위치하느냐
를 밝히는 것이다. 현재 많은 연구가 이러한 주제에 집중되어 있다. 결국 이 작업의 궁극
적인 목적은 공룡 전체의 진화계통을 밝히는 것이다.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각 공룡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객관적으로
확연히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발굴한 뼈와 이빨에서 이러한 특징들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공룡을 분류하는 작업은 각 공룡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이 공룡은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반복된 질문을 계속하는 것이다. 많은 특징을 찾아내 서로 비
교해 살펴보는 것이 더 정확한 분류를 이끌어내고 더 신빙성있는 계통도를 만드는 방법이
다. 결국 앞에서 언급했듯이 분기도는 공룡의 특징에 관한 모든 것들을 종합해 구성한 도
표로서 서로의 진하관계를 밝히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알아보려는 특징이 그
공룡에게 없다면 관계설정은 더욱 어려워진다.
마침내 공룡학자가 자기가 연구중인 공룡이 어느 그룹에 속하는 지 밝혀내면 그 공룡이
이미 알려진 공룡인지 혹은 새로운 공룡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모든 알려진 종을 세심히
조사해야 한다. 때로 이미 이름을 부여받은 종이 재조사에 의해 새로운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기재한 공룡에 이름을 붙이고 논문으로 발표하는 것이 공룡 학자의
마지막 임무이다. 하나하나 뼈를 기재하면서 공룡을 기재하는 일은 매우 공식화된 법칙에
의해 행해진다. 과학논문지에 한편의 논문으로 출판되기 전, 먼저 몇명의 전문학자에 의해
읽혀지고 인정받아야만 한다. 새로운 공룡의 존재는 논문에 실린 날짜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일은 매우 큰 노력이 요구되지만 이러한 작업만이 자신의 새로운 연구를
다른 과학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4. 공룡의 전시
관람객을 위하여 공룡을 모델링하고 뼈를 조립·전시하는 것은 더 전문화된 기술을 요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대부분의 공룡 골격은 실제를 그대로 복사한 모조품이다. 화석뼈는
보강 철재를 이용하여 설치할 수도 있으나 뼈의 무게와 파손 위험 때문에 안전하게 전시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유리섬유처럼 가벼운 물질을 이용하여 속이 비게 만들어진 모조
품은 실제 뼈보다 크게 무게를 줄일 수 있으며 훨씬 가느다란 철재나 플라스틱으로 전체
위치를 잡을 수도 있고 또한 이러한 보강자재를 뼛속에 안 보이게 설치할 수 있다.
공룡학자들은 공룡을 안전하고 올바른 자세로 전시하기 위해 기술팀과 함께 일한다. 공
룡 모델링은 매우 전문화된 작업으로서 이런 일을 하는 기술자는 전세계적으로 몇명밖에
없다. 전시기술자는 공룡학자가 연구한 뼈와 근육의 복원도를 가지고 공룡의 전체 형태를
잡는 일을 시작한다. 이빨이나 발톱 같은 정교한 부분은 공룡학자가 기재한 내용에 근거하
여 복원을 한다. 예를 들면 화석발통은 사실 발톱 안에 있던 발톱뼈이기 때문에 실제 발통
을 만들 때는 1/3 정도 크게 만든다. 피부조직의 모델링은 흔히 악어 같은 현생 파충류의
피부나 드물게 보존되어 있는 피부화석을 참고한다. 그러나 피부의 색깔은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입을 연 상태로 복원할 것인가 아니면 닫은 상태로 복원할 것인가? 눈동자를 새
처럼 동그랗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뱀처럼 날카롭게 찢어진 형태로 만들 것인가? 여기에
는 정확한 답이 없기 때문에 공룡학자는 이런 문제들을 모델링 기술자들과 협의해 결정해
야만 한다. 만약 공룡 모델이나 그림이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정확한 식물군과 풍경 또한
복원되어야 한다.
이렇듯 일반인들을 위해 공룡을 전시하는 일은 매우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그만큼 값진
일이다. 이것은 바로 힘든 탐사에서부터 몇년에 걸친 처리작업, 수백 시간을 들인 연구와
다른 학자와의 의견교환, 그리고 논문의 완성 등 모든 것이 집약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
리는 갑자기 무서운 이빨을 한 빌딩 트기의 육식공룡과 집채만한 초식공룡, 그리고 떼지어
날렵하게 움직이는 영리한 사냥꾼 공룡들을 보게 된다. 공룡학자들은 수억년 동안 암석 속
에 묻혀 있던 돌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어 이러한 경이로운 생명체를 우리 앞에 끌어내는
마법사 같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3장 텍사스의 공룡
앞에서 탐사에서 전시까지 어떤 단게에 따라 공룡연구가 진행되는지 살펴보았다. 이 장
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필자 이융남이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에 위치한 남부감리대학
(Sourthen Methodist University)에서 6년간 박사학위와 박사후 연구를 수행하면서 직
접 탐사·발굴하고 연구한 텍사스의 공룡들을 소개한다.
1억 8000만년간 지속된 중생대의 장구한 기간에 오늘날의 육상 척추동물의 대부분, 즉
도마뱀, 거북, 악어, 포유류, 새, 그리고 이미 멸종한 공룡과 익룡이 진화했다. 이러한 동물
집단의 진화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아직 이들의 진화과정이 명확히 규명되지 못한 상태
이다. 특히 후기 백악기의 지배 파충료는 전기 백악기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중기 백악기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더구나 전세계적으로 이 기강에 육성층(陸成層)이 적었고 산출된
화석도 매우 빈약하기 때문에 연구의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중북부 텍사
스에 분포한 중부 백악기 지층인 파파(Paw Paw) 지층과 우드바인(Woodbine) 지층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이들 지층으로부터 아직 어떤 지배파충류도 기재된 바가 없었지만
전기에서 후기 백악기로 가면서 공룡과 익룡, 악어 화석군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지층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 두 층에서 산출되는 척추화석을 학위논문
주제로 정하고 본격적인 야외탐사에 들어갔다.
1. 이빨을 가진 백악기 익룡
먼저 파파층에서 발견된 익룡에 관한 것이다. 1992년 여름, 달라스에 거주하는 아마추
어 화석채집가 와들리(Chris Wkdleigh)가 뼈 한조각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화석은 포트
워스 파파층에서 발견한 익룡의 깨어진 주둥이 앞부분이었다. 특이하게도 주둥이 위에는
둥그런 골즐이 있고 또한 이빨이 있던 자리가 주둥이 가장자리에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
었다.
나는 곧 이 익룡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문헌조사에 나섰다. 그때까지 북미의 백악기 익
룡은 세 종류가 알려져 있었다. 작은 골즐을 가진 닉토싸우루스규(Nyctosauridae), 긴 목
과 낮고 뾰죽한 부리를 가진 아스다크류(Azhdachidae)가 그것인데 이들 모두는 이빨이 없
는 익룡이다.
그러나 파파층에서 발견된 것은 이들과는 다르게 부리 가운데 골즐이 있고 이빨을 가지
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익룡은 북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이빨을 가진 백악기 익룡인 셈
이다. 주둥이에 골즐이 있는 익룡은 전 세계적으로 3속이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브라질 싼
따나층에서 산출된 안항 구에라와 트로페오그나투스, 그리고 영국의 케임브지지 그린쌘드
에서 발견된 트리오링쿠스(Criorbyncbus)이다. 그러나 형태학적으로 텍사스에서 산출된
익룡은 이빨의 배열과 골즐의 형태에서 이것들과 쉽게 구별되었다.
문헌을 계속 조사한 결과 텍사스의 익룡은 1874년 오언이 케임브리지 그린쌘드에서 기
재한 콜로보링쿠스 클라비로스트리스(Coloborbynbus clavirostris)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
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코로보링쿠스는 1900년대에 크로오링쿠스의 다른 이름(異名,
synym)으로 잘못 처리되어서 분류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따라서 나는 이
새로운 익룡을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콜로보링쿠스 와들리아이(Coloborbynbus wadleigb
i)로 명명하고 콜로보링쿠스라는 이름이 유효함을 입증하였다. 콜로보링쿠스 와들리아이는
처음으로 북미 익룡이 영국 익룡과 가까운 관계에 있음을 증명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2. 공룡뼈와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1989년 12살의 모리스(Johnny Maurice)는 열성적인 아마추어 화석채집가인 아버지와
함께 포트워스 북쪽 파파층이 노출된 공터에서 상어 이빨 화석을 찾고 있었다. 잠시 후 모
리스는 조그만 뼈 하나를 찾아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그 뼈가 누구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창밖으로 버린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의 뼈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같
은 장소에서 몇개의 뼛조각을 더 발견하자 혹시 화석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있는
대학을 찾아왔다.
이 뼈들은 놀랍게도 갑옷공룡 새끼의 뼈였다. 대퇴골의 길이는 10cm에 불과했으며 골단
부는 아직 완전히 경골화되어 있지 않았다. 척추와 신경배돌기도 확고하게 붙지 않았으며
아직 너무 어려 갑옷공룡의 특징인 골판도 발달하지 않은 상태였다. 화석이 발견된 장소로
달려가 이빨과 머리뼈 조각 등 상당수의 뼈를 더 발견했지만 이미 많은 부분이 없어진 후
였다. 각 뼈들을 자세히 관찰해본 결과 특이하게도 몇개의 뼈에는 긁힌 자국과 구멍이 나
있고 어떤 뼈 표면에는 굴껍질이 붙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공룡이 죽어 화석이 될
때까지의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실마리를 제공했다.
추론해본 이 공룡의 운명은 다음과 같아. 1억년에서 9750만년 전 사이의 어느날 당시
북미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대륙을 동서로 양분하던 서부 내륙해의 동쪽 해안에 갑옷공룡
한 무리가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고 있었다. 어린 새끼 한마리가 물에 빠졌다. 죽어서 쓸
려내려온 것인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물에 빠져죽은 것인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물에 빠
져욱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파파층은 전적으로 민물환경이 아니라 바닷물 유입에 영향을
받은 곳에서 퇴적된 지층이다. 이러한 환경에 대해서는 이 지층에서 발견되는 풍부한 성게
·불가사리 화석, 조개, 게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해양 무척추동물 그리고 상어의 이빨화
석을 통해 알 수 있다. 죽은 새끼는 곧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새끼의 살은 곧 상어에
의해 뜯기고, 조각난 벼들에 붙은 살은 게들이 깨끗하게 청소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형태
의 긁힌 자국과 구멍이 뼈에 남았다. 버려진 뼈들은 굴이 알을 낳을 수 있는 딱딱한 기반
을 제공했다. 굴들은 뼈 위에서 껍질을 만들어 2cm 정도까지 자란 후 또한 죽을 운명에
처하고 만다. 왜냐하면 계속 퇴적되는 점토와 모래가 뼈를 덮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굴의 크기와 성작속도로 판단해보면 뼈 위에 둥지를 튼 굴들은 약 한달 정도 생존했다. 이
렇듯 단지 조그만 뼈를 통해 1억년 전의 일을 돌이켜볼 수 있다는 것은 고생물학의 또다
른 매력이다.
우연히도 1994년에 새로운 노도싸우루스류(Nodosaurs) 화석이 새끼 뼈가 발견된 지역
에서 불과 200m 거리의 같은 지층에서 발견되었다. 이번에는 완전히 자란 성체의 머리뼈
였는데 머리뼈는 손상된 부분 없이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심지어 눈을 보호하는
누꺼풀뼈도 함께 산출되었는데 눈꺼풀뼈는 이전에 갑옷공룡 안킬로싸우루스류에서만 나타
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었다. 발견된 눈꺼풀뼈는 완전하게 눈동자를 덮을 수 있는 안킬로
싸우루스류의 눈꺼풀뼈와는 달리 눈 위에 햇빛 가리개처럼 내밀어져 있어 완전하게 눈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게 몸을 웅크리고 잘 뒤집혀지지 않는 자세로 취
하는 노도싸우루스류의 수동적인 방어전략을 생각해볼 때, 이 눈꺼풀뼈는 육식공룡의 날카
로운 이빨 공격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리라 판단된다. 5년 전 발견된 새
끼 뼈와 함께 이 화석은 기존에 알려진 노도싸우루스류와는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으
므로 파파싸우루스 캠벨아이(Pawpawsaurus campbelli)라 명명하였다. 머리뼈가 완벽하게
보존되었기 때문에 두개골의 해부학적 특징에 기초해 처음으로 노도싸우루스류의 신경과
혈관 구조를 정확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 작업을 위해 여름방학 동안 의대에서 인간해부학 실습과 척추동물의 비교해
부학을 공부하였다. 또한 스미스쏘니언자연박물관과 예일대 피바디박물관 그리고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에 보관중인 5종의 기존 노도싸우루스류 화석들과 비교 연구하기 위해
이들 박물관에서 한달을 머물렀다. 기존의 노도싸우루스류와 비교 연구한 결과 매우 흥미
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즉, 노도싸우루스류의 가장 큰 특징은 이들이 항상 머리를 50°정
도 수그린 채 살았다는 것이다. 이 자세는 낮게 자라는 풀을 뜯어먹는 데 장점이 있으나,
숙인 머리를 지탱하기 위해 여러가지 형태학적 변화가 일어났고 그러한 변화는 두개골 구
조와 근육 배치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즉, 머리를 항상 뒤쪽에서 당기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노도싸우루스류의 머리뼈 뒤쪽은 크게 뒤로 확장되어 있다는 설득력있는 해석을
제시할 수 있었다.
3. 긴 주둥이를 가진 악어
척추고생물학 연구는 새로운 화석을 발굴하는 야외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
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박물관의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오래된 화석에
의해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우드바인층에서 산출된 화석이 어떠한 것들인지 대학 부
설 슈러고생물박물관의 자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수년 전 발굴되어 아직 석고에 싸여 있
는 악어 화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곧 크고 작은 12개의 석고 껍데기를 열고 암석 속에
서 뼈를 추려내는 실험실 작업에 들어갔다. 두달에 걸쳐 완전히 처리된 악어는 유감스럽게
도 머리뼈는 없었지만 아래턱을 포함하여 다리뼈와, 몸을 감싸고 있는 96개의 비늘 들 거
의 모든 뼈가 보존되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몸뼈는 이미 멸종한 고니오폴리드(goniophlids)라는 악어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전의 고니오폴리드와는 다르게 긴 주둥이를 하고 있었다. 짧은 주둥이에서 긴
주둥이로 진화되는 것은 악어의 진화사에서 몇몇 그룹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는데, 우드
바인 악어를 통해 고니오폴리드 악어에서도 이러한 진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 진화 방향은 그들의 먹이습성과 관계있는데 긴 주둥이의 악어는 물고기를 주식으로 하
는 부류의 악어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악어는 우드바인쑤쿠스 바이어스모리스아이
(Woodbinesucbus byersmauricei)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4.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리주둥이공룡
가장 다양한 화석들이 산출되는 우드바인층의 일부는 달라스-포스워스 국제공항 지역에
분포한다. 일주일에 100만명의 여행객들이 오가는 공항이 바로 풍부한 화석층 위에 건설
되어 있는 것이다. 공항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두 개의 층이 만나는데 달라스 쪽은 해양에
서 퇴적된 오스틴(Austin) 지층이 분포하며 포스워스 쪽으로는 육성층인 우드바인층이 발
달해 있다.
과거 오스틴층에서는 수장룡과 모싸싸우루스류 같은 해양파충류와, 암모나이트를 포함한
무수히 많은 무척추화석들이 발견되어왔다. 반면에 우드바인층은 해수면이 빠르게 오르내
리는 강 하구 환경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뼈는 물에 이리저리 씻겨 잘게 쪼개
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오르내리는 파도는 여러가지 퇴적입자들을 키질하게 되었고 굵
은 입자층 속에는 자연적으로 많은 뼛 조각들이 모이게 된다. 이러한 층을 조사한 결과 몇
몇 공룡의 이빨을 포함해 악어, 거북, 개구리, 물고기, 상어, 심지어 포유류의 이빨에 이르
기까지 다양한 척추화석을 찾아내게 되었다.
여기서 공룡은 최소한 세 종류가 확인되었는데 수각류 리카르도에스테씨아
(Ricbardoestesia)의 이빨, 파파싸우루스와 다른 새로운 노도싸우루스류의 이빨과 상박골
(上膊骨, 위팔뼈), 그리고 오리주둥이공룡의 수많은 이빨과 상박골, 종아리뼈가 그것이다.
오리주둥이공룡의 이빨은 수백개가 보도블록처럼 모여 치판을 이루며 닳은 이빨은 빠지고
새 이빨이 계속 위로 올라오기 때문에 버려진 이빨들이 쉽게 발견된다.
우드바인층에서 오리주둥이공룡의 존재를 확인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9500만년이나 오래된 지층에서 오리주둥이공룡이 산출된적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북
미에서 오리주둥이공룡은 8000만년 이전의 지층에서만 산출되어 왔다. 그러므로, 우드바
인 오리주둥이공룡은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북미에서 오리주둥이공룡의 첫 출현시
기를 15000만년이나 끌어내린 것이 된다. 또한 당시까지 오리주둥이공룡은 아시아에서
기원해 북미로 넘어와 번성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왜냐하면 중국의 8700∼7300만년 전
시기의 지층에서 원시적인 오리주둥이공룡은 길모레오싸우루스(Gilmoreosaurus)와 박트로
싸우루스(Bactrosaurus)가 산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800만년이나 오래된 오
리주둥이공룡이 우드바인층에서 발견됨으로써 이 가설은 수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을 확증하기 위해서는 더 좋은 화석을 찾아야만 했다.
우선 공항 주변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러나 공항지역 대부분은 거대한 아스팜트로 덮여
있기 때문에 지층이 표면에 노출된 부분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공항에서 북쪽으로 10
km쯤 떨어진 그랩바인 호숫가를 따라 우드바인 치층들이 잘 노출되어 있어 자주 이곳을
찾아 야외조사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지역에서 수각류와 함께 조각류의 발자국이 정교
하게 찍힌 층리면(層理面)을 발견했다. 이 층리면을 도면에 옮겨 해석한 결과 놀랍게도 한
마리의 새끼를 포함한 커다란 조각류 공룡 네 마리가 9500만년 전 어느날 공항 쪽으로
(당시에는 없었지만) 이동하며 남긴 발자국들이었다. 한 발자국은 직선으로 연속적인 23
개의 발자국을 남겼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어린 조각류는 네 발로 걸은 반면 다 자란
커다란 조각류는 두 발로만 걸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발자국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구아노돈의 발자국으로 보기에는 지층의 시
대가 너무 젊고 이구아나돈에서 진화한 오리주둥이공룡의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오래되었
다. 물론 전혀 새로운 조각류의 것일 수도 있으나 화석뼈의 증거가 없었다. 이 발자국이
오리주둥이공룡의 것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공항 근처에서 낱개로 산출되는 이빨밖에 없었
다. 발자국 주위의 지층을 몇주간 정말탐사하여 나는 같은 층리면에서 92cm 길이의 오리
주둥이공룡 정강이뼈와 종아리뼈를 찾아냈다. 마침 내 오리주둥이공룡과 발자국의 연결고
리가 형성된 것이다.
학위논문 마무리로 바쁘던 1994년 겨울, 지도교수로부터 당장 달라스자연사박물관으로
가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버드(Gray Byrd)라는 아마추어 화석채집가가 그랩바인 호수 근
처에서 이상한 뼈를 발견해 박물관에 갖다놓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몇개의 뼛조각들에서
완전한 오리주둥이공룡의 뒤발 발톱 한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곧 뼈의 발견장소를 알아내
그곳으로 달려갔다. 우드바인 지층은 9500만년이나 오래된 지층이라고는 믿을수 없을 정
도로 부드러워 큰 중장비 없이 간단한 손도구로도 파헤칠 수 있다.
발톱이 발견된 장소에서 나는 송곳으로 조심스레 지층을 찔러나갔다. 잠시 후 땅속에서
딱딱한 물체가 송곳 끝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붓과 조그만 삽을 이용해 지층을 조심스럽
게 파내자 내가 송곳으로 건드린 것은 놀랍게도 오리주둥이공룡의 아래턱이었다. 순간 짜
릿한 흥분으로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혹시 완전한 머리뼈가 묻혀 있을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예감은 적중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리주둥이공
룡의 완전한 머리뼈를 찾은 것이다. 지도교수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그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곧 학교 동료와 박물관팀이 도착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달라스방송국의 카메라
맨과 기자가 현장에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렇게 가장 오래된 오리주둥이공룡의 발견은
곧 방송국에서 CNN 뉴스로 연결되어 전세계로 방영되었다.
5. 거대한 비밀을 간직한 유대류의 이빨
달라스-포스워스 국제공항의 조그만 강가에서 발견한 하나의 포유류 이빨은 또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중생대에 포유류는 매우 작았는데 오늘날의 생쥐
크기만 했다. 따라서 이들의 뼈는 매우 작고 부서지기 쉬워 화석으로 발견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대신 에나멜질로 싸여 있는 이빨은 풍화와 마모를 잘 이겨내기 때문에 화석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제는 그 크기가 너무 작다는 데 있다. 보통 이빨 한개의
크기는 이빨뿌리까지 포함해 약 2mm 내외다. 따라서 육안으로 이것을 찾는 것은 백사장
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도 어렵다.
1960년대에 이러한 조그만 화석을 찾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그 방법이란 한마디로 체로
거르는 것이다. 구멍이 1mm보다 작은 체를 아래에 놓고 그보다 구멍이 큰 체를 위에 포
개놓은 후 화석을 포함하고 있을 만한 지층을 채취하여 물을 부으면서 거른다. 그러면 1∼
2mm 크기의 입자들이 아래 체에 모이게 되고 이를 말려 조그만 판에 조미료를 뿌리듯 얇
고 고르게 뿌린 다음 현미경으로 일일이 보면서 화석을 핀셋으로 집어내는 것이다. 이 방
법을 통해 이빨을 찾는 작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화석들이 많이 농집된 지층에서 지료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공항의 강가에 노출된 우드바인층에서 오리주둥이공룡 이빨들이 함유
된 층준을 집중적으로 쌤플링하여 처리했다.
그러나 이렇게 화석이 농집된 층준을 찾았다 하더라도 포유류 화석을 찾아내는 것은 쉬
운 일이 아니다. 보통 포유류 화석이빨은 1톤의 시료당 한개가 나올까말까 할 정도 귀하기
때문이다. 1통의 암석가루를 현미경으로 일일이 관찰해야만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이렇게 발견하기 어려운 중생대의 포유류 화석에 대해 왜 고생물학자들은 그
다지도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삼첩기에 처음 진화해 오늘날까지 2억년이 넘는 긴 포유류
진화사에서 우리가 가진 지식의 대부분은 신생대 포유류에 편중되어 있다. 신생대에 갑작
스럽게 적응방산한 포유류는 이미 태반류(胎盤類), 유대류(有袋類), 그리고 단공류(單孔
類)로 다양하게 진화되어 그들의 기원을 밝히는 일은 매우 어렵다. 자연스럽게 포유류 진
화사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중생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시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드바인층으로부터 단 하나의 포유류 이빨만
을 찾아냈다. 좁쌀만한 크기를 가진 이빨의 형태는 전형적인 그러나 매우 원시적인 유대류
의 어금니였다. 캥거루로 대표되는 현생 유대류는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에 많이 분포하지만
유대류는 중생대 후기 백악기 때 북미에서 기원하였다. 전기 백악기에서 화석으로 산출되
는 포유류는 유대류도 아니고 태반류도 아닌 이들의 조상 포유류이다. 따라서 우드바인층
에서 찾아낸 조그만 이빨 하나로 9500만년 전에 이미 포유류가 태반류와 유대류로 갈라
져 진화해갔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4장 몽골 고비사막의 공룡탐사
1900년대 초 뉴욕 미국자연사박물관 관장 오스본(Henry Osborn)은 포유류가 신생대
초인 팔레오세(Paleo世)에 이미 다양하게 진화되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포유류는 이미
중생대 백악기에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을 주창하였다. 포유류의 뿌리를 찾기 위
해 1921년 뉴욕 미국자연사박물관 관장 앤드루즈를 팀장으로 하는 아시아탐사대가 구성
되어 중국을 거쳐 첫번째 몽골탐사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1921년부터 1930년까지 몽골
고비사막 지역을 탐사했는데 8대의 자동차와 150마리의 낙타를 이끌고 사막을 횡단하였
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 의도한 중생대 포유류 화석이 아니라 수많은 공룡화석을 찾아냈
고 세계 최초로 공룡알 둥지를 발견하였다. 이 발견은 공룡이 파충류나 새처럼 알을 낳는
다는 것을 화석으로 입증한 것으로 이때부터 몽골 고비사막은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
다.
그후 1946∼49년에는 구소련과학원에 의해 공룡탐사와 더불어 이지역에 대한 상세한
지질조사가 시행되었고, 1963∼71년에는 폴란드팀에 의해 수많은 귀중한 화석들이 발견
·연구되었다. 현재에도 몽골은 여러 국가들과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특히 1990년
부터 다시 미국자연사박물관팀과 탐사를 하면서 매우 귀중한 발견과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몽골 고비사막의 중요성은 바로 완벽한 화석 보존에 있다. 예를 들면, 북미에서 중생대
포유류 연구는 주로 낱개로 발견되는 이빨에 의존해왔다.(제3부 3장 참조). 반면에 고비사
막에서 포유류 화석은 전체 골격이 완전하게 발견된다. 중생대 포유류의 크리를 생각해볼
때 이렇듯 완벽하게 화석이 보존돌 수 있다는 것은 과거 이 지역이 화석 보존에 좋은 조
건을 갖추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고비사막은 모든 척추고생물학자들이
가고 싶어하는 화석탐사의 낙원으로 여겨져왔다. 이 장은 필자 이융남이 19996년 6월 14
일 ~ 7월 19일에 고비사막에서 직접 수행한 공룡탐사를 바탕으로 탐사준비에서 공룡발굴
까지를 기행문 형식으로 서술한 기록이다.
이 국제 공동 공룡탐사의 목적은 동북아시아의 공룡 분포와 그들의 상호연계성을 조사
하여 궁극적으로 아시아에서의 공룡의 진화를 밝히는 것이다. 이 탐사의 의의는 최초의 아
시아 공룡학자들에 으한 국제 공룡탐사라는 것인데, 1996년은 연구의 첫해로서 몽골 고비
사막을 탐사했다. 중국팀장은 뻬이징 척추고생물고인류연구소의 뚱 즈망교수, 몽골팀장은
공골자연사박물관 소장 바스볼드(Rinchen Barsbold) 박사, 일본팀장은 후꾸이현 박물관장
아즈마 요오이찌박사이다. 나는 아즈마 박사의 요청으로 이 계획에 참가했다. 탐사준비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의 몽골과학원 지질연구소에서 5일간 진행되었는데, 두 대의 소련
제 군용지프와 세대의 군용트럭에 50일분의 식량과 텐트, 탐사장비, 2800리터의 휘발유를
실었다. 나를 비롯하여, 몽골인은 3명의 운전사를 포함하여 7명, 중국인은 4명, 일본인은
3명, 그리고 요리사 겸 통역사인 2명등 모두 17명으로 탐사팀이 구성되었다. 몽골은 한반
도 면적의 7배나 되는 큰 나라인데, 북서지역은 알타이 산맥의 끝자락으로 산악지대이며
남동쪽은 사막이역이다. 중생대 지층은 주로 남부 고비사막에 분포하였는데 크게 세개의
층, 작토하(Djactokhta) 바룬고욧(Barun Goyut), 네메그트(Nemegt)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층들은 8700만년 전부터 6500만년 전까지, 바람에 의해 강과 호수에 쌓인 토적
층으로서 공룡과 악어, 거북, 포유류 등 풍부하고도 다양한 육상척추동물의 화석을 포함하
고 있다. 이번 탐사의 목적지는 투르릭 지역을 중심으로 알락테, 자민혼드, 바인작, 그리고
네메그트 분지지역의 네메그트 산맥과 알탄 울라였다. 이들 지역 대부분은 해발 1500m에
위치하고 있다.
1. 모래폭풍의 투그릭
길도 없는 초원지대를 이틀간 계속 달려 도착한 첫번째 야영지는 투그릭(Toogreeg)이
었다. 몽골의 화폐단위인 '투그릭'과 같은 이름을 가징 이곳은 지형적으로 동전처럼 둥그런
분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곳은 풍성 토적층인 작토하층이 분포하여 매우 중요한 화석들
이 산출되는 곳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공룡화석들은 약 8000만년 전 모래폭풍에 의해 갑자기 묻혀
화석화 된 것으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화석들이 산출상태가 완벽하고 또한 죽었
을 때의 상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프로토케라톱
스와 벨로티랍토르가 서로 생사의 싸움을 벌이다 화석화된 것으로 벨로키랍토르는 그 날
카로운 앞발톱으로 프로코게라톱스의 배를 찢고 있고, 프로토케라톱스는 필사의 몸부림으
로 벨로키랍토르의 앞발을 물고 있는 상태이다. 이 경이로운 화석은 현재 몽골자연사발물
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지역의 또하나 놀라운 사실은 화석을 함유한 지층이 해변의 모래
처럼 부드러워 간단한 손도구로 쉽게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맨텔이 1822년 우연히
이구아노돈 이빨을 발견한 것으로 공룡화석 발견은 시작되었지만 지금까지도 공룡화석을
찾는 방법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화석의 발견은 전적으로 암석표면을 조사하는 지루한
작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지층 속에 묻혀 있는 화석은 그것을 감싸고 있는 지층이 자연적
으로 풍화되거나 도로 건설처럼 인위적으로 암석이 지표로 노출되었을 때만 발견이 가능
하다. 탄성파 등의 지구물리학적 방법을 이용해 땅속에 묻힌 뼈의 존재 여부를 알아내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으나 실제 탐사에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지층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뼈화석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표를 빠진 부분 없이 관찰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계곡을 훑어 내려가는 것으로 탐사
는 시작된다. 공룡을 묻어버린 지층들이 바람과 비에 의해 조금씩 풍화되어 8000만년의
시간을 깨고 지표로 노출되어 있다. 그렇게 노출된 뼈는 지층과 함께 조금씩 풍화되어 흩
어져내린 뼛조각을 따라 거슬러올라가면 지층에 박혀 있는 뼈의 임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
러한 화석들이 몇천만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기다려 잠시 거쳐가는 탐사대의 눈에 발견
되는데, 이는 커다람 행운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만약 여기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이
귀중한 화석들은 풍화되는 지층과 함께 서서히 사라지고 말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계곡을 따라 뼈의 잔해를 찾아헤매다 프로토케라톱스의 아래턱 부분이
반쯤 노출되어 지표에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뼈는 하얀색으로 모래 색깔의 지
층과 쉽게 구별되었다. 약8000만년인 지층의 나이를 생각할 때 지층의 고화도나 뼈의 상
태가 너무나도 좋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중생대 공룡뼈는 오랜 기간 지층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화석화 작용 때문에 변색되고 단단한 암석처럼 고화되
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화석화 작용이란 뼛속으로 광물질이 침전되거나 혹은 뼈 성분이 다
른 물질로 치환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화석은 본래의 무게보다도 무겁고 단단해져 현생
의 뼈와 쉽게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여기서 발견된 뼈들은 현생 동물의 뼈처
럼 가볍고 심지어 색까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일단 발견된 뼈의 주위부터 조심스레 파서 묻혀있는 전체 뼈의 크기를 확인한다. 발견된
프로코케라톱스의 머리뼈는 거꾸로 뒤집힌 채로 지층 속에 박혀 있는 상태였다. 주위에 몸
뼈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죽은 후 몸에서 머리뼈가 분리되어 이 곳에 묻힌 것으로
판단되었다. 아래턱 주위를 조금씩 파들어가자 아래턱과 굳게 물린 위턱의 이빨들이 보였
다. 프로코케라톱스 머리뼈의 특징인 얇은 프릴 부분은 일반적으로 파손되기 쉬운데 조금
도 손상된 것이 없었다. 머리뼈의 길이는 63cm, 폭은 50cm였다.
여기서 발견한 화석처럼 크고 완전한 골격은 묻혀 있는 상태와 규모에 따라 발굴부터
운반가지 필요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먼저 노출된 뼈들은 쉽게 부서지기 때문에
PVA를 뼈 표면에 바른다.(제3부 2장 참조). PVA가 뼛속으로 스며들어 굳는 동안 발견된
화석의 위치를 지형도와 야외노트에 기재한다. 화석의 상태, 방향 그리고 화석을 함유한
지층에 대한 지질학적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나중에 실험실에서 화석
을 처리하고 궁극적으로 공룡을 복원할 때 이용되는 매우 귀중한 정보이다.
일단 기록이 끝나면 석고를 씌우는데 화석을 안전하게 운반하고 보관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팔이 부러졌을 때 병원에서 석고로 깁스를 해서 움직일 수 없게 하는 이치와 똑같다.
이때 중요한 것은 뼈를 포함하고 있는 암석덩어리를 석고로 씌우기 전에 물에 적신 두루
마리 화장지를 덮어 뼈와 석고가 직접 붙는 걸 방지하는 일이다. 석고를 씌울 때 강도를
높이기 위해 종종 두꺼운 천이나 포대를 잘라 긴 띠를 만들어 석고와 함께 이용한다. 이는
석고 붕대 같은 역할을 한다.
석고 표면이 완전히 굳었을 때 그 표면에 유성펜으로 표본의 방향과 번호를 표시한다.
나중에 정학한 표본의 위치를 복원하기 위해서이다. 그 다음 석고로 싼 밑부분을 조심스레
파들어가 송이버섯 모양으로 뒤집기 쉽게 만든다. 물론 뼈보다 깊게 파야 한다. 그후 충분
히 파인 석고덩이의 밑을 뒤집어 아래 표면이 깨끗하게 잘 잘렸나 확인한 후 그위에 다시
석고를 씌우면 완전한 석고껍데기가 완성되고 옮길 준비가 끝난다.
이렇게 야외에서 만들어진 표본은 실험실로 옮겨져 본격적인 실험실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지금 작업한 표본은 150kg 이상의 무게를 지닌 채 계곡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야영
지로 옮기기 위해 굵은 밧줄로 묶어 트럭으로 계곡 위로 끌어올렸다. 이렇게 석고 표본의
크기는 화석의 크기에 비례하기 때문에 커다란 화석을 발굴할 경우 크레인 같은 중장비가
동원되기도 한다.
바람이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작업을 서둘렀다. 우려했던 모래폭풍
이 드디어 시작되고 있었다. 모래폭풍은 보통 시속 60~80km로 휘몰아친다. 캠프를 강타
하는 모래폭풍을 피하기 위하여 차량으로 텐트를 둘러쌌지만 텐트는 국기처럼 펄럭거렸다.
점점 모래 속에 묻히는 텐트를 빠져나와 차 속으로 피신해 있었다. 모래폭풍은 점점 심해
져 거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모진 바람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음식에선 모래
가 버석버석 씹히고 옷 속으로 파고드는 모래와 싸워야 했다. 눈뜨기조차 힘들기 때문에
한 대원은 재빠르게 안경에 테이프를 감싸 사막용 안경으로 개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탐사대는 나흘 동안 총 8개의 거의 완전한 프로토케라톱스 골
격을 발견하였다. 프로토케라톱스는 북미지역에 잘 알려진 트리케라톱스의 조상으로 가장
원시적인 뿔공룡이다. 뿔은 아직 발달되지 않았지만 이 그룹의 특징인 머리 뒤의 프릴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특히 투그릭 지역은 프로토케라톱스의 알둥지와 함께 여러 연령층의
화석들이 산출되고 있어 공룡의 집단 서식지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1995년 다른 탐사팀에
의해 이곳에서 약 30cm 크기의 프로토케라톱스 새끼가 16마리나 함께 발견된 적도 있다.
며칠 후 나를 포함한 5명의 대원은 트럭 한대에 몸을 싣고 투그릭 베이스캠프로부터 남
서쪽으로 2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한 자민혼드를 탐사했다. 우리는이곳의 한 지점에서 많
은 공룡알 파편을 발견하였다. 조심스럽게 파편들을 걷어내자 이미 풍화되어 반쯤 깎여나
간 지름 60cm 가량의 공룡알 둥지가 나타났다. 세어보니 12개의 타원형 공룡알이 동심원
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불행히 지표에 노출된 둥지의 윗부분은 이미 풍화되어 있었지만
지층 속에 박힌 나머지 부분들은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둥지의 완전한 형태를 알아보기 위해 일단 가장 잘 보존된 공룡알 한개를 조심스레 둥
지에서 분리해보니 그 아래에 깨지지 않은 온전한 알들이 촘촘히 묻혀 있었다. 공룡알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앤드류가 처음 고비사막에서 발견한 공룡둥지의 알과 같은 것이었다.
과거 이러한 형태의 알은 프로토케라톱스의 알로 생각되었으나 최근 같은 형태의 알을 품
고 있는 오비랍토르가 발견됨에 타라 알의 주인에 대한 해석이 바뀌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트럭이 고장나 우리는 조난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시간이 저녁 6시 30
분,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우리는 구조대가 발견할 수 있도록 트럭 주위에 불을 피웠다.
초조하게 기다린 지7시간, 마침내 새벽 1시경 우리는 구조되어 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막에서의 이동은 언제나 어렵다. 1920년대 뉴욕 미국자연사박물관팀이 고비사막 탐사
에서 사용한 주요 운반수단은 낙타였다. 깊은 모래 때문에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가 이런
곳에서는 무용지물로 느껴지게 된다. 역사적 장소인 바인작(Bayn Dzak)으로 가는 길이
바로 그러했다. 바인작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포유류 화석산지이다. 1960년대 폴란드팀
이 150여 개체의 포유류 화석을 이곳에서 발견하여 보고한 바 있다. 그것들이 중생대 포
유류의 진화를 밝히는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흔히 이 작업은 백사장에서 바늘찾기에 비유되는데 39C를 오르내리는 폭염 아래서 중생
대 포유류 화석을 그토록 많이 발견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한 지역에서 이처럼
많은 포유류 화석이 완전하게 발견된 곳은 바인작 이외에는 없다.
베이스캠프에서 불쪽으로 약 5km에 위치한 알락테(Alag Teg)은 투그릭과는 달리 다양
한 공룡들이 산출된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갑옷공룡 피나코싸우르스(Pinacosauru
s). 오리주둥이공룡, 그리고 용각류 공룡이었다. 1982년 이곳에서 7마리의 새끼 피나코싸
우루스가 캐나다 - 중국 공룡탐사팀에 의해 발견된 적도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용각
류의 발견이다. 지금까지 몽골에서는 네메그토싸우루스(Nemegtosaurus)와 오피스토코일
리카우디아(Opisthocoelicaudia). 두 종류의 목긴 공룡이 네메그트층에서 보고되었을 뿐이
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토하층에서 발견한 것은 몰골에서 세번째로 발견된 목긴 공룡이며
또한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도 오래된 것이었다. 이 발견의 시발은 지표에 노출된 3개의 척
추뼈였는데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두 마리 새끼 용각류가 함께 묻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
으나 유감스럽게도 머리뼈는 발견되지 않았다.
2. 공룡들의 천국 네메그트
투그릭 베이스캠프를 떠나 네메그트 분지로 향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사막은 많아지
고 이동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트럭이 지프를 끌고 가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네메그트층에서 잘 알려진 공룡화석은
타르보싸우르스(Tarbosaurus)이다. 타르보싸우루스는 최근에 불미의 티라노싸우루스와 같
은 속을 판명되어 새로운 종 티라노싸우루스 바타르(Tyrannosaurus baatar)로 재명명되었
다.
네메그트 지역에는 갑작스런 소나기가 자주 내렸다. 소나기가 지나간 계곡은 금세 강으
로 변하고 계곡에서 쏟아지는 흙탕물은 템트를 덮쳤다. 트그릭 캠프에서는 모래폭풍을, 네
메그트 캠프에서는 물난리를 겪었다. 또 이곳에는 전갈과 수박씨만한 흡혈진드기가 많아
야외조사에 어려움이 있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사막지역에서 물은 생명수이다. 12개의 커
다란 물통을 싣고 6시간 이상 운전해 가야 하는 인근 유목민 마을에서 물을 길어왔는데
그나마 휴대용 정수기로 걸러 꼭 필요한 때만 먹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샤워는 생각
할 수도 없었다. 음식은 유목민들에게서 구한 염소와 양을 잡아 아무 양념 없이 물에 삶아
먹는 것이 전부였다. 사막에서 신선한 야채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러한 비위생적
인 음식과 비타민 부족으로 대원들은 배탈과 설사에 시달렸다.
갖은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이곳에서 긴 꼬리의 거북과 오비랍토르의 머리뼈, 악어,
티라노싸우루스의 골격 등 많은 화석을 찾아냈다. 특히 오비랍토르는 매우 드물게 발견도
기 때문에 완전한 머리뼈를 찾은 것은 실로 행운이었다. 알탄울라(Altan Ula)는 네메그트
분지에서 가장 넓게 지층이 노출되어 있는 지역으로 지름이 7km에 달한다. 이 지역에 대
한 구체적인 탐사가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이 탐사에서 발굴한 화석들은 현재 중국의 척추고생물고인류연구소에서 뼈를 추리는 작
업이 진행중이다. 뼈의 처리가 끝나면 본격적인 학술연구가 시행되어 흥미로운 결과가 밝
혀질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국제 공룡탐사에 우리나라를 대표하지 못하고 일본팀의 일
원으로 참가한 나는 큰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나라도 대학이나 자연사발물관에서 국제 공
륭탐사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지원하여 우리가 연구한 공룡을 우리의 국립자연사
박물관에 전시할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5장 우리나라의 공룡
1972년 공룡알 화석이 경남 하동에서 발견되어 한국 공룡의 존재를 처음으로 암시한
후, 경북 의성에서 몇몇 단편적인 공룡뼈가 발견되어 한반도에도 공룡이 살았다는 것이 확
인되었다. 1980년 들어 그때까지 무심히 지나쳤던 이상한 토적구조의 대부분이 공룡이 남
긴 발자국화석이라는 것이 알려져 현재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룡 발자국화석 산지
가 되었다. 발자국화석은 경상누층군이 드라난 곳을 잘 찾아보면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지역에서 산출되고 있다. 따라서 너무나 풀로 덮이지 않은 해안가나 하천바닥, 그리
고 공사에 의해 지층이 인위적으로 드러난 곳에서 자주 발견된다.
풍부하게 산출되는 공룡 발자국화석에 비해 골격화석의 산출은 아직 미미하다. 그 이유
는 경상누층군 지층들이 심한 지각운동을 받아 단단하게 고화되고 있으며 지층들 대부분
의 나무와 풀로 덮여 있어 공룡뼈 발견이 쉽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가지 우리가 한국의 공룡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지 않았고 체계적인 탐사도 이루어지
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룡 발자국화석과 뼈의 산출빈도가 대분의 경우 일치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발자국화석으로 미루어보아 경상누층군에서 다양한 공룡들이 발견될 가능성은 매
우 높다. 현재가지 주로 의성과 합천, 그리고 진주와 남해등지에서 뼈가 발견되고 있으나
화석들은 주로 골격의 일부이거나 화석화 과정에서 손상을 많이 받아 형태를 구분하기 어
려운 것이 대부분이다.
1. 공룡화석
공룡알
우리나라의 공룡연구는 1972년 경북대 양승영교수가 경남 하동군 금남면 수문동에서
알화석을 찾으면서 시작되었다. 이전에 한반도에는 어떠한 공룡의 흔적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독일 본대학에 알화석의 감정을 의뢰, 공룡알이라는 감정을 받았다. 그는 19
96년 같은 장소에서 최소한 6개 이사의 공룡알 파편이 회색 이암 속에 박혀 있는 것을 발
견하고 채집하였다.
그후 1999년 봄 경기도 시화호에서 지질과 생태조사를 하던 해양연구소 정갑식 박사와 '
희망을 주는 시화호 만들기 시민연대' 최종인 회장은 이상한 구형의 화석을 발견하고 필자
에게 연락을 해왔다. 이곳을 함께 조사한 결과 시화호 내에는 최소한 2종의 공룡알 화석이
3~12개(직경11~15cm)씩 모여 수많은 둥지를 이루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현재까지
간단한 지표조사를 통해 약 30개 이상의 공룡알 둥지와 3000여개 이상의 공룡알 위치를
파악했다. 이렇게 여러 층에서 산출되는 공룡알과 둥지로 미루어보아 과거 이곳은 공룡들
의 집단산란지였던 것이 분명하며, 또한 공룡알과 함께 나무화석 및 여러 다양한 흔적화석
이 산출됨에 따라 공룡 산란지의 정확한 복원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듯 공룡알 둥지가 대규모로 발견된 것은 전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일로서 현재 필
자와 해양연구소는 경기도와 화성군의 지원을 받아 시화로 일대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시화호와 함께 초근 전남 보성 득량면 해안과 경남 고성군 고성읍 해안에서도 공룡
알이 발견되어 이 지역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용각류
1973년 경북 의성 탑리에서 처음으로 공룡의 골격화석 일부가 부산대 김항묵 교슈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된 뼈는 그후 경북대 장기홍 교수가 재발견하고 발굴하여 경북대에
보관하고 있다. 이 뼈는 김항묵 교수에 의해 용각류의 오른쪽 아래팔뼈인 척골의 일부로
동정되어 울트라싸우루스 탑리엔씨스(Ultrasaurus tabriensis)라는 새우운 이름이 붙여졌
다. 그러나 1997년 이 뼈를 다시 조사한 필자는 이 뼈가 척골이 아니라 왼쪽 사완골의 윗
부분이며 또한 뼈가 너무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새로운 공룡으로 정의 할 수 있는 어떠한
특징이 없음을 밝혔다.
그밖의 용각류 화석은 양승영 교수에 의해 경남 진주 유수리에서 발견된 세 종류의 이
빨이 있다. 이들 이빨화석은 한반도에도 다양한 용각류가 서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특
히 이들 전기 백악기 용각류는 전세계적을 많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이빨화석이지
만 매우 중요하다. 이 가운데 한개의 이빨은 중국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한 종류의 것으로
카아유싸우루스(Chiayusaurus)에 속하는 새로운 종, 카아유사우루스 아시아넨씨스
(Chiayusaurus asianensis)로 판명되었다. 이는 동일한 종류의 공룡이 중국과 한반도에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첫번째 화석기록이란 점에서 중요하다. 카아유싸우루스는 쥐라기
에 아시아에서 기원한 에우헬로푸스류(Eubelopodidae)에 속하는 용각류이다.
그이의 용각류 골격화석으로 추정되는 뼈가 최근 의성고속도로 매표소의 산사면에 밝힌
채로 발견되었다. 뼈의 길이는 약1m로 매우 큰데 유감스럽게도 발견 당시 뼈의 반쪽은 도
로 개설 때 이미 잘려나간 상태였다 이 뼈 주위에는 조그만 뼛조각들이 많이 박혀 있어
뼈가 포함된 층에 따라 발굴을 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공룡화석이 발견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이다. 이러나 이곳은 연구지원 단체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어
있는 상태이다.
용각류의 발자국은 맨 처음 경남 고성 덕명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120개의 용각류 보행렬이 산출되었는데 발자국 크기도 20cm에서 1m에 이르기까지 다양
하다. 특히 이곳은 세계의 다른 용각류 발자국 산지와 다르게 45cm 이하의 크기를 가진
어린 것들이 많이 나타난다. 최근 전남 해남군 우항리에서 발굴된 용각류 발자국은 세계적
으로 기존에 보고된 바 없는 매우 독특한 형태이다. 1997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여
기서 확인된 발자국 수는 총 105개이다. 모든 발자국들은 원형의 윤곽을 가지며 발자국
내부에는 위로 솟아오른 부분이 별 모양으로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데, 이것들은 발자국 중
심에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공통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발굴된 발자국은 모두 용각류의 앞발자국이며 단 하나의 뒷발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용각류가 물속에서 부력에 의해 뒷발이 뜬 채 앞발로만 걸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형의 발자국은 미국 텍사스주를 비롯해 세계에서 여러차례 보고된 바 있는데 특히 우항
리의 발자국은 내부에 별 모양을 남긴 점이 독특하다. 이것은 실제 용각류의 발바닥이 어
떻게 생겼는가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처음으로 암시해주는 것이다. 발자국들이 폭 6m 범
위 내에서 제한도어 나타나므로 보행열은 동시에 만들어진 것을 해석된다. 보행길이로 판
단해보면 발자국을 남긴 용각류의 크기는 최소한 7m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각류
지금까지 경상누층군에서 발견된 수각류의 화석은 불완전한 이빨 네 개와 앞발톱 한 개
이다. 모든 육식 공룡의 이빨은 단검처럼 매우 단순한 구조이기 때문에 이빨 형태에 의해
서 육식공룡을 분류하기는 매우 어렵다. 경남 진주 유수리에서 발견된 약 5cm 크기의 이
빨도 뒷면에 스테이크칼처럼 작은 톱니형 구조가 나타나는 전형적인 육식 공룡의 이빨이
다. 앞면의 칼처럼 날카롭게 날이 서 있다.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 앞발톱뼈는 약 5cm의
크기로 낫처럼 날카롭게 휘어져 있다. 이러한 단편적인 뼈를 가지고 한반도에 어떠한 육식
공룡이 살았는지를 추정하기는 아직 무리다.
수각류의 발자국은 경북 의성 일대와 경남 고성 덕명리에서 산출된다. 이들 수각류의 발
자국은 길이가 폭보다 훨씬 길어 조각류의 것과 쉽게 구별된다. 또한 발가락이 매우 가늘
고 발가락끝에 날카로운 발톱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수각류의 보폭
은 조각류의 것보다 매우 커서 이들이 빠르게 달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각류
유감스럽게도 경상누층군에서 아직 조각류의 것으로 확신할 수 있는 뼈가 하나도 발견
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각류 발자국은 우리나라 전체 공룡발자국 중 80%를 차지할 만큼
많이 발견된다.
특히 경남 고성군 덕명리를 중점 연구한 경북대 임성규 교수는 상족유원지에서 실바위
까지 6km의 해안 절벽에 발달하는 약 110cm 두께의 진동층을 조하하였다. 이곳에는 총
329개의 발자국을 가진 층리면이 발달하는데 최소한 512개의 공룡 보행열들이 산출된다.
이 가운데 252개의 층리면에서 조각류의 보행열이 확인되었다. 이렇듯 한 지역에서 엄청
나게 많은 발자국이 발견된 곳은 전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전기 백악기에 살았던 대표적인 큰 조각류로는 테논토싸우루스, 이구아노돈, 그리고 중
부 백악기의 오리주둥이공룡을 들 수 있다. 경상누층군에 3000여개 이상의 발자국을 남긴
조각류가 어떤 종류인지는 아직 뼈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확실하지 않다. 다만 전기 백악
기 조각류의 발자국화석중 대표적인 카리리크니움(Caririchnum)이라 명명된 발자국은 이
족보행과 사족보행을 모두 나타낸다. 또한 발자국을 조사해보면 이들은 매우 느리게 걸었
으며 보폭이 매우 좁고 비둘기처럼 안짱다리로 뒤뚱뒤뚱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여러개의 발자국 보행열이 평행하게 나타나 이들이 무리를 지어 다녔다는 것도 알 수 있
다.
2.익룡
익룡은 물론 공룡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파충류이지만, 해양파충류인 어룡, 수장룡과 함
께 중생대 생태계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전남 해남군 우항리의 우항리층에서는 공룡발자
국, 새 발자국과 함께 40여개의 익룡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이곳의 퇴적층은 해안을 따라
10km가량 연장되어 잘 발발했는데 특히 과거에서부터 퇴적층에 협재한 흑색 셰일에 석유
함유 가능성이 있다 하여 주목받은 곳이다.
이곳의 익룡 발자국은 아시아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며 세계에서는 일곱번째로 발견된
매우 귀중한 화석이다. 발견된 익룡 발자국은 뒷발의 크기가 최대 35cm로서 지금까지 알
려진 익룡 발자국 중 가장 크며, 또한 백악기 익룡 발자국에서는 처음으로 쥐라기 익룡 발
자국처럼 다섯째 발가락 자국이 나타나는 특징을 보인다.
우항리의 발자국은 익룡이 두 발로 걸었나 아니면 네 발로 걸었나 하는 격렬한 논쟁에
서 익룡이 사족보행을 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익룡의 발자국은 앞발과 뒷발이 서로 전혀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앞발자국은 첫째, 둘째, 셋째 발가락으로만 만들어지기 때문에
사람의 귀와 같은 형태이며 반면에 뒷발자국은 사람의 발자국처럼 길쭉한 타원형이다.
3.새
경상누층군에서 공룡 발자국화석들이 계속 발견되던 중 경남 고성군 덕명리에 공룡발자
국과 함께 새 발자국이 존재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새 발
자국이 기재된 것은 1969년 서울대 김봉균 교수에 의해서였다. 마산시 북쪽 12km 지점
에 노출되어 있는 함안층에서 발견된 것인데, 당시는 그 발견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현재 경상누층군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새 발자국은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후기 쥐
라기에 시조새가 처음 출연한 후, 백악기 새의 골격화석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중생대 새
의 진화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골격화석은 아니지만 백악기에 존재
하는 새 발자국들은 간접적으로 중생대 새의 진화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1931
년 미국 콜로라도의 백악기 지층에서 맨 처음 새 발자국화석이 기재된 후 새 발자국화석
은 북미와 아시아에서 드물게 발견되어왔다.
경상도에서 발견된 새 발자국은 두 종류로서 코레아나오르니스 함안엔씨스와 진동오르
니페스 킴아이이다. 코레아나오르니스는 크기가 2.5 ~ 4.4cm로 작아 발자국을 남긴 새는
현생 물새떼와 비슷한 새로 추정된다. 반면에 진동오르니페스는 상당히 큰 네 발가락의 새
발자국으로 첫째발가락 자국이 아주 잘 보존되어 있다. 발자국 폭은 6.5 ~ 7.5cm이며 길
이는 첫째발가락을 포함하면 8cm에 이른다.
전남 해남군 우항리에서 발견된 새 발자국은 두 종류로 모두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다. 우항리크누스 전아이는 둘째와 셋째, 셋째와 넷째 발가락 사이에 분명한 물갈퀴 자
국이 나타난다. 첫째 발가락의 흔적 없이 세 발가락만이 남아 있다. 발자국의 평균 폭은
4.58cm이고 길이는 3.7cm이다. 이러한 발자국을 남긴 새는 상대적으로 크기가 매우 작아
호숫가에 서식하던 새로 추정된다. 발자국의 크기와 형태는 현생 오리류와 유사하다. 많은
발자국이 좁은 공간에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몇마리가 먹이를 찾아 이리 저리 천천히 움
직였을 것이다. 다른 한 종류는 황산이페스 조아이로 우항리크누스가 보존된 층준에 함께
나타난다. 그러나 우항리크누스처럼 둘째와 넷째 발가락 사이에는 물갈퀴가 있으나 우항리
크누스와는 다르게 뒤쪽으로 잘 발달된 첫째발가락 자국이 나타난다. 발자국의 평균 폭은
6.26cm이고 첫째발가락을 제외한 길이는 4.86cm이다.
이들 새 발자국화석은 기존에 알려진 중생대의 새 발자국과는 달리 물갈퀴를 가졌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는 기존 화석보다 4000년만년 정도 오래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물
갈퀴새 발자국이다. 과거에 물갈퀴를 가진 물떼새는 후기 백악기의 조상에서 신생대 중기
에 첫번째 오리로 진화했다고 여겨져왔다. 따라서 물갈퀴새는 공룡시대인 중생대에는 아직
진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우항리크누스와 황산이페스의 존재로 이미 중부
백악기에 이들이 진화해 공룡과 익룡을 포함한 다른 파충류들과 서식지를 공유했음이 확
인되었다. 최근 진주시 경남과학고 구내 공사장과 거제도 일대 해안에서 수천여개의 새 발
자국의 새로 발견됐다. 여기서는 우항리크누스가 코레아나오르니스, 진동오르니페스와 같
은 층준에서 함께 산출된다. 이에 따라 물갈퀴 발자국과 물갈퀴 없는 발자국을 남긴 새들
이 서식지를 공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한 새 발자국이 산출됨으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새 발자국 기록
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지금가지 백악기 지층에서 알려진 새 발자국 7속 7종중 한국에서
처음으로 이름 붙여진 4속 4종의 새 발자국화석이 경상누층군에서 보고되어 당시 다양한
새가 한반도에 서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들은 또한 중부 백악기에 이미 다양한 물떼새
가 진화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우항리의 새 발자국은 익룡 발자국과 함께 나타남으로
써 익룡과 새가 서식지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들이 같은 장소에서 같
은 먹이를 섭취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항리에서 산출된 익룡은 35cm의 발자국 크
기로 판단하면 굉장히 큰 동물이기 때문에 주로 물고기를 먹었을 것이다. 최근 다양한 물
고기화석이 경상누층군으로부터 보고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해준다.
요약해보면 우리나라는 공룡화석을 포함한 육상 척추화석이 산출될 좋은 지질학적 조건
을 갖고 있다. 현재까지 경상누층군으로부터 공룡, 익룡, 새의 풍부한 발자국화석이 발견되
고 있으며 그 학술적 가치도 세계적이다. 발자국화석에 비해 뼈화석은 아직 단편적이지만
공룡뼈 이외에도 거북, 악어, 물고기 뼈 등이 발견되고 있어 한반도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매우 다양한 척추동물이 서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를 한다면 앞으로 새로운 공룡이 발굴될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 좋은 예가 최근 시화호에서 발견된 공룡의 집단 산란지이다. 이러한 공룡 화석지
의 발견은 전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경우이며 공룡생태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귀중한 자료
로서, 우리나라의 공룡연구의 수준을 한차원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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