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골짜기에서 잠자는 사람 / 랭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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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에서 잠자는 사람 / 랭보

 

푸른잎의 구멍이다. 한 갈래 시내가 답답스럽게

풀잎이 은빛 조각을 걸면서 노래하고 있다.

태양이 거만한 산의 어깨로부터 빛나고 있다.

광선이 방울짓는 작은 골짜기다.

 

젊은 병사 한 명이 모자도 없이 입을 벌린 채

싹트기 시작한 푸른 풀싹에 목덜미를 담근 채

잠자고 있다. 구름 아래 있는 풀밭에 누워

광선이 쏟아지는 초록색 침대에 창백한 모습으로.

 

민들레 떨기 속에 발을 넣고 자고 있다.

병든 아이가 미소짓듯 웃으면서 꿈꾸고 있다.

자연이여, 따뜻한 손으로 어루만져 주어라,

추워 보이는 그를.

 

초목의 향내도 그의 코를 간질이지 못한다.

햇빛 속에서 고요한 가슴에 두 손을 올려 놓고

그는 잠잔다, 오른쪽 옆구리에 두 개의 빨간 구멍을 달고서.


요점 정리

작자 : 랭보

이해와 감상

총알을 맞고 풀밭에 쓰러져있는 병사를 본 1815년 당시의 소년의 인상을 생생하게 말한 것으로 보불 전쟁 당시의 인상을 노래한 시이다.

심화 자료

랭보(Jean-Nicolas-)Arthur Rimbaud

1854. 10. 20 프랑스 샤를빌~1891. 11. 10 마르세유.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모험가.

 

랭보, Henri Fantin Latour가 1872년에 그린 유화 <Un ...

한때 폴 베를렌과 깊은 관계를 맺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린시절

랭보는 프랑스 북동부의 아르덴 지방에서 육군 대위와 그 지방 농부의 딸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1살 위였고, 여동생은 2명이었다. 1860년 랭보 대위는 아내와 헤어졌고, 아이들은 어머니가 키우게 되었다. 일찍부터 남다른 지적 능력을 보인 아르튀르는 8세 때부터 타고난 글재주를 보였다. 나중에 그는 샤를빌 중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되었다. 그는 특히 라틴어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870년 8월에는 경시대회에서 라틴어 시로 1등상을 받았다. 그가 처음 발표한 시는 1870년 1월 〈르뷔 푸르 투스 La Revue pour Tous〉에 실렸다.

1870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프로이센전쟁 때문에 그의 정식 교육은 막을 내렸다. 8월에 그는 파리로 달아났지만, 차표 없이 여행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며칠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그의 옛날 은사가 벌금을 대신 물어주고 그를 두에로 보냈다. 두에에서 그는 국민군에 들어갔다. 10월에 그는 다시 사라져, 침략군이 지나간 자국을 따라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를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그는 다시 두에에 도착하여 2주일 동안 자유와 굶주림과 거친 생활 속에서 쓴 시들을 다듬었다. 삶과 자유 속에서 느끼는 천진난만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들은 그가 처음으로 쓴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이다. 어머니의 고발로 그는 다시 경찰에 잡혔지만, 1871년 2월 그는 손목시계를 팔아 다시 파리로 가서 2주일 동안 거의 굶다시피하며 보냈다.

반항과 시적 환상

3월초에 그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전에 쓴 시들을 가짜라고 내팽개치고, 삶에 대한 혐오감과 순진무구한 세계로 달아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선과 악의 투쟁의식을 표현한 거칠고 불경스러운 시를 썼다. 그의 행동도 그가 쓴 시의 분위기와 어울렸다. 그는 종교와 도덕 및 온갖 종류의 규율에 대한 의식적인 반항으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하루 종일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나날을 보냈다. 동시에 그는 신비주의 철학과 밀교(密敎) 및 마술과 연금술에 대한 책을 읽었고, 2통의 편지(1871. 5. 13, 15)에 표현된 새로운 미학을 형성했다. 특히 2번째 편지는 〈견자(見者)의 편지 Lettres du voyant〉라고 불리는데, 이 제목은 시인이란 무릇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볼 수 있고 개인의 인격에 대한 인습적 개념을 형성하는 모든 제약과 통제를 무너뜨림으로써 영원한 신의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 즉 '견자'(voyant)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1871년 8월말 랭보는 샤를빌의 한 문우의 충고에 따라 시인인 폴 베를렌에게 그의 새로운 시를 몇 편 보냈다. 그중에는 각 모음에다 다른 색깔을 부여한 소네트 〈모음 Voyelles〉도 들어 있었다. 베를렌은 이 시들의 탁월함에 깊은 인상을 받고, 랭보에게 여비를 보내어 파리로 초대했다. 갑자기 폭발한 자신감 속에서 랭보는〈취한 배 Le Bateau ivre〉를 썼다. 이 시는 전통적인 작시법을 따르고 있지만, 깊은 정서적·영적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서 언어구사의 기교가 놀랍고 상징과 은유의 선택이 대담하기 짝이 없다. 이 걸작에서 랭보는 그의 예술의 가장 높은 정점들 중 하나에 도달했다.

1871년 9월 파리에 도착한 랭보는 3개월 동안 베를렌 부부와 함께 지내면서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을 거의 다 만났지만, 거만하고 버릇없는 태도와 음탕함으로 베를렌만 제외하고 그들 모두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떠나라는 요구를 받자 술을 퍼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으며, 베를렌과 동성애 관계를 맺어 추문을 일으켰다. 1872년 3월 그는 베를렌이 아내와 화해할 수 있도록 샤를빌로 돌아갔지만, 5월에 다시 베를렌의 부름을 받았다. 베를렌은 이제 그가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맹세했다.

이 시기에(1871. 9~1872. 7) 랭보는 운문으로 된 마지막 시를 썼는데, 이 작품은 기법의 자유분방함과 독창성에서 뚜렷한 진보를 보이고 있다. 이때 그는 베를렌이 걸작이라고 격찬한 〈영혼의 사냥 La Chasse spirituelle〉이라는 작품도 썼지만 이 작품의 원고는 베를렌과 랭보가 영국에 갔을 때 어디론가 사라졌다. 일부 비평가들은 초월적인 산문시〈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도 이 창조적인 시기에 쓴 작품으로 보고 있지만, 랭보 자신은 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어떤 시에도 날짜를 적지 않았다.

1872년 7월 베를렌은 아내를 버리고 랭보와 함께 런던으로 도망쳐 소호에서 살았다. 랭보는 이곳에서 〈일뤼미나시옹〉의 일부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지내러 집으로 돌아갔지만, 1873년 1월 베를렌의 부름을 받았다. 베를렌은 랭보의 동정을 사기 위해 중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연극을 했다. 4월에 랭보는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머물고 있는 샤를빌 근처의 로슈에 있는 농장으로 가서 스스로 "이교도의 책, 또는 흑인의 책"이라고 부른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결국 〈지옥에서 보낸 한 철 Une Saison en enfer〉이라는 작품이 되었다. 1개월 뒤, 그 근처에 머물고 있던 베를렌은 랭보를 설득하여 함께 런던으로 갔다. 랭보는 베를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거기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고, 이 죄의식 때문에 베를렌을 가학적일 만큼 잔인하게 다루다가도 금방 그것을 뉘우치고 다정하게 대하곤 했다. 두 사람은 자주 말다툼을 벌였고, 마침내 7월초 베를렌은 랭보와 다툰 뒤 그를 버리고 벨기에로 가버렸다. 그러나 아내와 화해하는 데 실패한 그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랭보를 불러온 다음 함께 런던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다. 그래도 랭보가 떠나려고 하자 베를렌은 랭보에게 총을 쏘아 손목에 상처를 입히고, 다시 총을 쏘겠다고 위협했다. 베를렌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나중에 재판에서 2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랭보는 곧 로슈로 돌아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완성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정신이 지옥에 떨어지고 예술과 사랑에서 실패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1873년 가을 벨기에에서 인쇄되었다. 그러나 이 책이 파리에서 호평을 받지 못한 데다 인쇄업자에게 돈을 줄 수도 없게 되자, 그는 인쇄된 책을 모두 포기하고 원고와 서류들을 샤를빌에서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 책을 여러 권 묶은 꾸러미가 1901년에 벨기에의 장서가인 레옹 로소에게 발견되었는데, 그는 이 사실을 1915년에야 공표했다.

1874년 2월 랭보는 난폭하고 자유분방한 시인 제르맹 누보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잡역을 하여 번 쥐꼬리만한 돈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랭보는 이때에도 〈일뤼미나시옹〉의 일부를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보는 6월에 파리로 돌아갔고, 랭보는 병에 걸렸거나 가난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었던 것 같다. 7월말에 그는 버크셔 주 레딩에 있는 합승마차 매표소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크리스마스를 지내러 집으로 간 뒤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랭보는 1875년초에 베를렌을 마지막으로 만났고, 이 만남도 역시 격렬한 말다툼으로 끝났다. 랭보가 베를렌에게 〈일뤼미나시옹〉 원고를 준 것은 아마 이때였을 것이다.

여행가와 무역상

1875~76년에 랭보는 독일어·아랍어·힌두스타니어·러시아어를 배우고 세상을 구경하러 떠났다. 1879년 6월까지 그는 걸어서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서인도 제도의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에 입대했다가 탈영했고, 독일 서커스단과 함께 스칸디나비아로 갔고, 이집트를 방문했으며, 키프로스 섬에서 노동자로 일했는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매번 병에 걸리거나 다른 어려움을 만나 고통을 겪었다. 1879년 겨울 내내 장티푸스와 싸우고 있을 때 그는 방랑생활을 그만두고 장래계획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봄에 키프로스 섬으로 돌아간 그는 건축업자의 현장감독으로 취직했지만, 곧 그 일을 그만두고 다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아덴에서 커피 무역상에게 고용되어 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지역에 들어갔다. 이 탐험에 대한 그의 보고서는 프랑스 지리학회 회보(1884. 2)에 실려 약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885년 10월 랭보는 저금을 털어 셰와(에티오피아의 일부)의 왕인 메넬리크 2세에게 무기를 팔기 위한 원정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메넬리크 2세는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인 요한네스 4세와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88년 중엽에야 겨우 기반을 잡는 데 성공했고, 요한네스 4세가 이듬해 3월에 살해당하고 메넬리크가 황제 자리에 오른 뒤에는 총포 밀수로 얻는 수입이 계속 줄어들었다. 에티오피아에 있는 동안 그는 가장 가난한 원주민만큼 소박하게 살면서, 언젠가는 은퇴하여 느긋하게 살 수 있는 돈을 모으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는 인색했지만 남에게는 드러나지 않게 너그러웠고, 그가 원주민 여인과 함께 살던 작은 집은 에티오피아에 사는 유럽인들의 집합 장소가 되었다. 그는 외국어를 배우는 데 타고난 재주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에티오피아인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정직성과 성실함으로 추장들의 신뢰까지 얻었으며, 특히 메넬리크의 조카인 하레르 총독은 그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가 이 시기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애정과 지적인 친구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 있다.

1891년 봄 그는 신부감을 찾기 위해 고국에 가서 휴가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해외에서 살고 있던 이 시기에 그는 프랑스에서 시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베를렌은 〈저주받은 시인들 Les Poètes maudits〉(1884)에서 그에 대해 썼고, 그의 시를 발췌하여 발표했다. 이 시들은 열광적인 호평을 받았지만 랭보한테서는 소식이 없었다. 랭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에게서 답장도 받지 못한 베를렌은 1886년 상징파의 정기간행물인 〈보그 La Vogue〉에 〈일뤼미나시옹〉이라는 제목의 산문시와 여러 편의 운문시를 '고(故) 아르튀르 랭보'의 작품으로 발표했다. 랭보가 이런 발표에 대해 알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저주받은 시인들〉이 출판된 뒤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1885년 8월에 그는 학교 동창생인 폴 부르드한테서 편지 1통을 받았는데, 부르드는 전위파 시인들 사이에서 그의 시(특히 소네트인 〈모음〉)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고 전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1890년 7월에 한 평론지가 보낸 편지(프랑스로 돌아와 새로운 문학운동을 이끌어보라고 권유하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가 그의 서류 틈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가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아무래도 답장을 보내지는 않은 것 같다.

1891년 2월 오른쪽 무릎에 종양이 생겨, 4월초에 하레르를 떠날 때는 해안까지 1주일 걸리는 길을 줄곧 들것에 실려 가야만 했다. 아덴에서 받은 치료는 실패했고 그는 프랑스로 송환되었다. 마르세유에 도착한 직후 그는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어머니가 옆에 있다는 사실은 거의 위안이 되지 못했고, 그는 여동생 이자벨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좌절감과 절망을 쏟아놓았다. 7월에 로슈로 돌아갔을 때 그를 돌보아준 사람은 이자벨이었다.

그는 여전히 결혼하여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건강은 계속 나빠질 뿐이었다. 1891년 8월 그는 마르세유로 악몽 같은 여행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를 따라간 이자벨은 오빠의 병이 나을 가망이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러나 랭보는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견뎌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이자벨은 그를 설득하여 신부에게 고해를 하게 했다. 신부와 나눈 이 대화는 그에게 새로운 평화를 가져다 주고, 소년 시절의 시적인 상상력을 다시 일깨워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견자'가 되어, 여동생의 말에 따르면 〈일뤼미나시옹〉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것보다 훨씬 더 깊이있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근거는 여동생 이자벨의 말일 뿐이고, 이자벨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히 랭보가 에티오피아에서 쓴 편지를 몇 군데 교정했다는 점에서 이미 믿을 수 없는 증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평가

랭보보다 더 열렬한 연구대상이 되거나 근대 시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 시인도 드물다. 그가 독창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작품은 산문시 〈일뤼미나시옹〉인데, 이 시의 형식은 그의 생략법과 난해한 문체를 연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그는 선배 시인들과는 달리 산문시에서 일화를 이야기하고 서술하는 내용이나 심지어는 묘사적인 내용까지도 모조리 제거해버렸고, 낱말에서 사전적 의미나 논리적 내용을 박탈함으로써 상징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에타 담'(état d'âme:영혼의 상태)이라는 정신상태를 불러일으키는 거의 마술적인 힘을 시에 부여했다. 그는 또한 잠재의식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어린시절의 감각 속에 얼마나 풍부한 시의 재료가 숨어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의 글은 아직도 문명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의 가장 중요한 본질 자체에 대한 오늘날의 반감과 혐오감을 강렬히 표현하고 있다. En. Starkie 글 | 金碩禧 참조집필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취한 배

유유한 강물을 타고 내려올 적에,

더 이상 수부들에게 이끌리는 느낌은 아니었어

홍피족들 요란스레 그들을 공격했었지.

색색의 기둥에 발가벗겨 묶어 놓고서

플랑드르 밀과 영국 솜을 져 나르는

선원들이야 내 알 바 아니었어.

배를 끄는 수부들과 함께 그 북새통이 끝났을 때

나 가고 싶은 데로 물살에 실려 내려왔으니.

격하게 출렁이는 조수에 휘말린 지난 겨울,

난, 농아보다 더 먹먹한 골을 쌎바고

헤쳐 나갔지! 떠내려간 이베리아 반도도

그처럼 의기양양한 혼돈을 겪지는 못했을 거야.

격랑은 내가 항행에 눈뜬 것을 축복해 주었어.

코르크 마개보다 더 가벼이 나는 춤추었지,

끊임없이 제물을 말아먹는다는 물결 위에서,

열흘 밤을, 뱃초롱의 흐리멍덩한 눈빛을 그리지도 않으며!

아이들이 가진 사과의 상큼한,

초록빛 물이 내 전나무 선체로 스며들어와

푸른 포도주 얼룩과 토사물로부터

나를 씻기우고, 키와 닻을 훑어 내렸지

그래 그때부터, 나는 <바다의 시>속에 멱감았어라.

별들이 젖빛으로 녹아든 곳,

초록빛 하늘을 들이마시고 있는 그곳에, 꿈에 잠긴 익사자 하나

창백하고 황홀하게 떠돌다, 때로 가라앉으니

그 곳에, 푸르름을 일시에 물들이듯, 환멸과

율동이 번쩍이는 달빛 아래 서서히 배어들어,

알코올보다 강하게, 리라보다 값없이,

사랑의 쓰라린 다갈색 어루러기 피워올리니!

환하게 부서져 내리는 하늘과 솟구치는 물기둥을,

해랑과 해류를, 내 알지: 저녁을,

무수한 비둘기 떼처럼 황홀한 새벽을 내 알지.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는것을 내가 때로 보았지!

나지막이 신비스런 공포로 얼룩진 태양이

기다랗게 엉긴 보라빛 덩이들 비추는 것을 내 보았지,

고색창연한 고대극 배우들 같았어.

파도는 파르르 떨며 아스라히 밀리고 있었고!

내 꿈꾸었지, 현란스레 눈 덮힌 푸른 밤,

서서히 바다 위로 북받쳐 오르는 애무인 양,

형형히 퍼지는 희한한 향기를,

노릇파릇 깨어나 번뜩이는 인광들을!

내 여러 달 쫓아다녔지, 히스테릭한 암소떼처럼

넘실넘실 암초들을 덮치는 큰 파도를.

성모 마리아의 빛나는 발이라도

숨가쁘게 헐떡이는 대양을 억누르진 못했을 거야!

난 맞닥뜨렸지, 아시겠어? 엄청난 플로리다와.

꽃무리 속에 인간의 피부를 가진 표범들 눈초리 엉켜 있었고

수레바퀴 테처럼 탱탱한 무지개들,

수평선 아래 바다의 청록색 양떼들과 어우러지고 있었지!

부글거리는 거대한 늪을 나는 보았어, 그 그물 속에서

<바다 괴물>은 골풀 더미에 싸여 고스란히 문드러지고!

뿜어나던 물보라 잔잔한 바다 한가운데로 무너져 내리더니,

아득히 소용돌이치며 심연으로 빨려들더라!

 

빙하, 은빛 태양, 진주모빛 파도, 이글거리는 하늘들이여!

거무스름한 물굽이 한가운데로 끔찍스레 좌초되고 말았어라.

악취에 찌들린 거대한 배암들,

검은 향료로 뒤틀린 나무들을 휘감고 있는 그 곳에!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더랬는데,

그 푸른 물결의 만새기들을, 그 금빛 고기들을, 그 노래하는 고기들을

-꽃핀 거품들 나의 항정을 축복하였고

기막힌 바람 때때로 나에게 날개를 붙여 주었지.

간간이, 지축과 지대에 시달리다 지친 순교자들,

바다는 흐느끼듯 부드럽게 흔들어대며

노란 흡반 딸린 어둠의 꽃들을 올려보내 주었지.

나는 그대로 있었다, 무릎 꿇은 여인 마냥......

섬처럼, 나의 뱃전 위로 달라붙는 하소연을 뿌리치고

금빛 눈으로 빈정거리는 새들의 똥무더기를 가르며,

나는 떠내려갔다. 어렴풋이 날 스쳐간 혼백들.

다시금 뒷전으로 잠잠히 가라앉더라!

해서 난, 길 잃은 배 되어 머리카락에 휘감기듯,

폭풍에 말려 새도 없는 창공으로 내던져졌지.

미군 함정들이나 한자동맹의 범선들이라도

물에 취한 내 몸뚱이를 건져내진 못했을 게야.

자유로이, 보라빛 안개를 타고, 피어올라,

불그스름한 하늘을 파들어갔지, 벽을 뚫듯.

그 잘난 시인들이 과일잼인 양 즐기는 하늘은,

해 버짐병과 청천 부패병으로 잔뜩 굳어 있었거든.

휘황한 위성들에 휩싸인 채,

검은 해마들의 호위를 받으며, 미친 널빤지처럼 치달았지.

하해천공(夏海天空)은 <칠월기둥>의 몽둥이질로

여기저기 움푹 패여 이글이글 쏟아져 내리고 있었지:

나는 떨었다, 오십 리 밖에서 무성한 소용돌이 우짖고

마귀의 암내 진동하고 있었으니.

푸른 망망대해에 실 잣듯 한없이 미끄러지며

고성흉벽의 유럽을 그리워 헀었지!

나는 보았네, 항성 군도를! 섬들 위로

천공은 항해자에게 황홀하게 열려 있었다:

-그대, 이 밑도 없는 밤의 오궁 속에 숨어 잠들고 있는가,

무수한 황금 새들, 오 미래의 정령이여?-

그런데 난, 참으로, 너무 울었어! 새벽이면 애통스러워,

달은 참 끔찍하고 해는 참 지독하이:

그 쓰라린 사랑이 허허로운 열광으로 날 잔뜩 부풀려 놓았구나.

오 나의 용골, 찬연히 일어서라! 오, 나 바다에 흐르리라!

내 하나 탐하는 유럽의 물 있다면, 그건 웅덩이야,

검고 차가운, 향기로운 황혼을 향하여,

웅크린 한 아이가, 슬픔에 가득차서,

5월의 나비처럼 연약한 배를 띄워 보내는 곳.

오 파도여, 그대의 나른함에 젖어, 나 이제 더 이상

솜 나르는 짐꾼들에게서 그들의 항적을 훑어낼 수도.

펄럭이는 군단 깃발과 불꽃을 가로지를 수도,

배다리의 무시무시한 시선 아래 노 저을 수도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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