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의 문학적 배경
by 송화은율
시대적 배경
중세 한반도에 세워진 통일 왕조.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년간 34대에 걸쳐 존속하였다.
성립·발전
신라 말에 송악(松嶽;지금의 開城)의 호족(豪族) 왕건(王建)이 태봉(泰封)의 왕인 궁예(弓裔)의 부하로 있다가, 918년 민심을 잃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워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왕건은 철원(鐵圓;지금의 鐵原)에서 즉위, 고려 태조가 되었는데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다음 호족세력을 통합, 북진정책과 숭불정책으로 세력을 굳혔다. 935년(태조 18) 신라를 평화적으로 병합하였으며, 다음해에 후백제를 멸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경종 때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토지를 원칙적으로 국가의 지배하에 두고 이를 관료들에게 관계(官階)에 따라 분배하여 줌으로써 관료제도의 기초를 세웠으며, 제6대 성종은 중앙과 지방의 관제를 대폭 개혁하고 학문과 산업을 장려하여 국가의 기반을 굳게 하였다.
11대 문종 때에 이르러 전제(田制)·관제(官制)·병제(兵制) 등 모든 제도가 완비되고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예종·인종 때에 이르러 권력층은 토지를 겸병(兼倂)하기 시작하여 농민들의 몰락을 촉진하였다. 또 인종 때에는 승려 묘청(妙淸)이 수도를 서경(西京;平壤)으로 옮기려고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켰으며(묘청의 난), 1170년(의종 24)에는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의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문신 50여 명을 죽이고 의종을 추방하고 명종을 세웠다(정중부의 난). 이로부터 30년 동안 무신들간에 권력쟁탈전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지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서 나라의 형편이 매우 어지러웠다.
이 무신들간의 싸움은 1196년(명종 26) 최충헌(崔忠獻)의 집권으로 매듭지어져, 이후 최씨 일가의 무단정치(武斷政治)가 우(瑀)·항(沆)·의 4대에 걸쳐 계속되었으나 1258년(고종 45) 왕권이 회복되었다. 고종 다음의 원종은 몽고와 강화하고 1264년(원종 5)에 개성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이때부터 약 80년간 고려는 원(元;몽고)의 지배를 받아 왕실은 원나라에 예속되고, 원나라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겨우 맥을 이어나갔다. 원나라의 세력이 새로 일어난 명(明)에 밀리자 공민왕은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기반을 굳히기 전에 밖으로부터 홍건적(紅巾賊)과 왜구가 쳐들어와서 이를 방어하기 위해 중용된 이성계(李成桂) 등 신흥 무장(武將)들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멸망
1388년(우왕 14) 고려는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그에게 요동정벌에 나서게 하였는데, 이때 이성계는 요동정벌(遼東征伐)을 반대하고 위화도(威化島)에서 군대를 이끌고 개성으로 돌아왔다(위화도 회군). 이어 반대파인 최영(崔瑩) 등을 제거한 후 우왕을 폐위시키고 아들 창(昌)을 창왕으로 즉위시켜 자기 세력을 키운 끝에, 1392년(공양왕 4) 마침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웠다. 고려는 처음부터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으나 항상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고민하였고, 한때는 전국이 그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러한 북방민족과의 갈등은 이성계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는 간접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즉 왜구·홍건적 등 잦은 외적의 침입은 무신의 세력을 키워 마침내 고려 멸망의 원인을 만들었던 것이다.
제도
정치
태조 왕건은 태봉과 신라의 제도를 아울러 사용하였으나 이것은 신라시대의 골품제(骨品制)를 청산하고 왕권이 확립될 때까지의 과도기적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왕권이 확립된 성종에서 문종에 이르는 기간에 당(唐)·송(宋)의 제도를 수입하여 관제를 정비·완성하였다. 중앙 행정의 최고기관으로는 3성 6부가 있었으며, 3성(三省)은 중서(中書;초기에는 丙議 또는 內史)·문하(門下)·상서(尙書;성종 때는 尙書都省)인데 이것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이 중에서 문하성과 중서성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어 합쳐서 중서문하성이라 불렀다. 상서성의 지휘를 받는 6부는 이부(吏部)·병부(兵部)·호부(戶部)·형부(刑部)·예부(禮部)·공부(工部)였다. 이밖에 3성과 거의 같은 자격을 가진 3사(三司)가 있었는데 국가재정을 통할하였다. 또 군국(軍國)의 기밀과 숙위(宿衛)를 맡은 기관을 중추원(中樞院;후에 樞密院이라 고쳤다)이라 하고 그 장관을 판원사(判院事)라 하였다.
중추원은 3성과 더불어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그 고관을 추신(樞臣)이라 했고, 3성의 고관인 재신과 아울러 재추(宰樞)라 불렀다. 이 두 기관을 양부(兩府)라 하였다.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는 군사제도의 정비에도 나타나 중앙에 2군(二軍) 6위(六衛)를 두었는데 2군은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 6위는 좌우위(左古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였다. 각 군과 위(衛)의 아래에는 영(領;부대)이 소속되었다. 또 군과 위에는 각각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이 1명씩 있었고, 지휘하는 영의 수에 따라 영마다 장군 1명, 중랑장(中郎將) 2명이 있었고, 그 아래 낭장(郎將)·별장(別將)·산원(散員)·위(尉)·대정(隊正) 등 군관이 배치되었다. 2군 6위의 상장군 8명과 대장군 8명으로 중방(重房)을 구성하였으며 중방은 최고급 장성들의 회의기관이었다.
관계(官階)를 보면 종1품(從一品)에서 종9품(從九品)까지 29계가 있었는데 정4품 이하는 같은 관계에 상하의 두 계단이 있었다. 지방의 관제는 983년(성종 2)에 12목(牧)을 두어 중앙의 관원을 파견한 것이 처음이다. 995년(성종 14)에 경기 이외의 전국을 편의상 10도(道)로 나누고, 아울러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비롯하여 아래로 단련사(團練使)·자사(剌史)·방어사(防禦使) 등을 설치하였다. 현종 이후에는 12주가 개편되어 이루어진 4도호부·8목이 서경(西京;平壞)·동경(東京;慶州)·남경(南京;서울)에 설치되고, 북방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양계(兩界)와 함께 지방행정의 중심이 되어 전국의 군(郡)·현(縣)·진(鎭)을 분담하여 다스렸다. 그 밑으로 특수한 하급 행정구획이던 촌(村)·향(鄕)·소(所)·부곡(部曲)이 있었다. 그리고 교통상의 요지에는 진(津)·역(驛)·관(館)이 있었으며, 군사상의 요지에는 진(鎭)이 설치되었다.
사회·경제
국초에는 구세력을 포섭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식읍(食邑)·사전(賜田)을 주어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게 하는 한편, 문무 관료들에게는 공로와 성품에 따라 역분전(役分田)을 주었다. 새로운 국가가 차츰 확고한 체제를 갖추어 감에 따라 관품제도도 확립되었고, 이에 따라 976년(경종 1) 처음으로 전시과(田柴科)가 정해져서 관료들은 관계(官階)에 따라 전지(田地)와 시지(柴地;땔나무와 숯을 얻는 땅)를 받았다. 998년(목종 1)에는 문무백관과 일반 군인의 전시과를 개정하여 18과(科)를 두었는데 제1과(정1품)는 3성의 장관에 주는 것으로 전지 100결(結)·시지 70결, 제8과(종9품)는 말단관료·병졸들에게 주는 것으로 전지 20결이었고, 관계에 오르지 못한 자(말직자;閑人)에게는 일률로 17결을 주었다.
그 뒤 덕종과 문종 때에 이를 개정하였다.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므로 이것을 받은 자는 수익권(收益權)을 가질 뿐 매매하거나 죽은 뒤에 자손에게 상속시킬 수는 없었다. 이 밖에 1049년(문종 3)에 공음전시과(功蔭田柴枓)를 제정하여 공로있는 문무신에게 최고 전지 25결·시지 15결, 최하 전지 15결·시지 5결을 주어 자손이나 조카·사위 등에게 상속시켰다. 또 병역의 의무가 있는 남자는 20세가 되면 전지 20결을 주었다. 국가 기관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중앙의 각 관서와 지방의 주·군·현·관(館)·역(驛)에 이르기까지 토지를 배당하였는데 이를 공해전시라 하였다. 그러나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후 정권이 무인들의 손에 들어감에 따라 공전제도는 크게 어지러워져 말기에는 거의 전부가 사전(私田)이었다. 한편 농민과 예민(隸民)들은 이 땅을 경작하여 전조(田租;地代)·세공(歲貢)·기타 잡세를 바치고 부역을 했다.
전조는 일종의 현물세로 국가재정의 기본이 되었으며, 또한 각 지방의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공부(貢賦)라는 것이 있었다. 부역(賦役)은 요역이라고도 불렀는데, 남자 16세가 되면 <정(丁)>이라 하여 나라의 역사에 종사할 의무가 생기고 60세가 되면 <노(老)>라 하여 면제 되었다. 화폐제도는 996년(성종 15) 건원중보(乾元重寶)라는 철전(鐵錢)을 만들어, 한국 주전(鑄錢)의 시초를 이루었는데, 1102년(숙종 7)에 다시 해동통보(海東通寶)와 아울러 은병 (銀甁;은 600g으로 주전)도 사용하였다. 고려의 주전에는 해동통보 외에 해동중보(海東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삼한중보(三韓重寶)·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 등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1331년(충혜왕 1)에는 소은병(小銀甁)을 새로 만들었고 91년(공양왕 2)에 교역의 불편을 덜기 위해 저화(楮貨;지폐)를 인쇄하였으나 유통되지 못하였다.
문화
교육
태조 때부터 교육기관으로 개경학(開京學)·서경학(西京學)이 있기는 했으나 본격적으로 정비된 것은 성종 때부터였다. 고려는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았으므로 유교교육을 받은 관리양성이 필요하였다. 992년(성종 11) 개성에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였으며, 국자감에는 국자학(國子學)·대학(大學)·사문학(四門學)·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의 6개 부문을 두었는데 이것을 경사육학(京師六學)이라고 하였다. 국자학은 3품 이상의 자제, 대학은 5품 이상의 자제, 사문학은 7품 이상의 자제와 우수한 서인(庶人)을 대상으로 했다.
3학에는 각각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품행이 단정한 박사(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어 가르치게 했다. 8품 이하 관료들의 자제와 서인이 들어가는 율학·서학·산학에는 박사만 두었다. 1109년(예종 4) 국자감에 무학(武學)을 두었다가 인종 때에 폐지하였다. 성종은 12목(牧)에 경학박사(經學博士)와 의학박사(醫學博士) 각 1명씩을 보내어 가르치게 하였고, 인종 때에는 각 주에 주학(州學)을 세우게 하였는데 이들 관학 외에 사학(私學)도 많이 있었다. 또한 958년(광종 9)에 후주(後周) 사람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진사(進士)·명경(明經)의 2과가 중심을 이루었으며, 공양왕 때에 무과가 설치되었다.
국사편찬
국초부터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기관으로 사관(史館)을 두었는데, 뒤에 춘추관(春秋館)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황주량(黃周亮)·왕가도(王可道) 등이 사료를 수집·정리하여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칠대사적(七代事跡)》 36권을 1032년(덕종 1)에 편찬하였는데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실록의 편찬과 아울러 다른 사서(史書)의 편찬에도 힘썼는데 제11대 문종 때 박인량(朴寅亮)은 《고금록(古今錄)》 10권을 편찬하였으며, 또 일찍이 작자·연대 미상인 《편년통재(編年通載)》라는 역사책도 편찬되었다. 예종은 《편년통재》를 보고 홍관(洪灌)에게 명하여 상고시대부터의 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편년통재속편(編年通載續篇)》이다.
1145년(인종 23)에는 김부식(金富軾) 등이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을 완성하였으며, 의종 때에는 김관의(金寬毅)가 《편년통록(編年通錄)》과 《삼대종록(三代宗錄)》을 엮었다. 충렬왕 때에는 특히 여러가지 사서가 나왔는데,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임익(任翊)의 《선원록》, 원부(元傅) 등의 《고금록(古今錄)》,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 정가신(鄭可臣)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민지(閔漬)의 《세대편년요록(世代編年要錄)》 및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 등이다. 그러나 이들 사서는 대개 없어지고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몇 가지뿐이다.
예술
고려의 예술은 호화로운 궁정생활·귀족생활과 불교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다. 전체적으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양식에 독특한 창의를 가미하였는데, 도자기와 그림은 송(宋)·원(元)나라의 영향을 받았다. 고려는 화가 양성을 위하여 도화원(圖畵院)을 설치하였으며, 대표적인 화가로 정득공(鄭得恭)·이영(李寧)·이광필(李光弼)·고유방(高惟訪)·안치민(安置民)·공민왕(恭愍王)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그림으로 남아 있는 것은 소수이며, 이영의 《예성강도(禮成江圖)》와 공민왕의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와 《안향(安珦)의 초상》, 사원벽화로는 부석사조사당(浮石寺祖師堂) 벽화의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이 있다. 도자기는 고려예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데 초기에는 송나라 도자기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종·인종 때에 크게 발전하여 비색청자(翡色靑磁)의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들었다. 특히 중기 이후의 상감청자(象嵌靑磁)는 정묘하고 아담한 모양을 가미하여 자기예술의 극치를 이루었다.
서예는 왕희지(王羲之)체와 구양순(歐陽詢)체가 문신귀족들에게 환영을 받았는데 문종 때의 유신(柳伸)과 인종 때의 승려 탄연(坦然), 고종 때의 최우(崔瑀)가 명필로서 신라의 김생(金生)과 함께 신품사현(神品四賢)이라 일컬어졌다. 건축은 초기에는 귀족적이고 불교적이었으나 후기에는 고려의 독특한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대부분 목조건축으로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불타버리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 덕산(德山) 수덕사(修德寺)의 대웅전(大雄殿) 등이다. 이 중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한국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장중한 구조와 화려한 균형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 불교예술을 나타내는 것으로 불상과 탑을 들 수 있다.
불상은 신라시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나 대표적인 것으로는 논산(論山)의 관촉사(灌燭寺) 미륵보살입상(彌勒菩薩立像)으로 거대하지만 균형이 잡히지 않아 예술적 가치는 적다. 탑은 처음에는 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나 차츰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방탑(方塔) 외에 6각탑·8각탑이 생겼고, 경천사(敬天寺)의 10층석탑과 같이 라마예술의 영향을 받은 원나라 양식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은 예천(醴泉) 개심사(開心寺;지금은 폐사)의 5층탑, 현화사(玄化寺)의 7층탑, 흥국사탑(興國寺塔) 등이 있다.
시가·음악
고려 초기에는 신라시대의 향가 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은 듯하다. 그러나 중기로 접어들면서 향가는 차츰 장가(長歌)의 형식으로 발전하여 지식계급에서는 향가에서 변모한 경기체가(景幾體歌)가, 일반 민중 사이에서는 민요가 유행하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으로는 《동동(動動)》 《서경별곡(西京別曲)》 《쌍화점(雙花店)》 《청산별곡(靑山別曲)》 《처용가(處容歌)》 《만전춘(滿殿春)》 《이상곡(履霜曲)》 《정석가(鄭石歌)》 《사모곡(思母曲)》 《정읍사(井邑詞)》 《가시리》 《정과정곡(鄭瓜亭曲)》 《한림별곡(翰林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등으로 그 가운데에 한문조의 가사(歌詞)도 있다. 시조는 중기 이후에 나타났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우탁(禹倬)·이조년(李兆年)·이존오(李存吾)·최영(崔瑩)·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방원(李芳遠) 등외 시조이다. 무신의 난 이후의 한문학 경향은 고려 초기의 향가문학이 사라지면서 패관문학(稗官文學)이 대두되어 최씨 무신집권 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현재까지 전하는 문집(文集)으로 초기의 것은 금석문(金石文)의 일부와 중기의 것으로 대각국사문집이 있을 뿐이다. 중기 후반부터 말기에 이르는 것에는 임춘(林椿)의 《서하집(西河集)》과 진매호(陳侮胡)의 《매호집(梅湖集)》,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이승휴(李承休)의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이색(李穡)의 《목은집(牧隱集)》, 김구용(金九容)의 《척약재집》, 정몽주의 《포은집(圃隱集)》, 길재(吉再)의 《이은집(冶隱集)》 등이 있다.
또 고려의 음악을 보면 속악(俗樂)·아악(雅樂)·당악(唐樂)의 3가지가 있었다. 속악은 예전부터 전해 오던 고유의 음악이며, 아악은 궁정·종묘·교사(郊祀)에서 연주되는 정악(正樂)으로 송나라에서 들어온 대성악(大晟樂)이다. 태묘악장(太廟樂章) 등 10편 안팎의 악장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아악은 1370년(공민왕 19)에 명나라 태조가 고려 사신에게 새로 악기를 더 보내어 내용이 풍부해졌으며, 발생지인 중국이나 또 일본에는 전해지지 않고 오직 한국에만 보존되어 있는 동양의 고전적 정악이다. 당악은 전부터 내려오던 중국의 속악으로 가곡에는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등 40여 편이 있다
풍속
고려는 귀족들과 농·공·상에 종사하는 일반 서민을 중심으로 하여, 그 중간에 서리(胥吏)들, 가장 밑바닥에 천민과 종들이 있는 계급사회였다. 귀족들은 임금을 정점으로 한 문무백관(文武百官)으로 구성되었는데 중앙과 지방을 합하여 약 3000명이었다. 계급의 차별은 매우 엄격하여 의복·그릇에 이르기까지 양반·농민·노예에 차별이 있었다. 백관의 관복(官服)은 광종 때에 송나라 제도를 따랐다가 몽골이 들어온 후로는 몽골의 제도로 바뀌었고, 말기에 원과 명의 세력이 바뀜에 따라 몽골과 명의 제도가 혼용되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돌아온 후로는 명제가 확정되어 근세에 이르렀다.
일반 서민은 대개 흰옷을 입었고, 여자들은 홍(紅)·황(黃) 등 색옷을 입기도 하였다. 처녀는 붉은 댕기, 총각은 검은 댕기를 달았고, 귀족은 가죽신, 서민은 짚신을 신었으며 귀족의 부인은 너울을 썼다. 죄인은 관이나 두건을 쓰지 못했다. 왕실과 귀족들은 금·은그릇과 정밀한 도자기를 썼고, 서민은 조제(粗製)도자기·토기·구리그릇·놋그릇을 썼다.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사람이 죽으면 화장(火葬)하는 풍습이 퍼졌고, 부모상에는 대개 100일 동안 복상(服喪)하였다. 고려 말에는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가 수입되어 3년 동안 복상하는 풍습이 생겼다. 무당이 많았고 산신(山神)을 모신 사당과 서낭당〔城隍堂〕 등이 있었으며, 기타 귀신도 많이 모셨다. 고려의 명절로는 설·정윌보름·한식·상사(上巳;3월 3일)·단오·추석·중양절(重陽節;9월 9일)·동지·팔관회(八關會)가 있었다.
이 밖에 인일(人日;1월 7일)·입춘·2월 연등·3월 삼짇날·사월초파일·유두(6월 15일)·우란분재(盂蘭盆齋;7월 15일)·제석(除夕;섣달 그믐) 등이 있었다. 설에는 차례를 지내고 관청에서도 전후 7일의 휴가를 주었다. 보름에는 다리밟기, 입춘에는 첩자(帖子)를 써붙였고, 한식에는 성묘(省墓)와 그네, 삼짇날에는 들놀이에 쑥떡을 먹었다. 사월초파일에는 연등(燃燈)을 하였으며 우란분재에는 절에 가서 공양을 하였다. 이 가운데서 국가적 경축일은 원정(元正) 즉, 설·동지·팔관·성상절일(聖上節日;임금의 생일)이었다.
종교
불교
유교가 고려의 정치이념이 되었는데 비하여 불교는 정신계의 지도이념이 되어 현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왕실·귀족들의 두터운 보호 속에 번성하였는데, 수도 개성을 비롯하여 전국에 많은 사찰이 있었다. 종파로는 오교(五敎)의 교종(敎宗)과 구산(九山)의 선종(禪宗)이 아울러 발전하였다. 교종의 5종파는 화엄(華嚴)·법상(法相)·법성(法性)·열반(涅槃)·계율(戒律)이다. 광종은 일반 과거제도와 아울러 승과(僧科)도 설치하여 승려들을 등용했다. 교종의 과거인 교종선(敎宗選)은 교종의 총본산 삼륜사(三輪寺;개성 소재), 선종의 과거인 선종선은 그 총본산 광명사(廣明寺;개성 소재)에서 실시하였다.
여기에 합격하면, 대선(大選)이라는 첫단계의 법계(法階)를 주었다. 이로부터 대덕(大德;住持의 자격이 있음)·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에 차례로 오르고, 그 이상은 교·선종이 각각 달라서 교종은 수좌(首座)·승통(僧統), 선종은 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로 각각 승진하였다. 특히 덕이 높은 승려에게 왕사(王師)·국사(國師)의 법계를 주었는데 이것은 승통이나 대선사의 위에 위치하였다.
국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과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다. 의천은 선·교(禪·敎)가 각기 한쪽에 치우치는 폐단을 고쳐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내세우고 천태종(天台宗)을 창설하였다. 지눌은 9산의 선문(禪門)을 통합하여 조계종(曹溪宗)을 개창하고 돈오점수(頓悟漸修)·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창하여 선문에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보우(普愚)·혜근(惠勤) 등 고승도 나타났으나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파쟁이 심했다. 한편 불교는 민간신앙과도 결합하여 승려들은 무복(巫卜)·풍수·도참(圖讖)을 통해 이것으로 민심을 좌우하었다. 또, 많은 경비를 들여 절을 짓고 불교행사를 마련한 것은 고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유교
문종 때의 최충(崔沖)은 정치가이자 덕망이 높은 학자로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9재(九齋)를 만들었는데, 수도 개성에는 최충의 9재를 본따 사학(私學)을 만들고 교육에 힘쓴 학자가 11명 있어, 그 제자들과 최충의 제자들을 합하여 12도(徒)라 불렀다. 고려에 처음으로 송나라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안향(安珦)이다. 안향은 1289년(충렬왕 15) 왕을 따라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에 갔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이것을 유교의 정통이라 생각하여 책을 손수 베끼고 주자의 초상을 그려 가지고 돌아와 최초의 성리학자가 되었다. 충선왕은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을 설치하여 양국의 문인들을 교류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유학을 연구하였다. 이어 백이정·이제현(李齊賢)·우탁(禹倬) 등 성리학에 정통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고려 말기에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길재(吉再) 등 뛰어난 학자들이 나타나 한국 성리학의 기반을 세웠다.
외세와의 투쟁
고려는 개국 이래 중국의 양(梁)·당(唐)·진(晋)·한(漢)·주(周)의 5대조와국교를 맺었는데, 그 뒤 중국을 통일한 송(宋)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신라와 중국과의 관계를 계승한 것으로, 고려도 중국의 문물에 대해서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의 경향이 많았다. 따라서 오랑캐 나라인 요(遼)와는 단순한 국교조차 맺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요나라의 성종(聖宗)은 압록강 하류의 여진(女眞)을 정복하고, 993년에는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도 끊기 위해 고려의 영토 서북면에 쳐들어왔다.
이에 고려는 사대의 관계를 송나라로부터 거란(契丹)에 옮겨서 거란 황제의 정령을 받는 대신 압록강 동쪽의 여진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고려와 중국과의 정치적인 관계는 이로써 일대 전환을 보게 되었는데 10여 년 뒤에 고려의 목종이 피살되고 현종이 즉위하자, 요나라 성종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침입하여 서울인 개경(開京)을 함락시키는 한편 대묘(大廟)·궁궐을 불태워 버렸다. 이어 강동육주(江東六州)의 반환을 핑계로 삼아 1019년(현종 10)에 이르기까지 전후 4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해 왔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철수하였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화주(和州;永興)에 변성(邊城)을 두었으며, 성종 이후는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라 하고 변경 밖의 여진을 다스리는 데 힘썼다.
특히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함관령(咸關嶺) 안에 있던 여진으로, 여러 추장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고려에 복종하고 물질적인 이익을 얻고자 자주 조공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외적이 되어 때때로 변경에 침범하였다. 숙종조에 이르러 북만주 아집하(阿什河)를 본거지로 하는 생여진(生女眞)의 완안씨(完顔氏)가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두만강 하류 유역으로 진출하여 그곳 여진을 이끌고 또다시 남하, 고려 변방의 갈라전(曷懶甸)의 여진을 세력권 내에 넣었다. 그런 후에 정평성(定平城) 밖에서 고려와 충돌하고 2차례에 걸쳐 고려의 군사를 무찔렀다. 이에 고려는 갈라전을 고려의 영토로 하고자 예종 초, 윤관(尹瓘)을 장수로 한 유명한 9성(城)의 싸움을 일으켰다.
그러나 군사를 보낸지 1년 반이 지나도 완안씨의 군사를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게 되자, 그들의 완전복종을 조건으로 성의 포기와 갈라전의 전지역을 완안씨에게 돌려 주고 되돌아왔다. 그 뒤 곧 완안씨의 아구다〔阿骨打〕는 요나라에 모반하고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금(金)이라 정한 뒤, 1116년(예종 11)에 고려에 대하여 형제의 나라로 국교를 맺도록 하였다. 금과의 사대관계는 금나라가 몰락할 때까지 계속되는 한편, 남송(南宋)과의 교섭도 끊어지지 않았다. 13세기 초, 몽고의 태조 칭기즈 칸〔成吉思汗〕이 금나라 정벌싸움을 일으키자, 거란족은 다시 고려에 침입하여 전후 3년 동안 경상도·충청도·전라도 지방을 제외한 북방 일대를 차지하였다.
고려는 1219년(고종 6) 몽고와 보선만노(蒲鮮萬奴;금나라에 모반한 장군)가 세운 동진국(東眞國)의 군사와 협력하여 그들을 쳐서 멸망시켰으나, 대신 몽고와 형제지간의 국교를 맺게 되었다. 이후 몽고는 해마다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받아 갔으며, 수년 뒤 몽고의 사신이 돌아갈 때 국경지대에서 암살되자 이를 빙자하여 고려 정벌에 단행하였다. 이 정벌은 몽고의 태종 초부터 정종·현종조를 거쳐 세조가 즉위할 무렵까지 29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그동안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遷都)하여 저항했으나 원 세조의 회유책으로 결국 몽고에 복종하였다. 1269년(원종 10)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다시 서울을 옮긴 고려는 몽고와 연합군을 편성하여 74년(원종 15)과 81년(충렬왕 7) 2차례에 걸쳐 일본을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원종에서 공민왕 초에 이르기까지 90여 년 동안 고려는 거의 원나라에 예속되다시피 하였다.
고려왕은 원나라에 의해 책봉되는 국왕인 동시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장관격이었다. 충렬왕은 세자로 있을 때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였으며 이때부터 역대의 여러 왕들은 모두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 두 나라 왕실은 서로 사돈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따라서 원나라가 고려왕의 폐위·복위를 마음대로 하게 되었으며, 때로는 벌을 받아 귀양갔던 왕도 있었다. 충렬왕 이후의 여러 왕들이 죽은 뒤 묘호(廟號)를 부르지 못한 것도 원나라의 간섭 때문이었다. 1368년(공민왕 17) 순제가 연경에서 쫓겨나 막북(漠北)으로 도망치고, 뒤를 이어 명나라 태조가 황제가 되어 이를 고려에 통고해 왔으므로 이듬해 왕은 사신을 보내 태조의 등극을 축하하고 그의 책봉을 받았다.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고 우왕이 즉위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친원(親元)·친명(親明) 두 파로 분리되어 대립이 심하였는데 88년(우왕 14)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그들의 영토인 요동에다 예속시키겠다고 통고해 왔으므로, 친원파의 영수 최영(崔瑩)은 명나라 정벌을 계획하고 조민수(曺敏修)·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요동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에 있는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려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세워 친명의 국책을 확립시켰다. 4년 뒤인 92년 이성계는 공앙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개국하였다.<이기동>
고려 시대의 문학
⑴ 정의
고려 시대의 문학이란, 통일 신라의 멸망 이후 조선 왕조가 건국되기까지의 500여 년 동안, 곧 고려 왕조 통치 기간 중 창작된 우리 문학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⑵ 시대적 배경
고려 왕조는 불교를 국교(國敎)로 정하고 주자학(朱子學)으로 이론적 체계를 이룬 시대이다. 국내적으로 눈부신 신라의 문화를 계승하고, 박으로는 대륙 문화와 대등하게 교역했던 선진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중국 문화와의 접변(接變)은 한(漢) 문화의 자연스런 도입을 촉진시켰으며, 나랏글이 없었던 우리에게 국문학의 위축과 한문학의 융성이라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도 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민중 계층에서는 무신(武臣)들의 집권이후 이상향을 그리거나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읊는다든가 하는 노래를 짓기도 하였고, 사대부들은 경기체가(景畿體歌)라든가 시조(時調)를 통해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 및 고뇌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⑶ 정주학(程朱學)
중국 송나라 때의 정호(程顥), 정이(程裡)와 주희(朱憙) 계통의 유학(儒學)을 이른다. 성리학(性理學) .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 . 당나라의 유자(儒者)의 경서(經書)에의 훈고학(訓古學)을 배척하고, 인성(人性)과 우주(宇宙)와의 관계, 곧 이기 심리(理氣心理)의 이치를 밝힌 학문이다. 심(心)은 중리(衆理)를 갖추어 만물에 통하고, 그 본연(本然)은 선(善)이라고 하였다.
⑷ 고려 시대의 문자 생활
초기에는 신라의 향찰(鄕札)이 그대로 계승되어 사용되었으나, 그 뒤 상류층에 한문(漢文)에 대한 지식이 널리 보급되자, 차차 문자 생활은 한자에 의존하는 습관이 일반화되었다. 이리하여, 입으로는 국어를 말하면서 글은 한자를 쓰게 되는 이중적인 체제가 이룩되었다. 향찰은 쇠퇴했지만, 이두(吏頭)는 고려 시대에도 여전히 사용되어 조선 시대에까지 계승되었다. 이것은 한문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서리(胥理)들에 의해서 주로 사용되었다.
② 고려 시대 문학의 흐름
고려 시대 문학의 주류(主流)는 단연 한문학(漢文學)이었다. 과거 제도의 실시와 중국 문물의 수입으로 한문학이 융성했기 때문이다. 향가의 전통은 균여 대사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거쳐 예종(睿宗)의 '도이장가(悼二將歌)'에 이루어졌으나, 나랏글이 없었던 때 한문을 자유 자재로 구사하게 되자 향가계 문학은 사라지게 되었다. 반면, 한자에 의한 귀족들의 한시(漢詩), 시화(詩畵), 설화(說話) 등의 다양한 한문학이 문학사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밖에도 경기체가, 고려가요(高麗歌謠), 시조 등의 문학이 성립되었는데 이것들은 전 시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것들이었다.
고려로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근 천 년간의 사대부문학은 한국 한문학의 굵은 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한문학의 작가들은 고려를 한문학의 전성 시대로 이끌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 시대의 구비 문학을 정착시키는 의욕적인 작업에서부터 경기체가와 단가 양식의 창안, 패관 문학(稗官文學)과 가전체 소설(假傳體小說)의 개발 등으로 한국 문학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의 문학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고려 가요의 양식인데, 이 민중의 노래는 위에 든 사대부 문학과의 이중 구조를 이루면서 조선조 평민 문학으로 그 전통을 이루고 있다. 이 민중의 노래들은 조선조의 가집(歌集)들에 정착될 때까지는 대부분 민요 형태의 구비로 전해져 왔다. 고려에서는 불교가 국교로 숭상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벌써 개인 구복적(個人 求福的) 세속 종교로 전락했고, 정치적 불안정은 문화의 내용을 향락적이거나 현실 도피적인 쪽으로 몰고 갔다.
⑴ 고려 가요(高麗歌謠)
고려시대의 시가로 고려가요는 속요(俗謠;別曲)와 경기체가(景機體歌;別曲體)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민중 사이에 전해진 속요를 뜻한다. 줄여서 여요(麗謠)라 부른다. 대부분 한글로 표기되어 있지만 《도이장가(悼二將歌)》 《관동별곡(關東別曲)》 등 이두로 표기된 것도 있다. 고려가요를 실은 문헌으로는 《악장가사(樂獐歌詞)》 《악학궤범(樂學軌範)》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근재집(謹齋集)》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 《장절공유사(壯節公遺事)》 등이 있고, 대부분이 작자 미상이다. 작자의 신분은 유녀(遊女)가 많고, 그 내용은 ① 애정:《만전춘(滿殿春)》 《가시리》 《서경별곡》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② 군신(君臣):《도이장가》 《정과정(鄭瓜亭)》 ③ 유상(遊賞):《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한림별곡(翰林別曲)》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형식은 분장(分章)과 후렴(後斂)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가요는 모두 72편인데 가사가 전하는 것과 전하지 않는 것이 있다.
① 향가 문학의 쇠퇴 후 고려의 시가는 사실상 그것을 표현할 그릇을 잃은 셈이어서 정상적인 발달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고려 가요는 문자로 정착되지 못한 채 구전되어 오다가 후에 한글이 창제됨에 따라 비로소 문자화된 것으로 그 정확한 저작 연대나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문자로 정착된 당시 유학자들로부터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하여 그 내용에 첨삭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② 이들 고려 가요는 각 절(節)이 분리되어 있고, 매절에는 후렴구(後斂句)가 있다. 그러나 고려 가요는 문자로 정착되지 못한 채 민중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가운데 일종의 민요처럼 불리워졌으며, 그 특유의 평민 문학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매우 자유 분방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고려에 한문학이 들어와 고유의 문학적 토대를 장식하고 있을 때, 비록 구전을 통해서 살아 남을 수밖에 없었다.
내용
고려속요의 내용상 공통적인 특색은 진솔한 생활 감정의 표출이다. 경기체가(경기하여가)가 한학자·도학자 등 양반계급에 의하여 제작되어 거의 대부분이 윤리적인 관념에만 얽매여 감정적인 발산이 활발하지 못한 반면에 고려속요는 내부의 감정이 자유릅게 발산되고 있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따라서 고려속요의 내용은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이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음사(淫詞)라 할 정도로 남녀 정사 관계를 대담하게 묘사하였다. 또한 잇따른 외적의 침입과 무신들의 전제적 집권 등으로 말미암아 고려 사람들에게는 현실도피적인 심상과 체념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그것이 작품의 유머·아이러니·새타이어 등으로 발산되었는데, 이는 곧 슬픔을 잊으려고 몸부림치는 역설적인 표백이었던 것이다.
고려속요는 은유적·풍유적인 기법이 많으며 그 밖에 상징적인 표현이 눈에 띈다. 《정과정》에서는 산접동새에 작가 자신을 비유하면서 간신과의 대비를 통한 알레고리로 선악의 상반되는 불가시적(不可視的) 사실을 밝히려 했으며, 《서경별곡》에서는 구슬과 구슬을 이어 주는 끈을 두 애인의 사이를 묶어 주는 믿음의 끈으로 묘사하였고, 《정석가》에서는 불가능한 사실을 앞에 내걸어 유덕하신 님과 이별할 수 없다는 일종의 신념과 소망을 기원하였다. 《쌍화점》은 은유에 의한 표현에 상징적인 기법을 곁들인 작품이다. 그와 유사한 수법은 《동동》과 《청산별곡》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속요의 또 하나의 내용적 특징은 서정적이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내용이 매우 함축성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고려속요가 엄청난 비약 없이 당시 서민들의 정한(情限)을 매우 함축성 있게 표출하고 있다.
형태
① 고려속요는 사설을 빼고 보면 《가시리》 《서경별곡》은 3·3조를 기조로 하였고, 《청산별곡》은 3·3·2신조를 기조로 한 4구 1장의 정형이다. 그리고 《정석가》 《만전춘별사》 등은 3·4∼4·4조를 넘나들고 있는데, 이는 고려속요가 우리의 전통적인 음수율과 가까운 형태를 밟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구전(口傳)시가로서 시조와 가사에서와 같은 엄격한 율조상(律調上)의 제약을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불려졌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② 고려속요는 분절성(分節性)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후렴의 형태가 등장하게 된다. 연(聯)과 연 사이에 후렴을 끼워넣음으로써 흥을 돋우는 것이다. 사설 가운데 <아소 님하> <아으> 등은 엄격히 따져 후렴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후렴 역할을 하는 것이고,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딩아돌아> <동동다리> 등은 해학적으로 삽입한 의성이 그대로 후렴이 된 것이며, <아즐가> <나
증즐가> 등은 무의미한 도움소리들이다.
③ 고려속요는 원가(原歌)의 모습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조선의 시가는 그 형태가 비교적 정제(整齊)되어 있으나, 고려속요는 전수 전달에 어떤 뚜렷한 구실을 갖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전하는 고려속요에서만도 가요의 내용이 서로 섞여 있음을 쉽사리 찾아낼 수 있다. 《정과정곡》 3연(聯)과 《만전춘》 3연은 누구나 같은 내용의 시구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구는 《서경별곡》 12절과 《정석가》 마지막 끝 연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구절이다. 특히 《서경별곡》의 경우에는 2개의 가요가 합쳐진 흔적이 엿보인다. <장노현>
⑵ 경기체가(景畿體歌)
① 한문학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던 국문학 자체의 발전에 대한 욕구와 한학자의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말미암아 경기체가라는 새로운 시가 양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경기체가는 노래의 말미에 경기하여(景氣何如) 또는 '景ㅅ 긔 엇더하니잇고' 라는 문구를 붙이는 데서 기인한 이름인데, 이 시가는 국문학상 특이한 형태이다. 경기체가는 귀족 문학으로서, 향찰식 표기 체졔가 한자로 바뀌면서 정치적 혼란기에 문인들이 한자 어휘의 나열과 이두식 후렴구로 그들의 의식 세계를 노래한 것이다.
② 경기체가는 고려 무신난 이후 조정에서 밀려난 문인들의 현실 도피적이로 향락적인 생활을 그 주된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는 고려 가요와 마찬가지로 현실 도피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예상적(豫想的)인 것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경기체가가 일반 민중들과 유리된 채로 한학자들 간에 일종의 유흥시로 부리워졌다면 고려 가요는 민중들의 생활 감정을 솔직하고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⑶ 시조(時調)
① 한국 시가의 대표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시조(또는 단가)의 발생은 그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고려 중엽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정착 시기는 대개 고려 말엽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또 시조 문학이 성립되었다는 것은 고려 문학이 국문학사에 끼친 일대 공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귀족 문학과 평민 문학으로 양분되어 있던 문학적 풍토에 시조 문학이 나타남으로써 새로운 국민 문학의 기틀을 형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② 그러나 현재 전하는 작품만으로는 고려 시대 단가의 경향이나 그 시대적 특성을 살피기는 매우 어렵다. '시조'라는 명칭 자체도 조선 후기에 이형상(李形狀). 이세춘(李世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착된 명칭이다. 단가는 원래 문자로 씌어졌던 것이 아니라 창(唱)으로 불리어 발전하다가 나중에 문자로 기록되어진 창의 문학이다. 이를 장가인 고려 가요에 대하여 단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⑷ 한문학(漢文學)
① 고려의 한문학은, 한국 문학사의 전 시대를 통하여 가장 융성한 발전을 보였다. 고려의 문인들까지도 고려의 한시를 가리켜 조선시대를 훨씬 능가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라 문신들의 재등용과 과거제도의 실시 및 불교의 포교는 고려 한문학을 꽃피게 하였다. 중기 이후 무신들의 득세와 몽고의 침입 속에서도, 고려는 귀족문화의 번영을 이룩하였다. 고려 청자의 우아한 색깔과 '팔만대장경'의 판각 및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 인쇄서인 '상정고금예문'의 간행 등은 그 일단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② 고려 문인, 학자들은 자신들의 문장 취미로 한문으로 쓴 일종의 기록 문학을 발전시켰으니, 이것이 곧 패관소설이다. 여기에는 전설, 야담, 시화, 소화(笑話),전기, 평론 등이 취재되어 성격상으로는 고대 수필의 형태로 나타난다.
③ 또한, 고려 중기에 활발해진 가전체 소설이라는 단편 의인 전기체는 소설문학의 싹을 틔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③특징
(1) 향가의 쇠퇴로, 경기체가 등의 귀족문학과 고려 가요 등의 평민 문학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2) 신라의 불교 문화를 계승하였으며, 과거 제도의 실시로 한문학이 융성하게 하였다.
(3) 설화에서 발전한 패관문학과 가전체 작품이 소설에 접근해 갔다.
(4) 시조가 최초로 발생하였다.
(5) 내용이 향락적이고, 표현에서 진솔성과 소박성을 담고 있다.
(6) 향가, 경기체가, 고려 가요는 그 수명이 길지 못하였고, 시조는 조선시대에 와서 꽃을 피웠기 때문에 과도기적 문학의 성격을 띤다.(동아대백과사전 및 기타 사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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