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
by 송화은율고도를 기다리며 /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
등장 인물
에스트라공
블라디미르
럭 키
뽀 조
소 년
제 1 막
나무가 있는 시골집.
에스트라공이 땅바닥에 앉아 구두를 벗으려고 한다. 두 손으로 애쓰며 잡아당기다 힘이 다 빠져 멈추고는 가쁜 숨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다. 같은 동작이 반복된다. 블라디미르가 들어온다.
에스트라공 :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구먼.
블라디미르 : (다리를 벌리고 뻣뻣한 걸음걸이로 다가서면서) 나도 그걸 믿게 되는군. 넌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침착해야지.
에스트라공 : 그렇다고 생각해.
블라디미르 :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네. ……다리는 좀 어때?
에스트라공 : 붓는구먼.
블라디미르 : 내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 도둑 얘기였었지. 기억나나?
에스트라공 : 싫어.
블라디미르 : 그것이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이니까. (잠시 후에) 구세주와 함께 두 도둑이 십자가에 매달렸었지. 사람들이…….
에스트라공 : 누구 말인데.
블라디미르 : 사람들의 얘기가 한 명은 구원을 받았고, 한 명은 저주를 받았다는군.
에스트라공 :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지.
블라디미르 : 지옥으로부터.
에스트라공 : 나 가겠어.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블라디미르 : 제기랄! (땅에 침을 뱉는다.)
에스트라공이 무대 한가운데로 다시 오더니 안쪽을 들여다본다.
에스트라공 : 아름다운 곳이로군. (난간 있는 데까지 와서 관중을 본다. 블라디미르를 향하여) 떠나자구.
블라디미르 : 그럴 수 없어.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리니까.
에스트라공 : 여기가 확실한가?
블라디미르 : 그가 말하길 나무 앞이라고 했거든. (둘이서 나무를 쳐다본다.) 다른 나무가 보이나?
에스트라공 : 가지가 축 늘어지지 않았군.
블라디미르 : 제철이 아니라 그런지도 모르지.
에스트라공 : 내게는 관목 같아 보이는군.
블라디미르 : 그가 꼭 온다고는 안 했건든.
에스트라공 : 오지 않는다면?
블라디미르 : 내일 다시 오지.
에스트라공 : 그리고 모레도 다시 오고.
블라디미르 : 어찌 됐든 …… 저 나무만은 ……. (관중을 향해서) ……이 늪만 있으면 되니까.
에스트라공 : 오늘 저녁이 확실한가?
블라디미르 : 토요일이라고 그가 말했지. 나도 그렇게 믿어.
에스트라공 : 만약 어제 저녁에 그가 와서 헛탕을 쳤다면 그는 오늘 다시 오지 않을걸.
블라디미르 : 한데 자넨 우리가 어제 왔었다고 하지 않았어?
에스트라공 : 나도 실수할 수 있지.
뽀조와 럭키가 등장한다. 뽀조는 럭키의 목에 포승을 감아 묶고는 그를 앞세워 들어온다. 뽀조는 채찍을 들었고 럭키는 무거운 트렁크와 접는 의자, 음식 담는 바구니를 들었으며 팔에 외투 하나를 걸쳤다.
뽀 조 : (무대 뒤에서) 더 빨리 가라!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 뽀조가 나타난다.) 뒤로 돌앗!
럭키가 짐을 전부 진 채 넘어진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들과 상관없는 일에 말려드는 것이 겁이 나서 엉거주춤한다.
뽀 조 : 인사드립니다. 뽀조라고 하지요.
에스트라공 : 고도라고 말했어. 당신 혹시 고도 아니오?
뽀 조 : 고도가 누구지?
블라디미르 : 저, 그게……그저 아는 사람이지요.
에스트라공 : 아니, 그게 아니라. 거의 모르는 사람입니다.
뽀 조 : (손을 크게 벌려) 그 얘긴 그만하기로 하고. (포승줄을 잡아당긴다.) 일어섯! (잠시 후에) 송장 같은놈! (럭키가 일어나 물건을 주섬주섬 줍는 소리. 뽀조가 포승줄을 잡아끈다.) 뒤로 물러섯!
럭 키 : (뒤로 돌아선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향하여 공손히)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뽀 조 : (포승줄을 잡아당긴다.) 더 가까이 왓! (럭키가 앞으로 다가선다.) 정지! 보시는 바와 같이 길이란 혼자 가면 지루합니다……. (시계를 쳐다본다.) ……여섯 시간 동안, (끈을 잡고) 사람 그림자도 못 보고 ……. (뽀조가 럭키에게 채찍을 내민다. 럭키가 앞으로 다가와서 입으로 받아 문 다음 뒤로 물러선다.)
에스트라공 : 미안하지만, 여보시오.
럭키는 아무 반응이 없다. 뽀조가 채찍으로 철썩 친다. 럭키가 고개를 든다.
에스트라공 : 실례합니다. 닭 뼈다귀가 필요하신지요. (럭키가 한참 동안 쳐다본다.)
뽀 조 : (기뻐하며) 이봐! 필요해? (럭키 대답하지 않는다. 에스트라공을 향하여) 당신 차지요. (에스트라공이 뼈다귀를 집어서 갉아 먹기 시작한다.) 저놈이 뼈다귀를 먹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처음인데. (근심스러운 듯이 럭키를 쳐다본다.) 저놈이 아프다고 나뒹굴지나 말아야 할 텐데.
블라디미르 : 나 가요.
뽀 조 : 나와 같이 있는 걸 더 참지 못하시는구먼.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으니까. 지금 떠난다고 가정해 봅시다. (셋이서 하늘을 쳐다본다.) 당신네들이 말하는 고데…… 고도…… 고뎅…… 인가 하는, (침묵)…… 적어도 당신네들에게 당장 닥쳐올 미래를 손으로 쥐고 있다는 그 친구와 만날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지?
블라디미르 : 그걸 어떻게 아셨지요?
뽀 조 : 됐어! 그가 다시 나에게 말을 거니 이러다간 정말 둘이서 정이 들고 말겠는걸.
에스트라공 : (손가락으로 럭키를 가리킨다.) 왜 늘 짐을 지고 있는 거지? (숨을 헐떡이며 등을 굽히는 사람의 흉내를 낸다.) 어째서 그럴까?
뽀 조 : 난 알고 있지. 어째서 그가 좀 편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지. 주의 깊게 검토해 봅시다.
블라디미르 : 잘 들어 보게!
뽀 조 : 저놈 속셈은 자기의 처지를 동정하게끔 해서 내가 자기를 떼어 놓는 것을 포기하도록 하자는 겁니다. 아니, 그것도 꼭 맞는 대답은 아니고.
블라디미르: 쫓아버리실 작정인가요?
뽀 조 : 쫓아 버릴 수도 있지만, 불문곡직하고 내 성품이 착해서 저놈을 셍소뵈르 시장에 끌고 가서 무엇과 바꿀 생각이오. 제대로 하자면 죽여 버려야 될 거요.
(럭키가 운다.)
에스트라공 : 저 사람 우는군.
뽀 조 : 눈물을 닦아 주면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덜 날 거요. 집으시오. (에스트라공이 손수건을 집는다. 에스트라공이 주저한다.)
에스트라공 : 개 같은 놈! 재수 더럽게 없다! (바지를 올려 입는다,)
뽀 조 : 내가 무어라고 말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한 말 중에 진실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어나더니 가슴을 치며) 내가 고통을 당하는 사람 같아 보입니까? 내가? 잘 보십시오! (주머니를 뒤적인다.) 내 파이프를 어떻게 했더라?
블라디미르 : 밤은 영영 오지 않으려는지……. (셋이서 하늘을 쳐다본다.)
뽀 조 : 당신. 먼저 떠날 의향이 없으신가?
에스트라공 : 아시겠지만…….
뽀 조 : 아무튼 당신이 잘 아는 그 작자와 내가 약속이 있었더라면 포기하더라도 한밤중까지 기다렸다가 포기할 거요.
블라디미르 :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거지.
뽀 조 : 지루하시지?
에스트라공 : 약간 그렇다고 할까요.
뽀 조 : 당신은 어떻소?
블라디미르 : 신나는 편은 못 되지요.
침묵, 뽀조는 내적인 고민에 사로잡혀 있다.
뽀 조 : (럭키에게) 이 망할 놈, 춤추란 말이야! (럭키가 트렁크와 바구니를 땅에 내려 놓고 약간 앞으로 다가서더니 춤춘다. 멈춘다.)
에스트라공 : 이게 전분가?
뽀 조 : 더 계속!
럭키가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더니 멈춘다.
블라디미르 : 그가 피곤한가 보죠.
에스트라공 : 어째서 저 친구가 짐을 땅에 내려 놓았을까?
블라디미르 : 춤추기 위해서.
에스트라공 :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아무도 안 오고, 아무도 안 떠나고, 참 지긋지긋하군.
블라디미르 : (뽀조에게) 그에게 생각하라고 하시지요.
뽀 조 : 그놈에게 모자를 줘요, 줘. 그놈은 모자 없인 생각할 수 없답니다. <후략>
요점 정리
지은이 : 사무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
갈래 : 희곡(장편 희곡), 부조리극
배경 : 해질녘 한적한 시골길
성격 : 관념적, 실험적
구성 : 2막
초연 : 1953년
제재 : 인물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 고도
주제 : '기다림'이라는 행위를 통한 삭막한 일상 생활의 파헤침, 절망과 불안과 기대를 안고 살아가는 고독한 현대인의 모습, 막연한 구원을 기다리는 인간의 내면 탐구, 세계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무의미한 기다림을 계속하는 절망적인 인간의 조건
의의 : 영어판에는 '비희극(悲喜劇)'이라는 부제목이 붙어 있다. 현대 전위극의 고전으로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었다. l969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특징 : '고도'라는 실체가 없는 인물을 기다리는 내용의 부조리극이며, 구원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인간의 내면을 잘 표현한 희곡
줄거리 : 막이 오르면, 마른 나무가 서 있는 황량한 무대. 허름한 점퍼를 걸친 에스트라공이 길가에 앉아 열심히 구두를 벗으려 애쓴다. 거기에 낡은 연미복을 입고 더럽혀진 검은 넥타이를 맨 블라디미르가 나타나 기묘한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두 사람은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기 위하여 여기에 온 것이다. 블라디미르는 어제도 여기에 왔었다고 하고, 에스트라 공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블라디미르가 오늘이 토요일이라고 하자. 에스트라공은 아니 금요일이다. 어쩌면 목요일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지, 지금이 며칠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고도를 기다리는지, 고도가 누군지조차 그들은 모른다. 다만 그가 오면 그들은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 밤이 오면 고도를 더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내일 또 기다리면 된다는 사실만 알뿐이다.
절망과 불안과 기대를 참아가며,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엉터리 같은 대화를 나누고, 시시한 장난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고도를 기다리며 어두운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제 1막에서는 목에 밧줄을 매고, 두 손에 무거운 짐을 든 기계 인형 같은 하인 럭키를 조종하며 거만한 부자 뽀조가 등장한다. 그러나 제 2막에서는 오직 하루라는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이 럭키가 벙어리가 되었고, 뽀조는 장님이 되어 등장한다. 언제부터 눈이 멀었느냐고 묻자, 뽀조는 "시간 관념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언젠가 그 시각에 장님이 되었을 뿐이다. "라고 대답한다. 정신 차려 보니 죽은 나무에도 잎이 돋아나 있다. 과연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거기서 제 1막에 나타났던 소년이 다시금 등장하여 "오늘은 고도 씨가 오지 못하십니다."라고 되풀이한다. 그러나 고도는 언젠가 반드시 올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면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아무튼 하루가 지난 것에 안도의 숨을 쉬며 퇴장한다.
내용 연구
(전략 줄거리)
어느 한적한 시골길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언덕 밑에서 기다림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뜻 없는 대화를 나누거나 욕을 하고 춤을 춘다. 그 사이 포조와 럭키라는 정체 불명의 두 인물이 잠시 무대 위에 나타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 주고 사라진다.
그는 부산스럽게 왔다갔다 하더니 마침내 왼쪽 출입구 가까이 가서는 먼 곳을 바라본다. 오른쪽에서 어제 왔던 소년이 걸음을 멈춘다.
소년:아저씨…… (블라디미르가 돌아선다.) 알베르 아저씨는…….
블라디미르:다시 시작이로구나. (사이. 소년에게) 너 나 모르겠니?
소년:모르겠어요.
블라디미르:너 어제도 왔지?
소년:아니요.
블라디미르:그럼, 처음 오는 거냐?
소년:네.
침묵.
블라디미르:고도 씨가 보낸 거지?
소년:네.
블라디미르:오늘 밤에는 못 오겠다는 얘기겠지? (블라디미르는 소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소년이 할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는 이와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며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는 내일을 향하여 다시금 반복될 것임을 알려준다.)
소년:네.
블라디미르:하지만 내일은 온다는 거고?
소년:네.
블라디미르:내일은 틀림없겠지?
소년:네.
침묵. <중략>
블라디미르:너의 형은 잘 있냐?
소년:아파요.
블라디미르:그럼, 어제 온 건 형이었나 보구나.
소년:모르겠어요.
블라디미르:수염이 있냐, 고도 씨는?
소년:네.
블라디미르:노란 수염이냐. 아니면…… (망설이다가) 까만 수염이냐?
소년:(망설인다.) …… 흰 수염 같아요.(블라디미르가 고도에 대해 캐묻자 소년도 망설이며 불확실한 대답만을 할 뿐이다. 이를 통해서 블라디미르가 기다리는 '고도'란 존재의 실체가 여전히 명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중략>
에스트라공:정말 내일 또 와야 하니?
블라디미르:그래.
에스트라공:그럼, 내일은 튼튼한 끈을 가지고 오자. ('끈'은 무의미하고 겉도는 대화로 일관하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연결해 주는 요소이다. 이 두 사람은 내일 또 다시 고도를 기다리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블라디미르:그래.
에스트라공:디디.
블라디미르:왜?
에스트라공: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 하겠다.
블라디미르: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그럼 살게 되는 거지.
블라디미르가 모자를 벗는다. 럭키의 모자다. 그는 모자 안을 들여다보고 손을 넣어 보 고 흔들어 본 다음 다시 쓴다.
에스트라공:그럼 갈까?
블라디미르:바지나 추켜올려.
에스트라공: 뭐라고?
블라디미르:바지나 추켜올리라고.
에스트라공:바지를 벗으라고?
블라디미르:추 ― 켜― 올리라니까.
에스트라공:참 그렇구나.
그는 바지를 추켜올린다. 침묵.
블라디미르:그럼 갈까?
에스트라공: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 겉도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형식은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 고도라는 대상을 기다리는 지루함과 낭패감, 초조감, 회의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처럼 황당한 대사를 이어 가게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넌 - 안 하겠지? : 이와 유사한 상황이 계속 반복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고도가 언제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고도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어제 만났던 소년이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에 대해서 자신과 만난 사실을 기억하도록 미리 다짐을 받아 두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내일도 소년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블라디미르는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을 것이며 이를 알리러 소년이 찾아올 것임을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목이나 맬까 : 고도를 기다리는 지루함, 낭패감, 초조감, 회의감이 엉뚱한 방향으로 탈출구를 찾는다.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 오지도 않는 고도를 막연히 기다리는 행위, 즉 그러한 삶을 더 이상 못하겠다는 의미
바지나 추켜올려 - 참 그렇구나 :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서로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도 않으면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이것은 '고도'를 기다리는 것에 지친 두 사람의 초조와 불안을 극복하려는 의지에 의한 행동이다.
Godot : 영어로 '신(神)을 의미하기도 하고,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며, 또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뽀조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불문곡직(不問曲直) : 옳고 그름을 묻지 아니하고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반연극적인 요소를 지닌, 흔히 '부조리극'으로서 일컬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과거의 연극에 반기를 든 것으로서, 고대 희랍의 순수 연극으로의 회귀를 바라는 경향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한 그루의 고목(古木)이 서 있는 황량한 길가에서 두 주인공이 고도(Go dot)라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가 와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그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이다. 뚜렷한 주제도 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한한 탐구, 존재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초조와 당혹감을 자문자답(自問自答)식으로 냉철한 의식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해와 감상1
아일랜드 출신의 프랑스 작가 S.베케트의 2막 희곡. 1953년 파리의 소극장에서 첫 공연의 성공으로 앙티테아트르(反演劇)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해질 무렵, 어딘지도 모르는 시골길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사람의 떠돌이가 고도라는 인물(이를테면 절대자)을 기다리는 동안 부질없는 대사와 동작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낸다. 거기에 노예 럭키를 데리고 뽀조가 등장하여 역시 두서 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떠났는데, 심부름하는 양치기 소년이 와서 “고도는 내일 온다”고 알려 준다. 두 사람은 계속 기다린다.
제2막(다음날)에서도 거의 같은 내용이 되풀이되는데, 이번에는 뽀조가 장님이 되어 있으나 럭키는 달아나려고 하지 않는다. 관객은 고도가 누구인지 갈수록 알 수 없게 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기다리고 막이 내린다. 작자는 ‘기다린다’는 기묘한 행동을 통하여 일상생활의 그늘에 숨어 있는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을 독자적 수법으로 파헤쳤다. 영어판에는 ‘비희극(悲喜劇)’이라는 부제목이 붙어 있다.
현대 전위극의 고전으로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었다. l969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작품이다. 이 작품은 반연극적인 요소를 지닌, 흔히 '부조리극'으로서 일컬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과거의 연극에 반기를 든 것으로서, 고대 희랍의 순수 연극으로의 회귀를 바라는 경향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한 그루의 고목이 서있는 황량한 길가에서 두 주인공이 고도(Godot)라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가 와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그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이다. 뚜렷한 주제도 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한한 탐구, 존재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초조와 당혹감을 자문자답형식으로 냉철한 의식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심화 자료
고도의 상징성
'고도'의 상징적 의미 때문에 이 작품은 때로 난해한 작품이라고 평가받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의미를 밝히지 않음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1957년, 단지 등장 인물 중에 여성이 없다는 이유로 미국의 샌 퀀틴(San Quentin) 교도소에서 공연되었을 때 1,400여 명에 달하는 죄수들은 '고도'가 "바깥 세상이다!" 혹은 "빵이다!" 혹은 "자유다!"라고 외쳤다는 일화는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한편 1960년대 폴란드인에게 '고도'는 러시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으며, 프랑스 통치 하의 알제리인들에게는 (당시 땅이 없는 농부들은 그들에게 약속되었으나 아예 실시되지 않은) 토지 개혁의 약속으로 이해되었다.
어떤 이들은 어원을 통해 '고도'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였는데, 그들에 따르면 '고도'(Godot)가 영어의 'God'와 프랑스어의 'Dieu'의 합성어라는 것이다. 하지만 베케트는 "이 작품에서 신을 찾지 말라. (...) 여기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찾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보는 동안 즐겁게 웃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극장에서 실컷 웃고 난 뒤, 집에 돌아가서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이다"라는 말했을 뿐이다.
결국 '고도'의 의미는 이 작품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 이 점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는 철저하게 관객을 향해 열려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때문에 <고도를 기다리며>는 지금까지도 학인들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었으며, 또한 삶의 질곡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생의 비밀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 어떤이는 영어의 God(고드)를 의미한다고 하기도 하며,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기도 하며, 포조야말로 바로 고도 자신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현대인의 상실한 목적 의식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아무튼 인간으로서의 비참함에 무력한 항의를 하며, 냉철한 의식과 고독한 독백을 읽을 수도 있는 이 희곡의 대화에서 현대인의 내면 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인의 의식을 대변한 이유로서, 1953년 가을에 바빌론 극장에서 처음 상연되자, 300회의 연속 공연의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1. 기다려도 오지 않는 희망
2. 일상에 매몰된 현대인 자각
3. 현대인의 잃어버린 목적 의식
부조리연극<ThAetre de l'absurde>(不條理演劇)
195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극(前衛劇) 및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연극. 40년대 사르트르와 카뮈도 세계의 부조리와 그에 대항하는 자유로운 행위자로서의 인간을 묘사하였지만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전쟁 전의 쉬르레알리슴(초현실주의) 등의 수법을 빌려 부조리를 재현하여 그 구체적인 이미지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언어를 음절(音節)로 해체도 하고 등장인물의 동일성을 상실시키기도 하여 행위의 뜻과 목적을 박탈하였다. 대표적 작가로 S.베케트, A.아다모프, J.즈네, H.핀터, 올비 등이 있다.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
1906. 4. 13(?) 아일랜드 더블린 폭스록~1989. 12. 22 프랑스 파리.
아일랜드 태생 프랑스의 작가·비평가·극작가.
196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프랑스어와 영어로 집필한 여러 편의 희곡들로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고도를 기다리며 En attendant Godot〉(1952)를 비롯한 여러 편의 희곡들로 유명하다.
생애
베케트는 더블린 근교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 출신의 동료 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나 오스카 와일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처럼 그도 영국계 아일랜드 출신의 프로테스탄트로 출생했다. 14세에 영국계 아일랜드 중산층을 위한 포토라 왕립학교에 다녔다.
1923~27년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로망스어를 공부했고, 이곳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벨파스트의 한 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은 후 1928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강사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표적 현대소설 〈율리시스 Ulysses〉의 저자이자 스스로 망명한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를 만났고, 그의 서클의 일원이 되었다. 1930년 아일랜드로 돌아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프랑스 문학 강좌를 맡았으나 4학기만 하고 1931년 12월에 그만두었다. 그뒤 런던·프랑스·독일·이탈리아를 정처없이 여행하기 시작해 1937년 파리에 정착했다. 1941년 지하 저항단체에 가입했는데, 1942년 동료들이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몸을 피했다가 프랑스의 정복되지 않은 지방으로 옮겼다. 프랑스가 해방될 때까지 농업노동자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1945년 아일랜드로 돌아갔다가 아일랜드 적십자사에 지원해 노르망디의 생로에 있는 야전병원의 통역관이 되어 프랑스로 다시 왔고, 그해 겨울에 마침내 파리로 돌아왔다.
주요작품
파리에서는 왕성한 창작이 이루어졌는데 이때야말로 베케트의 생애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작품을 쏟아낸 시기였다. 비교적 적은 수의 전쟁 이전 작품 가운데는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에 대한 각각의 평론이 포함된다. 〈차는 것보다 찌르는 게 낫다 More Pricks Than Kicks〉(1934)는 더블린의 지식인 벨라퀘이 슈어의 생활 에피소드를 그린 10편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소설 〈머피 Murphy〉(1938)는 런던에 사는 아일랜드인이 곧 결혼할 여자에게서 도망쳐 자신의 의지대로 정신병원의 남자 간호사로서 삶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베케트의 얇은 시집 2권은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에 관한 시 〈호로스코프 Whoroscope〉(1930)· 〈에코의 본질과 잔재 Echo's Bones〉(1935)라는 시집이다. 상당수의 단편들과 시들이 여러 종류의 정기간행물에 흩어져 실려 있다.
나치 독일에 점령되지 않은 곳에 수년 간 숨어 지내면서 〈와트 Watt〉라는 소설을 완성했는데, 이 책은 1953년에 비로소 출간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뒤 1946~49년에 주요한 산문소설 〈몰로이 Molloy〉(1951)· 〈말론 죽다 Malone meurt〉(1951)· 〈이름붙이기 어려운 것 L'Innommable〉(1953)과 간행되지 않은 3막극 〈에뢰테리아 Eleutheria〉,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등 많은 작품을 저술했다. 그러나 1951년이 되어서야 이러한 작품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전쟁 동안에 베케트가 가담하고 있던 저항단체에서 활동한 부인 쉬잔 데셰보 뒤메닐은 여러 곳에서 거절당했지만 마침내 〈몰로이〉를 출판해줄 발행인을 찾는 데 성공했다. 이 책이 상업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비평가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게 되자 그 출판업자는 다른 소설 2권과 〈고도를 기다리며〉를 출판했다. 그러나 베케트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53년 1월 파리에 있는 소극장 '테아트르 드 바빌론'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면서부터였다. 창작을 계속했지만 전쟁 직후보다는 속도가 느렸다. 주요관심사는 연극과 라디오 극본 및 수많은 산문 작품 작업이었다. 베케트는 파리에서 계속 살았지만 집필은 파리에서 좀 떨어진 마른 계곡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전적으로 예술에 전념하고자 했기 때문에 라디오나 텔레비전 출연, 언론 인터뷰 등 모든 사람의 이목을 차단했다. 1969년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었을 때도 수상은 받아들였지만 수상식에서 대중연설을 하지 않으려고 스톡홀름에 가지 않았다.
철학적 탐구
베케트의 저술은 그의 방대한 학식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러한 저술에는 많은 철학적 저술가와 신학 저술가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학자료들에 대한 미묘한 암시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사상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와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제자로서 인간의 육체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는가를 연구한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아르놀트 횔링크스와, 그가 존경하는 아일랜드인 친구 조이스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베케트의 작품이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뜨내기나 절름발이 등 인간 존재의 추한 면을 집중적으로 다룬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근본적인 오해이다. 베케트는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을 다루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삶의 더럽고 병적인 측면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 경험의 본질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의 문학에서 그토록 많이 다루어지는 주제들, 즉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 그들의 태도와 재산, 신분과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투쟁, 성적 대상들을 정복하는 것 등의 존재의 단순한 겉치레를 인간 조건의 기본적인 문제들과 근본적인 고뇌를 가려버리는 우연적이고 피상적인 측면들로 보았다. 그의 관점에서 근본적인 문제들은 스스로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내던져진, 즉 존재하게 된 사실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으며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 자신의 참된 본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한 인간이 '나'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들이다.
피상적인 눈으로 볼 때 베케트가 비참한 면에 그냥 집중하는 것으로만 보이지만 이 집중은 사실 인간 조건의 매우 본질적인 면을 붙잡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예를 들어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두 주인공을 흔히 비평가들은 뜨내기라고 설명하지만 베케트 자신은 결코 그렇게 묘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이 세상에 있지만 왜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여서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무의미하거나 무의미할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두 사람이 쓸쓸한 나무 한 그루와 텅 빈 무대로 표현되는 세상에 자신들이 존재하는 까닭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 것이 틀림없다고 막연히 추측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도'라는 사람이 그들에게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거나 혹은 '고도'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객관적인 증거조차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베케트는 그 두 사람의 끈기있고 소극적인 기다림을 또다른 두 등장인물의 삶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 없고 목적 없기는 마찬가지인 여행과 대비시키고 있다. 대부분의 희곡의 경우 등장인물이 권력이나 부를 얻으려고 한다든지 바라던 짝과 결혼하는 등 뚜렷한 목적을 추구한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이러한 목적들을 일단 달성했다고 해서 그들이나 관객이 베케트가 제기한 근본적인 질문의 해답에 조금이라도 더 접근하고 있는가? 바라던 아내를 얻은 주인공이 실제로 그후에 그녀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본질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 질문들을 던져버리고, 다른 작품들이 손을 뗀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베케트는 존재를 그 적나라한 본질까지 벗겨버리는 이 태도 때문에 작가로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더 집중·여백·간결을 지향했다. 초기에 쓴 대화체 소설 〈차는 것보다 찌르는 것이 낫다〉·〈머피〉 등은 세부 묘사가 풍부하다. 영어로 쓴 마지막 소설 〈와트〉의 배경은 아일랜드로 나타나 있지만, 대부분의 행위는 매우 추상적으로 묘사된 비현실 세계에서 일어난다. 베케트의 희곡들도 대부분 비슷한 수준의 추상적 개념에 입각해 씌어졌는데 〈승부의 끝 Fin de partie〉(1막극, 1957)·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Krapp's Last Tape〉(1막극, 1958 초연)· 〈행복한 날들 Happy Days〉 등의 작품이 그러한 경향을 띠고 있다.
작품집 〈무를 위한 이야기와 주제들 Stories and Texts for Nothing〉(1967)뿐만 아니라 3부작 〈몰로이〉·〈말론 죽다〉·〈이름붙이기 어려운 것〉에서도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발생하는 인간 자아의 정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쓰고 있다"고 말할 때 나는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때 나의 일부는 다른 일부가 행동하고 있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셈이 된다. 즉 나는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관찰의 대상이 된다. 이 두 모습 중 진짜 '나'는 어느 쪽인가를 제기한다.
그는 산문 작품들에서도 포착하기 어려운 자아의 본질을 추적하려고 노력하는데, 그 본질을 자신에 대한 사고와 관찰의 끊임없는 흐름으로 본다. 한 개인의 존재 전체, 즉 세상에 존재하는 자로서 자신에 대한 의식은 곧 사고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베케트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모든 것의 출발로 삼았듯이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베케트는 바로 존재 자체인 의식의 흐름의 본질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그가 발견한 것은 계속해서 멀어지는 관찰자들 혹은 이야기꾼들이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인데, 이들은 한번 관찰하자마자 즉시로 새로운 관찰자의 관찰대상이 된다.
유머와 기술
베케트는 궁극적인 신비와 인간 존재의 절망을 과감하게 다루었지만, 1차적으로 희극적인 작가이다. 프랑스어로 씌어진 한 소극(笑劇)에서 등장인물이 하찮은 성적 희열을 미친듯이 추구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날 것이다. 게다가 인간 노력의 대부분이 사소하며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견해는, 관객으로 하여금 무의미하며 헛된 대상에 관심을 두지 않게 함으로써 사람을 해방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등장인물들이 헛된 야망과 부질없는 소망들에 마음이 팔려서 거드름 피우고 스스로 잘난 체하는 모양을 보면 웃음이 나게 된다. 연극을 보거나 희곡을 읽으면 우울하고 침울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카타르시스적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해방감은 연극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연극의 목적인 것이다. 기교면에서 그는 숙련된 장인이다. 그의 구성 감각은 흠잡을 데가 없다. 예를 들어 〈몰로이〉·〈고도를 기다리며〉는 서로 '거울 상'(mirror image) 역할을 하는 대칭 구성이다.
후기 저작들은 극단적인 농축과 간결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가 '소드라마'(dramaticule)라고 이름붙인 단막극 〈왕래 Come and Go〉(1967)는 3명의 등장인물이 단지 121마디 말밖에 하지 않는다. 산문 단편 〈더 적은 것 Lessness〉은 60문장밖에 없는데, 각 문장이 2번씩 나온다. 〈무언극 Acts Without Words〉은 정확히 제목의 의미 그대로 한마디의 대사도 없고, 마지막 작품들 가운데 하나인 〈자장가 Rockaby〉는 상연 시간이 15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간결성은 사소한 일들에 단어를 낭비하지 않고 작품을 본질적인 요소만 남기고 모두 잘라내버리려는 베케트의 결심을 보여준다. M. J. Esslin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 En Attendant Godot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를 유명하게 만든 연극이었다. 이것은 이른바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에 속한다. ’부조리‘란 말은 이 경우 - 일상어에서 말하는 것처럼 - 우스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질문과 연관된다. 부조리극이 이 문제의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부조리극 작품들은 깊은 나락의 염세주의와 기괴한 유머가 독특하게 뒤섞인 형태가 된다.
사무엘 베케트는 아일랜드 출신이다. 젊었을 때 그는 당시 현대 예술가들에게 마력적인 흡인력을 갖게 하는 도시였던 파리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그는 제임스 조이스와 친교를 맺는다. 하지만 - 끈질기게 회자되는 일화와는 달리 - 그의 비서가 되지는 않는다. 1930년대 말에 베케트는 프랑스를 자신이 선택한 고향으로 삼는다. 비록 베케트의 모국어는 영어였지만 그는 대부분이 극작품과 소설들을 프랑스어로 썼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줄거리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기다림’이다. 베케트는 이 작품으로 희곡에 거는 모든 관습적인 기대를 깨버린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심오한 특성의 인물들은 없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위대한 독백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는 피상적으로 이런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허튼소리라는 인상을 주는 언어가 놓인다.
두 남자 블라디므르와 에스트라공은 한 국도의 작은 나무 옆에서 고고godot라는 이름의 어떤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도라는 인물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그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낟. 그가 어떤 외모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가 언제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실제 존재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서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들의 시도는 계속해서 실패한다. 그들의 얘기는 서로 지나치게 되고, 오해를 낳고, 도중에 끊어지면, 반복되고, 돌연 다른 주제로 옮겨가며, 질문을 발언처럼 다룬다. 그러니까 그들의 행동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어떤 막다른 골목의 끝에 다다르게 되고, 여기서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돌아서서 새로 달리기 시작하며, 다시 그곳에서도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또다시 돌아서 달리며 우왕좌왕한다.
기다리는 동안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잠시 자살을 생각한다. 이때 두 번째 쌍이 등장한다. 그들은 독재적인 포조와 그의 노예 럭키이다. 포조는 럭키를 긴 밧줄에 매고 가차 없이 명령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그는 럭키에게 춤을 추라고 명령하고, 큰소리로 생각하라고 고함친다. 포조와 럭키는 무대를 다시 떠나고 난 후에 한 소년이 등장한다. 그는 고도가 오늘은 올 수 없을 것이라고 알린다. 하지만 그 대신에 내일은 반드시 온다고 덧붙인다.
다음날은 모든 것이 전날과 같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다시 그 국도에서, 이번에는 너댓 잎들만 달고 있는 앙상한 나무 아래에서 기다린다. 그들은 끊겼던 그들의 대화를 계속하고, 자살을 생각하며, 이윽고 포조의 방문을 받는다. 그는 이제 눈이 멀어 있다. 그리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있다. 그들은 어제가 정말 어제였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고도가 오늘은 오지 않을 것이지만 내일은 틀림없이 오리라는 소년의 말을 전해 듣는다.
둘째 날 또는 막의 끝에는 셋째 날이 되거나 막이 계속되더라도 새로운 것은 발생하지 않은것의 반복일 것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그들이 있는 곳에 머물러 있고, 그들이 있는 방식과 그들의 존재대로 머물러 있으며,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고, 아무것도 받지 않고,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으며 그저 고도를 기다릴 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파리에서 (1953년에) 초연되고 4년이 지난 후에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상 웅틴 감옥에서 상연되었을 때 재소자들은 이 작품이 그들을 위하여 쓰여진 것으로 믿었다. 여하튼 그들은 유럽의 대도시에 있는 진보적인 극장들을 찾는 관객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져 주었던 이 작품에서 단번에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도는 누구이며 무얼하는 사람인가? 고도는 아마도 신일까? 어쨌건 베케트의 작품에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종교적인 암시가 충분히 존재한다. 그러면 영락한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영적인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고도는 어쩌면 죽음일까? 또는 혹시 고도는 혹시 의미를 찾는 일의 끝에 있는 목표인가? 그것도 아니면 고도는 희망일까? 그렇지도 않다면 고도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상 웅틴 감옥의 재소자들은 고도가 ‘바깥 세계’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은 그들이 마침내 그것을 얻게 되면 고통스런 환멸로 밝혀지는 것이라고. 베케트가 고도가 누구이거나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말해줄 수 있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작품에서 그것을 말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고도가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여기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해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이든, 인식이든, 감옥의 담장 밖에 있는 자유든, 하지만 그가 어떤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우리들이 고도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관한 대답에 가장 접근할 수 있는 경우는 그를 의미의 무한한 열림으로 표시할 때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 그들의 행위는 뚜렷한 시작도 끝도 알 수가 없다. 첫날에 앞서 많은 동일한 날들이 있었고, 둘째 날과 같은 날들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기다리는 동안에는 그럴 것이다. 그들의 기다림은 블라디미르가 제2막이 처음에 부르는 노래와 비슷하다.
한 마리 개가 부엌으로 와서 요리사의 계란을 훔친다.
그러자 요리사는 숟가락을 잡아 개를 쳐서 죽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자 다른 개들이 와서 그를 무덤 속으로 묻어 버린다.
그리고 그 무덤에는 비석이 세워지고, 이런 말이 새겨진다.
한 마리 개가 부엌으로 와서 요리사의 계란을 훔친다.
그러자 요리사는 숟가락을 잡아 개를 쳐서 죽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자 다른 개들이 와서 그를 무덤 속으로 묻어버린다.
그리고 그 무덤에는 비석이 세워지고, 이런 말이 새겨진다.
한 마리 개가 부엌으로 와서 요리사의 계란을 훔친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
이 노래가 자신의 존재의 조건들을 계속하여 스스로 생산하는 것처럼, 블리다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도 이와 동일한 관계에 있다. 그들은 ‘그들이 기다리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는 196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는 현대의 종지부를 보여준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기다림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질문에 그 질문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통해 대답을 돌려주고 있다.(에셔M.C.Escher의 그림들을 연상시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미의 이런 순환은 포스트모던을 인식할 수 있는 표시로 여겨진다. 하지만 베케트에게는 항상 향수와도 같은 희망이 있는데, 기다림은 아마도 ‘어떤 특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기다림은 고도라는 특정한 이름을 지닌다.(‘현대’편 193-196쪽)(출처 : 크리스티아네 취른트 지음/ 조우호 옮김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 책’)
부조리극(不條理劇/theatre of the absurd)
195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극 및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연극.
1940년대의 사르트르나 카뮈도 세계의 부조리와 그에 맞서는 자유로운 행위자로서의 인간을 묘사했으나 1950년대의 부조리극 극작가들은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초현실주의 등의 수법을 빌어 부조리를 재현하고 그 구체적 이미지를 부여하고자 했다. 카뮈는 자신의 글 〈시시포스의 신화 The Myth of Sisyphus〉(1942)에서 인간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며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용어는 부조리 작품들을 쓴 극작가들과 그들 작품의 공연을 가리키는 말로 다소 느슨하게 쓰이기도 한다. 특정한 형태의 부조리극 운동은 없었지만, 새뮤얼 베케트, 외젠 이오네스코, 장 주네, 아르튀르 아다모프, 해럴드 핀터 등 다양한 극작가들을 비롯하여 그밖에 몇몇 작가들은 하나의 공통된 입장을 공유하고 있었다. 즉, 인간이 어떤 목적을 발견하고 자신의 운명을 제어하려는 몸부림이 헛될 뿐이라는 비관적인 입장을 함께하고 있었다. 이 견해에서 볼 때 인간은 절망과 혼동, 불안을 느끼고 있는 버려진 존재이다.
이 극들의 성격을 결정지었던 사상들이 극의 구조를 결정하고 있다. 따라서 부조리극 작가들은 전통극의 논리적 구성의 거의 대부분을 폐기하여, 부조리극에서는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오던 류의 극적 행위를 찾아보기 힘들다. 즉 부조리극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아무리 혼신을 다해 연기를 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분주한 연기를 통해 강조되는 점은 그들의 실존을 변화시키는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1953년 처음 무대에 올려진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En Attendant Godot〉에는 줄거리가 배제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뜨내기로 분장하고 나오는 2명의 정처 없는 남자가 날마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도 그들이 누구인가 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데, 기다리는 것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아울러 기다리는 것이 과연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신도 없는 상태로 기다림을 계속한다. 이를 통해서 이 극은 처음도 끝도 없는 순환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부조리극의 언어는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으며, 진부한 상투어와 말장난, 반복어, 문맥과는 무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1950년에 초연된 이오네스코의 극 〈대머리 여가수 La Cantatrice Chauve〉의 등장인물들은 자리에 앉아 누구나 아는 뻔한 얘기를 반복해서 말하는데, 나중에는 그 소리가 무의미하게 들린다. 이를 통해서 이 작품은 언어로 하는 의사소통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행동과 말의 조합 때문에 이 극들이 표면적으로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희극적일 때가 있지만, 작품의 기저에는 형이상학적인 비탄이 깔려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코메디아 델라르테, 희가극(보드빌), 뮤직 홀 등에서 나온 희극적 전통의 영향과 무언극 및 곡예와 같은 무대 연기술이 결합되어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동시에 부조리극에는 초현실주의자들과 실존주의자, 표현주의 유파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사상의 영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조리극은 애초에 연극의 관례를 무시해서 충격을 주고 20세기 중반의 관심사를 적절하게 표현하여 인기가 있었지만,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다소 쇠퇴하게 된다. 즉 부조리극이 한 걸음 더 나아간 실험을 시도하도록 새로운 전위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데 기여했지만 그들의 형식적인 시도 중 일부는 연극의 본류로 흡수되었다. 대표적인 부조리극 작가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예술에서 새로운 방향을 탐색해오고 있으며, 그밖의 작가들은 동일한 성향의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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