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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이여 / 휠더린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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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이여 / 휠더린

 

거룩하신 분이여, 당신의 황금빛 찬란한 거룩한 고요함을 내가 어지럽혔음이

많았으오리다. 허나, 나로 하여 인생의 속 깊은 시름을 당신이 알게 되었음도 또한 많았으오리다.

오오 잊으소서 용서하소서, 나로 하여금 평화로운 달앞을 지나쳐 흘러가 버리는 구름을 닮게 하소서. 그러면 당신은 조용히 머물며 그 아름다움 가운데 비취리니, 그대 감미로운 빛이시여!


요점 정리

작가 : 휠더린

이해와 감상

휠더린은 1806년 이래로 죽을 때까지 35년 동안 정신병자로 지내게 된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그의 시를 읽을 때 그 시에 깃들여 있는 우울감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심화 자료

횔더린 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 (1770-1843)

독일의 서정시인.

고대 그리스 시의 고전적 형식을 독일 시에 도입하고 그리스도교와 고전이라는 두 주제를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슈바벤 지방의 네카어 강변에 있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1772년에 아버지가 죽고 2년 후 어머니가 뉘르팅겐 시(市)의 시장과 재혼하여 뉘르팅겐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1779년 어머니는 다시 남편을 잃고 혼자서 프리드리히와 그의 누이 하인리케, 그리고 아버지가 다른 남동생 카를을 부양해야 했다. 교구목사의 딸로서 단순하고 다소 편협한 신앙심을 가졌던 어머니는 그가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다.

성직자 지망생들은 자유로운 교육을 받았는데, 재능은 있지만 가난한 소년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에는 덴켄도르프와 마울브론의 '수도원학교'(종교개혁 이전 시기부터 그렇게 부름)에 보내졌고, 이어 1788-93년에는 튀빙겐대학교 신학부에 다녔으며 여기서 석사학위를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

그렇지만 그는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는 했어도 성직에 몸담을 수는 없었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쉽지 않은 타협이었던 당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결코 그의 영혼을 안전하게 기대도록 해주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리스 신화에의 몰두와 전적으로 양립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 몰두하면서 그리스 신들을 해와 땅, 바다와 하늘 속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현시하는 실제적인 생명력들로 보게 되었다. 이처럼 전념 대상의 양분에서 오는 긴장이 횔더린에게는 존재의 영원한 조건으로 남았다. 그는 루터교 목사로서 소명을 받았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종교적인 직업에 대한 의식은 대단히 강해서, 그에게 시인이란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하는 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793년 프리드리히 실러에게 소개를 받았고 그의 추천을 받아 처음으로 가정교사직을 얻었다. 그후 여러 번 가정교사를 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실러는 다른 방식으로도 횔더린을 도와주었다. 그가 만드는 <신(新)탈리아 Neue Thalia>라는 정기간행물에 횔더린이 쓰기 시작한 시 일부와 소설 <히페리온 Hyperion>의 일부를 실어주었다.

<히페리온>은 그리스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던 전사의 환멸을 그린 비가조 이야기로 미완성에 그쳤다. 횔더린은 실러를 대단히 존경했다. 그는 1794년 예나로 가기 위하여 가정교사직을 그만둘 때 다시 실러를 만났다. 횔더린의 초기 시에는 실러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나 있으며, 그가운데 여러 편은 프랑스 혁명이 초기 단계에 약속해주는 듯이 보였던 새로운 세계에 갈채를 보내고 있다.

여기에는 자유·인간성·조화·우정·자연 등에 대한 찬가들도 포함된다.

1795년 12월 가난 때문에 횔더린은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 J. F.곤타르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다정다감한 젊은 가정교사는 주인의 부인 주제테에게 깊이 빠져버렸으며, 대단히 아름답고 감수성 있는 이 여인은 그의 애정에 응답했다. 1797년 2월 친구 C. L. 노이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들의 관계를 "이 비참한 시대에서 정말 헤매고 있던 존재와 맺어진 영원하고 행복한 성스러운 우정"이라고 묘사했다.

주제테는 그의 시와 1799년에 나온 소설 <히페리온> 제2권에서 '디오티마'라는 그리스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그녀는 고대 그리스 정신의 화신을 의미했다. 그들의 행복은 짧았고 주제테의 남편과 고통스러운 사건이 있은 다음, 횔덜린은 1798년 9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야 했다. 육체적·정신적 동요 속에서도 그는 <히페리온> 제2권을 완성했으며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Der Tod des Empedokles>이라는 비극을 쓰기 시작했다.

이 첫번째 원고는 거의 완성되었으며, 2번째 단편과 3번째 원고도 아직 남아 있다. 이즈음 그에게 아주 민감한 신경증 징후들이 나타나 가족과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그럼에도 1798-1801년은 맹렬한 창조력이 발휘된 시기였다. 많은 고귀한 송시(頌詩) 이외에도 위대한 비가 <디오티마에 대한 메논의 비탄 Menons Klagen um Diotima>·<빵과 포도주 Brot und Wein>가 씌어졌다.

1801년 1월 하우프트빌에서 가정교사를 하기 위해 스위스로 갔지만 주인의 사정이 바뀌어 결국 횔더린은 같은 해 4월 집으로 돌아갔다.

실러의 영향력으로 예나대학교에서 그리스 문학 강사 자리를 얻고자 했으나 실패한 다음, 그는 다시 프랑스의 보르도에서 가정교사 자리를 얻었다. 1802년 6월 주제테 곤타르트가 죽고, 같은 해 여름 횔덜린은 갑자기 보르도를 떠나 걸어서 프랑스를 통과하여 고향으로 향했다. 그가 뉘르팅겐에 도착했을 때는 돈 한푼 없고 정신도 혼란스러웠다.

정신분열증이 더욱 심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집에서 친절하고 부드러운 간호를 받은 결과 다소 회복되는 듯이 보였다. <평화의 축제 Friedensfeier>·<유일자 Der Einzige>·<파트모스 Patmos> 같은 1802-06년의 시들은 미치기 직전의 정신에서 쓴 작품들로 비할 데 없이 장엄한 묵시록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Antigone>·<오이디푸스 왕 Oedipus Tyrannus>을 운문으로 완역하여 1804년에 출판했다.

같은 해에 헌신적인 친구 이자크 폰 싱클레어가 그를 위해 헤센홈부르크의 영주 프리드리히 5세의 사서라는 한직(閑職)을 얻어주었다.

싱클레어 자신도 온당한 급료를 주었으며 그의 보살핌과 동료애 속에서 횔덜린의 정신상태는 현저하게 좋아졌다. 횔덜린이 정신이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던 싱클레어는 1805년 반체제활동을 했다고 무고를 당해 5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그가 석방되었을 때 횔더린의 병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었고 튀빙겐의 병원에서 한 차례 발작을 일으킨 다음에는 어떤 목수의 집으로 옮겨졌으며, 정신착란의 그늘 아래 이후 3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다가 거기서 죽었다.

횔더린은 정신적으로 균형을 잃기 2년 전에 <고향 Die Heimat>이라는 송시의 결말부에서 자신의 운명을 요약했다. "하늘의 불을 우리에게 빌려준 저 신들은 성스러운 슬픔도 같이 주었다네/두어라. 지상의 아들인 나, 사랑하고 고통받도록 태어난 듯하구나."

횔더린은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100년 가까이 거의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20세기초 비로소 그는 독일에서 재발견되었으며, 독일어로 시를 쓴 뛰어난 서정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명성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세워져 있고, 특히 그의 뛰어난 표현양식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고전 그리스 운문형식을 독일어에 성공적으로 이식시킨 전무후무한 시인이다. 격렬한 열정으로써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종교적 정신 및 고대 그리스의 믿음들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고 영혼의 부활과 "신들로의 회귀"를 예언했으며 철저히, 고도로 민감하게, 그렇기에 유달리 상처받으면서 자신을 예술에 바쳤다.(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서정시(抒情詩, lyric)

악기(고대에는 대개 리라)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기 쉽도록 되어 있거나 노래를 연상시키는 표현방식으로 강렬한 개인적 감정을 나타내는 운문이나 시.

서정시는 시인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며, 때로는 이야기 형식으로 사건을 설명하는 서사시나 극시와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비가(elegies)·송가(odes)·소네트(sonnets) 등은 서정시의 중요한 유형들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합창단이 노래하는 시(합창 서정시)와 시인 한 사람의 감상을 표현한 노래가 일찍부터 구별되었다. '멜로스', 즉 진정한 의미의 노래인 2번째 부류의 시는 BC 7세기에 이미 '정열적인 사포가 사랑하고 노래한 그리스의 섬들'에서 그 기법이 완숙단계에 이르렀다. 이 여류 시인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알카이오스와 더불어 순수한 그리스 노래를 지은 도리아 지방의 주요시인이었다. 이들과 동시대 또는 보다 후기에 합창곡에 가사를 붙인 위대한 시인들인 알레만·아리온·스테시코로스·시모니데스·이비코스가 활약했다. BC 5세기말에는 바킬리데스와 핀다로스가 바코스 신을 찬미하는 송가의 전통을 이어받아 최고로 발전시켰다.

고대 로마에서는 BC 1세기에 카툴루스와 호라티우스가 서정시를 썼다. 중세 유럽에서는 음유시인들의 노래, 그리스도교 찬송가, 다양한 발라드에서 서정시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페트라르카, 셰익스피어, 에드먼드 스펜서, 존 밀턴이 가장 완성된 형태의 서정시인 소네트를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18세기말과 19세기에는 낭만파 시인들이 서정시 형식과 특히 밀접한 관련을 가졌는데, 로버트 번스,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워즈워스, 존 키츠, 퍼시 비시 셸리, 라마르틴, 빅토르 위고, 괴테, 하인리히 하이네 등을 꼽을 수 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서양의 시는 몇 편의 극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정시이다.

한국의 서정시로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 黃鳥歌〉를 현존하는 최초의 서정시로 본다. 이후에 나온 서정시로는 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이규보, 조선의 황진이 등의 시가 유명하다. 특히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에 버혀내어/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라고 한 시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근대문학에서 대표적인 서정시로는 김소월의 〈산유화〉·〈진달래꽃〉·〈초혼〉 등을 꼽는데, 그의 시에 나타난 운율은 시의 정서를 더욱 뚜렷하게 해준다. 그밖에 잘 알려진 서정시인으로 한용운·이상화·서정주 등이 있다.(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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