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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부랄꽃은 요강꽃으로 고치고 - 우리나라의 식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던 무렵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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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부랄꽃은 요강꽃으로 고치고

우리나라의 식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던 무렵 / 박만규(고려대 식물 분류학)

 

1946년의 긴 겨울 밤을 나는 독일제 고물 타자기와 씨름을 하며 보냈다. 낮에는 군정청 학무국에 나가 앉아 장학관이랍시고 자리를 지키긴 했지만 밤이면 다시 그 짓을 계속해야 했다. 스무 살에 시작한 선생 노릇을 해방되던 그 해에 겨우 치우고 나왔으니 거진 스무 해를 가르치는 일만 했었고, 그러다가 어찌어찌 관청이라고 자리를 옮기긴 했지만 타자 치는 일 같은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처음 남대문 시장 모퉁이에서 이 고물을 사 안고 들어와서는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라 쩔쩔 맸었다. 식구들은 또 무슨 뚱딴지같은 물건을 집안에 들이나 보자는 듯이 지켜보고 섰는데, 열 손가락을 척하니 그 기계 위에 얹어놓긴 했지만 다음번엔 막막했다. 나는 기계를 안고 골방에 들어앉아 이 궁리 저 궁리해 보았다. 타자교본 같은 게 있을 때도 아니었고, 우선 그 기계만도 드물었다. 열 손가락으로 두들기는 일이 어찌나 송구하고 엄두가 나지 않던지 아예 그만둬버리고 두 손의 엄지와 검지를 써서 이럭저럭 눌러보았더니 신기하게도 선명하게 찍혀졌다. 그 길로 그 병신 시늉을 밤에만 반 년을 해댔다. 나는 요즘도 타자기를 칠 땐 그 네 손가락 밖엔 쓰질 못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영 젬병일지 몰라도 나 혼자 생각에는 그만하면 괜찮은 솜씨인 듯하다.

 

그래 마흔 살 난 사내가 한밤에 화차 가는 소리를 내며 엉거주춤 타자기와 씨름질을 해야만 했던 일은 무어냐? 그것은 선생 노릇 스무 해 동안에 짬만 나면 산으로 들로 물가로 돌고 돌며 모은 식물에 우리말 이름을 달아주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절로 나서 자라는 식물이 사천여 종이나 있다. 그 가운데에 <조선식물 항명집>에서 이름을 달아준 것이 이천 종이다. 그러나 나머지 이천 종은 확실한 이름이 없으니, 여기서는 이렇게 불리고 저기서는 저렇게도 불리어서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어려움을 주지 않았다. 나는 내가 모은 표본들 가운데 <향명집(鄕名集)>에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것들대로 모아서 새로 이름을 붙이고, <향명집>에 실린 이름 중에서는 나쁜 것만 골라 고쳤다.

 

꽃은 처음 본 사람이 그 느낌으로 무어라 불러주면 그것이 곧 그 꽃의 이름이 된다. 제비처럼 날렵하니 제비꽃, 씹어보아 쓰다고 씀바귀, 물가에서 자란다고 물쑥, 이 모두가 우리네 조상들이 지어서 불러내려온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처럼 꾸밈없고 멋진 이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듣기만 해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는 엉큼한 이름도 많이 있다.

 

난초과에 딸린 여러해살이 풀로서 붉은 꽃이 한 개씩 늘어져 피는 꽃을 <향명집>에서는 개부랄꽃이라고 이름지어 놓았다. 꽃의 모양에서 딴 이름인 듯하나 부르기가 몹시 난처한 이름이라 나는 요강꽃이라고 바꾸어놓았다. 광릉 부근에서 나는 더덕의 한 종류인 소경부랄도 이와 비슷하게 점잖은 이름이다. 이처럼 욕하듯이 불러야 하는 이름이 식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조개라고 부르는 조개의 본디 이름은 말씹조개였다. 이 조개의 이름은 경성고등학교 생물교과서를 만들면서 지금의 말조개로 고쳐 실었다.

 

일본 이름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만든 이름 가운데에 끈끈이주걱이니 며느리밑씻개니 하는 이름도 있다. 며느리밑씻개는 마디풀과에 딸린 한해살이풀로서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이다. 이 풀의 일본 이름은 의붓자식밑씻개인데, 풀의 모양이 예쁘지 않고 잎과 줄기에 잔가시가 많아 껄끄러우므로 의붓자식처럼 미운 것의 밑이나 닦았으면 좋겠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의붓자식이 미운 만큼 며느리도 미우니 우리나라에서는 며느리밑씻개가 되었다.

 

<향명집>에는 버들잎쥐꼬리란 이름의 고사리 식물이 있다. 잎이 갸름하고 꼬리가 가늘게 뻗은 모습이 버들잎과 쥐꼬리 같다는 데서 지어진 이름인 듯하나 별로 좋은 이름은 아니다. 나는 그 식물의 이름을 꿩고사리라고 고쳤다. 어느 한 곳에서만 자라는 식물은 대개 그 지명을 따서 이름을 짓는다. 서울에서만 산다고 서울돌배나무, 서울제비꽃이 있고 지리산에서만 난다고 지이바꽃도 있다. 그런 이름 가운데서 틀린 것으로는 웅기자작나무가 있다. 처음에는 웅기에서만 자란다고 웅기자작나무라 이름 지었겠지만 내가 알아보니 그 자작나무가 웅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을 숲박달이라고 바꾸었다.

 

나는 밤중에 타자를 치다 정 못 견딜 만하면 슬며시 집을 빠져나와 관훈동 골목을 헤매었다. 해방 뒤에 쏟아져나온 헌책들이 그 골목에서 싼 값으로 팔리고 있었다. 내 수중에 있는 돈이 얼마가 되든지 다 털어서 책을 사곤 늦은 밤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잠을 못 자겠다고 핀잔을 주는 집식구들의 구박이야 참을 만했지만, 일로 잠을 설치고 겨우겨우 새벽잠이 드는 날이면 어김없이 지각을 해대서 탈이었다. 내 집은 돈암동 전차종점 근처에 있었는데 출근시간이 여덟시 삼십분이라 일곱시면 집을 나서야 했다. 전차를 탄다고 해도 중간에서 갈아타야 했으므로 두 시간이 좋이 걸렸다.

출근시간이면 군정청 고문인 미국사람이 사무실에 나와 앉았다가 지각한 내 얼굴에다 대고 왜 지각을 하느냐고 꼬치꼬치 까닭을 캐묻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번은 편수관 한 사람이 지각을 하고선 이유라고 댄 게 전차가 고장이 났다는 거였다. 이 미국사람은 그 말을 듣자마자 기계는 언제든지 고장이 날 수 있는 것인데 기계를 믿고 늑장을 부린다는 건 이유가 안되며 전차가 고장날 것을 미리 생각에 넣고 출발시간을 정하라.”고 호령을 했다. 옆에서 이 말을 들은 나는 아무래도 지각 안할 자신이 없어서 서둘러 중앙청 관사로 이사를 했다.

 

겨울에 붙든 일이 이듬해 여름께야 끝장이 났다. 엄동에 골방에 박혀 떨면서 고초를 겪어야 했던 일이 마치 그 놈의 고물 타자기 탓인 것만 같아 일만 끝나면 당장 내다가 엿이나 바꿔 먹을 생각으로 별렀는데 막상 일이 끝나고 타자기 뚜껑을 닫자니 몹시 서운했다. 온기가 없는 쇠붙이인데도 어찌나 정겹고 훈훈하게 느껴지던지 손에서 놓기가 어려웠다. 애들은 내가 그 물건을 들고 골방에서 스적스적 나오자 무슨 몹쓸 것 가리키듯 멀찍이서 손가락질을 하며 내다 치우려 했다. 나는 그것을 기름걸레로 닦아서 서재 구석켠에다 옮겨놓았다.

 

누구인들 자기의 뜻을 책으로 펴고 싶지 않으랴? 더구나 그 학문의 성질이 책으로써가 아니면 펼 수 없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나는 내 일이 학문적으로 큰 업적이 될 만한 일이라거나 그것으로 남들 앞에 버젓이 뻐겨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다만 젊음을 걸고 해온 일을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한 매듭을 짓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내 봉급은 군청 때의 화폐가치로 보아서 박하지는 않았다. 백 원을 받아 오십 원으로 그럭저럭 생활을 하고 오십 원으로는 책을 사거나 실험기구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서 눈먼 돈이 굴러들지 않고서는 책을 낼 엄두는 낼 수가 없었다. 얼마 동안을 답답하고 한심한 기분만 들어서 목을 늘어뜨리고 다녔다.

 

1946년에 정부는 일본식 직제를 개편하여 학무국은 문교부로 바꾸고 문교부장 자리에 유억겸 선생이 앉았다. 해방된 이 땅의 학생들을 위하여 교과서도 새로 만들어지고, 출판사에서는 잇달아서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문교부에서도 교육에 필요한 자료를 공짜로 출판해주는 이른바 문교총서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나는 슬며시 들뜬 기분이 되었다. 내가 가진 자료가 우리나라 식물학계에 얼마만큼이나 영향을 줄 수 있느냐의 문제로 며칠을 고민했었다. 내가 해놓은 일이란 건 무슨 어마어마한 발견이나 발명도 아니고 그저 이름없는 풀이나, 이름이 있으되 곳마다 달리 불리는 풀의 이름을 하나로 바르게 지어준 것뿐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니 문교총서로서 내달라고 하기가 몹시 부끄럽고 쑥스러워졌다. 같은 방의 동료들도 나의 이런 고민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터라 여러 가지로 격려해 주었다. “<향명집>이 나온 지 이십 년이 지났고 그 책이 나올 무렵은 일제의 한글 박해가 극심하던 때였으니 제대로 이름이나 밝혔겠느냐? 더구나 이십 년 동안 새로 발견된 식물이 얼만데 그 좋은 원고를 묵힐 셈이냐? 우리가 도울 테니 책으로 내자.” 대개 이런 의견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격려에 힘입어서 문교총서의 실무를 맡고 있던 오천석 차장을 찾아갔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시원시원 수월하게 풀려주기만을 바라는 사람은 아니다. 기다리는 재주도 있고 참는 재주도 있다. 내 원고가 문교총서로서 마땅한 것이냐를 심의하려 위원회에 올려지고 나서부터 나는 한시름 놓고 느긋해 있었다. 위원회에서 어련히 알아 결말을 내줄까 싶어서였다. 나중에 듣고 보니 문교총서가 되어 책을 내려면 이리저리 다니며 꽤 힘을 써야 겨우 위원회를 통과한다는데, 내 본디 배포가 유하고 남 앞에 때맞춰 인사하는 버릇을 못 기른 탓으로 그때도 그런 힘 따위는 써볼 생각도 않았다. 심의 기간이 좀 길긴 길다 싶어도 내처 그쪽에서 기별 오기만 기다리다가 어느 날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소식을 들었다. 조선생물학회로부터 박만규의 원고를 문교총서로 출판하는 일을 중지해달라는 진정서가 문교부장 앞으로 날아들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길로 처음 유억겸 부장의 사택을 찾아갔다.

 

내가 양심적이고 청렴한 관리였다는 얘기가 될까 무섭다. 나는 그저 윗사람의 집에 사사로이 드나드는 일이 계면쩍고 불편해서 안 가는 버릇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일만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일에 무던히도 애착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갈데올데 없이 앉아서 벙거지를 쓸 수는 없었다. 유 부장은 나를 보더니 대뜸 박 선생, 큰일났어.” 하며 허허 웃었다. 나도 바보스럽게 마주보고 허허대다가 깜짝 정신이 들었다. “부장님 어쩐 일이요? 무슨 말인지나 들어봅시다.” 하고 다그쳤다. 유 부장은 웃음을 그치지 않고 생물학회에서 당신은 죽일 놈이니 총서에 당신 원고를 쓰지 말라고 하오.” 이러고는 허허허 웃었다. 유 부장은 자세한 이야기는 오 차장에게 들으라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청년처럼 불끈해서 얼굴만 붉히고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채 못하고 관사를 나왔다.

 

나라고 오기 없으란 법이 있느냐? 이것이 오 차장이 내미는 진정서를 받아 읽은 뒤의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진정서라는 게 다 남을 무고하는 데에 쓰이는 것인지는 몰라도, 조선생물학회에서 보내온 진정서는 정말 한심한 것이었다. 그 진정서는 나의 자료가 문교총서로서 출판되면 안되는 까닭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박만규의 자료는 <향명집>의 확대판을 넘지 못하며, 더구나 새로 지은 식물의 이름은 거개가 일본 이름의 직역으로서 신빙성이 없고 개인의 업적이란 오류가 많다.” 고까지 덧붙였다. 나는 일찌기 조선생물학회라는 데를 가본 적도 없고 그 곳의 사람들에게 내 자료를 보여준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내 원고를 본 듯이 학자적인 양심에 비추어 그 책이 문교총서로 출판되는 것을 막으려 한다고 탄원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든 이 세 가지 까닭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먼저 내세운 <향명집>의 확대판이란 말은 오히려 그들에게 맞는 말이었다. <향명집>은 이덕봉, 이휘재, 도봉섭, 심학진 들이 만든 책인데, 이른바 조선생물학회란 그들 가운데서도 도봉섭, 심학진 이 두 사람을 기틀로 한 모임이었다. 그러니 <향명집>을 확대하기란 그들 쪽이 쉽지 않았을까? 두번째 든 일본 이름의 직역이란 말도 묘한 어림짐작이었다. 그때에 우리나라에는 영어, 불어, 독어는 어떻든 겨우겨우 뜻을 이을 만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라틴어까지 공부한 사람은 없었다. 린네가 붙인 학명은 여러 나라 말이 섞여 있는데 그때의 상황으로는 이것들을 번역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나는 하노라고 했다. 우리말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그 가운데에서 가장 그럴싸한 것으로 이름을 삼았고 모양이나 성질이 밝히 나타난 것은 또 그것을 따서 지었다. 이래도 잘 잡히지 않는 이름은 학명을 의역하였지만, 되도록 본래 주어진 이름과 가깝게 옮기도록 애썼다. 일본 이름을 전혀 번역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일본이름이건 미국이름이건 어느 나라 이름이건 번역을 하게 되면 맨 먼저 한글학자들과 상의했다. 형용사를 명사로 만들어서 어색한 이름이 지금도 더러 남아 있긴 하지만 전부가 일본이름의 직역이라니 억울했다. 더구나 마지막의 개인의 업적에는 오류가 많다.”라는 귀절에 이르러서는 분한 생각마저 들었다. 어째서 개인의 업적에 오류가 많다는 말이냐? 한 사람이 한 가지 일만을 죽 이어 해왔으니 오히려 체계가 있을 게 아니냐?

 

나는 오 차장에게 진정서를 되돌려 주며, “위원회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라고 꼭 한 마디만 하고 나왔다. 오래 잊어온 고향 구례의 너른 산야가 눈 앞에 어른거리며 왜 그리도 서럽던지 갈 길을 모르고 한참을 세검정 쪽으로 걸었었다. 그때의 그 서러움은 지금 되새겨도 가슴이 어릿하다.

 

마침내 그 진정서의 처리 문제를 의논하려는 문교총서 편집위원회가 열리게 되었다. 문교부의 네 국장과 문교부장 유억겸 선생, 그리고 차장 오천석 선생이 편집위원이었다. 나도 오 차장의 부름을 받고 그 자리에 나가 앉았다. 오 차장이 진정서 내용을 말하고 먼저 나의 진술을 듣겠다고 했다. 나는 처음에는 온갖 감회가 목으로 치밀어오르는 듯하여 겨우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학문의 연구는 자유가 아니냐? 우리

 

나라 식물에 우리 이름이 붙은 것은 겨우 몇백 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나머지 식물에는 새로운 우리말 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자 조금 속이 후련하였다. 나는 이어 그 진정서 내용이 한 개인을 무고하고 있음을 낱낱이 설명하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가만히 위원들의 눈치를 살펴보니 내놓고 무어라고 말은 않았지만 그 공기가 안 내줬으면 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음을 이내 알 수 있었다. 조선생물학회에서 말썽을 부리면 난처하지 않느냐는 쪽으로 대세가 기우는 것 같았다. 나는 더 오래 그 자리에 앉았을 수가 없어서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그랬더니 오 차장이 고개짓으로 그냥 앉아 있으라는 시늉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지금 와 다 챙겨 적을 수는 없다. 그저 하도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하는 바람에 코가 얼얼하던 것만 생각난다. 그는 간단히 잘라 말했다. “다른 것은 문제삼지 않으마. 다만 개인의 업적이 공동의 업적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어쩌면 혼자 힘으로 한 가지 일을 해낸 것이 더 가상한지도 모른다. 조선생물학회는 그들의 원고가 문교총서로서 적합하다고 생각되면 가져와라. 그것도 총서로 내주겠다. 박만규의 것과 함께 세상에 내보내보아서 어느 이름이 더 널리 불리는지 보면 알 것 아니냐? 모든 행정적인 결정은 다수에 따르는 것이 옳다. 그러나 학문의 문제는 꼭 다수가 옳은 것이 아니다. 다른 일은 잘못되면 다시 고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그러나 학문의 오류는 자칫 잘못 저질러지면 다시 고치기가 어렵다.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문제를 들어 다시 논의치 말아라.” 대략 이런 얘기였다. 오 차장의 자른 듯한 이 말은 다른 국장들의 은근한 반대의 뜻을 깨끗이 묵살했다.

 

내 책 <우리나라 식물명감> 1947년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았다. 거의 같은 무렵에 조선생물학회의 <조선식물명집>도 정음사에서 나왔다. 정음사는 문교총서의 위원이 되는 편수국장 최현배 선생의 맏아들 영해가 하던 출판사였다. 뒤에 소문을 들으니까 내 책이 문교총서가 되느냐 마느냐의 시비에 올려져 있을 때에 정음사에서는 이미 <조선식물명집>의 조판이 끝나가고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내 책이 나오면 곧바로 정음사가 타격을 입을 참이었다. 이 일을 최 선생이 모를 리가 없었는데도 어쩌면 그처럼 태연하기만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할수록 훌륭한 분이다.

 

책이 나온 이듬해에 육이오가 터졌다. 불탄 것이 어디 내 책 뿐이랴만, 그 곡절 많은 <우리나라 식물명감>도 몇 권 남지 않고 타버렸다. 그토록 무상한 일이 될 것을 모르고 무던히도 속을 태웠구나 싶었다. 그래도 남은 몇 권이 뉘 집 서가에 꽂혀 단잠을 자리라 생각하면 흐뭇하다. / 뿌리깊은 나무1976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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