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촌별곡(江村別曲)
by 송화은율강촌별곡(江村別曲)
평생(平生) 아재(我才) 슬데 업셔, 세상(世上) 공명(功名)
하직(下直)하고, 상산(商山) 풍경(風景) 바라보며, 사호(四皓)
유적(遺跡) 따로리라. 인간(人間) 부귀(富貴) 절노 두고,
물외(物外) 연하(煙霞) 흥(興)을 겨워 만학(萬壑) 송림(松林)
슈풀 속이 초옥(草屋) 수간(數間)지어두고 청라(靑蘿) 연월(烟月)
대사립의 백운(白雲)심처(深處) 다다두니 -하략-
요점 정리
연대 : 선조
작자 : 차천로
주제 : 벼슬에서 물러나서 지내는 전원의 한정
내용 연구
작자에 대해서는 성운, 또는 조식이라는 설도 있으나, 차천로의 작품임이 거의 확실하다. '교주가곡집'에는 낙빈가란 제목으로 실려 있고, '청구영언'에 같이 실려 있는 '처사가(處士歌)'나 또 한 사본(寫本)의 '별어부사'와도 같이 가사 내용이 비슷하다.
이해와 감상
'환산별곡', '낙빈가' 등과 같이 관직 사퇴 후의 전원의 한가한 생활을 읊은 가사로 조선 중기에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사. 은거자의 한적한 생활을 노래한 가사이다. ≪고금가곡≫과 홍만종(洪萬宗)의 ≪순오지 旬五志≫에 차천로의 작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이나 필사본의 ≪악부 樂府≫·≪가집 歌集≫에는 작자가 밝혀져 있지 않고 작품만 실려 있으며, 특히 악부에는 〈별어부가 別漁父歌〉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다.
관직에서 물러나 산수간에 은거하면서 안빈한적(安貧閒適)하는 생활을 노래한 것으로, 표현에 있어서 “평생아재(平生我才) 쓸데업셔”, “세상공명(世上功名) 하직하고……”와 같이 한 구의 앞쪽이 일률적으로 네 자의 한문구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낙빈가(樂貧歌) 계열의 작품이다.
≪참고문헌≫ 校合樂府 上·下(金東旭·林基中 編, 太學社, 1982), 校註歌曲集(前間恭作 編, 1951), 校合歌集 二(金東旭·林基中 編, 太學社, 1982), 江村別曲에 대하여(姜銓瓏, 한국고전문학연구, 198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차천로 (車天輅 )
1556(명종 11)∼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귤실(橘室)·청묘거사(淸妙居士). 송도(松都) 출신. 고려의 간의대부 원부(原琅)의 6대손이며, 계생(繼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운(廣運)이다. 아버지는 식(軾)이며, 어머니는 이계천(李繼天)의 딸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지냈고, 1583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6년 정자(正字)로서 고향 사람 여계선(呂繼先)이 과거를 볼 때 표문(表文)을 대신 지어주어 장원급제시킨 일이 발각되어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1588년 문재가 있어 용서되었다.
이듬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그 때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4,000∼5,000수의 시를 지어 일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 문명이 명나라에까지 떨쳐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명사(明使)들이 문장의 속작을 실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시에 거침없이 수응(酬應)하여 이름을 더욱 떨쳤다.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1601년 교리가 되어 교정청(校正廳)의 관직을 겸임했고, 광해군 때 봉상시첨정을 지냈다.
한호(韓濩)·권필(權億)·김현성(金玄成)과 더불어 서격사한(書檄詞翰)이라 하였다. 특히 시에 능해 한호의 글씨, 최립(崔凌)의 문장과 함께 ‘송도 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어졌다.
아버지 식, 아우 운로(雲輅)와 함께 세인(世人)으로부터 ‘3소(三蘇)’라 불렸다. 가사(歌辭)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 ≪오산집 五山集≫·≪오산설림 五山說林≫, 작품으로 〈강촌별곡 江村別曲〉 등이 있다.≪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鶴峰集, 五山集, 崧陽耆舊傳, 旬五志.(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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