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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재 - 파도, 임진강의 민들레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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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대질(對質)의 미학(美學) / 천이두

 

 

줄거리를 쫓아가며 어떤 특정한 인물의 운명이나 행적을 엮어 나가는 일에 싫증을 느낀 때에 작품 <파도(波濤)>의 구상을 하였다.

 

  일단(一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양에다 이리저리로부터 카메라 앵글을 마주대어서, 나 나름의 미학으로 처리해 보고 싶었다.

 

  물론 주축이 되는 인물은 필요하다. 감정이 억세고 좀 야비한 계집아이를 택하였다. 세련된 인품은 여기서 내가 사용하려는 렌즈로 적당치 않았기 때문에.

 

  그 계집애는 무엇이든지 잘 보고, 무엇이든지 잘 느낀다.

 

 

 

  이것은 장편 <파도>에 관하여 작자 자신이 밝힌 '작가 노트'의 한 구절이다. 작가의 의도와 결과로서의 그 작품의 현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므로, 이른바 의도라는 것을 무작정 그 작품 해명의 절대적 단서로 채택할 경우에 여러 가지 엉뚱한 잘못이 빚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뉴 크리틱들의 이른바 '의도의 오류'라는 것이 곧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위험성을 충분히 고려에 넣고 생각해 본다 해도 강신재의 이 구절은 분명 <파도>라는 작품의 기법상의 특질을 살펴 나가는 데 있어 매우 효과적인 단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은 넓게 보면 이 작가의 문학적 입장 내지 방법의 중요한 일면을 해명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우선 <파도>라는 작품을 살펴 보기로 한다.

 

  '무엇이든지 잘 보고, 무엇이든지 잘 느낀다'는 소녀가 곧 이 작품의 중심 인물인 '영실'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일제 시대의 함경도의 어느 항구 도시로 되어 있다. 바야흐로 사춘기에 접어들려 하는 이 어린 소녀는 아닌게 아니라 잘도 이곳저곳을 거침없이 쏘다니며 '무엇이든지 잘 보고, 무엇이든지 잘 느끼고' 그래서 무엇이든지 잘 알아낸다. 병적일 정도로 호기심이 강해서 무슨 일에든 뛰어들고 싶어 못 견딘다. 게다가 지극히 활달한 외향적인 성품이어서 모든 외부의 자극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민감하고도 정확한 반응을 나타내는 반면 무슨 일에건 깊이 안에 새겨 두는 법도 없다. 이 작품에 있어서 이 소녀의 모습은 생생하게 부각되고 있다.

 

  '영실'이 뚜렷한 성격적 샘플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우선 흥미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느끼게 되는 더 큰 흥미는 작중 현실 안에 있어서의 이 소녀가 수행하고 있는 바 그 역할의 특이성에서 연유된다. 이 소녀를 이 작품에 있어서 '주축이 되는 인물'이라고 작자 자신은 말하고 있지만, 엄밀히 따져 볼 때 이 소녀는 이 작품의 현실 안에서 빚어지고 있는 갖가지 액션의 구경꾼이지 그 당사자는 아니다. 물론 이 소녀는 그녀 나름의 액션을 빚어 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어느 소년(경식)을 짝사랑해 보기도 하고, 집을 뛰쳐나간 언니를 찾아오기도 하고, 친구 소녀(성아)의 선물을 염치 불구하고 가로채기도 하고, 자기가 맡아서 하고 싶었던 여왕의 배역을 친구 애(명옥)에게서 빼앗는 데 성공하기도 하고, 하는 식으로 무슨 일에든 뛰어들어, 하고 싶은 짓은 염치 불구하고 해 내고, 갖고 싶은 것은 어거지로라도 차지하곤 한다. 요컨대 작중의 모든 액션은 '무엇이든지 잘 보고 무엇이든지 잘 느끼는' 이 소녀를 '주축으로' 하여 빚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녀는 이 작품의 내면의 흐름의 자리에서 보면 오히려 그 바깥에서 겉도는 존재로 머물러 있음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작중의 액션의 거의 모든 현장에 헐레벌떡 뛰어들어 그때마다 톡톡히 한몫을 차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몫으로서의 오롯한 액션은 하나도 벌이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서 우선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생생한 모습으로 부각되는 이 소녀에 비하면 그녀의 아버지나 언니의 생모 성아나 그녀의 가족들, 혹은 순희나 그녀 아버지 등은 오히려 그 윤곽이 희미하다. 그런데도 정작 자기 몫의 운명 앞에서 괴로운 소용돌이를 빚는 것은 '영실'이 아니라 그녀의 배후에 가려 있는 그 사람들이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뜻맞는 사람과 결혼에 성공한 '신실', 단란과 성의의 기둥이였던 아버지(백의사)의 돌연한 죽음으로 모든 것이 허물어지게 되는 '성아'일가의 몰락, 아버지(소방대장)의 발광으로 하여 의지가 없는 신세가 되는 '순희', 이루지 못한 숨겨 온 사랑의 고뇌 때문에 결국 투신하고 마는 아버지 등이야말로 각기 자기 운명의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간 당사자들이요, 영실은 다만 그 소용돌이가 일 때마다 헐레벌떡 쫓아가서 그 현장을 놓치지 않는 재빠른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보고 무엇이든지 느끼는'이 소녀가 이 작품에서 수행하는 일차적 역할은 바로 그 재빠른 구경꾼일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실은 작중 현실 안에 설정된 렌즈요 그 개개의 액션들은 그 피사체라 할 수 있다. 작자는 일제 시대의 함경도의 어느 항구 도시의 풍경을 펼쳐 보임에 있어 '무엇이든지 잘 보고 무엇이든지 잘 느끼는' 한 소녀의 민감한 렌즈를 매체로 사용함으로써 그 표현 대상과 작자 자신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매체와 피사체는 각기 색채와 광도가 다른 것이다. 말하자면 작중의 관찰자인 영실의 성격적 분위기와 작중의 실질적 액션의 분위기는 작기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영실은 한번도 작중의 여러 가지 비극적 액션의 당사자로 참여한 일이 없다. 그녀는 비극의 당사자는 아닌 것이다. 그녀는 오히려 희극적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건강하고 낙천적이다. 슬퍼서 울 때조차도-실상 뼈저린 슬픔을 의식하는 경우도 있을 수 없지만-이내 웃음이 뒤따른다. 말하자면 이런 희극적인 렌즈에 의하여 작중의 비극적 액션들은 관찰되고 있다는 것이다. 작중의 액션의 내용과 그것을 관찰하는 렌즈 사이의 이러한 언밸런스, 거기에 이 작품의 묘미는 걸려 있는 것이다.

 

  작중의 모든 비극적 액션들은 영실이라는 소녀의 특정한 시선, 그것도 지극히 희극적인 분위기를 지닌 시선에 의하여 관찰되게 됨으로써 그것들은 이중적인 왜곡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런 이중적인 왜곡에 의하여 작자 자신의 주관적 정서가 작중 현실 안에 투입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이중적으로 봉쇄당하게 되는 셈이며 따라서 그 비극적인 액션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더욱 선명하게 그 자체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 작품의 표면적인 흐름이 다분히 코믹한 톤으로 펼쳐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암담한 여운을 풍겨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작품과 여러 가지 점에서 구조가 비슷한 작품이 <오늘과 내일>(장편)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 '매지 마누라'는 여러 가지 점에서 '영실'의 위치와 비슷하다. 이 작품에 있어서도 '주축이 되는 인물'은 매지 마누라다. 병적일 정도의 강한 호기심을 갖고 있고. 여기저기 액션의 현장에 헐레벌떡 쫓아다니는 것도 영실과 비슷하다, 매지 마누라 역시 작중의 액션들과 직접 관계지워져 있는 게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 액션들의 가장 핵심적인 당사자라고 할 수조차 있다. 4·19라는 커다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세 아들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단적으로 이를 말해 준다. 큰아들은 '발포(發泡)순경'으로, 둘째는 '정치 깡패'로, 셋째는 '학생데모의 주동자'로 각기 4·19하는 역사의 현장에 관계지워져 있고, 매지 마누라는 그 세 아들을 가진 어머니로서의 슬픔과 감격을 아울러 갖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4·19라는 치욕과 영광이 엇갈린 거대한 역사적 현장의 자리에서 볼때는 '매지 마누라'는 아무래도 그 당사자일 수는 없다. 이 장중한 역사의 현장에 참여하기에는 그녀가 발산하는 분위기는 너무도 희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헐레벌떡 쫓아다니며 보고 느끼고, 그리고 직접 겪고 있기도 하는 역사적 현장의 장중한 심각성에 비하여 그것들을 자기 내면의 절실한 문제로서 받아들이기에는 그녀의 속성은 너무도 외향적이고 조건반사적이다. 그녀가 보고 느끼고 겪고 있는 액션의 비극성과는 관계없이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희극적 속성 안에 머물러 있다. 이리하여 작중의 액션과 그 관찰자(관찰자로서의 그녀의 역할은 영실에 비하면 다소 제한되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사이의 기묘한 언밸런스는 여기서도 빚어진다. 아무튼 이런 언밸런스를 빚게 하는 결정적 요인으로서의 매지 마누라의 분주한 활약에 의하여 경무대의 긴장된 순간에서 시정의 잡다한 세태풍경에 이르기까지의 4·19의 역사적 현상이 다층적으로 부각된다.

 

  비극적 액션의 현장에 희극적 요인을 대질시킴으로써 기묘한 아이러니를 빚어내려는 방법은 작가 강신재가 비교적 꾸준하게 시도하여 온 방법인 듯하다.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발광하고 만 '난아'의 처참한 몰골을, 그와는 아무런 정신적 연계성이 없는 며느리나 식모를 대질시켜 놓는다거나 (<이브 변신(變身)>), 순탄치 못한 사랑의 우여곡절 끝에 죽음으로 끝막는 젊은 남녀의 애절한 모습을 나루터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무심한 시선으로 목격케 한다거나, 착하기는 하나 대가 약하고 그래서 늘 주눅들려 지내는 외로운 남편을 정력적이고 독선적이고 위압적인 아내에 대질시켜 그들의 외축된 외로움과 기름진 탐욕을 각기 그로테스크하게 부각시킨다거나(포말(泡沫), 녹지대(綠地帶)와 분홍의 애드벌룬, 투기(妬忌)>), 기괴하게 추악한 누이와 암울하게 외로운 오라비를 대질시킴으로써 전쟁의 후유증을 진단해 본다거나(<난리 그 뒤>), 형의 떳떳하고 공개적인, 그리고 유쾌하기까지 한 혼사의 진행 과정을 아우의 은밀하고도 외로운, 전세대적인 사랑의 진행 과정을 병치(倂置)시킴으로써 터부를 범한 아우의 사랑의 비극을 부각시킨다거나 하는 것 등이 모두 그러한 방법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이와는 다소 성격이 다르지만 가령 무지와 아집과 탐욕으로 얽혀 있는 어느 일가의 더없이 암담한 흥망성쇠를 오히려 코믹할 정도의 희화적(戱畵的) 톤으로 그려 나가고 있는 그들의 행진이나. 우연히도 시류(時流)에 휘말린 꼴이 되어 한껏 번롱당한 끝에 결국 자살하고 마는 한 우직한 서민의 생태를 오히려 희화적으로 그려 내고 있는 <달오(達五)는 산으로>, 어느 한 부부의 비극적 파탄으로 병약하고 외로운 어린 소년의 시선을 통해서 부각시키고 있는, 인생의 문턱에 접어든 한 소녀의 아련한 사랑의 감정을 그녀 자신의 내면의 분위기를 통해서 부각시키고 있는 <젊은 느티나무> 등에서도 우리는 작중 현실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작가 자신의 방법론적인 노력의 반영을 보게 된다. 강신재의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는 <팬터마임>의 '그'는 우연히 목격한 어느 비극적 순간의 장면들을 팬터마임을 감상하듯 회상한 끝에 이런 생각을 한다.

 

   얼굴을 고치면서 그는 문득 오랫동안 잊었던 몇 개의 무언극을 회상하였다. 그리고 오늘 자기가 주연을 한 그것은 사실 약간 저열함을 면치 못하였다는 생각도 하였다.

 

  여기서 무언극의 주연 노릇을 한 스스로를 저열했다고 뉘우치고 있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다름아닌 작자 자신의 작가 자세를 느끼게 된다, 작가 강신재는 분명 자기 작중 현실에 대하여 이처럼 주연배우의 자리가 아닌 그 구경꾼의 자리를 지키려 노력하여 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껏 살펴 본바 문학적 기법도 그런 노력에서 연유되는 것이겠다. 이 작가의 문학적 소재가 매우 다양한 측면에 걸쳐 있는데도 정작 사소설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자전적(自傳的)인 요소가 별로 눈에 띄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은 것도 그런 점과 관련된다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작가 강신재는 이토히토시가 두 가지 타이프로 분류한 구도(求道)의 작가와 인식의 작가 가운데 분명 후자에 속한다 하겠다. 내가 읽은 한에서 볼 때 중기 이후의 작업들이 특히 그렇다.

 

 

2

   <임진강의 민들레>는 얼핏 보기에 다소 예외적인 작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같이 장편이면서도 가령 <파도>의 영실, <오늘과 내일>의 매지 마누라 등과 같은 작중의 렌즈 역할을 하는 인물의 설정이 없다. 따라서 작중 현실은 특정한 작중 인물의 시선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자 자신에 의하여 관찰되고 있다 이 점에서는 <신설(新雪)> 같은 장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작품에 있어서도 강신재 특유의 기법적 특질은 역시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서두에서 볼 수 있는 바 '이화'일가의 분위기를 생기 있게 빚어내는 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보매에는 정력적이고도 활동적인 듯하지만 실상은 호인풍으로 무능하고 시대착오적인 아버지나 착하고 상냥하기는 하나 어리뚱하고 좀 모자란 어머니나. 덜렁대기만 했지 맺힌 데는 없는 '동근' 등이 발산하는 다분히 희화적인 분위기와, 자기 내면의 일정한 질서를 간직하고 있는 '이화'나, 근면하고 헌신적인, 이 또한 자기 나름의 그늘을 지닌 '옥엽', 어린깐으로는 제법 다부진 구석이 있는 '동훈' 등이 빚어내는 좀 진지한 분위기 사이의 대질을 통해서 어수선하면서도 그 나름으로 착하고도 평화스런 한가정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더욱 두드러지는 아이러니컬한 대질은 이 가족 개개인과 6·25라는 참담한 상황 사이의 대응 관계 자체에서 드러난다. 말하자면 착하고 평화스런 한 가정이 잔혹하고도 살기에 찬 역사적 현장에 던져졌을 때에 빚어지는 충격적인 언밸런스가 곧 그것이다. 즉 평화와 전쟁 사이의, 선의와 악의 사이의, 행복과 불행 사이의 대질인 것이다. 그 양자의 돌발적인 부딪침에서 빚어지는 불꽃 튀기는 소용돌이, 바로 그것이 이 작품의 액션의 핵심인 것이다. 그 양자의 사이의 승부는 애당초 자명하다. 후자의 일방적인 유린에 의한 전자의 참담한 파멸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바로 그 점에 걸려 있다.

 

  물론 이 참혹한 사태 앞에 대응하는 개개인의 양상은 각기 다르다.

  아버지는 말하자면 시대 착오적인 낙천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러했듯이 이 돌발적인 사태에 대하여 이렇다 할 방도를 세우지 못한 채 일을 당한다. 게다가 설마 나야 어쩌랴 하는 천성적인 호인 기질도 작용한다. 이러한 아버지와 그 앞에 펼쳐지는 상황 사이의 대응 관계에서는 오히려 희화적인 분위기마저 감돈다. 이런 희화적인 분위기의 밑바닥에서 이 작품의 내면의 비극성은 더욱 절실한 양상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이런 효과는 어머니의 경우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머니는 평화 속에서 밖에는 살 수 없는 늙은 애기다. 객관 상황이 혹독해질수록 어머니는 더욱 정신없이 애기의 몸짓에로 기울어져 간다. 어머니 자신의 주체적인 자리에서 보면 더없는 비극이지만, 객관적인 자리에서 보면 또 말할 수 없는 희극이다 어머니는 말하자면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절실한 의미에서 비극적 상황 속에서 희극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비극성은 바로 이 점에서 빚어진다.

 

  그러나 충격적인 언밸런스에서 빚어진 비극의 당사자라는 점에서는 옥엽이나 이화도 마찬가지다.

  옥엽은 전형적인 규중(閨中)처녀다. 살림 속에서 삶의 전부를 호흡하며 살아가는 옥엽이야말로 평화의 표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잔혹한 전쟁은 한 가정의 부엌에까지 침입해 들어온 것이다 전쟁은 부엌에 있는 그녀조차도 역사의 현장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굴욕적인 노동(밥을 지어 바치는)을 감당해야 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던 것이다. 최후의 용감한 결단에 의하여 그 전쟁의 무리들을 뿌리치고 평화로운 자기 영역으로 되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중심 인물인 이화의 비극적 과정은 보다 다각적으로 얽혀 있다. 그녀는 우선 어느 정도 지식인이다. 지식인인 만큼 정신적인 갈등이 심하다 게다가 생사의 고비에 있는 지운(애인)의 일이 걱정스럽다. 지운이 당초부터 뚜렷한 자기 지표(자유의 투사로서의)를 행하고 있었는 데 반하여 이화는 그런 무슨 지표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그녀는 의사가 되어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지운과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을 뿐이다. 평화 속에 살고 있었고 그 속에서 살기만을 바랐을 뿐,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켜 나가는 문제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평화는 빼앗겼고, 이화는 전쟁 속에 말려들었다. 이화 역시 당면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그 전쟁에 협력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전쟁의 사슬은 좀처럼 이화가 탈출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화가 탈출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녀의 비극은 죽음으로 끝맺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6·25라는 민족적 비극을 한 가정의 구성원들이 치르게 되는 갖가지 피해의 양상을 펼쳐 보임으로써 비교적 다층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4·19 전후의 역사적 상황을 한 가정의 구성원들(매지 마누라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펼쳐 보이고 있는 <오늘과 내일>과 비슷한 계열에 서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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