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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관노탈놀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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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관노탈놀이

강릉단오제 때 행해지던 탈놀이. 우리 나라 가면극 전승의 주류를 이루는 산대도감 계통 극과는 그 계통을 달리하는 서낭제탈놀이의 하나이다.

서낭제에는 이 밖에도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있는데, 그것들은 제의적 연희의 성격을 갖고 있는 농촌형의 탈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농악대의 잡색놀이나 무의적(巫儀的)인 탈놀이와 함께 토착적인 탈놀이의 기원에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

강릉단오제는 음력 3월 20일에 신주(神酒)를 빚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4월 1일과 8일에 서낭당에의 헌주(獻酒)와 무악새신(巫樂賽神)이 있고, 14일 저녁에 대관령으로 출발하여 15일에 대관령국사서낭〔大關嶺國師城隍〕을 맞이하여 읍내의 대서낭당에 모시고, 27일에 다시 굿을 지낸 다음, 5월 1일부터 본제(本祭)로 들어간다.

〔내 용〕

관노탈놀이는 5월 1일의 본제부터 단오날까지 놀았다. 먼저 첫째 마당 장자마리 개시과장은 장자마리(일명 보쓴 놈)가 복면과 같은 탈을 쓰고 허리에는 대나무테를 두르고, 그 테에 말치〔海草〕와 색포(色布) 같은 것을 주렁주렁 달았으며, 청회색의 먹장삼을 입고 막대기를 들고 등장한다. 장자마리는 혼자 혹은 둘이서 춤을 추며, 장내를 돌면서 익살스럽게 춤추며 춤판을 정리한다.

둘째 마당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사랑과장으로, 양반광대가 머리에 관을 쓰고 청색 도포를 입고 긴 담뱃대를 물고 삼으로 만든 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등장한다.

그 때, 얼굴에 연지를 찍고 노랑저고리에 분홍치마를 입은 소매각시가 나오자, 양반광대가 희롱하다 결국 뜻이 맞아 함께 춤을 춘다.

셋째 마당은 시시딱딱이 훼방과장으로, 검붉고 험상궂은 탈을 쓴 시시딱딱이 둘이 나와 춤을 추며 소매각시를 끌고 간다. 그러자 양반이 크게 노하여 소매각시를 도로 끌고 온다. 소매각시가 양반의 오해와 분노에 당황하여, 양반의 긴 수염으로 목을 매어 죽는다. 시시딱딱이는 그때까지 둘레를 돌며 계속 춤을 추고 있다.

마지막 넷째 마당은 소매각시 소생과장으로, 양반이 소매각시를 용서하고, 소매각시가 소생한 것을 보고 출연자 모두와 동민도 함께 장내에 들어가 군무(群舞)를 하며 노는 것으로 끝난다.

이 탈놀이는 대사가 없는 묵극(默劇)이었다고도 하고, 또 다소의 재담이 있었다고도 한다. 일반 탈춤이 서민들의 울분과 양반들에 대한 반감을 풍자하고 있으나, 이 탈놀이는 연희자들이 원래 관노들이기 때문에 대담하게 양반을 조롱하고 모독하는 내용이 없으며, 따라서 대사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 황〕

그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광해군 때 허균J53417(許筠J53417)의 문집에 단오제를 구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노탈놀이의 기원 역시 조선 중기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리라 본다. 이 탈놀이는 관노들이 맡아서 한말까지 놀아왔으나, 민족항일기에 금지되어 전승이 끊기고 말았다.

그 뒤 196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때에 재연되었고, 1967년에 강릉단오제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뒤로 지금까지 단오제 때마다 연희되어 온다.

그러나 옛 연희자나 탈이 전해지지 않아, 탈놀이 자체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대학생들에 의해 그 명맥만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강릉단오제, 탈놀이 ≪참고문헌≫ 嶺東民俗志(崔喆, 通文館, 1972), 韓國의 假面劇(李杜鉉, 一志社, 197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

 

강원도 강릉지방에 전승되는 향토신제(鄕土神祭).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대관령서낭을 제사하며, 산로 안전(山路安全)과 풍작·풍어, 집안의 태평 등을 기원하는 제의이자 축제라고 할 수 있다. 단오굿·단양제(端陽祭)라고도 불리며, 단오날 행사로서는 가장 대표적인 행사이다.

음력 3월 20일부터 제사에 소용될 신주(神酒)를 빚는 데서 시작하여 단오 다음날인 5월 6일의 소제(燒祭)까지 약 50여 일이 걸리는 대대적인 행사이다. 단오제의 제사일정은 다음과 같다. 3월 20일 제사에 쓸 술을 담그고, 4월 1일을 초 단오(初端午), 4월 8일을 재 단오(再端午) 또는 2단오라 하여 헌주(獻酒)와 무악(巫樂)이 있다.

4월 14일은 서낭신을 모시기 위하여 강릉을 출발하여 송정(松亭)에서 야숙하고, 4월 15일 3단오날에는 대관령서낭과 산신께 제사하고 신목(神木)과 서낭을 모시고 돌아온다. 이때에 강릉사람들이 구산(邱山)서낭당까지 마중을 나와 횃불을 밝히고 함께 여서낭당에 와서 서낭내외를 합사(合祀:둘 이상의 혼령을 한 곳에 모아 제사함)시킨다.

4월 27은 4단오로 무당들에 의해서 굿이 행해진다. 5월 1일 5단오날은 본제가 시작되는 날로, 화개(花蓋)를 모시고 굿당으로 가서 굿과 관노가면극(官奴假面劇)을 행한다. 5월 4일은 6단오, 5일은 7단오로 무굿과 가면극이 있으며, 단오날을 본제날로 여기고 있다. 5월 6일은 8단오로 서낭신을 대관령국사서낭당으로 봉송하는 소제를 끝으로 약 50일 동안의 단오제는 막을 내린다.

본격적인 제의와 놀이는 5월 1일부터 시작되는데, 단오굿과 관노가면극을 중심으로 한 그네·씨름·줄다리기·윷놀이·궁도 등의 민속놀이와 각종 기념행사가 벌어진다. 이때 영동일대와 각지에서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드는데, 예나 다름없이 지금도 대성황을 이루어 강릉시가는 일년 중 가장 혼잡을 이룬다.

[역사 및 유래]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그 역사와 예전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편적인 기록이 전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문인 남효온(南孝溫)의 문집인 ≪추강냉화 秋江冷話≫(1477)에 의하면 영동민속에 매년 3·4·5월 중에 택일을 하여 무당들이 산신을 제사하는데, 3일 동안 큰 굿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추강냉화》의 기록은 반드시 단오제를 지칭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시기 중 5월이 포함되어 있고, 또 그 의식이 대관령서낭제의 진행과 비슷한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강릉단오제로 추정하게 한다. 또한,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 惺所覆螺藁≫(1611)에도 그가 1603년(선조 36)에 강릉에 가서 단오제를 구경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대관령산신이 김유신(金庾信)이라는 이속(吏屬 : 관아에 딸린 구슬아치)의 말을 인용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도 단오제가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기록으로 강릉의 옛날 향토지인 ≪임영지 臨瀛誌≫를 취사(取舍)해서 경종 때 간행한 ≪강릉지 江陵誌≫ 권2 풍속 조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劍)을 정벌하기 위해서 남정(南征)하였을 때 꿈에 중과 속인 두 신〔僧俗二神〕이 병졸을 이끌고 와서 구해주었다. 꿈이 깨어서 싸웠는데 이기게 되어 대관령산신에게 제사하고 치제(致祭)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이로 보건대 대관령산신은 10세기에 이미 있었으며 당시에 왕이 제사한 것으로 보아 큰 신제(神祭)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런데 허균의 ≪성소부부고≫나 현지주민의 이야기에 따르면, 대관령산신은 김유신이며 서낭신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김유신이 명주(溟州 : 지금의 강릉)에 유학한 일이 있고 대관령산신에게서 검술을 배웠으며 죽어서 산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나 ≪임영지≫의 ‘승속이신’ 등의 내용을 보면, 대관령산신은 김유신 하나가 아니고 그 이상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만, 대관령산신으로 중요하게 간주되는 것은 김유신이다. 이에 대하여 ‘승(僧)’은 국사 범일(梵日)이고 ‘속(俗)’은 김유신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한편, 강릉단오제의 유래를 알려주는 것으로, 단오제의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대관령국사서낭〔大關嶺國師城隍〕과 그 부인인 대관령국사여서낭〔大關嶺國師女城隍〕에 대한 구전설화가 있다. 대관령국사서낭은 범일 국사가 죽어서 된 것이고, 대관령국사여서낭은 국사서낭과 혼배(魂配)한 정씨녀(鄭氏女)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대관령국사서낭설화 : 옛날 학산리(鶴山里:지금의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마을에 한 처녀가 굴산사(屈山寺) 앞에 있는 석천(石泉)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물 속에 해가 떠 있었다. 물을 버리고 다시 떴으나 여전히 해가 있으므로 이상하게 여기면서 물을 마셨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처녀에게 태기가 있어 마침내 아이를 낳았는데 아비 없는 자식이라 하여 마을 뒷산 학바위 밑에 버렸다.

산모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이튿날 그곳에 다시 가보니 뜻밖에도 학과 산짐승들이 모여 젖을 먹이고 날개로 가려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 믿고 아이를 데려와 키웠다. 아이가 자라자 당시의 서울인 경주로 보내어 공부시켰는데 나중에 국사가 되었다. 해가 뜬 물을 마시고 태어났다고 하여 ‘범일국사(泛日國師)’라 부르게 되었다.

범일 국사는 학산에 돌아와 자기의 지팡이를 던져 꽂힌 곳에 절을 지어 심복사(尋福寺)라 하였다. 범일 국사는 강릉에 살았는데, 때마침 난리가 나서 대관령에서 술법을 써서 적을 격퇴시켰다. 불법을 전파시키고 고향을 지킨 그는 죽어서 대관령의 서낭신이 되었다고 한다.

② 대관령국사여서낭설화 : 옛날 강릉에 정씨가 살았는데, 나이 찬 딸이 있었다. 하루는 꿈에 대관령서낭신이 나타나 장가오겠다고 청하여 왔으나 정씨는 서낭신에게 딸을 줄 수가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정씨 집 딸이 곱게 단장하고 마루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업고 달아났다. 처녀를 업고 간 호랑이는 산신이 보낸 사자였으며, 서낭신은 처녀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다.

딸을 잃은 정씨 집에서는 야단이 났고 대관령서낭당에 찾아가 보니 처녀는 서낭과 함께 서 있는데, 이미 죽어서 혼은 없고 몸만 비석처럼 서 있었다. 정씨는 하는 수 없이 화공을 불러 딸의 화상을 그려 붙이니 처녀의 몸이 비로소 떨어졌다. 호랑이가 처녀를 업어가서 대관령서낭과 혼배(혼인)한 날이 4월 15일이므로, 지금도 4월 15일에 두 신을 함께 모셔 제사지낸다.

이 두 전설은 서로 연관성이 있는데, 강릉단오제가 대관령서낭을 제사하는 굿이며 그 주신인 서낭은 비범한 탄생을 가진 국사 범일이고 대관령서낭신이 부부신이라는 것을 설명한 것으로, 이 두 사람을 함께 제사지내는 데서 강릉의 단오제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앞의 문헌기록과 함께 범일이 통일신라 말인 9세기 사람이고, 민족항일기까지 대관령국사서낭신을 모셔 단오제를 지냈던 큰서낭당(현재는 없음)에 모신 12신위 중 신라시대 인물이 많은 점으로 보아 이 단오제는 적어도 9세기 이전에 기원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준비 및 절차]

단오제가 다가오면 제관을 선정하고 제물을 마련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준비와 정성이 따르는데, 현재는 강릉단오제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어서 단오제와 이에 수반되는 일체의 대회운영을 맡고 있다. 제관으로 초헌관 (初獻官)은 강릉시장, 아헌관(亞獻官)은 명주군수(현재는 강릉시의회의장), 종헌관(終獻官)은 경찰서장이 관례적으로 담당한다.

그리고 따로 제물을 장만하는 도가(都家)가 있다. 제비(祭費)는 위토(位土:수확을 亨祀 등 일정한 목적에 쓰기 위하여 장만한 논과 밭)가 있어 여기에서 얻은 소출(所出)로 충당하지만 워낙 규모가 큰 굿이기 때문에 기부금과 걸립(乞粒)에서 얻은 전곡(錢穀)으로 충당한다. 걸립 때 각 가정에서는 자진해서 곡식이나 돈을 성의껏 내어놓아 대관령서낭에 대한 신앙심을 보여준다.

제물은 제한을 받지 않으며, 메·탕·술·과일·쇠고기·어물 등으로 소박한 편이다. 제일(祭日) 며칠 전부터 제사에 직접 관여하는 제관·임원·무격(巫覡) 등은 부정(不淨)이 없도록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언행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제사가 끝날 때까지 먼 곳 출입을 삼가고 근신하는 등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 마을사람들도 근신해서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고, 부정한 것을 보거나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리고 제사를 지낼 신당(神堂)과 우물·도가 등에는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서 부정을 막는다. 제물을 다루는 사람은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입에 밤이나 백지조각을 문다. 말을 하면 침이 튀어 음식에 들어갈 수도 있고, 또 부정한 말을 주고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금기(禁忌)는 여러 가지이고 엄격하였다.

금기를 깨면 개인은 벌을 받고, 임원·제관·무격이 금기를 어기면 제사를 지내도 효험이 없으며 오히려 서낭의 노여움을 사서 재앙이 있다는 것이다. 제사일정과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③ 음력 3월 20일 : 단오제에 사용할 술(일명 조라)을 담근다. 관에서 급여한 쌀이나 제전(祭田)에서 농사를 지은 정(淨)한 쌀 한 말과 누룩을 섞어서, 옛날에는 호장(戶長)·부사(府使)·수노(首奴)·서낭맹〔城隍盲:남자 首巫覡〕·내무녀(內巫女)가 목욕재계하고 술단지를 봉해서 호장청의 하방(下房)에 둔다. 근래에는 도가가 제물을 준비하므로 도가의 집에서 준비한다. 이를 ‘신주근양(神酒謹釀)’이라고 한다.

④ 4월 1일 : 초 단오(初端午)라고 하는데, 이날부터 계산해서 7일 만에 단오가 한번씩 들고, 5월 1일에 5단오가 되면 다음은 3일 뒤인 5월 4일이 6단오, 5월 5일은 7단오, 5월 6일은 8단오라고 한다. 초 단오날에는 사시(巳時)에 큰서낭당에 헌주하고 무악을 연주한다. 초헌은 호장, 아헌은 부사, 삼헌은 수노, 종헌은 서낭지기가 했다. 헌주가 끝나면 무격들이 〈산유가 山遊歌〉를 부르고 굿을 한다. 관노들은 〈태평가〉를 부르는데, 오후 미시(未時)에 끝난다.

⑤ 4월 8일 : 2단오에 해당하며 불탄일(佛誕日)이다. 초 단오와 마찬가지로 큰서낭당에서 헌주하고 굿을 한다.

⑥ 4월 14일 : 저녁을 먹고 대관령서낭을 모시러 대관령으로 출발한다. 행렬의 선두에는 16명의 악공(樂工)들이 연주를 하고 호장·부사·수노·도사령과 남녀무격 50∼60명이 따르는데, 옛날에는 모두 말을 탔으며 수백 명의 마을사람들이 뒤를 따라 장관을 이루었다 한다. 행렬이 구산에 도착하면 마을사람들이 밤참을 준비하였다가 일행을 대접한다. 산중턱 송정(松亭)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조반을 지어먹은 다음 닭이 울면 길을 떠나 국사서낭당에 도착한다.

⑦ 4월 15일 : 국사서낭과 서낭당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대관령산신당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때 바로 옆에 있는 칠성당과 우물에서 용왕굿을 한다. 소지(燒紙)를 마지막으로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하고 가지고 간 물건은 모두 버린다. 서낭당 근처에서 무녀가 굿을 하고 빌면 많은 나무 가운데에서 한 나무가 신들린 것처럼 흔들리는데, 그 나무를 신칼로 베어 신간목(神竿木)으로 삼아 제사가 끝날 때까지 제당 안에 세워둔다.

제사가 끝난 다음 신간목을 앞세우고 하산하는데, 구산 쯤에 이르면 저녁때가 되므로 강릉에서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을 나온다. 일행은 국사서낭부인의 생가에 잠시 들른 다음 여서낭당에 가서 서낭내외를 합사한다.

⑧ 4월 27일: 4단오날로 무당들에 의해서 굿이 거행된다.

⑨ 5월 1일: 5단오날로 화개(花蓋)를 만들고 관노들에 의하여 탈놀이가 시작된다. 이날부터 단오굿이 본격적으로 행해지는데, 5일인 단오날까지 굿당에서 매일 무당들의 굿과 관노의 탈놀이가 계속된다. 화개는 ‘○대’라 부르기도 하는데 부사청(府司廳)에서 만들었다. 대나무를 직경 6척(1.8m) 정도로 둥글게 하고 여기에 나무껍질을 감아 무겁고 튼튼하게 해서 30척(9m)쯤 되는 장대 위에 세워 수레바퀴를 달아맨 것처럼 만든다. 여기에 20척(6m)쯤 되는 오색 천을 늘어뜨리고 장대도 오색 천으로 감아 곱게 만든다. 화개의 무게는 4, 5관(15∼20㎏)이 되므로 여간한 장사가 아니면 들 수 없다.

⑩ 5월 5일 : 단오날은 대제(大祭)의 날이다. 대관령에서 국사서낭을 모실 때처럼 악대·임원·무격·마을사람들의 행렬이 있다. 옛날에는 화개를 앞세우고 큰서낭당을 출발해서 약국서낭〔藥局城隍〕·소서낭〔素城隍〕을 거쳐 시장·전세청(田稅廳)·대동청(大同廳)·사창청(司倉廳)에서 굿을 하고 화개는 여서낭당에, 신간은 큰서낭당에 봉안했다. 단오날에는 사당주변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쳐서 부정을 제거한다.

⑪ 5월 6일 : 큰서낭당의 뒤뜰에서 소제가 있다. 단오제를 위해서 만든 신간과 화개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불에 태우는 의식이다. 그 동안 여서낭당에 모셨던 국사서낭을 대관령의 국사서낭당으로 다시 모셔 가는 봉송(奉送)을 마치면 근 50일에 걸쳐 있었던 단오제가 모두 끝나게 된다.

대관령에서 국사서낭을 모셔다가 여서낭당에 모신 다음날인 4월 16일부터 5월 6일 제사가 끝날 때까지 21일 동안 날마다 새벽에 호장·부사·수노·서낭지기·무녀는 국사서낭에게 문안을 드리며, 주민들은 직접 큰서낭에 가서 치성을 드리거나 단골무당을 시켜 치성을 드리고 소원을 빈다. 상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번창을 빌고, 농가에서는 풍년이 들기를 빌며, 어부들은 만선해서 풍어를 이루기를 빈다.

일반적으로는 가내안정과 질병 없이 건강하며, 또 대관령을 자주 왕래하는 사람들은 산로(山路)의 안전을 빌었다. 원래는 큰서낭당에서 주로 행사하였지만 도시 발전에 따라 큰서낭당 자리에 측후소가 들어앉게 되어 서낭당이 없어졌으므로 근래에는 남대천(南大川)의 넓은 백사장에 임시로 제당을 가설하고 여기에서 굿과 탈놀이를 하고 있다. 그래서 단오제 때가 되면 수만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므로 장터처럼 혼잡하고 강변일대에는 난장이 벌어지기도 한다.

[단오굿]

강릉단오제는 제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유교식 의례와 무격에 의하여 거행되는 굿이 복합되어 있다. 그러나 단오제를 ‘단오굿’이라고 부를 만큼 무당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굿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그 핵심이 되고 있다.

특히 단오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5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는 무당굿이 한창이다. 굿거리는 열두거리로 행해졌다고 하나 굿의 거리 수나 순서는 경우에 따라 다소 달라지기도 한다. 근래에는 15∼19거리로 행해지는데, 그 절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부정굿 : 굿의 맨 처음에 행하는 거리로 본거리에 들어가 모든 신을 맞이하기 전에 불결하고 부정한 것을 정화시켜 제장을 깨끗이 하는 굿이다. 무당이 무가를 부르고 신칼로 바가지의 물을 찍어 제장 주변에 뿌린다.

②축원굿 : 합사한 서낭내외를 5월 3일 단오장(남대천 가설서낭당)에 모시는 거리로, 대관령국사서낭을 4월 15일 대관령에 모시러 간 데서부터 여성황사·정씨가지(鄭氏家址, 현 최씨댁)에 모신 경위를 가창하여, 서낭내외가 화합하고 재수와 복을 베풀어달라는 축원을 한다.

③ 조상굿 : 조상신을 위하는 거리로, 아기조상이든 어른조상이든 조상신을 청하여 재수를 빌고 자손을 잘 돌보아달라고 축원한다.

④ 세존굿(당고마기) : ‘시준굿’ 또는 ‘중굿’이라고도 하는데, 자손의 번성과 복을 가져다주는 삼신 ‘당고마기(당금아기)’를 위하는 굿거리이다. 무녀는 고깔을 쓰고 염주를 걸고 장삼을 입고 나와 장편 서사무가(敍事巫歌)인 〈당고마기노래〉를 부른다.

⑤ 성주굿 : 집을 관장하는 성주신을 모시는 거리로 〈성주풀이〉를 가창한다. 무녀가 쾌자를 입고 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나와 집을 짓는 과정, 세간을 장만하고 집치장을 해나가는 모습 등을 무가를 통하여 묘사한다. 팔도민요들이 중간에 삽입되고 유흥성이 고조된다.

⑥ 군웅굿 : 군웅은 무신(武神)으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액을 막아준다. 김유신을 비롯하여 중국의 조자룡·제갈량 등 뭇 장수와 오방신장 등을 청배무가(請陪巫歌)로써 모셔 강릉의 안녕함과 질서를 기원한 뒤 놋대야를 입에 무는 행위를 함으로써 장수의 위엄과 영력(영적인 힘)을 보여준다. 또한 가축의 번식을 빌기도 한다.

⑦ 심청굿 : 인간의 눈병을 막아주고 눈이 밝아지기를 기원하는 거리로 〈심청전〉의 내용과 같은 서사무가가 장시간 구연된다.

⑧ 칠성굿 :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을 위하는 거리이다.

⑨ 지신굿 : 지신(地神)을 모시는 굿으로 자손과 가업이 번창할 것을 기원한다.

⑩ 손님굿 : 손님이라는 두신(痘神)에게 마마를 예방하고 건강을 비는 굿거리이다.

⑪ 제면굿(계면굿) : 무당신인 ‘제면할머니’에 대한 굿으로 무조(巫祖)의 내력을 밝히는 서사무가가 구연된다. 단골들을 위한 굿이며 골계적인 내용이 많다.

꽃노래굿: 여러 명의 무녀들이 제사상을 장식하였던 지화(紙花)를 들고 나와 윤무(輪舞)하며 온갖 꽃을 찬양하는 꽃노래를 부른다.

⑫ 등노래굿 : 제장에 달아놓은 큰 호개등을 떼어내려 이것을 무녀 여러 명이 들고 돌리면서 등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⑬ 대맞이굿 : 5일간 단오장에 모셨던 국사서낭을 환송하는 거리로, 대관령에서 내려와 있는 동안 정성을 잘 받으셨는지 신의(神意)를 묻고 응답을 받아서 안도와 번영을 스스로 굳혀나가자는 의도에서 이루어진다. 서낭대를 앞으로 모셔내고 제관은 위패를 들고 국사서낭님이 오셔서 그간 반가이 맞으시고 즐거이 보셨는지 물으면 대가 흔들린다. 그러면 내년 이맘때까지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타고 대관령 아흔 아홉 굽이 올라가시라고 하고 자손들의 부귀공명과 태평함을 축원한다.

⑭ 환우굿 : 맨 마지막 제차로 국사서낭신이 단오장에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의식이다. 대관령에 올라가 깨끗한 장소를 골라 단오제에 사용된 신간·꽃·호개등·위패 등 모든 것을 불태우는데, 불이 다 탈 때까지 제관·무녀·일반인 등은 불길을 향하여 계속 절을 한다. 근래는 남대천 단오장 주변에서 한다.

이러한 15거리 외에 화해굿·청좌굿·산신굿(산신령굿)·용신굿 등이 첨가되기도 한다. 국사서낭당과 여국사서낭당에서의 굿은 부정굿·청좌굿·화해굿·축원굿의 제차만을 행한다. 단오제의 굿은 원래는 대대적인 것이었으나 근래에는 체육대회·궁술대회·씨름대회·민요경연대회·농악대회·백일장 등의 행사에 치중되어 경비가 많이 드는 무당들의 굿은 규모가 축소되었다.

[의 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강릉단오제는 고대 부족국가의 제천의식 또는 부락제(동제)의 잔형으로 해석되며, 우리 나라의 향토신제 중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규모나 축제의 분위기는 시장의 경기 부흥책으로 벌이던 난장굿의 성격을 띠고 있어 일종의 대형화된 별신굿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은산별신제나 동해안별신굿, 그밖에 부락제와 비교해볼 때 강릉단오제는 그 절차나 진행이 돋보이고 문화적 의의가 두드러진다. 그 의의는 첫째, 종교적 측면으로서 향토신앙을 통하여 전 주민(시민)이 화합하는 대동단결의 힘이 구현된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협동정신은 향토의식과 애향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전 주민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함께 참여하여 즐김으로써 진정한 축제의 구실을 한다. 둘째, 나날이 쇠퇴해 가는 전통문화의 현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전통문화의 가치가 보존적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와 더불어 생동하는 박진감에 있는 것인데, 이에 적절한 예가 강릉단오제이다. 셋째, 강릉단오제가 제시해준 문화의 복합양상과 그 창조적 계승방향이다. 유교·불교·무속의 복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있고, 그 구현이 시대의 상이(相異)에도 불구하고 적절히 계승되었다. 그밖에도 이 행사가 관 주도형에서 탈피하여 민간주도형으로 행하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시 위주의 행사가 아닌 향토주민들의 생활 속의 문화가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으며, 기·예능보유자로 김신묵(金信默 : 제관·도가)·김동하(金東夏:관노가면극)·차형원(車亨元 : 관노가면극)·장재인(張在仁:무녀)이 인정되었으나 사망하였고, 그 뒤 1976년 박용녀(朴龍女:무가), 1989년 신석남(申石南:무가), 1993년 권영하(權寧夏:관노가면극)가 인정되었으나 사망하였다. 현재 기예능 보유자로는 김진덕(金振悳 : 제관·도가, 1982년 인정)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秋江冷話, 惺所覆螺藁, 江陵誌, 臨瀛誌, 重要無形文化財指定資料-江陵端午祭-(任東權, 文化財管理局, 1966), 韓國詩歌의 民俗學的硏究(金善淵, 螢雪出版社, 1977), 重要無形文化財解說-놀이와 儀式篇-(文化公報部文化財管理局, 1985).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릉단오제 세계무형유산 등록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세계무형유산)으로 선정됐다.

문화재청은 유네스코 국제심사위원단이 21~24일 파리 소재 유네스코 본부에서 심사위원회를 열어 64개 신청 유산 중 강릉단오제를 비롯한 43개를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했다고 25일 밝혔다.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은 무형유산이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는 가치와 그 보존 필요성을 인식해 유네스코가 2001년 도입한 제도이다. 현재 모두 47건의 무형유산이 등록됐으며 한국은 2001년과 2003년 ‘종묘 및 종묘제례악’과 ‘판소리’가 각각 세계무형유산으로 선정된 바 있다. 강릉단오제는 매년 단옷날 전후로 강릉지방에서 열리는 전통축제로 강릉 남대천변의 단오장, 관노가면극, 단오굿, 씨름, 그네타기, 윷놀이 등이 50여일간 펼쳐진다.

문화재청은 “이번 강릉단오제의 세계유산 선정은 1~2차 연속 등재국으로서 다른 신청국가들의 형평성 제기, 중국의 단오제 공동 등재 시도 등 난관을 극복하고 이룬 성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밝혔다. 강릉시민들은 ‘천년 동안 소중하게 지켜온 강릉단오제가 이제 세계의 축제가 됐다’며 크게 반기고 있다.(출처 : 경향신문 : 2005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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