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일리어드6
by 송화은율필록테테스의 독화살
아이아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알게 된 그리스 병사들은 통곡했다. 온 해변이 다 시끄러울 정도였다. 오뒤세우스는 이런 말을 했다.
“트로이아 포로들이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나에게 주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지고 아이아스가 이겨 그 갑옷을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 그랬어도 우리 그리스 군이 이렇게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되었을 것인가?” 그리스 군은 아이아스를 화장한 뒤 땅에 묻고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슬퍼했듯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스 군사들은 비록 그들이 헥토르를 죽이고 아마조네스와 멤논의 검은 군대를 물리쳤으며 <트로이아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고는 하나, 너무 많은 장군들을 잃었기에 가까운 장래에 트로이아 성과 헬레네를 장악할 가능성은 십 년 전보다도 훨씬 적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절망에 빠진 그리스 장군들은 점쟁이 칼카스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 보았다. 칼카스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거기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들에게 말했다.
“렘노스 섬으로 가서 필록테테스를 불로 오십시오. 신들의 말씀에 따르면 필록테테스 없이는 트로이아 성을 장악할 수 없습니다.”
필록테테스가 그리스의 렘노스 섬에 남게 되었던 경위는 이렇다. 십 년 전 트로이아를 향해 가던 그리스 선단은 물을 싣기 위해 렘노스 섬에 상륙했다. 그런데 그리스 군에 속해 있던 필록테테스는 그 섬의 산중에 살고 있던 독을 뿜는 용과 싸우게 됐다. 그 독 있는 용은 그의 발을 물어 버렸다. 필록테테스가 결국 용을 쳐죽이기는 했지만 상처는 낫지 않았다. 독물이 뚝뚝 듣는 상처는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가 어찌나 비명을 질러댔던지 다른 병사들이 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리스 군사들은 필록테테스를 불쌍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꽉 막힌 공간이나 다름 없는 배에다 그를 실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한적한 섬에다 두고 트로이아로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십 년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야, 신들은 칼카스를 통하여 필록테테스 없이는 트로이아 성을 장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디오메데스와 오뒤세우스는 그를 데리러 갔다. 적막한 무인도에 상륙한 그들의 귀에 고통과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질러대는 필록테테스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두 장군은 그 소리나는 곳을 따라가다가 해변 바위 틈에 있는 동굴을 찾아 냈다.
필록테테스는 비참한 모습을 하고 거기에 있었다. 몸은 뼈만 남아 앙상했고 수염과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있었으며 눈은 머리 깊숙이 쑥 들어가 있었다. 그는 활과 화살을 든 채 바닷가 깃털 더미 위에 누워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동굴 바닥도 그가 잡아먹은 무수한 새들의 뼈와 깃털투성이였다. 그의 상처난 발에서는 여전히 독물이 뚝뚝 듣고 있었다.
오뒤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다가오는 것을 본 그는, 활을 들고 화살에다 자기 상처에서 듣는 독을 묻혀 시위에 걸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손을 흔들어 적의가 없다는 뜻을 전하자 그제서야 활과 화살을 바닥에 놓고 두 사람을 맞았다.
두 사람은 바위에 앉아 그 섬으로 온 까닭을 얘기했다. 그리고는 함께 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상처를 낫게 해주고, 섬에다 버려 두고 왔던 일도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의 말을 들고 난 필록테테스는 함께 트로이아로 가겠다고 했다.
노잡이들이 필록테테스를 들것에다 실어 배로 옮겼다. 오뒤세우스는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를 주워 불을 피우고, 거기에다 데운 물로 필록테테스의 상처를 씻어 주었다. 그런 다음 기름을 바르고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 주기까지 했다. 그가 십 년 동안이나 막보지 못한 음식과 포도주를 대접 하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을 트로이아를 향해 뱃길에 올랐다.
바람이 좋아서 검은 선단이 정박해 잇는 바다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뒤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필로테테스를 아가멤논의 막사로 데려갔다. 그는 대왕으로부터는 환영을, 마카온으로부터는 정성이 지극히 담긴 치료를 받았다. 아가멤논은 그에게 시중들 여자종 여럿과 스무필릐 혈통 좋은말, 그리고 청동 그릇들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여종들을 시켜 그의 머리를 감기고 손질하고 빅기게 했다. 이렇게 해서 힘을 되찾은 필록테테스는 한시 바삐 활을 들고 싸움터로 나가 트로이아 군을 향해 독화살을 쏘고 싶어했다.
그리스 장군들은 촉에 독을 묻히는 것은 의롭지 못한 짓으로 여겼다. 그러나 필로테테스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십 년이라는 긴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익힌 것은 죽이는 일뿐이오. 나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면 모르지만, 만일 받고 싶다면 내 방식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오."
그리스 군이 트로이아 성벽 밑에서 싸우고 있을 때였다. 파리스는 성벽 위에 서서 아래쪽을 향해 활울 쏘아대고 있었다. 필록테테스가 파리스를 보고는 이렇게 놀렸다.
"보아하니 활솜씨도 있고 아킬레우스 장군을 죽였을 정도의 화살도 있는 모양인데, 너만 있는줄 아느냐? 나에게도 활솜씨가 있고 헤라클레스로부터 대물림받은 활도 갖고 있다."
그리고는 재빠른 손질로 화살 하나를 시위에 걸어 쏘아 보냈다. 시위가 부르르 떨고 있을 동안 화살은 제 갈 길로 날아갔다. 화살은 파리스의 손등을 살짝 긁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심장이 세 번 뛸 동안 독은 그의 몸에 퍼졌다. 견줄 데 없는 고통이 불길처럼 파리스의 몸 속으로 퍼져갔다. 파리스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트로이아 군이 파리스를 성 안으로 들쳐 업고 들어 갔다. 의사들은 밤새도록 그를 치료했다. 그러나 그의 고통을 줄 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새벽이 되자 파리스가 소리쳤다.
"이제 내게 남은 희망은 단 하나뿐이다. 나를 이다 산 기슭에 사는 요정 오이노네에게 데려다다오."
트로이아 병사들이 그를 들것에다 싣고 가파른 숲길을 올랐다. 파리스 자신이 애인을 만나러 자주 오가던 길. 그러나 십 년 세월이 흐르도록 한 번도 다시 오가지 못했던 길이었다. 파리스를 들것에 실은 병사들은 마침내 오이노네의 동굴 앞에 이르었다. 안에서는 삼나무가 불에 타면서 내는 달콤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오이노네가 나짓하게 부르는 슬픈 노랫소리도 들려 왔다.
파리스가 오이노네의 이름을 불렀다. 오이노네는 그 소리를 듣고 동굴 입구로 나왔다. 모닥불이 지펴져 있기는 했지만 밖에서 보면 여전히 어두운 동굴을 배경으로 서 있는 오이노네 마치 달처럼 창백했다.
병사들이 들것을 내리자 파리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오이노네의 무릎에다 손을 대고는 도와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오이노네는 치막자락을 걷어 쥐고 몸을 사렸다.
파리스가 사정했다.
"오이네노, 나를 미워하지 마시오. 나를 모르는 척하지 말아 주오, 이 고통은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한 고통이 아니오. 그대를 혼자 버려 두고 간 것은 나의 본뜻이 아니었소.,운명의 여신>모이라이가 나를 헬레네에게로 이끈 것이라오. 헬레네의 얼굴을 보기 전에 그대 품안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를 불쌍하게 여겨 주오. 한때 우리가 나누던 사랑을 생각해서라도 여기 그대의 발치에서, 고통 속에 죽게 버려 두지는 말아 주오."
그러나 오이노네는 나지막하면서도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헬레네에게 반해 나를 떠난 뒤로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헬레네는 나보다 아름다울터이니 분명히 나보다 더 잘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헬레네에게 가서 고통을 없애 달라고 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동굴로 들어가 모닥불 가에 앉아 울었다. 한동안 그렇게 울고 나니 화가 풀렸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 동굴 입구로 나갔다. 그녀는 파리스가 당연히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없었다. 파리스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자 들것 든 병사들에게 어두운 숲 속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죽어가는 짐승이 그런 곳을 찾아들어간다고 했던가. 오이노네가 여전히 동굴 입구에 서서 눈으로 그의 행방을 가늠하는 그 시각에 파리스의 숨은 이미 끊어지고 말았다.
들것 든 병사들은 서둘러 그의 시신을 떡갈나무 숲을 지나 성 안으로 옮겨 놓았다. 그의 어머니가 통곡하자 다른 여자들도 곡을 하기 시작했다. 헬레네는 헥토르가 죽었을 때 그랬듯이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만가를 불렀다. 사람들은 화장단을 높게 쌓고 그의 시신을 그 위에 올린 다음 불을 붙였다. 불길은 어둠을 뚫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오이노네는 그런 줄도 모르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면서 사냥꾼에게 새끼를 빼앗긴 암사자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다녔다. 그러다 멀리 성 안에서 오르는 화장단의 불길을 보게 되었다. 오이노네는 그 불길의 의미를 너무나도 달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서야 파리스가 온전하게 자기의 것이 되었다는 생각에서 울었다. 살아 생전에는 다른 여자에게 빼앗겼지만 죽어서나마 서로 만나 헤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오이노네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파른 떡갈나무 숲과 요정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숲 속을 내달아 평원에 다다랐다 평원에는 수많은 트로이아 백성들이 화장단의 불길 주위에 모여 있었다.
오이노네는 신부처럼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는 바른 발길로 군중 사이를 지나, 높이 솟는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는 불길의 혀가 별이라도 핥을 듯이 낼름거리는 속으로 뛰어들러 파리스의 시신 옆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두 팔로 그의 시신을 안았다.
불길은 그 둘을 함께 태웠다. 불길이 사그러지자 사람들은 뒤섞인 재를 모아 황금 술잔에 단고, 돌로 만든 조그만 방에 그 잔을 넣고는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그로부터 긴 세월이 플렀다. 숲의 요정들은 무덤 위에다 두 그루의 찔레장미를 심었다. 이 찔레장미는 자라면서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서로의 가지를 상대 쪽으로 꼬아 나갔다. 그래서 두 개의 가지가 아닌, 마치 하나의 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거대한 트로이 목마
파리스가 죽었지만 트로이아 왕가에서는 헬레네를 메델라오스에게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가면 비참한 죽음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트로이아 왕가로서는 헬레네를 그런 지결으로 몰아넣는 불명예스러운 일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파리스의 형제 중 하나인 데이포보스에게 헬레에를 그의 집에 두고 보살피게 했다.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서 그리스 군은 트로이아 성에다 또 한 차례의 결정적인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트로이아 군은 튼튼한 성볍 뒤에서 화살을 소나기처럼 퍼부어 그들을 격퇴했다. 필로테테스의 독화살도 소용 없었다. 독화살이 날아갈 때마다 트로이아 군이 돌로 된 성벽이나 나무 문 뒤에 숨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병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면 트로이아 병사들은 큰 돌을 떨어뜨려, 그리스 병사를 성벽에서 떨어뜨리거나 머리가 부숴지게 했다.
밤이 되자 그리스 군은 선단이 있는 곳으로 철수했다. 아가멤논은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소집을 받고 달려온 장군은 얼마 되지 않아삳. 늘 그렇듯이 그들은 점쟁이 칼카스가 지혜를 짜내어 주기를 기다렸다.
칼카스가 회의장 한복판에 서서 말했다.
"나는 매가 비둘기를 좇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둘기는 매의 추격에 쫓기다가 성벽 밑 바위 틈에 숨더군요. 매는 꽤 오랫동안 비둘기를 따라 그 틈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더군요. 그래서 매는 위로 날아올라 역시 바위 틈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어리석은 비둘기가 태양 아래로 날아 나왔고, 매는 바로 그 순간 비둘기를 덮쳐서 죽였습니다. 우리 그리스 군은 바로 이 매를 본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린 힘만으로는 트로이아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꾀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아테나 여신이 오뒤세우스의 마음에 기발한 생각의 씨를 뿌려 주었다. 원래 오뒤세우스는 꾀가 많아서 별명이 꾀주머니였다. 그는 일어나서 그리스 장군들에게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병사들을 시켜 목마를 만드는 겁니다. 뱃속이 텅 빈, 거대한 나무 말을 만든단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군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들을 뽑아 완전 무장하게 하고 그 뱃속에 숨겨 놓 고서, 나머지 군대는 선단에 나누어 타고 고향으로 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아주 가는 것은 아니고 테네도스 섬 해안까지만 가서 그 섬 뒤에 숨어서 기다리는 겁니다.
트로이아 군은 칼카스가 말한 비둘기처럼 성밖으로 나오겠지요. 우리 그리스 군의 진영이 정말 텅 비었는지 궁금할 테니까요. 그러다가 거대한 목마를 보고는 우리가 왜 이런 목마 를 만들었는지, 왜 거기에다 두고 떠났는지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트로이아 병사들 이 목마를 너무 자세히 관찰하게 하면 안됩니다. 혹 이 목마를 해코지하거나 뱃속에 숨어 있는 우리특공대를 찾아내면 안 되니까요. 그러니 우리 그리스 인 하나를 뒤에다 숨겨 두기로 합시다. 꾀 많고 용감한 사람이어야 하되 트로이아 병사들에게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뒤에 남겨 놓고는 트로이아 인들의 눈에 뛰게 합니다. 트로이아 병사들은 그를 사로잡고는 묻습니다. 그러면 그는 그리스인들이 마침내 희망을 버리고 고향으로 배를 띄운 까닭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덧붙여<트로이아의 보물>을 훔쳐 아테나 여신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 한 그리스인들이, 여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거대한 목마를 만들어 고향으로 가는 뱃길에 폭풍을 만나지 않게 해줄 것을 빌었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 말을 믿는다면 트로이아 인들은 이 목마를 성안으로 끌어 들여 아테나 여신의 신정에 전리품으로 바치겠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한밤중에 목마의 뱃속에 숨어 있던 특공대원들 이 밖으로 나와 성문을 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때쯤이면 선단은 테네도스에서 돌아와 트로이아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칼카스가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 때 마침 새 두 마리가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좋은 징조라고 생각한 칼카스는 일이 계획대로 잘 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리스 전군에서 가장 솜씨 있는 목수이자 권투 선수이기도 한 에페이오스가 자기를 도울 병사들을 뽑아 일을 시작했다.
다음 날 그리스 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사들이 손에 손에 도끼를 들고 이다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찍었다. 이렇게 찍어 낸 참나무, 소나무, 단풍나무를 노새 등에 실어 그리스 진영으로 운반했다. 에페이오스와 그 부하들은 나무를 갈라 판자를 만들기도 하고 다듬기도 했다. 사흘만에 거대한 목마가 완성되었다. 늠름한 갈기는 아가멤논의 막사 지붕보다 높았다. 텅 빈배에는 스무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캄캄한 공간이 있었다.
오뒤세우스는 뒤에 남아 있다가 트로이아 군에 붙잡히는 역할을 맡을 지원자를 찾았다.
그러자 시논이라고 하는 젊은 병사가 일어나 자기가 그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그는 최전선에서는 싸워 본 적이 없는 병사였다(만일에 최전선에서 싸웠다면 트로이아 병사들에게 낯이 익었을 테고 그렇게 되면 곤란했다.) 그러나 용기만은 어떤 최전선 전투 경험자에 못지 않았다.
네스토르가 첫 번째로 목마의 뱃속에 숨는 특공대원이 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나이가 많아서 모두가 말렸다. 아가멤논도 두 번째로 지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선단을 지휘해서 테네도스 섬으로 가야할 사람도 그였고, 되돌아와서 연합군을 지휘해야 할 사람도 그였다. 따라서 아가멤논도 곤란했다. 결국 메널라오스, 오뒤세우스, 디오메데스, 그리고 목마를 만든 목수 에페이오스가 병사들을 데리고 목마 뱃속에 숨기로 했다.
그보다 조금 전에 메넬라오스가 오뒤세우스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만일에 트로이아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면(일단 뱃속으로 들어가기로 한 이상 기어이 함락시키지 못하면 그들 손에 죽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다스리는 도시 국가 중 하나를 주겠다면서 서로 가까이 살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게는 험한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왕국 이타카 섬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트로이아를 함락하고 우리 둘 다 살아 남는다면 그 때 내가 소원을 말하지요. 그대는 땅이나 금덩어리를 주지 않고도, 사람을 주지 않고도 내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을 겁니다."
메넬라오스는 그 때가 오면 그 소원이 무엇이 되었든 기꺼이 들어주겠노라고 제우스신의 광명에 대고 맹세했다.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하고 가서 갑옷을 챙겨 입고는 목마의 뱃속으로 들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뱃속에 숨을 특공대원들은 부드럽고 두꺼운 옷으로 몸을 감쌌다. 그래야 목마가 끌려갈 때 갑옷이 덜그럭거리는 바람에 들통나는 일이 없을 터였다. 특공대원들이 어둠 속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릴 동안 밖에서는 병사들이 막사에다 불을 지르고 배를 띄웠다. 선단은 테네도스 섬을 향해 나아갔다.
성벽에서 망을 보던 트로이아 병사들은 그리스 진영의 막사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연기와 바다로 나아가는 선단을 보았다. 그들은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성문을 열고 해변으로 다가가 보았다. 그러나 혹시 그리스 군사들이 속임수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완전 무장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과연 목재로 지어진 막사들은 불타고 있었고 진영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굄목과 모래톱의 용골 자국만이 선단이 있었던 자리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새 나무로 지어져 보릿대처럼 누런 빛깔인 목마는 바로 그 폐허가 된다시피 한 그리스 진영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프로아모스 왕과 왕가의 귀족들은 그 크기와 지어진 솜씨에 혀를 내두르면서 왜 그런 목마를 지었는지 궁금해했다. 마음 한 켠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제사를 담당하는 계급이 아주 놓은 사제 라오코온도 두 아들을 데리고 그 자리에 나와 있었다.
그는 목마에 다가서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 그걸 만지지 마시오. 그리스 놈들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고 갔을 리 만무합니다. 틀림없이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을 겁니다. 저 속에 병사들을 숨겨 놓았다가 적당한 때 나 오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우리를 해치도록 사악한 마법을 걸어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가 창을 들어 둥그런 목마의 배를 향해 던졌다. 창이 꽂히는 순간 속이 빈 목마의 배에서 터엉 소리가 났다. 트로이아 병사들이 어쩌면 그를 도와 도끼로 배를 갈라 볼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였다. 병사들이 시논을 끌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
병사들은 프리아모스 왕 앞에다 시논의 무릎을 꿇리면서 말했다.
"갈대밭에 숨어 있는 걸 끌고 왔습니다. 발바닥을 불로 지지면 이 나무 괴물의 비밀을 털어 놓을 것입니다."
그러자 시논이 외쳤다.
"나같이 비참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처음에는 내 백성이 내가 미워 죽이려 하더니 이번에는 트로이아 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프로아모스 왕이 병사에게 시논을 일으켜 세우라는 눈짓을 보내면서 물었다.
"말하라. 무슨 까닭으로 너는 네 백성의 미움을 샀으며 모두들 떠났는데 무슨 연유로 여기에 남게 되었는가. 네가 제대로 말하면 우리로부터는 미움을 안 받게 될지도 모르지 않느냐?"
시논이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하, 물으시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팔라메데스의 친구이자 갑옷 담당입니다. 그런데 사악한 오뒤세우스가 평소에 자기를 별로 안 좋게 보던 팔라메데스를 죽였습니다. 저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이 오뒤세우스의 귀에 들어갔던지 나까지 죽이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점쟁이 칼카스가......"
시논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믿지 않으실 텐데 얘기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죽여주십시오. 아가멤논과 오뒤세우스도 제가 죽기를 바랄 것입니다. 저의 목을 자르시면 메넬라오스는 고맙다는 인사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트로이아 사람들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프로아모스 왕은 얘기를 계속하라고 명했다. 시논은 울면서 부들부들 떨며 얘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스 장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신들이 맡긴 뜻이 어떠한지 알아보았습니다. 그 뜻에 따르면 바람이 순조롭고 바닷가 고요하기를 바란다면 그리스 인 중 하나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군들이 칼카스에게 누구를 희생시켰으면 좋겠느냐고 묻자 칼카스는 저, 시논을 찍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꽁꽁 묶이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 동안 그리스 병사들은 아테나 여신에게 평화를 비는 제물로 거대한 목마를 만들었고요. 저는 밧줄을 끊고 도망쳐, 선단이 바다로 나갈 때까지 갈대밭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는 죽어 있을 것입니다."
시논이 어찌나 입담 좋게 얘기를 했던지 트로이아 병사들은 그 말을 믿고 손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 주고는 뛸 듯이 좋아했다. 목마가 자기들에게 해코지를 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트로이아의 보물>인 팔라디온을 도난 당한 아테나 신전에 제물로 바치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로이아 병사들이 목마를 끌어들이려는 찰나 끔직한 일이 벌어졌다. 거대한 두 마리의 바다뱀이 아침 안개를 가르고 나와 해변으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두 마리의 뱀은 진홍빛 볏을 세운 채 몸을 꾸불텅거리면서 물을 가르고 오는데, 어찌나 기세 등등한지 뒤로는 노 30개 짜리 겔리온 배가 일으키는 것과 맞먹을 만한 물결이 일었다. 사람들은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채로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돌아서서 냅다 뛰었다.
두 마리의 괴물은 해변으로 올라왔다. 눈은 바다의 불길로 번쩍거렸고 벌어진 입에서는 끝이 갈라진 혀가 낼름거리고 있었다. 괴물은 식식거리면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그런데 바로 이 두 마리의 괴물이 라오코온의 두 아들을 덮쳐 똬리를 옥죄기 시작했다. 아버지 라오코온이 두 아들을 구하러 달려갔지만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다. 괴물은 터지고 일그러진 두 아들을 몸을 버려 두고 라오코온에게 달려들었다.
얼이 빠진 트로이아 병사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창 같은 것을 던질 수 있었을 때는, 이미 두 괴물이 라오코온을 감고서 목과 몸을 옥죄고 있을 즈음이었다. 라오코온은 하늘이라도 찢을 듯한 비명을 한 차례 지르고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생명이 그의 육신을 떠난 것이었다.
그제서야 두 마리의 바다뱀은 평원을 지나 트로이아 성으로 들어갔다. 아테나 신전의 여사 제들이 그 뱀을 보았다. 뱀은 대리석 바닥을 지나고 거대한 여신상의 방패 뒤로 들어가더니 여신의 발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사라졌다.
프리아모스 왕 일행은 알아보지도 못하게 터지고 찌그러진 라오코온과 두 아들의 시체 앞에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두 마리의 뱀이 분노한 아테나 여신을 대신해서, 여신의 거룩한 목마에 창을 던진 라오코온에게 복수했다고 생각했다. 여신의 화를 가라앉히려면 그 거대한 제물을 성안으로 들여 신전으로 모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은 거대한 목마에 밧줄을 걸고 흡사 배를 진수시키듯이 목마의 앞에다 굴림 대를 달아 굴렸다. 밧줄을 당기는 조가 편성되었다. 시논도 밧줄을 당기는 조에 들어 있었다. 목마는 울퉁불퉁 한 평원을 지나 성의 정문으로 통하는 큰길로 들어섰다.
트로이아 백성들이 목마를 맞으러 정문 앞 큰길로 몰려 나왔다. 아이들, 처녀들 할 것 없이 삼으로 꼰 밧줄에 매달려 밧줄 끌어당기는 것을 도왔다. 앞일을 미리 아는 능력이 있는 프리아모스 왕의 딸 카산드라는,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순간부터 목마는 트로이아의 재앙이 될 것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고함소리와 신을 찬양하는 노래와 춤에 파묻힌 채, 목마는 마지막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리고 오랜 전쟁이 남긴 돌무더기를 지났다. 물론 뱃속에 숨어 있는 특공대원들과 함께였다. 정문 위의 두 망대 사이를 지나고 가파른 길을 오르자 트로이아 성의 높은 지대에 자리잡은 성채, 아테나 신전의 안뜰이었다.
몰락하는 트로이아 성
온종일 트로이아 사람들은 기쁨에 겨워 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했다. 그들은 다음 날의 거룩한 잔치를 준비하느라고 신전을 떡갈나무와 은매화 가지로 치장했다. 준비가 거의 끝나자 어둠이 내렸다. 사람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날이 뜨기 전이었다. 어둠에 묻힌 채 그리스 선단이 테네도스 섬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노잡이들은 소리도 없이 노를 젖고 있었다.
비좁은 목마의 뱃속에 다닥다닥 붙은 채 웅크리고 있던 우뒤세우스 일행은 잔뜩 긴장한 채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논도 신전의 벽 위에서 몹시 긴장된 표정으로 바다 쪽을 바라보면서 아가멤논 대왕이 지휘하는 선단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단에서 배들이 해변에 접근했다는 신호를 보내면 시논은 목마의 뱃속에 숨어 있는 특공대원들에게 그것을 알리기로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다음이라서 트로이아는 고요에 묻혀 있었다.
마침내 신호가 왔다. 바다 저쪽의 어둠 속에서 불빛이 반짝거렸다. 시논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 위에서 뛰어내린 그는 목마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목마는 달이 떠오르면서 은빛으로 빛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목마의 배 밑에 숨어 있는 특공대원들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에페이오스가 목마의 소나무 빗장을 열자 뚜껑 문이 열렸다. 거기에서 밧줄이 내려왔고 그 밧줄을 타고 메넬라오스와 오뒤세우스 그리고 디오메데스를 비롯한 특공대원들이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들은 무장한 유령들처럼 소리 없이 신전 앞에서 성의 정문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는 문지기들을 죽이고, 물밀 듯이 밀려오는 그리스 전우들을 위해 성문을 활짝 열었다. 잠든 트로이아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병사들로 이루어진 검은 물결은 곧 불꽃의 강이 되었다. 횃대를 하나씩 든 병사들이 정문 초소에서 불을 옮겨 붙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횃불을 들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다.
잠을 자고 있다가 엉겁결에 무장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리스 군을 맞은 트로이아 군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어둠 속으로 아이들과 여자들의 비명이 퍼져 나갔다. 방패로 내려치고 칼로 베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불길은 삽시간에 성 전채로 번져 갔다. 흡사 바람을 받고 번지는 들불 같았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그 자리에 없었다. 목마의 배에서 내려온 뒤로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우토메돈을 비롯한 한 무리의 군사를 거느린 디오메데스는 왕의 침실을 찾아 내었다. 바깥을 지키던 경호병들은 순식간에 몰살을 당했다. 그들은 지붕으로도 횃불을 던져 올렸다. 지붕 위에서 경호병들이 묵직한 기왓장을 벗겨 아래로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방패로 가린 채 그들은 도끼로 문을 두들겼다. 빗장이 부서져 내렸다. 청동 돌쩌귀가 부서지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스 군은 안마당과 침실과 기둥사이를 누비면서 앞을 가로막는 경호병들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였다.
어떤 빗장도 어떤 칸막이도 어떤 칼도 그들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이 복도 저 복도로 몰려다니던 그들은 마침내 가장 안쪽 뜰 앞에 이르렀다. 뜰에는 가정의 수호신을 위한 제단이 있고, 그 위로는 우람한 월계수 고목이 붉게 물든 하늘을 가리기라도 하듯 제단을 덮고 있었다.
왕비와 왕자들은 바로 그 안뜰에 한 덩어리로 있었다. 흡사 폭풍우 몰아치는 날 둥우리에 오구구 모여 있는 비둘기 떼 같았다. 하지만 그 안뜰도 그들의 피난처는 되지 못했다. 제단 앞에 꿇어앉아 신들에게 기도하고 있던 노왕 프리아모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길과 전쟁의 광기에 취한 젊은 병사 하나가 프리아모스 왕의 한 수염을 잡고 제단 계단으로 끌어내리고는 단칼에 왕의 몸을 갈랐다. 그의 못에서 용솟음친 피는, 그가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곤 하던 제단을 적셨다.
그리스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왕가의 여자들을 끌어 내었다.
성 안은 온통 불바다였다. 사방에서 죽고 죽이는 소기가 들려 왔다. 벽이라는 벽, 지붕이라는 지붕은 모조리 내려앉았다. 십여 년이나 버티어 온 막강하던 트로이아 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헬레네는 왕가의 여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메넬라오스는 불붙은 나무 조각들이 비오듯 쏟아지는 왕궁 속을 샅샅이 뒤지다 데이포보스의 집을 찾아갔다. 프리아모스 왕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왕자가 데이포보스인만큼 헬레네가 거기에 있을 것으로 짐작했던 것이었다.
그 집 앞에 이르는 순간 메넬라오스는 집을 제대로 찾았다는 것을 알았다. 데이포보스는 가슴에 창을 맞은 채 입구에 쓰러져 있었다. 데이포보스의 피 웅덩이에서 시작된 핏빛 발자국이 현관을 지나 건너쪽의 어두운 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그 발자국을 따라갔다. 가다가 그는 오뒤세우스를 보게 되었다. 오뒤세우스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중앙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나 있는 창으로는 지붕을 태우는 불길이 보였다. 그의 팔목은 검붉은 피로 젖어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칼을 뽑아 든 채 문 앞에 서서 물었다.
"헬레네는 어디에 있소? 만일에 그대가 헬레네를 숨기고 있다면‥‥‥."
오뒤세우스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오늘 아침 그대는 내게 맹세했소. 내가 요구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주겠다고 말이오. 그것이 무엇이든."
"그럼 요구하시오. 그러면 그것은 그대 것이 될 것이오. 나는 맹세를 어기는 사람이 아니오. 지금이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기는 하오만‥‥‥."
오뒤세우스가 말했다.
"나는 <예쁜 뺨> 헬레네의 목숨을 요구하오. 나는 이 목숨을,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례로 헬레네에게 돌려줄 것이오. 내가 <트로이아의 보물>을 찾아 이 성으로 들어왔을 때 헬레네는 내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소."
그 큰 방 안에 오랫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벽 저쪽에서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어서 더욱 무시무시한 침묵이었다. 그 때 헬레네가 옷자락을 모아 쥐고 숨어 있던 구석 자리에서 앞으로 나섰다. 헬레네는 메넬라오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금발이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헬레네는 아무 말 없이 두 손으로 내밀어 메넬라오스의 무릎을 어루만졌다.
메넬라오스는 선 채로 헬레네를 내려다보면서 자기를 배신하고 파리스에게 가던 일, 집을 비우고 자식을 버리고 떠나던 일을 떠올렸다. 오뒤세우스에게 했던 약속만 아니라면 단칼에 죽였을 터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뒤세우스에게 한 약속이 있었다. 그 약속 때문에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메넬라오스는 여전히 선 채로 헬레네를 내려다보면서 파리스가 오기 전에 서로 나누었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의 마음 속에서 연민과 사랑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가 뽑아 들고 있던 칼이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몸을 구부리고는 헬레네를 일으켜 세웠다. 헬레네의 하얀 팔이, 불타는 트로이아의 연기 때문에 연방 기침을 해대는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새벽이 왔다. 트로이아는 재가 되어 있었다. 아테나의 신전도 거대한 목마도 재가 되어 있었다. 그리스 병사들은 금과 은, 상아와 보석을 나누어 가졌다. 프리아모스 왕은 왕가 수호신의 제단 앞에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리스 병사들 손에 죽음을 당한 트로이아 병사들의 시체는 거리에 쌓인 채로 개들과 독수리 떼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이아의 여자들은 선단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새 주인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안드로마케가 등을 떠밀리면서 뮈르미돈의 새 주인이 기다리는 배에 오르고 있을 즈음, 헥토르의 아들은 이미 성의 망대 밑에 떨어진 채 죽어 있었다. 절망을 느낀 안드로마케가 던졌던 것이었다. 카산드라 공주는 등을 떠밀리면서 아가멤논의 배에 올랐다. 불화의 여신이 한 알의 사과를 던진 이래, 그 모든 불화의 씨앗 노릇을 해왔던 헬레네만이 지아비 메넬라오스의 배로 모셔졌다. 노예로서 등을 떠밀린 것이 아니라 왕비로 모셔진 것이었다.
오랜 포위 공격전은 이렇게 해서 끝이 났다. 싱그러운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그리스 대선단은 얕은 물길로 나섰다. 노잡이들은 흥겨움에 젖은 채 노를 저었다. 그들의 뒤에 남은 것은 물떼새의 울음 소리와 여전히 연기가 솟는 트로이아의 폐허뿐이었다. 선단은 오래 전에 떠나온 고향 항구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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