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일리어드5
by 송화은율헥토르의 시신을 되찾아오다
신들은 테티스를 올림포스 산 꼭대기로 불러 올렸다. 그리고는 테티스에게 일렀다. "가서 아들에게 이르세요. 제우스 신을 비롯한 올리뮤ㅗ스의 신들은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체를 다루는 것에 화가 났다고요. 헥토르의 시체를 그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에게 돌려 주라고 하세요. 프리아모스 왕이 몸값을 알맞게 치를 테니까요."
아킬레우스는 어머니로부터 그 말을 들었다. 슬픔에 젖어 어떤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던 아킬레우스도 어머니의 말만은 다소곳이 들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신들은, 종종 신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무지개 여신 이리스를 프리아모스 왕에게 보냈다. 프리아모스 왕은 왕궁에서 머리에다 먼지와 재를 뿌린 채로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리스 여신은 프리아모스 왕에게 말했다.
"아킬레우스에게 가서 몸값을 낼 테니 아들의 시신을 돌려 달라고 하세요. 그러면 아킬레우스도 마다하지 않을 거예요."
늙은 프리아모스 왕은 보물 창고로 가서 향내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를 열고는 열두 벌의 비싼 예복, 열두 벌의 겉옷과 수놓인 웃옷을 꺼냈다. 열 개의 금덩어리, 번쩍거리는 황금 솥, 그리고 트리키아 백성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무척이나 아끼고 자랑스러워 하던 금술잔을 꺼내 그 옷더미 위에 놓았다.
프리아모스 왕은 남아 있는 두 아들 파리스와 데이포보스를 불렀다.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잇던 왕은 맏아들 헥토르가 죽었는데도 뻔뻔하게 살아 남아 있는 두 아들을 꾸짖고는, 수레를 한대 준비해 몸값으로 치를 물건을 거기에다 실으라고 명했다.
두 아들은 수레 위에다 몸값을 싣고 나귀를 비끄러맸다. 그러자 프리아모스 왕을 신들에게 기도를 하고 포도주를 제물로 올린 다음, 미리 준비되어 있던 전차에 올랐다. 왕은 수레 몰이와 전령 하나만을 데리고 정문을 빠져나가 어둠에 잠긴 평원으로 들어서서 선단 족으로 말을 몰았다.
프리아모스 왕은 알지 못했지만 나그네의 수호신인 헤르메스가 그의 옆에 붙어 있었다. 헤르메스 신은 그리스 군을 만날 때마다 날개 달린 지팡이로 툭툭 건드려 그들을 잠재웠다. 그래서 그리스 진영에서 노왕의 전차와 몸값 실은 수레를 본 병사는 하나도 없었다. 프리아모스 왕 일행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방어벽을 지나 이윽고 갈대 이엉으로 덮인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이르렀다. 프리아모스 왕은 전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아킬레우스의 부하들이 수레에서 몸값을 내리고 있을 동안 헤르메스 신은 가만히 올림포스로 돌아갔다.
아킬레우스는 막사 안에서 부하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프리아모스 왕은 아킬레우스왕자에게 다가가 발 밑에 무릎을 꿇고는 관습에 따라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헥토르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여럿 죽인 그 손이 프리아모스 왕에게는 진흥빛으로 보였다.
왕은 애원했다.
"늙은 나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신들의 뜻을 좇으시어 내 아들을 돌려주기 바라오. 장군의 아버님을 생각해 보시오. 늙으신 아버님도 아들을 멀리 떠나 보내고 나처럼 슬퍼하실 게 아니오? 하지만 그분에게는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이라도 있지 않소. 나를 불쌍하게 여겨 주오. 내 아들을 위해 나는 오늘 도저히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일을 했소. 내 아들들을 무수히 죽인 장군의 손에 입을 맞춘 일이 그것이오.?
아킬레우스는 멀리 있는 늙디늙은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도 프리아모스 왕처럼 머지 않아 슬픈 소식을 듣게 될 터였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 왕을 일으켜 세우고 다정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여안고 울었다. 프리아모스 왕은 아들을 생각하면서 울었고 아킬레우스는 자기 아버지와 파트로클로스를 생각하면서 울었다.
아킬레우스는 여종들에게 명하여 헥토르의 시체를 화장할 수 있도록 깨끗이 씻고, 프리아모스 왕이 가져온 겉옷 중에서도 가장 좋은 옷으로 잘 싸도록 했다. 헥토르의 시체가 깨끗한 겉옷에 싸여 빈 수레에 실리자 그는 음식과 술을 내어오게 했다.두 사람은 함께 먹고 마셨다. 프리아모스 왕은 그런 다음에야 몸값을 치르고, 되찾을 아들의 시신과 어두운 평원을 가로질러 트로이아 성으로 돌어갔다.
온 트로이아 백성들이 성문으로 나와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했다. 헥토르의 시신은 생전에 살던 집으로 옮겨졌다. 여자들이 시신의 주위로 모여들어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곡을 하고 만가를 불렀다.
안드로마케는 침대 앞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부짖었다.
"아직 이렇게 젊으신데 어째서 아내는 집 지키는 과부로, 아들은 아비 없는 자식으로 남겨 놓고 떠나십니까? 떠나시려면 집에서 떠나셔야지요. 저에게 손을 내미시든지 그게 안 되면 유언이라도 몇 마디 하고 가셔야지요. 어차피 울면서 보내야 할 긴 세월, 그래야 밤낮으로 떠올리기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으로 어머니 헤쿠바가 통곡하면서 말했다.
"헥토르, 그 많은 아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아. 살아 있을 때 그토록 신들의 사랑을 받더니, 그원수의 전차에 매달려 그렇게 끌려 다녔는데도 터진 데 멍든 데 하나 없는 것을 보니 아직도 신들의 사랑을 받는 모양이구나. 아, 네 목숨을 앗아간 붉은 꽃 한 송이 같은 상처 자국이 하나 있을 뿐, 너는 잠을 자고 있는 것 같구나."
세 번째로 검은 상복 차림의 헬레나가 그 흰 팔을 흔들면서 통곡했다.
"헥토르여, 트로이아 왕가의 왕자들 중 내 마음에 가장 가깝던 분이시여, 파리스가 나를 이 곳에 데려온 이후로, 진작에 죽었어야 했던 나에게 거친 말 한마디 퉁명스러운 말 한 마디 안하시던 분이시여, 모두가 나의 소행을 질타할 때도 따뜻한 가슴과 부드러운 말씨로 원망을 자제하던 분이시여. 아, 나에게 화 있으라. 나에게 화 있으라. 이제 이 트로이아에는 나를 벗으로 여기는 사람이 없어지고 말았구나.……."
프리아모스 왕은 부하들에게 황소를 수레에다 매고 화장단 쌓을 장작을 실어오게 했다. 그리고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장례식을 위해 열하루 동안의 휴전을 약속한 만큼 그리스 군의 공격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트로이아 군사는 황소 수레를 끌고 산으로 올라가 아흐레동안이나 장작을 베어 내려 성벽 밖에다 거대한 화장단을 쌓았다. 그리고는 열흘째되는 날 헥토르의 시신을 화장단에 올리고 불을 붙였다.
불길이 가라앉자 트로이아 왕족들은 울면서 헥토르의 재와 뼈조각을 주워 모아 보랏빛 천에 다 쌌다. 그런 다음 이것을 다시 금상자에 넣어 미리 파둔 구덩이에 묻고 그 위를 돌로 쌓았다. 왕족들은 장례 절차를 따르면서 사방을 살피며 몹시 조급하게 굴었다. 아킬레우스가 약속한 열하루가 거위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례를 마치고 성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관습에 따라 큰 잔치를 열었다.
<말을 길들이는 자>로도 불리던 헥토르의 장례식은 이렇게 끝이 났다.
사라진 트로이아의 보물
헥토르의 장례식을 위한 휴전이 끝났지만 트로이아 성 포위 공격전은 소강 상태로 들어갔다. 십 년 동안 계속되어 온 상태와 비슷했다. 아킬레우스도 전투에 의욕을 잃은 것 같았고 트로이아 군도 사령관을 잃은 참이라서 성문을 나와 평원으로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트로이아 군은 사실 자신들을 지원하러 오는 새 연합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맞이할 부대는 새벽의 신 에오스의 아들인 멤논 왕이 지휘하는 남쪽 나라 군대와, 아마조네스라고 불리는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막강한 전투 부대였다. 따라서 트로이아 군은 성 안에서 조용히 그들을 기다리고 싶어했다.
트로이아의 높은 성체에 위치한 아테나 신전에 오래 전 하늘에서 떨어진 아테나 여신의 방패 비슷한 거룩한 보물이 있다는 사실은, 트로이아 연합군은 물론이고 그리스 연합군도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람들은 그 보물을 <팔라디온>, 혹은 <트로이아에 행운을 가져다 주는 보물>이라고 불렀다. 트로이아 백성들은 그 보물이 거기에 있는 한, 잿빛 눈의 여신이 그들을 도와 적군으로부터 트로이아를 지켜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트로이아 백성들은 밤낮으로 그것을 지키고 그 보물이 거기에 있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힘과 위안을 얻고는 했다.
오뒤세우스는 트로이아 성 한복판에 있는 경비가 삼엄한 산전에서 트로이아의 보물을 훔쳐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되면 트로이아 백성들은 보물이 사라진 것을 나쁜 징조로 받아들이고 사기를 잃게 될 터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하면 그 보물을 훔쳐낼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가 계획을 하나 세웠다.
델로스 섬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 중의 하나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재주가 있고 또 하나는 돌을 떡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진흙을 올리브 기름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다고 했다. 당시 그리스 연합군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공급해 주는 포에니키아 상인들에게 금으로 그 값을 지불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즈음은 금이 딸리고 있을 때였다.
오뒤세우스는 대왕 아가멤논에게 한 달만 말미를 주면 배를 타고 델로스로 가서 세공주의 뜻을 물어버고, 만일에 함께 가겠다면 데리고 오겠노라고 말했다. 마침 전투도 소강 상태에 접어든 즈음이어서 아가멤논은 그렇게 하라고 쉬게 허락해 주었다. 오뒤세우스는 한 달 안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오십 명의 노잡이가 노를 젓는 겔리온 선에 올라 먼 바다로 나아갔다.
바로 다음 날 그리스 진영에 웬 거렁뱅이 하나가 나타났다. 그 거렁뱅이가 구부정한 몸을 이끌고 디오메데스의 막사로 와서는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디오메데스는 빵 조각과 살코기가 조금 남은 뼈를 던져 주었다. 거렁뱅이가 굶주린 개처럼 뼈까지 빨아먹는 것을 보고 디오메데스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어떻게 이 곳에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거렁뱅이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저는 이집트 인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신세를 망친 크레아 해적이랍니다. 여러 해 동안 이집트의 채석장에서 일하다 거대한 바윗덩어리 사이세 숨어 채석장을 탈출했습니다. 당시 그 바윗덩어리는 뗏목에 실려서 나일 강을 따라 강변의 신전 공사장으로 운반되고 있었지요. 채 석장을 탈출한 저는 포에니키아 장삿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이 배가 트로이아 남쪽 해안에서 석장을 탈출한 저는 포에니키아 장삿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이 배가 트로이아 남쪽 해안에서 파선하고 말았습니다. 부서진 널빤지 조각에 붙어 해안으로 올라왔는데 살아 남은 사람은 저 밖에 없었습니다."
거렁뱅이의 말을 다 듣고 난 디오메데스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싶어 그에게 깔개 하나를 던져주고 막사 앞에서 잘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다음 날부터 늙은 거렁뱅이는 온 막사를 다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한편 병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가 가는 곳에는 꼭 입씨름이 벌어지고 했다. 어느 장군에게, 혹은 장군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험담할 거리가 있으면 이 거렁뱅이는 어떻게 알아 내었는지 그것을 진영에다 퍼뜨리고는 했다. 그래서 아가멤논은 몽둥이로 그를 두들겨 주었고 디오메데스는 엉덩이를 걷어찼으며, 이도메네오스는 자기 할아버지 험담을 퍼뜨리는 이 거렁뱅이를 창자루로 흠씬 두들겨 때려 주었다.
결국 거렁뱅이는 네스토르의 막사에서 금술잔을 훔쳐 내기까지 했다. 그것은 두 개의 손잡이 위에 각각 비둘기가 새겨진 아름다운 술잔이었다. 술잔이 거렁뱅이의 지저분한 주머니에서 발견되는 순간, 그리스 군은 입을 보아 이 거렁뱅이를 채찍으로 매우 쳐서 진영 밖으로 쫓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젊은 전사들 몇몇이 낄낄 웃으면서 거렁뱅이를 평원으로 끌고 나갔다. 나간 김에 아주 멀리까지 가다보니 마침내 트로이아 성문 바로 앞까지 끌고 갔다. 무리를 이끌던 네스토르의 아들 트라쉬메데스는 거렁뱅이의 멱살을 잡은 채 성문안의 트로이아 군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우리는 이제 이 뻔뻔스러운 거렁뱅이에게 질리고 말았다. 그래서 채찍 맛을 좀 보이려고 한다. 불쌍해 보이면 너희들이 거두어도 좋다. 너희가 거두지 않는다면 평원을 돌아다니다 굶어죽고 말겠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만일 되돌아온다면 눈알을 뽑고 팔에서 약병을 꺼내 바로 옆의 대리석 바닥에다 놓았다. 막상 여사제가 다가오자 그는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여사제가 오뒤세우스의 옆을 지나는 순간, 등잔불빛이 조그맣고 예쁜 약병 위에서 일렁거렸다. 여사제는 허리를 굽혀 약병을 집고는 그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약병은 마개가 조금 열려 있었다. 그 약병에서 풍겨나오는 향내는 여사제가 고향에서 맡던 꽃향기와 비슷했다.
여사제는 마개를 열어 냄새를 맡아 보고는 혀끝으로 끈적끈적한 그 약을 맛보았다. 이제까지 여사제는 그렇게 달콤한 것을 맛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너무 여러 차례 약병이 비도록 맛본 것이 탈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여사제는 마개를 닫고 병을 있던 자리에 가만히 내려놓고는 다시 기도문을 흥얼거렸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졸음이 여사제에게 밀려왔다. 여사제는 제단 앞에 쓰러지면서 깊고깊은 잠 속으로 그대로 골아떨어졌다. 여사제가 들고 있던 등잔이 대리석에 떨어지는 순간, 불이 꺼졌다. 신전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그제서야 오뒤세우스는 약병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나 바닥에 잠든 사람들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 제단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어둠 속을 더듬어 <트로이아의 보물>을 확인한 뒤, 그것을 집어 주머니 속에 있던 그 날 구걸한 빵부스러기 밑에 감추었다. 그리고 원래 보물이 있던 자리에는 미리 검은 흙으로 만든 가짜 보물을 놓아 두었다. 그는 다음에야 자는 사람 사이를 기어 처음 누워 있던 자리에 돌아와 신전 돌기둥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 때를 기다렸다. 자던 사람들이 일어나고 신전의 문이 열리자 그는 다름 사람들에 섞여 신전을 나왔다.
이른 아침이어서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뒤세우스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되도록 음침한 곳만 찾아서 걸었다. 그렇게 걸어서 그가 간 곳은 트로이아 성의 산 쪽으로 나 있는, 그리스 진영과 반대편인 성의 동쪽 문 앞이었다. 그는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트로이아에서는 빵르 충분하게 동냥질했으니 다른 도시로 가보겠다고 말했다. 병사들은 웃으면서 트로이아보다 더 넉넉한 도시로 가기를 바란다며 성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이다 산의 숲으로 통하는 마찻길로 들어섰다. 숲이 시작되는 곳에 이르럿을 때, 트로이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거리에 온 것을 확인한 오뒤세우스는 그 길에서 벗어나 숲 그늘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어둠이 밀려오고 서늘한 밤 공기에 한기가 느껴질 때까지 푹 잤다.
잠에서 깨어난 오뒤세우스는 주머리를 비우고는 전날 구걸한 빵을 먹었다(시장했던 데다가, 그리스 진영까지 가려면 꽤 먼 거리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시원한 산골짜기의 개울물에 다 몸을 씻은 그는 헬레네가 준 옷을 입은 다음 칼을 차고 신전에서 훔친 팔라디온, <트로이아의 보물>을 가슴에 품었다. 그런 뒤에야 개울물의 숲이 울창한 쪽 둑을 따라 걸어, 크산토스 강 어귀에 다다랐다.
이윽고 그가 이른 곳은 그
리스 진영의 맨 끝에 있는 초소였다. 초소를 지키던 병사들은 횃불을 들이대 자기들 앞에 있는 사람이 오뒤세우스 장군인 것을 확인하고는 함성을 질렀다. 그러면서 병사들은 델로스로 떠난 배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오뒤세우스가 나타난 걸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자 오뒤세우스는 멀미가 나서 일단 배를 해변에 대게 했으며 부하들이 배를 점검할 동안 자신의 진영의 일이 궁금해서 걸어오게 되었노라고 둘러대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보초를 잘 설 것을 당부하고는 아가멤논의 막사로 갔다. 대와 아가멤논은 막사로 장군들을 벌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장군들 역시 오뒤세우스가 온 것을 알고는 환호성을 올렸다. 아가멤논은 그에게 물을 포도주로, 돌을 떡으로, 진흙을 올리브 기름으로 바꾼다는 델로스 공주들은 데리고 왔으냐고 물었다.
오뒤세우스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러나 대신 우리에게 훨씬 더 귀하게 여겨질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옷 속에서 <트로이아의 보물>을 꺼내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네스토르의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상처난 어깨를 보여 주었다.
"자네, 앞으로 거렁뱅이를 쫓을 때 너무 심한 매질은 하지 않는게 좋아."
그 말에 장군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장군들에게 <트로이아의 보물>은 승리의 조짐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황소 열 마리를 잡아 제우스 신께 제사를 지냈다.
한편 트로이아 성 안에서는 보물이 없어진 것을 알고는 난리가 났다. 백성들은 충격과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많은 트로이아 백성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고 믿게 되었다.
아마조네스 여군 부대의 입성
그즈음 파리스는 아마조네스 부대를 트로이아로 안내하고 있었다. 아마조네스 족은 머나먼 테르모돈 강가에 사는, 여자 군인만으로 이루어진 부족이었다. 그들은 비록 여자들이긴 했지만,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남자들 이상으로 어찌나 잘 싸우는지, 그들을 전쟁의 신 아레스의 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아마조네스 족의 젊은 여왕 펜테실레이아는 사냥터에서 사슴을 향해 던진 창이 빗나가는 바람에 엉뚱하게도 동생 히폴뤼타를 죽인 일이 있었다. 가장 사랑하던 동생이었던 만큼 이 일로 인한 펠테실레이아의 슬픔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 후부터 펜테실레이아는 인생의 낙을 잃었다. 그녀에게 희망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구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왕은 여자들로만 구성된 경호 부대를 거느리고 깊은 숲과 넓은 강가에 숨어 살다가, 트로이아 성의 방어전을 지원하기 위해 트로이아로 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깊은 숲길과 높은 산길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아는 파리스의 안내를 받았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트로이아에 이를 수 있었다. 오뒤세우스도 아마조네스 문제에 관한 한 입을 다물겠다고 한 헬레네와의 약속을 지켰으므로, 도중에 아마조네스를 노리고 숨어 있는 그리스 군도 없었다.
입성하는 아마조네스 부대를 맞기 위해 성문 앞에 몰려 나와 있던 트로이아 병사들은, 그들이 저희 전통에 따라 말을 타고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트로이아 같으면, 전차를 타고 들어오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별 무리 속의 달처럼 돋보이는, 처녀 병사들 속의 펜테실레이아 여왕에게 몰려들어 환호성을 질러댔다. 창을 흔드는 병사들도 있었고, 말발굽을 향해 꽃을 던지는 병사들도 있었으며 여왕의 발에 입을 맞추는 병사들도 있었다.
프로아모스 왕은 그 여군 부대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여왕에게는 금술잔과 수놓은 옷, 그리고 손잡이가 은으로 된 칼을 선물로 주었다. 여왕 펜테실레이아는 그 칼을 뽑아들고는 바로 이 칼로 아킬레우스를 쳐죽이겠노라고 맹세했다. 그 맹세를 들은 헥토르의 미망인 안드로마케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이렇게 속삭였다.
불쌍한 애송이 같으니라고……,헥토르도 그 일을 하지 못하고 흙 속에 묻혀 버렸는데, 너 같은 애송이가 어떻게할 수 있겠느냐?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펜테실레이아는 눈부신 갑옷을 입고 선물로 받은 새 칼을 찼다. 창과 튼튼한 방패를 들고 백마에 오른 펜테레이아는 열두 처녀 경호병과 트로이아 왕족들을 거느리고 트로이아 군의 선두에 섰다. 그리고는 그리스 진영과 바닷가에 정박 해있는 검은 선단 사이로 바람같이 공격해 들어갔다.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가 펜테실레이아가 오는 것을 본 병사들은 서로 이렇게 수근거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헥토르가 지휘햇던 트로이아 군을 이끌고 오는 저 장군은 누구인가?선두에서 전차 부대를 지휘하면서 달려오는 것을 보니 흡사 신 같지 않은가!
트로이아 평원은 그 전에도 여러 번 그랬듯이 무수한 양귀비 꽃이라도 핀 것처럼 다시 붉게 물들었다.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아마조네스 부대는 그리스 군 중에서도 가장 용감한 정예 부대를 만나 혹독한 값을 치렀다. 태양이 머리위를 채 지나가기도 전에 아마조네스 부대의 절반이 죽음을 당했다. 여왕이 더할 나위 없는 슬픔과 분노를 느낀 것은 당연했다. 부하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쫓긴 여왕은 그리스 전차 부대에 뛰어들었다. 그리스 전차병들은 산 속에서 암사자에 쫓기는 가축 무리처럼 흩어졌다. 여왕이 외쳤다.
너희들은 프리아모스 왕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다. 오늘이야 말로 트로이아가 그리스에 그 값을 물게 하는 날이다. 디오메데스, 아킬레우스, 아이아스려,그리스의 용장이라 불리는 이들이여, 나와서 내 창을 받아라!
여왕 펜테실레리아는 몇 차례나 트로이아 왕가의 군사들을 선두에 서서 그리스 군을 공격했다.얼마 남지않은 아마조네스의 병사들은 여왕 옆에서 여전히 경호병 노릇을 했다. 여왕의 지휘를 받는 트로이아 전차들은 시체 위를 덜컹거리면서 그리스 군 속을 누볐다.펜테실레이아 여왕은 흡사 검은 구름 사이로 보이는 번개처럼 동에 번쩍 서에서 번쩍했다. 그리스군은 다시 도랑 뒤로 밀려났다. 헥토르가 살아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트로이아 군속에서 횃불 든 병사들이 뛰어나와 검은 선단의 배에다 불을 지르려고 했다.
아킬레우으와 아이아스는 싸움이 시작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두 장군은 나름대로 트로이아 군에게 기습 공격을 감행하느라고 진영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여왕 펜테실레이아와 트로이아 군이 도랑을 건너는 것과 때를 같이 해서 진영으로 돌아온 두 장군은, 트로이아 군을 선단에서 떼어 놓기 위해 질풍처럼 군사들을 몰아쳤다. 아이아스는 아마조네스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바로 트로이아 군을 공격했다. 어칼레우스는 여왕을 공격하는 한편, 여와을 호위하고 있던 마지막 남은 다섯 처녀 경호병들을 순식간에 죽었다. 그토록 아껴오던 처녀 경호병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여왕은 두 그리스 장군을 향해 돌진해 왔다.
여왕이 아킬레우스를 향해 창을 던졌다. 하지만 창은 아킬레우스 방패에 맞으면서 땅바박에 떨어졌다. 여왕은 아이아스에게도 창을 던지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전쟁 신의 딸이다! 내 창 맛을 보아라!
그러나 그 창도 아이아스의 방패에 맞고 떨어졌다.아이아스와 아킬레우스가 껄껄걸 웃었다.
아킬레우스는 웃으면서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들지 못하는 창을 쳐들었다.여왕의 손이 칼집으로 가는 순간 아킬레우스가 창을 던졌다. 창은 여왕 펜테레이아의 구리 방패를 뚫고 가슴에 꽂혔다. 상처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콸콸콸 쏜아져 내렸다. 아킬레우스는 칼을 뽑아 이번에는 여왕의 백마를 베었다. 여왕과 말이 동시에 거꾸러지면서 숨을 놓았다.
펜테실레이아 여왕은 폭풍에 쓰러진 어린 포플라 나무처럼 먼지 구덩이에 널부러져 있었다. 투구도 벗겨져 있었다. 펜테실레이아 여왕의 시체를 둘러선 그리스 병사들은 머리카락을 풀고쓰러져 있는 여왕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놀라곤 했다. 아킬레우스는 슬픔과 동정을 느끼며 이미 숨이 끊어져 있는 여왕의 죽음을 애도했다.
여왕에 대해 비슷한 동정을 느끼고 있던 그리스군사들은 퇴각하는 트로이아 군을 더 이상 추격하려고도, 여왕과 처녀 경호병들의 갑옷을 벗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여왕과 처녀 경호병들의 주검을 관에 넣어 프리아모스 왕에게 보내 주기까지 했다.
전날 아마조네스를 위한 환영 잔치를 베풀어 주었던 프리아모스 왕은, 그들의 주검을 화장하고 그 재를 황금 관에 넣어 트로이아 왕들의 무덤에 묻어 주었다.
아킬레우스 전사하다
트로이아 장군과 왕자들, 그리고원로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프리아모스 왕도 함께 했던 그 자리에서 트로이아 인들은 멤논 왕이 올 때까지 성 안에서 방어만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멤논 왕이 에디오피아 군대를 이끌고 출발한 시점이 아마조네스가 출발한 시점과 비슷했던 만큼, 조만간 트로이아 지원군을 몰고 당도하리라 믿고 있었다. 트로이아 군에서 가장 냉정한 사람으로 알려진 폴뤼다마스는, 기다릴 것도 싸울 것도 없이 헬레네에게 올 때의 갑절쯤 되는 보석을 주어 메넬라오스에게 돌려 보내면 될 게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파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폴뤼다마스를 비겁자라고 소맃치면서 헬레네와 조금만 가까이 지내 보면 트로이아의 운명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을 자라고 비난했다.
트로이아 군은 평원에서 후퇴하고 성안에서 기다렸다. 드디어 멤논 왕이 도착했다. 파리스와 아킬레우스를 제외한다면 그만큼 풍채 좋은 사람은 트로이아 평원에 있을것 같지 않았다. 멤논 왕은 이만 빼면 흰 것이 하나도 없는 군대를 이끌고 왔다.에디오피아의 강렬한 태양에 그을려 병사들은 모두 새까맣게 되었다.
프리아모스 왕은 또 한차례 잔치를 베풀고는 커다란 금술잔에 포도주를 남실남실하게 따라 멤논 왕에게 건네 주었다. 멤논 왕은 그 포도주를 단숨에 마셨다. 그는 싸움에 대해 큰소리치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말을 했을 뿐이었다.
내가 만일에 훌륭한 장군이라면 싸움이 시작돼 봐야 드러날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은 일찍 자는 것이 좋습니다. 아침이면 싸워야 할 사람들이 잠을 안 자고 술 마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아침이 왔다. 멤논 왕은 새까만 군사들을 이끌고 평원으로 나갔다.만약 번쩍거리는 갑옷 차림의 아킬레우스가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 싸움에 지치지 않은 멤논의 군사들을 보는 순간 그리스 군사들의 사기는 많이 꺆여 버렸을 것이다.
멤논 왕은 그리스 군의 왼쪽날개를 공격했다. 그는 이 공격전과 방어전에서 네스토르의 아들인 안틸로코스와 맞붙었다. 멤논 왕이 이 젊은 왕자를 덮치는 기세는 흡사 검은 사자가 아기를 덮치는 것과도 같았다. 안틸로코스가 가까운 옛 왕릉 앞에 서있던 비석을 뽑아 멤논에게 던졌다. 비석에 머리를 맞은 멤논 왕은 뒷걸음질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나 안틸로코스에게 창을 던졌다. 창은 가슴 가리개를 뚫고 안틸로코스의 가슴에 박혔다. 그는 이렇게 해서 아버지 네스토르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멤논 왕은 좌우를 무차별 공격하면서 안틸로코스의 주검에서 갑옷을 벗겨 내었다. 네스토르는 아들의 주검에 접근할 수 없게 되자 전차를 타고 아킬레우스에게 달려가, 안킬로코스의 주검이 욕을 보지 않게 도와 달라고 애원했다.
아킬레우스는 즉시 젊은 안킬로코스의 주검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이로써 멤논 왕과의 한 판 싸움은 피할수 없게 된 셈이었다. 멤논 왕은 아킬레우스를 맞기 위해 부하들을 뒤로 물렸다.멤논이 먼저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아킬레우스에게 던졌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방패로 바위를 막으면서 달려나와 멤논 왕의 어깨를 찔렀다.부상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이 시커먼 멤논 왕은 창을 던져 아킬레우스에게도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입게 했다.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으나 아킬레우스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팔에는 아무리 부상을 당해도 치명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킬레우스와 멤논 왕은 칼을 뽑아들고 맞붙었다.
무수한 칼질이 서로의 방패와 투구를 때렸다. 두 사람의 투구 위에 달린 긴 말총 볏은 칼에 잘려, 강풍에 떨어진 새처럼 땅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이 서로 노리는 것은 방패 가장 자리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무릎과, 방패와 투구끈 사이의 목줄이었다. 두 사람의 발 아래에서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이윽고 아킬레우스가 오랫동안 노리고 있던 곳을 먼저 재빨리 찌르고 들어갔다. 맴논은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아킬레우스의 청동 칼끝은 갈비뼈 사이로 파고 들었다. 맴논 왕이 땅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생명은 그의 몸을 떠났다.
아킬레우스는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진격했다. 온 그리스 군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스 군은 트로이아 군을 성의 정문까지 추격했다. 정문은 병사들와 전차들, 쫒고 쫒기는 자들로 복작거렸다. 그리스 군이 트로이아 성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면 기나긴 포위 공격전은 그것으로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성문 위에는 파리스가 있었다. 파리스는 닳고 닳은 활시위를 새 것으로 갈아 끼우고 있었다. 그는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골라 시위에 먹이고는, 성문을 밀고 들어오는 아킬레우스를 겨눠 사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화살이 날고 있을 동안 아폴론 신은 이것을 인도했다. 화살은 치열하게 접근전을 벌이고 있는 병사들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 드디어 아폴론이 노리던 과녁에 명중했다. 바로 무릎 가리개로도 가리지 못하는 발뒤꿈치였다. 아기 아킬레우스를 스튁스 강물에다 담글 때 어머니 테티스가 손으로 쥔 곳, 따라서 스튁스 강물에 잠기지 못한 곳이 바로 아킬레우스의 발목이었다. 아킬레우스의 몸에서 죽음이 파고들 수 있는 곳은 발목뿐이었다.
아킬레우스는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면서 외쳤다.
"어느 비겁한 놈이 멀리서 날 쏘았느냐? 그 자에게 이리로 내려와 창칼로써 나와 맞서라고 하라."
그는 발꿈치에서 화살을 뽑았다. 피가 용솟음치며 흘러 나왔다. 피는 사방으로 튀었다. 아킬레우스의 눈앞이 가물거리시 시작했다. 그는 비칠거리며 미친 듯이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힘이 다한 그는 걸음을 멈추고 창에 몸을 의지한 채 외쳤다.
"트로이아의 개들아! 나는 이렇게 죽는다만 너희들은 내 창끝을 피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겨우 이 말만을 남기고 아킬레우스는 앞으로 쓰러졌다. 갑옷이 땅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트로이아 병사들은 아킬레우스의 숨이 완전히 끊길 때까지 차마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지 그가 죽어가는 것을 구경만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죽어가는 사자를 바라보고 있는 사냥꾼 같았다.
이로써 헥토르가 죽으면서 한 예언은 이루어진 셈이었다. 헥토르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아킬레우스가 성의 정문에서 파리스의 손에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었다.
그제서야 성문 앞 큰길에서 있던 트로이아 군사들이 아킬레우스의 주검을 갑옷째 차지하기 위해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그리스 군사들 역시 장례를 치루려면 그 주검을 지켜 진영으로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문에 그의 시신을 사이에 두고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양쪽 군사가 어찌나 빽빽하게 어우러져 있었던지 성벽 위의 트로이아 군사들은 저희 군사가 맞을까 봐 활도 쏘지 못했을 정도였다.
결국 오뒤세우스가 부상당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의 팔을 잡아 끌어 들쳐 업고는 비틀거리며 선단 쪽으로 내달았다. 아이아스와 그의 부하들은 오뒤세우스의 뒤를 따르면서 쫒아오는 트로이아 군을 막았다. 트로이아 군이 너무 접근할 경우엔 그들을 공격하여 다른 트로이아 군 속으로 몰아넣고는 했다.
아킬레우스의 주검은 그의 막사로 옮겨졌다. 브리세이스를 비롯한 여자들이 그의 몸에서 피와 먼지를 닦고는 관 위에 눕히고 흰 겉옷으로 덮었다. 그리고는 곡을 하고 만가를 불렀다. 살아 남은 그리스 장군들은 아킬레우스 자신이 얼마 전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랬듯이, 긴 머리채를 잘라 그의 주검 위에 놓았다.
바다에서 그의 어머니<은빛 발> 테티스가 시녀 요정들을 데리고 물위로 솟아올랐다. 깊은 바다 수정의 방에서 여름 날의 파도처럼 솟아오르며 부르는 테티스 일행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는 온 해변에 골고루 퍼져 나갔다. 공포에 질린 그리스 병사들은 해변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때 노와 네스토르는 이런 말로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혔다.
"두려워할 것 없다. 세상을 떠난 아드님을 보러 오신 그의 어머니와 바다의 요정들이다."
그제서야 그리스 병사들은 마음을 놓았다. 테티스와 바다의 요정들은 그를 둘러싸고는 인간 세상 여자들의 곡소리와 만가 부르는 소리에 신들 세상의 곡소리와 만가를 보탰다.
그리스 인들은 나무를 쌓아 거대한 화장단을 만들고 아킬레우스의 주검과 제물로 잡은 활소, 꿀 항아리, 포도주 항아리를 올리고 불을 붙였다. 불이 사그러들자 영웅의 주검이 남긴 흰 재를 모아,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에서 꺼낸 손잡이가 두 개 달린 금술잔에 넣고 파트로클로스의 재와 잘 섞었다. 이 금술잔을 다시 묻은 뒤 무덤을 높이 쌍호 봉우리 한가운데에 비석을 세웠다. 그 땅을 지나는 사람과 바다로 나가거나 들어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누구의 무덤인지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아킬레우스를 추모하는 장례경기가 열렸다. 파트로클로스의 장례 경기 때처럼 전차경주, 달리기, 권투와 시름 겨루기가 벌어졌다. 모든 경기의 우승자들에게 테티스는 귀하고 명예로운 선물을 내렸다. 경기가 끝나자 테티스는 헤파이스토스 신이 특별히 만들어 준 아들의 귀하기 짝이 없는 갑옷을 가져다 무덤 앞에 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 갑옷을 가장 용감한 전사에게 드리겠습니다. 트로이아 군사들로부터 아킬레우스의 주검을 빼앗아 이렇게 장례를 지낼수 있게 해준, 가장 큰 공을 세우신 분이 이것을 차지하도록 하세요."
테티스는 이 말을 남기고는 바다의 요정들을 데리고 바닷속으로 되돌아갔다.
아이아스와 도윗세우스가 일어나 서로 자기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차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각자 자기야말로 갑옷을 차지할 자격이 있으며 용감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왕 네트토르가 일어나 이런 말을 했다.
"남아 있는 우리들 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한 사람을 뽑아 이 갑옷을 준다는 건 예삿일 이 아니오. 왜인 줄 아십니까? 이 갑옷을 차지하지 못한 사람은 속이 상할 것이고, 우리가 자기를 푸대접한 것으로 오해할 것이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전과 다를 것이고,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큰 손실이 될 것임에 분명하오. 하지만 꼭 두 분 중에서 한 분을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가 직접 하지는 말도록 합시다. 누구는 오뒤세우스를 선택하고 누구는 아이아스를 선택한다면, 이 두 무리 사이에서도 적의가 싹틀 있으니 말이오. 우리 진영에는 몸값이 지불되기를 기다리는 많은 트로리아 포로들이 있지 않소. 그들에게 심판을 맡기기로 합시다."
"현명하신 말씀이오."
대왕 아가멤논도 만족스러워했다.
트로이아 포로들이 회의장으로 불려나왔다. 오뒤세우스와 아이아스는 그들 앞에서 연설을 함으로써 아킬레우스의 갑옷 소유권을 주장하기로 했다. 아이아스가 먼저 연설했다. 그런데 갑자기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포도주의 신 디오뉘우스가 아이아스를 취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그의 연설은 엉망이 되었다. 그가 자기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아이아스는 오뒤세우스를 깎아내리기 위해 그를 겁쟁이, 약골이라고 부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오뒤세우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이아스는 나를 겁쟁이, 약골이라고 합니다만 이렇게 부르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일은 트로이아 인들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들은 나와 많이 싸워 보았으니 잘 알 것이고, <트로이아의 보물>을 가져온 것도 나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파트클로스의 장례 경기에서 나와 그가 싸운 것을 잊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부상을 갓 나은 몸으로 그와 싸웠습니다. 비기기는 했습니다만 이곳만 보아도 그는 나를 약골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트로이아 포로들이 의견을 모아 두 사람 중에서 오뒤세우스가 더 용감한 장군이며, 따라서 아킬레우스의 갑옷은 그의 차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아스의 얼굴이 검붉게 변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던 그는 친구들에게 끌리다시피 해서 회의장을 나갔다.
막사로 돌아갔지만 그는 그 날 해가 질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디오뉘우스 신이 그에게 광기를 불어넣음으로써 벙어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둠살이 끼어 올 때까지도 아이아스는 그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둠이 깊어갈 즈음부터는 사악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맴돌았다. 그는 칼을 들고 어둠 속을 나섰다. 오뒤세우스의 막하를 찾아가 그를 처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이아스는 오뒤세우스의 막사에 이르기 전에 양떼를 만났다. 그리스 군이 양식의 일부로 기르고 있는 양떼였다. 그는 양떼 속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양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오로지 죽이기에만 열중한 것이다.
새벽이 오기 시작하자 그에게도 맨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오뒤세우스를 죽인 게 아니었으며, 대신 무수한 양의 시체 앞 피웅덩이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아스는 광기가 불러 일으킨 그런 불명예를 안고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칼을 뽑아 땅바닥에 거꾸로 단단히 세웠다. 그리고는 뒤로 조금 물러섰다가 그 칼끝 위로 몸을 던졌다. 칼끝이 심장에 박히면서 그의 광기도 그것으로 끝이 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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