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일리어드4
by 송화은율아킬레우스의 빛나는 황금 갑옷
쿵쾅거리며 무너져내리는 듯한 가슴을 안고 파스로클로스는 뮈르미돈 족의 막사로 내달았다.싸움터와는 달리 그 곳은 여전히 평온했다. 배 위에서는 아킬레우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맞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는 거요. 파트로클로스? 나들이하는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우는 계집아이처럼 우는 거요? 장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소? 아니면 내 아버지라도 돌아가셨소? 아니면 어리석은 허물의 죄값으로 죽어가는 그리스 군이 불쌍해서 우는 거요?"
"그리스 군이 죽어가는 것은 저희들이 지은 허물의 죄값 때문이 아닙니다. 단 한 사람의 어리석음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한 사람. 아가멤논은 이미 사령관께 그 허물을 바로잡을 의향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령관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파트로클로스의 머리 속에 문득 노장군 네스토르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만일에 사령관께서 우리가 모르는 이유 때문에 싸움터로 나갈 수가 없다면 저에게 사령관의 갑옷과 전차와 말을 빌려주고 뮈르믿돈 군의 지휘를 맡겨 주십시오. 트로이아 군은 사령관께서 몸소 나온 줄로 알고 기가 죽을 것입니다. 그려면 그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한 2천의 우리 뮈르미돈 군이 이 싸움의 전세를 뒤집어 놓을 것입니다."
아킬레우스는 전날 헥토르가 칼과 햇불을 들고 자신의 배있는 곳까지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한 결코 싸움터로 나서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을 떠올리자 목이 메어 왔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의 말을 좇으면 맹세를 깨뜨리지 않고도 결과적으로는 싸움터에 합류한 셈이 될 것 같았다.
"내 갑옷을 입고 내 말을 몰고 가시오. 나인 것처럼 꾸미고 뮈르미돈 부대를 지휘하시오. 우리배를 다 태우기 전에, 우리의 귀향 길을 끊기 전에 트로이아 군을 쳐부수도록 하시오. 그러나 이 선단에서 적을 몰아내거든 뒤쫓지 말고 여기 있는 내게로 돌아오시오."
파토클로스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아킬레우스가 병사들을 소집할 동안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었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이 불화를 빚기 전부터 트로이아 군이 두렵게 여긴 것은 갑옷이었다.아킬레우스의 전차병 아우토메돈은 서풍의 신의 핏줄을 타고나 죽음을 모르는 두 마리의 말 크산토스와 발리우스, 그리고 때가 되면 죽을 운명을 타고 태어난 말 페다소스의 목에 멍에를 채우고는 전차 앞에 메었다. 페다소스는 발이 빠르고 용기가 있으며 특히 옆걸음질에 능한 말이었다. 싸우고 싶어서 이리 떼처럼 눈에 불을 켜고 있던 뮈르미돈 병사들은, 그 동안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불화로 싸움터에서 줄창 돌림쟁이가 되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대열을 짓고 출전을 기다렸다.
이윽고 파트로클로스가 전차에 올랐다. 병사들은 방패의 숲에 싸인 채 그 전차 뒤에 바싹 붙어 트로이아 군을 향해 나아갔다. 뮈르미돈 군이 트로이아 군의 옆구리를 공격하는 순간, 트로이아 군은 천둥치는 소리를 내며 앞서나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말과 전차를 보고는 그만 기가 꺽이고 말았다.
그러나 아킬레우스 자신은 그싸움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막사 안에서 고풍스런 금술잔에 핏빛 포도주를 따르고 그것을 문턱 앞의 마른 땅에 부으면서 제우스 신에게 기도했다.
"제우스 신이시여 저 사람에게 영광을 베푸소서. 힘을 주소서. 저 사람이 선단을 유린하는 적을 쫓아버리고 돌아오게 하시되 다친 데 없이 예 친구인 저에게 돌아오게 하소서."
제우스는 그 기도를 듣고는 절반은 들어 주고 절반은 들어 주지 않았다.
파트로클로스는 뮈르마돈 병사들에게 따라오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선단을 포위하고 있는 트로이아 군사들에게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는가 하면 횃불 든 적병을 덮치기도 하였다.
횃불은 적병의 손 안에서 일렁거리다 주인이 목숨을 잃는 순간 땅바닥에 떨어졌다 꺼져 버리고는 했다
순식간에 선단 주위의 적이 격퇴되었고 불길도 잡혔다 트로이아 군은 다시 도량을 건너 저편으로 밀려갔다. 도량은 부서진 전차로 메워져 있었다. 전차에서 풀려난 말들은 평원을 가로질러 도망치고 있었다.
그 말떼를 뒤쫓아 아킬레우스의 말들이 도랑을 건넜다 파트로 클로스는 말떼를 모았다 말떼가 트로이아군과 트로이아 성중간에 위치하는 파트로클로스 말떼의 퇴로를 차단하고 병사들이 침을 삼키며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 진영으로 몰고갔다.
보병과 전차병 할것없이 수많은 병사들이 죽음을 당했다 트로이아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뤼키아 왕 사르페돈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르페돈이 쓰러진 자리로 헥토르가 지휘하던 트로이아군이 몰려들었다
그의 시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결국 사르페돈의 시신을 차지한것은 그리스 군이었다. 그리스군은 시신에서 번쩍거리는 갑옷을 벗기고는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그러나 사르페돈은 다름아닌 제우스 신과 인간 세상의 어머니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사르페돈의 시신은 그리스 인들이 보는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어떻게 없어졌는지 어디로 옮겨갔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눈에 보이지 않은 쌍동이 형제휘프노스와 타나토스가 아버지 제우스 신의 명을 받고 그 큰날개를 펄럭거리며 내려와 사르페돈의 시신을 뤼키아로 데려가 버린 것이었다 뤼키아인들이 저희왕의 장례식을 예를 갖추어 치러줄수 있게 하기위해서였다
파트로클로스는 선단주위에서 트로이아군을 완전히 몰아내면 추격하지말고 돌아오라던 아킬레우스 왕자의 당부를 떠올렸어야 했다. 그러나 구름을 모은느 신 제우스는 아들의 죽음에 화가 난 나머지 파트로클로스의 머리에 광기를 불어넣어 싸움 미치광이가 되게함으로써 아킬레우스의 당부 같은 것은 완전히 잊어 버리게 했다.파트로 클로스는 전차병 아우토메돈에게 연방고함을 질러대면서 트로이아군을 추격했다 그는 트로이아군을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느라고 뮈르미돈군을 저만치 뒤에두고서 혼자 트로이아 성벽 밑에 이르렀다 싸움 미치광이가 되어버린그는 세차례나 그까마득한 성벽을 기어 오르려다가 세번 모두 성위로부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서야만 했다.
전차를 탄채 정문앞 큰길에 있던 헥토르는 전차병에게 전차를 똑바로 아킬레우스쪽으로(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있었으므로)쪽으로 몰라고 명했다. 성벽밑에 서 있던 파트로클로스는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하나 들어올려 헥토르를 향해 던졌다. 바윗덩어리는 헥토르를 빗나가는 전차병에게 맞았다. 전차병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파트로클로스는 그때부터 세 번이나 트로이아 군의 철통같은 전투 대형을 공격했다. 한번 공격할때마다 아홉명의 트로이아 병 사가 목숨을 잃고는 했다. 뒤따라온 뮈르미돈 군대가 그의 뒤를 받쳤다.그날의 전투가 어떻게 끝날것인지 예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트로클레스가 네 번째로 트로이아 군을 공격하는 순간 아폴로 신이 아무도 모르게 그뒤로 다가와 그의 어깻죽지를 때렸다 파트로크로스의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투구가 머리에서 벗겨져 전차 끄는 말발굽 아래로 떨어졌다.
그제서야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아킬레우스가아니라 파트로클로스인 것이 밝혀진 셈이었다. 그의 창은 부러져 있었고 어깨에 메고 있던 방패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둥그렇게 파트로클로스를 둘러싸고 있던 트로이아 군 중에서 한 병사가 창으로 그이 등을 찔렀다.눈앞에서 붉은 안개가 어른거리고 있었음에도 파트로클로스는 창을 잡고 병사를 찌르려 했다. 그러나 그순간, 헥토르가 썩 나서면서 창으로 그의 배를 찌르고 창날로 그어 버렸다. 파트로클로스는 쓰러졌다. 눈앞에 보이던 붉은 안개가 검은 안개로 변하면서 그의 생명은 그를 떠나갔다.
파트로클로스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 ,자기를 내려다보고서 있는 헥토르에게 말했다.
"죽음은 그대의 곁에도 가까이 서있다. 그대는 바로 이 문앞에서 , 이갑옷의 임자인 아킬레우스 장군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트로이아 군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들 죽어가는 자가 멀리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트로클레스의 숨이 끊어지자 헥토르는 그의 몸에서 신들이 만들어 선물로 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벗겻다.전투가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는 틈을 타서 헥토르는, 자기 갑옷은 벗어 성 안으로 들여보내 아테나 여신의 신전에 바치게 하고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었다. 그리고 나서야파트로클레스의 시신을 구고 벌어진 또 하나의 싸움터로 뛰어들었다.
정오의 불볕 태양 아래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트로이아 군은 시신을 빼앗아 성 안의 개들에게 던져 주고 싶어했고, 그리스 군은 선단으로 모셔 정중한 장례식을 치려 주고 싶어했다.
파트로클로스의 전차병으로 나섰던 아우토메돈은 처음에는 그 싸움에 합류할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의 전차를 끌던 말 두 마리(옆걸음질에 능한 페다소스는 그 때 이미 죽고 없었다)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선채 , 그 오랜 포위 공격 기간 동안에 저희들을 아껴 주던 주인 친구의 죽음을 애 도하며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마리의 말은 그곳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싸움터에서 도망치려고도, 싸움에 가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제우스는 슬픔에 빠져 있는 그 두 마리의 말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아버지인 서풍의 신을 생각해서 가슴에는 불길을 다리와 구부러진 목에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우토메돈 자신도 조금전과는 전혀 다른 전사가 되어있는 기분이었다 그제서야 아우토메돈은 싸움터로 뛰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해가 머리위를 지나 점차 서쪽으로 기울수록 전황은 조금씩조금씩 그리스군에 불리해져 갔다
그리스군은 조금씩 물러섰고 트로이아군은 조금씩 다가섰다 그러나 뮈르미돈용사들은 낡은 외투처럼 누더기가 된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트로이아군과 싸우는 한편으로 피가 엉겨붙고 싸움터의 먼지에 절여진 시신을 선단이 있는 곳으로 조금씩조금씩 운반해갔다 아이아스와 그 부하들은 방패와 투팡으로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운반하는 뮈르미돈 병사들을 호위했다.
헥토르에게 복수하는 아킬레우스
네스토르의 아들 안틸로코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알리러 아킬레우스에게 달려가 그리스 병사들은 모두 길을 비켜주었다 그리스 병사들은 그소식이 어쩌면 아킬레우스를 다시 싸움터로 되돌아오게 할수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안틸로코스가 숨을 헐떡거리며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이르렀다 아킬레우스는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던 나머지 막사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그때 안틸로코스를 통해 그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파트로클로스 장군이 전사했습니다 지금밖에서는 파트로클로스의 알몸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장군이 알몸인 것은 헥토르가 갑옷을 벗겨갔기 때문입니다."
아킬레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화롯가에서 고개를 숙이고 자기 머리카락에다 화로에서 퍼낸 재와 검은 먼지를 끼얹었다 안틸로코스가 달려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안틸로코스로서는 아킬레우스로서는 아킬레우스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혹시 자살이나 하려는 것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깊은바다에서 바다의 요정인 테티스가 아들을 위로하러 올라왔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오랜 친구를 죽인 헥토르에게 복수하는데 자신의 목숨을 걸겠다고 말했다.
테티스가 흰팔로 아들을 껴안고서 말했다. "갑옷도 없이 싸움터로 나갈수는 없는 일이다 맨몸으로 갔다가는 헥토르를 만나기도 전에 트로이아 군의 창에 몸을 상하고 말게다 그러니 오늘밤만 넘기도록 해라
내가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신에게 올라가 갑옷을 주문하고 내일아침에는 이세상 인간은 본 적도 들은적도없는 방패와 투구 그리고 가슴 가리개를 가져다 주마" 테티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사라졌다. 테티스의 음성은 해변에서 한숨을 쉬는 파도 소리와 같았다.
한편, 파트로클로스의 갈갈이 찢긴 시신을 서로 차지하려는 싸움은 선단의 방어벽 가까이까지 와 있었다.
야수의 발톱 같은 슬픔에 가슴을 쥐어뜯기던 아킬레우스는 밖으로 나갔다.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방어벽으로 올라간 그는 떨어져가는 붉은 태양을 등지고 섰다. 그가 두른 머리띠 위로 불덩어리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흡사 야간 공격전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봉화 같기도 했다. 거기 그렇게 선 채로 그는 목청껏 트로이아를 저주했다. 그 소리는 성벽을 공격하면서 병사들이 내지르는 함성 같았다.
그는 세 차례 고함을 질렀는데, 트로이아의 말들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힝힝거리면서 도랑을 건너다 말고 물러서고는 했다. 세 차례나 트로이아 병사들의 가슴이 공포로 오그라들었다. 트로이아 병사들은 거기까지 쫓아온 목적도 잊었는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 순간을 틈타 뮈르미돈 용사들은 파트로클로스의 몸에 묻은 먼지를 대강 털고 선단 앞 방어벽의 문 안으로 시신을 들여갈 수 있었다.
방어벽의 문이 잠기면서 벽 위에 파수병이 무수히 배치되었다. 병사들이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관 위에 눕히고 나자 아킬레우스가 그 옆으로 다가갔다. 그는 자기 자신이 가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파트로클로스에게 자기 전차와 말을 주어 싸움터로 보낸 것을 후회하고, 살아서 되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을 슬퍼했다.
병사들은 갈갈이 찢긴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옮겼다. 평소에 파트로클로스부터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 온 여자 노예들은 울면서 시신에 묻은 피와 먼지를 씻기고는 희고 부드러운 천으로 그의 몸을 감쌌다.
해가 지고 밤의 고요가 찾아들었다.
헥토르의 참모 몇몇은 헥토르에게 트로이아 성으로 들어가 안전을 꾀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아킬레우스가 최전선에 나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트로이아군이 위태롭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성 안이 피난민들로 붐비는 것은 그대도 알지 않는가? 아킬레우스, 올 테면 오라지. 평원에서 아킬레우스를 맞이하겠노라."
그래서 평원은 다시 한번, 잡목수풀과 옛 묘지 사이에 지펴진 트로이아 연합군의 모닥불로 인해 마치 무수한 별이 박힌 밤 하늘 모양이 되었다.
아킬레우스의 막사 앞에서 여자들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통곡했다. 뮈르미돈 병사들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킬레우스도 옛 친구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올림포스 산 꼭대기의 대장간에서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는 테티스가 보는 가운데 불을 지피고 황소 스무 마리의 가죽으로 만든 풀무로 바람을 일으켜 불을 부쳤다. 그는 청동과 은, 주석과 금을 녹여 번쩍거리는 가슴 가리개와 장딴지 가리개, 붉은 색깔의 장식 볏을 넣은 금 투구와 방패를 만들었다. 특히 헤파이스토스는 방패에다 도시, 바다, 전투 장면, 사자 사냥, 곡식 걷이가 끝난 평원, 포도가 오종종하게 열린 포도 덩굴, 피리소리에 맞추어 춤추는 남녀의 그림을 박아 넣었다.
새벽이 되자, <은빛 발> 테티스는 헤파이스토스가 아들을 위해 만들어 준 갑옷을 들고 올림포스를 내려왔다. 아킬레우스는 그 빛나는 갑옷을 입었다.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용기와 적개심이 아킬레우스의 가슴 속에서 솟아올랐다. 그러나 개인의 명예와 관련된 문제에 민감한 오뒤세우스는 아킬레우스가 무턱대고 뮈르미돈 군대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가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했다. 오뒤세우스의 말에 따르면, 먼저 아가멤논과 정식으로 화해하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 이를 알리는 예식을 거행한 후, 일찍이 아킬레우스가 거절한 적이 있는 아가멤논의 선물을 받아 들인 뒤에 출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아가멤논은 사람을 보내어 선물을 전했다. 선물을 전해 준 사람들은 아킬레우스에게, 아가멤논을 대신해서 그 동안의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아킬레우스는 이제 금덩어리, 노예, 값비싼 말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브리세이스조차도 귀찮았다. 하지만 그는 그 선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을 받아야만 비로소 화해의 절차를 끝내고 싸움터로 달려갈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두 사람의 화해는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뮈르미돈 족을 비롯해서 모든 그리스 병사들이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복수가 끝나기까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손을 대지 않으려 했다.
그가 전차에 올라 막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였다. 헤라 여신으로부터 딱 한 차례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권능을 받은 그의 백마 크산토스가 갈기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아킬레우스 장군님. 장군님만 슬픈 것이 아니고 저희들도 슬픕니다. 저희들은 아버님 제퓌로스(서풍)처럼 내닫고 싶습니다만, 아무리 그렇게 달려도 장군님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곧 목숨을 잃으시게 됩니다."
백마 크산토스의 말에 아킬레우스가 대답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헥토르가 살아 있는 한 그 자리를 피하지 않겠다. 그러니 그 동안 만이라도 힘껏 달려 다오."
그러자 두 마리의 백마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적진을 향해 내달았다.
아킬레우스는 그 날 하루 종일 뮈르미돈 군대의 선두에서 트로이아 군을 무찔렀다. 그는 트로이아 군을 강으로 밀어넣었다. 핏빛으로 흐르는 강은 트로이아 군을 보호하면서 아킬레우스를 금방이라도 삼킬 듯이 용틀임쳤다. 숱한 병사들이 그 강물에 떠내려갔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아 군을 추격하여 강을 건넜고, 건너쪽 강변에서도 무수히 많은 트로이아 군을 죽였다. 얼마나 죽였던지 땅은 진홍빛으로 물들고 시체를 밟은 말이 전차의 차축과 뼈대에 무수한 핏덩어리를 튀겼을 정도였다. 그는 마지막 승리의 영광을 앞두고 트로이아 군을 압박해갔다. 아킬레우스와 뮈르미돈 군대는 트로이아 군을 성문 앞까지 추격했다. 트로이아 군은 성 안 사람들의 활짝 열어 놓은 성문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그러나 헥토르만은 창을 움켜쥔 채 성의 정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성벽 위에서 아들의 모습을 지켜 보던 프리아모스 왕은, 신들이 준 갑옷을 입고 유성처럼 달려오는 아킬레우스를 보자 아들에게 어서 성 안으로 들어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헥토르는 오래 전에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아킬레우스를 기다렸다.
그가 그렇게 기다렸던 것은 자신의 최후가 멀지 않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전날 평원에서 야영해야 한다고 주장해 엄청나게 많은 부하들을 죽게 한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킬레우스를 죽임으로써 부하들의 죽음을 복수할 수 있으며,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자기 목숨으로 그 빚을 갚겠다고 결심했던 것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전속력으로 전차를 몰아 돌진해왔다. 헥토르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검은 선단이 오고 나서 십여 년 세월이 흐르도록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헥토르는 돌아서서 도망쳤다. 그는 도망치느라고 트로이아 성을 세 바퀴나 돌았다. 세 차례나 거룩한 무화과 나무를 지나고 평화시에는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쓰이던 우물가를 지났다. 헥토르는 사슴처럼 도망쳤고 아킬레우스는 표범처럼 추격했다. 헥토르가 용기를 되찾은 것은 세 번째로 성의 정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돌아서서 적을 맞았다.
아킬레우스의 창이 그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어찌나 가까이 스쳤던지 바람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을 정도였다. 헥토르 역시 창을 던졌다. 그러나 그의 창은, 도시와 전쟁터의 풍경과 피리 소리에 맞추어 춤추는 남녀가 새겨져 있는 아킬레우스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아킬레우스에게는 창이 하나 더 남아 있었지만 헥토르에게는 없었다. 헥토르는 칼을 뽑아들고 외쳤다.
"불명예스럽게 죽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는 아킬레우스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칼로 찌를 만한 거리까지 접근하는 순간, 아킬레우스가 그의 목을 겨누고 창을 던졌다. 그는 휘청거리다 땅바닥에 쓰러졌다.
"개떼와 까마귀 떼가 땅에 묻히지 못한 너의 살을 찢어 먹을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먼지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는 헥토르를 내려다보면서 내뱉었다.
헥토르는 그에게 애원했다.
"아버지가 금덩어리로 내 몸값을 치를 것이다. 그러니 내 시체를 아버지께 내어 드려 제대로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다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자비를 베풀 기분이 아니었다.
"안 돼! 할 수만 있다면 네 살을 찢어 먹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개떼에게 던져 주어 개들로 하여금 너의 살을 놓고 다투게 해주지. 네 아버지가 네 몸무게와 맞먹는 금덩어리를 가져 온다 해도 소용 없다."
헥토르는 더 이상 애원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내 아우 파리스가 바로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일 것이다. 내 말을 명심하라."
마지막 숨결을 토해 내고서 헥토르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의 영혼은 저승을 향해 길을 떠났다.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몸에서 하루 전만 해도 자신의 것이던 갑옷을 벗겨 내고 있을 동안 그리스 진영의 최전방에 있던 병사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병사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헥토르의 시체를 구경하고는,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 전에 저마다 한 차례씩 시체에다 창질을 했다.
아킬레우스는 시체에다 해괴한 짓을 했다. 그는 헥토르의 발목 뒤, 발뒤꿈치에서 장딴지에 이르는 힘줄 뒤쪽을 잘라 구멍을 내고 거기에 소가죽 끈을 꿰어 묶고는 그 끈의 한쪽 끝을 전차 뼈대에다 묶었다. 되찾은 갑옷을 전차에 실은 그는 전차에 올라 손수 고삐를 잡고 채찍으로 말 엉덩이를 때렸다. 말은 선단 방어벽을 향하여 서풍처럼 달려나갔다.
말이 달리자 헥토르의 시체는 울퉁불퉁한 땅바닥 위에서 때로는 뒤틀리면서 때로는 엎어지고 쓰러지고 하면서 끌려갔다. 헥토르의 검은 머리카락은 전쟁터의 먼지와 온갖 쓰레기를 주위가 자옥해지도록 휘날리게 했다.
장례 경기를 벌이다
헥토르의 어머니 헤쿠바를 비롯한 트로이아 여인들은 트로이아 성 정문 위의 망대에 서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헥토르의 죽음을 통곡하기 시작했다.
안드로마케는 자기 집 다락방에서 금빛 꽃을 수놓으면서 헥토르의 겉옷을 짜고 있었고, 안방 하녀는 주인이 싸움터에서 돌아오면 몸을 닦을 수 있도록 물을 데우고 있었다. 안드로마케의 귀에 망루에서 여자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드로마케의 손에서 날실 사이로 들어가던 베틀의 북이 툭, 떨어졌다. 시어머니의 통곡 소리에 외마디 비명까지 들은 안드로마케는 여자들이 통곡하는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하녀 둘을 데리고 망루로 올라갔다.
안드로마케는 망루에 이르러서야, 아킬레우스의 전차에 매달린 채 선단 쪽으로 끌려가면서 헥토르의 시체가 일으키고 있는 먼지 구름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통곡하는 여자들 사이에서 안드로마케의 몸이 화살에 맞은 새처럼 무너져 내렸다.
정신을 차린 안드로마케는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 없는 자식으로 남게 된 아들 때문에 울었고 견줄 데 없이 비참하게 죽은 헥토르 때문에 울었다. 한시 바삐 시신을 찾아 장례식을 치러 주지 않으면 영혼은 하데스의 나라인 저승에 들지 못하고, 산 자의 땅과 죽은 자의 당 사이에 있는 경계를 외로이 방황하게 될 터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안드로마케는 또다시 울음이 나왔다.
그러나 시체가 되어 장례식도 치러지지 못하고 누워 있는 영웅은 헥토르뿐만이 아니었다.
사냥감을 배불리 잡아먹은 사자처럼 포만감을 느끼며 잠들어 있는 아킬레우스에게 파트로클로스의 망령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왜 나를 화장해서 묻어주지 않습니까? 저승의 나라 망령들은 나를 저희 동아리에 끼워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하데스의 검은 문 앞을 서성거린답니다. 자, 내 손을 한번 더 잡아 주십시오. 하데스의 문으로 들어서면 다시는 이렇게 와서 장군을 뵐 수 없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아킬레우스는 오랜 전우의 손을 잡아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망령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잠을 깬 아킬레우스는 부하들에게 화장할 장작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아킬레우스의 부하들은 멀리 떨어진 내륙의 이다 산에서 나무를 베고 장작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노새 무리에 등짐을 지워 해변으로 실어 내었다. 아킬레우스의 명에 따라 그들은 장소를 정하고 장작을 쌓아 거대한 화장단을 세웠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이 화장단으로 올려지자 전우들은 저마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느라고 머리카락을 자라 시신 위에 뿌렸다.
아킬레우스도 머리카락 한 타래를 싹둑 잘라 파트로클로스의 손에다 쥐어 주었다. 전우의 명예에 어울리게 가축도 여러 마리 잡았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전차를 끌던 말 네 마리, 파트로클로스가 매우 좋아하던 사냥개 두 마리도 죽여서 화장단 위에다 올리게 했다. 슬픔과 분노로 제 정신이 아니었던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아 군의 포로 열두 명도 울대를 끓어 올리게 했다. 부하들은 여러 항아리의 기름과 꿀을 화장단 가에다 부었다. 해질녘이 되자 아킬레우스가 횃불로 화장단에다 불을 붙였다. 나무의 잔가지와 기름과 꿀에 불이 붙었다. 북풍과 서풍의 신이 와서 불길을 불어 주었다. 화장단은 밤새 타다가 해가 희붐해질 녘에야 사그러졌다.
부하들은 장군이 생전에 아킬레우스와 술을 마시곤 하던,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황금 술잔에 재가 되어 버린 파트로클로스를 담았다. 술잔을 땅바닥에 놓고 주위에다 돌을 쌓아 조그만 방을 만든 다음 그 위를 흙으로 덮으니 곧 무덤이 되었다.
아킬레우스는 흙을 덮긴 하되 돌로 쌓은 방은 밀봉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자기가 죽거든 화장해서 그 재를 파트로클로스의 재가 든 술잔에 넣어 잘 섞은 후에야 돌로 쌓은 무덤을 밀봉하라고 명령했다.
이윽고 장례 경기가 열렸다. 죽은 사람의 명예에 어울리게 장례 경기를 열어 주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아킬레우스의 보물 창고에서 나온 상품들이 진열되었다. 경기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첫 경기는 전차 경주였다. 그리스 연합군에서 가장 빼어난 전차와 말, 그리고 다섯 명의 전차 몰이가 출전했다. 선수들은 평원을 질풍처럼 내달았다. 그들 뒤로 먼지 구름이 일었다. 아득한 옛날 그 평원에 세워졌던 이정표가 반환점이었다. 전차는 반환점을 돌아 선단 방어벽 앞의 관중들 앞으로 오게 되어 있었다.
디오메데스가 앞섰다. 고함을 지르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말의 엉덩이에다 연방 채찍질을 해댔다. 그의 전차 바퀴는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았는데도 뒤로는 먼지가 피어올랐다. 1등상은 그에게 돌아갔다. 음악과 살림살이에 재주가 있는 여자 노예 하나, 발이 세 개 달린 황금 솥 하나가 상품이었다.
그 다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네스토르의 아들 안틸로코스였다. 안틸로코스는 말의 속도 덕분이었다기보다는 말 모는 기술로 메넬라오스를 간발의 차로 따돌리고 들어왔다. 안틸로코스에 이어 메넬라오스의 말발굽 네 개가 천둥소리를 내면서 결승점을 지났다. 안틸로코스와 메넬라오스에게 각각 2등상과 3등상이 돌아갔다. 상품은 혈통이 좋은 암말 한 필과 1등상보다는 조금 작은 황금 솥이었는데 두 사람이 상의해서 서로 좋은 것을 갖도록 했다. 이어서 메니오네스가 들어왔고 한참 있다가 에우멜로스가 들어왔다. 마차가 부서지는 바람에 손수 말을 몰면서 전차를 끌고 왔기 때문에 늦었다는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그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이어서 권투 경기가 베풀어졌다. 거인이자 권투 잘 하기로 유명한 에페이오스와 아르고스 군의 대장 에우뤼알로스가 맞붙었다. 두 사람은 아랫도리를 벗고 넓적한 가죽 허리띠를 매었다.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서로 치고 빠지고 했다. 격렬한 싸움인데도 꽤 오래 계속되었다. 결국 에페이오스가 에우뤼알로스의 턱에 일격을 명중시키고는 노새 한 마리를 상으로 받았다. 에우뤼알로스는 선 채로 땅바닥에다 피를 토했다.
다음에는 씨름 경기가 열렸다. 아이아스와 다친 상처가 이제 갓 나은 오뒤세우스가 짝짓기 계절을 맞은 두 마리의 뿔사슴처럼 맞붙었다. 그러나 실력이 엇비슷해서 결판이 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두 사람의 경기를 중단시키고 상을 반씩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어서 벌어진 달리기 경주에서는 오뒤세우스를 당할 상대가 없었다. 그는 이 경기에서 포도주를 섞는 은사발을 따냈다. 마지막으로 아킬레우스는 전사한 사르페돈의 갑옷을 가져오게 한 뒤, 구경꾼 사이에다 창을 하나 꽂아 그 위에 걸고는 창시합할 사람은 나오라고 했다. 갑옷은 먼저 상대에게 피를 흘리게 하는 사람이 차지하게 된다고 했다. 디오메데스와 아이아스가 갑옷을 입고 구경꾼 한가운데 만들어진 공터로 나섰다.
두 사람은 세 차례나 맞붙었다. 피가 서서히 달아오르자 아이아스가 창으로 디오메데스를 찔렀다. 창끝은 디오메데스의 방패를 뚫고 가슴 가리개에 꽂혔다. 이번엔 디오메데스가 아이아스의 목을 겨누고 방패로 숨기고 있던 창을 내질렀다. 구경꾼들은 둘 중 하나가 다치는 것을 염려해 경기를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경기는 중단되었다. 두 장군은 사르페돈의 갑옷을 나누어 가졌다. 해가 질 즈음 경기에 참가했던 선수들은 마무리 잔치를 벌이기 위해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몰려갔다.
마무리 잔치가 끝나고 장수들은 잠자리로 돌아갔지만 아킬레우스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과, 다시는 누릴 수 없는 함께 사귀고 나누었던 세월을 슬퍼하면서 혼자 울었다. 그러다 자리를 박차고 해변으로 달려간 아킬레우스는, 날이 희붐해질 때까지 해변 모래톱을 미친듯이 걸었다.
하지만 새 아침이 밝아와도 아킬레우스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슬픔 때문에 맑은 정신을 잃어 버린 사람처럼 마굿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말을 끌어내 멍에를 채워 전차에 맨뒤, 헥토르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갔다. 헥토르의 시체는 여전히 땅바닥 위에 엎어져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다시 헥토르의 시체를 전차에다 비끄러매고 방어벽을 나가, 파트로클로스의 뼈무덤을 세 바퀴나 돌았다. 그 동안 헥토르의 시체는 물론 흙먼지 위를 계속해서 끌려 다녔다.
그는 열이틀 동안이나 밤으로 낮으로 똑같은 짓을 했다. 그러나 그 동안 아폴론 신이 헥토르의 시체를 가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거칠게 다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체는 더 이상 상하지 않았다. 신들은 결국 아킬레우스가 광기 때문에 스스로 제 명예와 친구의 명예와 땅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다는 쪽으로 뜻을 모았다. 신들은 어떻게든 아킬레우스를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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