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일리어드3
by 송화은율레소스 왕의 백마를 훔쳐 오다
그 날 밤 그리스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가멤논은 숫제 뜬 눈이었다. 마음이 뒤숭숭해서 막사에서 통 잠을 이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침대에 깔려 있던 사자 가죽 이불을 걷어 어깨에 두르고는 현명한 장군 네스토르를 찾아나섰다.
그때 멜넬라오스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우연히 검은 선단 뒤에서 만나게 되었다. 트로이아 병사들이 평원 위에 피우고 있는 무수한 모닥불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마침내 메넬라오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처럼 잠 못 이루는 젊은 병사 하나를 은밀히 트로이아 진영으로 보내. 저자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듣게 하면 좋을 듯 합니다. 그러면 내일 우리가 대비할 방책을 세우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마침 대왕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정말 좋은 생각이다. 어디 한번 해보기로 하지.하지만 먼저 원로 회의에 안걸을 붙여 보아야 한다."
두 사람은 네스토르를 부르고 원로들을 소집했다. 모두들 갑옷 입을 여유가 없어서 이불 삼아 쓰고 왔던 짐승의 털가죽을 두르고 모여들었다.
대왕 일행은 우선 선단 방어선을 지키는 젊은 병사들이 졸지 않고 제대로 지키고 dLT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도량을 건너 트로이아 군의 모닥불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가서 그 계획에 대해 의논했다.
네스토르가 말했다.
"어둠을 이용해 젊은 병사 하나를 트로이아 진영으로 들여보내 우리가 심문할 만한 적 병사 하나를 잡아 오게 하든지. 모닥불 주위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엿듣고 오게 하든지 합시다. 그러면 아침에 저들이 우리를 공격할 것인지. 아니면 성으로 들어갈 것인지를 알아낼 수 있고. 따라서 대비책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
노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디오메데스가 벌떡일어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하지만 하나가 아니라 둘이 가야합니다. 함께 갈 사람을 제가 뽑을 수 있다면......."
"그럼 뽑으시오."
대왕과 장군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오뒤세우스를 선택했다.
오뒤세우스가 천천히 일어서면서 말했다.
"한밤중을 넘겼으니 가려면 빨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은 젊은 병사들로부터 무기와 가죽투구를 빌었다. 청동투구는 불빛을 받으면 번쩍거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사냥감을 찾으러 나서는 두 마리 사자처럼 어둠 속으로, 그리고 평원에 흩어진 시체사이로 묻어 들어갔다.
한편.같은 시각에 트로이아 진영에서도 헥토르가 지휘관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은밀하게 그리스 진영으로 파견할 염탐꾼을 뽑고 있었다.헥토르는 염탐꾼을 보내어 그리스 군의 보초 근무상태를 알아보고. 병사들의 사기가 죽어있는 것이 확인되면 새벽에 기습을 감행할 생각이었다.그는 누구든 그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면 적진에 있는 말 중에서 가장 좋은 말 두 마리를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트로이아 진영에는 돌론이라고 하는 생김새도 보잘 것 없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젊은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발은 어느 누구보다 빨랐다. 그가 이 세상에서 탐내는 것은 오로지 혈통 좋은 말뿐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말했다.
"헥토르 장군, 저에게 아킬레우스의 전차를 끄는 말 두 필을 주겠습니까? 그러면 지금당장 그리스군의 진영, 아가멤논의 막사로 숨어들어 장군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조리 알아 가지고 오겠습니다."
돌론은 활을 들고 늑대가죽을 어깨에 걸치고는 바닷가에 있는 그리스 진영을 향해 발소리를 죽이고 내달았다.
그러나 디오메데스와 오뒤세우스는 트로이아 진영으로 가는 도중에 저쪽에서 오는 돌론을 발견했다. 그들은 시체사이에 숨어 돌론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사냥개가 토끼를 좇듯이 뒤쫓아갔다. 돌론은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늧췄다.그는 두 명의 장군의 뒤에 바싹 달라붙은 채 따라오고 있어서 그들을 따돌릴 수도 자기 진영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방어벽 바로 앞에서 돌론을 덮치고는 곧 일으켜 세워다. 멱살을 잡힌 돌론은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부자인 자기 아버지가 엄청난 액수의 몸값을 지불할 것인즉 제발 자기의 죽이지 말라고 애원하였다.
"몸값 이야기를 하기 전에, 너의 진영에서는 멀고 우리 진영쪽으로는 너무 가까운 이 곳에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그것부터 말하라."
오뒤세우스가 물었다.
"헥토르 장군 께서 그리스 진영을 염탐해 오면 나중에 아킬레우스의 전차를 끄는 말 두 필을 주겠다고 약속해서 오게 돼었습니다.
돌론이 대답했다.
오뒤세우스가 그 말을 듣고 어둠 속에서 코웃음을 쳤다.
"꿈 한번 큰 녀석이군. 아킬레우스의 말은 인간 세상의 말이 아니다. 더구나 아킬레우스나 아킬레우스의 명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 몰 수가 없는 말이다. 어쨌든 잘 만났다. 내가 묻는 대로 대답해라. 트로이아 군이 평원에서 야영하고 있는 것은 새벽에 우리를 기습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지금은 꽤 잘 싸우고 있지만 여차하면 성 안으로 도망치기 위함인가? 트리오아 군의 초소는 어디어디에 있는가? 오늘 밤 헥토르 는 어디에서 자며 그의 전차를 끄는 말은 어디에 있느냐?
문득 오뒤세우스의 머리속에 트로이아 진영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말을 훔치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유명한 도둑이었던 할아버지의 피가 오뒤세우스의 핏줄에도 흐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들론은 다 말해야 살려줄 것 같아서 오뒤세우스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헥토르 장군은 주무시는 것이 아니고 지ㄹ금 원로들과 회의중 이십니다. 트로이아 병사들은 성안에 있는 가족들을 염려해 졸지 않고 잘 지키고 있습니다만. 연합군 중에서도 다른 나라에서 온 병사들은 가족이 안전한 곳에 있기 때문인지 파수 보는데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새벽에 기습 공격 여부는 제가 돌아가 그 동안 염탐한 것을 보고하는데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장군께서 말을 빼앗고 싶은 모양이신데 트로이아 진영에서 가장 값지고 혈통 좋은 말은 오늘 막 도착해서 연합군에 합류한 트라키아 왕 레서스의 막사에 있습니다. 이 막사는 우리 진영의 동쪽 끝에 있습니다. 백조처럼 하얗고 덩치가 크고 바람같이 빠른 이 두 마리의 말은, 신들에게나 어울리는 금은으로 장식한 레소스 왕의 전차를 끕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돌론은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디오메데스는 매정하게 말했다.
"우리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 그리스 진영을 염탐하려고?"
디오메데스가 칼을 뽑아 드는 순간 들론의 머리가 어깨 위에서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죽어 마땅하지. 다음 목표는 트라키아 왕의 말이오."
오뒤세우스가 말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염탐꾼의 시체를 갈대와 나뭇가지로 덮고, 그의 활과 담비 가죽 모자는 근처 나뭇가지에다 걸어 두었다. 돌아올 때 길을 찾는 표적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레소스 왕의 막사에 이르렀다. 병사들은 파수도 세우지 않은 채 골아 떨어져 있었다. 레소스 왕은 한가운데 놓인 전차 옆에서 자고 있고 주위에는 열두 경호병이 잠들어 있었다.
디오메데스는 순식간에 소리도 없이 레소스 왕과 열두 경호병을 죽였다. 오뒤세우스는 시체를 옆으로 치우고 말을 몰아낼 길을 열었다. 아직 싸움터에 나가지 못한 말이라 혹시 시체를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를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을 가죽끈을 자르고 상아색 전차로부터 말을 풀어 내었다. 전차도 훌륭하긴 했지만 그것까지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날이 희붐해지면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낌새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얀 말잔등에 훌쩍 뛰어오른 두 장군은 말을 몰아 트라키아의 죽은 병사들과 잠든 병사들, 반쯤 잠에서 깨어난 병사들 사이를 지나 그리스 진영으로 달렸다. 그들은 달려가는 길에 나뭇가지에 걸어 둔 돌론 의 담비 가죽 모자와 무기까지도 두루 챙겼다.
두 장군은 수많은 왕들과 지휘관들부터 환영을 받았다. 두 사람의 그 동안의 경위를 보고하자 모두들 함성을 질렀다. 레소스 왕이 죽었으니 트라키아 군이 귀국을 서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전투에 지치지 않은 수천 트라키아 운의 합류를 사전에 막은 셈이었다.
디오메데스는 자기가 타고 온 말에게 꿀에 버무린 밀을 먹였다. 오뒤세우스는 돌론의 피묻은 모자와 무기를 자기 배의 고물에다 내려놓다 아테나 여신에게 제물 올릴 준비를 했다.
제사가 끝나자 두 장군은 바다로 뛰어들어 밤새 설쳐대느라고 팔과 목과 다리에 묻은 피와 땀을 말끔하게 씻었다. 바닷물에 씻은 다음에는 노예들이 데워 놓은 물에 다시 한번 몸을 깨끗이 닦아 내고는 음식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이제 서서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붉은 소나기
분명히 날이 샜는데도 그리스 진영의 하늘은 어둡기만 했다. 제우스가 하늘의 검은 구름이라는 검은 구름은 모조리 모아 그리스 진영의 하늘에다 퍼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진영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는 트로이아 진영의 하늘은 화창했고 햇살도 강렬했다. 갑자기 그리스 진영을 뒤덮고 있는 구름으로부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처럼 붉은 비였다. 그러나 붉은 비가 불길한 조짐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리스 진영의 사기는 전날보다 훨씬 높았다. 디오메데스와 오뒤세우스가 그리스 군의 사기를 드높여 놓은 셈이었다.
아가멤논 대왕은 밝은 얼굴로 갑옷을 차려 있고 나와, 앞에는 보병을 배치하고 그 뒤에는 전차 부대를 배치하여 보병을 지원하게 했다. 그리고 전차 부대 뒤로는 창 부대와 활 부대, 그리고 투석기 부대를 배치했다.
이윽고 트로이아 군이 위에서 그리스 군을 덮쳐 누르듯 공격해 내려왔다. 양 진영의 군대는 격돌하면서 낫으로 수수를 베듯 그렇게 적을 베어나갔다. 오래지 않아 트로이아의 용감한 병사들의 투구가 그리스 병사들 사이에서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리스 군이 트로이아 진영으로 깊숙이 들어가 찌르고 베기 시작한 것이었다. 머리 위로는 화살이 쉭쉭 소리를 내면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목동들이 염소 다리를 한 개구쟁이 신인 판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유난히 조심하는 시각, 모두가 졸음을 느끼는 정오가 되었다. 아가멤논은 결사대를 이끌고 무섭게 밀고 들어갔다. 그는 이 공격에서 수많은 적군의 지휘관들을 베었는데 헥토르의 두 아우도 거기에 섞여 있었다. 보병은 보병을 베고, 전차병은 전차병을 찌르는 무서운 공격이었다. 그리스 결사대가 트로이아 부대를 치고 들어가는 광경은, 마치 바람 부는 날 불씨가 숲에 떨어져 이 나무 저 나무를 차례로 태워나가는 것과도 같았다. 전차 끄는 말들은 전차병을 잃은 다 부서진 전차를 끌고 좌충우돌하면서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짓밟고 다녔다.
그리스 군의 결사적인 공격에 트로이아 군은 성문 바로 앞까지 밀려났다. 트로이아 군은 거기에서 헥토르의 명에 따라 병사들을 점검하고 허물어진 대열을 다시 정비했다.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리면서 그리스 군의 다음 공격에 맞설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리스군의 공격은 성문앞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아가멤논이 팔에 창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상처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는 전차를 타고 검은 선단이 집결해 있는 본대로 돌아가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광경을 내려다 본 헥토르는, 사자를 공격하는 사냥개 떼를 향해 소리지르는 사냥꾼처럼 고함을 지르면서 선두에서 부하들을 몰고 공격해 내려왔다. 그리스군은 물보라가 치듯이 뿔뿔이 흩어졌다, 트로이아 군은 단숨에 그리스 군을 검은 선단 있는 곳까지 밀어부칠 기세였다. 그러나 오뒤세우스와 디오메데스가 도중에서 그들을 막고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던진 창에 트로이아 지휘관이 넷이나 말에서 떨어졌다. 그리스 군은 다시 힘을 얻고 트로이아 군을 밀고 나왔다. 헥토르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려는 찰라, 디오메데스가 칼로 그의 투구를 내리쳤다. 디오메데스의 칼이 헥토르의 청동 투구를 뚫은 것은 아니었지만 헥토르는 전차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부하들이 방패로 헥토르를 감쌌다. 헥토르는 곧 일어났다. 그의 눈이 다시 번쩍거리기 시작해따. 그는 다시 자기 전차에 올랐다. 전차병이 말의 잔등에 채찍질을 했다. 헥토르의 전차는 그리스 공격 부대의 왼쪽 날개를 겨냥하고 나아갔다.
디오메데스는 헥토르를 공격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싸움터 언저리에서만 살살 맴돌던 파리스가 디오메데스를 보고는 활에다 살을 먹여 그를 향해 쏘았다. 화살은 디오메데스의 발을 꿰뚫고 땅바닥에 꽂혔다. 디오메데스가 화살을 뽑아 내는 순간 오뒤세우스가 그 큰 방패로 디오메데스를 가려 주었다. 디오메데스는 전차에 실려 검은 선단이 있는 해변의 본진으로 후송되었다.
싸움터 한복판에서 싸우는 그리스 장군은 오뒤세우스뿐이었다. 트로이아 군은 사방에서 그를 협공했다. 오뒤세우스는 한 곳에 우뚝 서서, 궁지에 몰린 멧돼지가 사냥개를 뿌리쳐 내듯이 그렇게 트로이아 군의 칼날을 막아 내었다.
그러나 한 트로이아 군의 창날이 그의 가슴 가리개를 뚫고는 갈비뼈 사이에 박혔다. 오뒤세우스는 도망치는 그 창병을 돌아다 보고서 들고 있던 창을 던졌다. 창은 그 창병의 양 어깨 한가운데 꽂혔고 창병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오뒤세우스는 그 때까지도 옆구리에 꽂힌 채 덜렁거리던 창을 뽑아 내고 나서, 있는 힘을 다해 세 차례나 고함을 질러 그리스 전우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아이아스와 메넬라오스가 그 소리를 듣고서 트로이아 군을 헤치고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메넬라오스가 전차에다 그를 싣고 싸움터를 빠져 나갈 동안 큰 방패를 든 아이아스가 오뒤세우스의 자리를 채웠다.
그 때 헥토르가 그리스 군의 왼쪽 날개에서 되돌아 나왔다. 그의 주위에서 함성이 일었다. 파리스가 또 하나의 화살을 날렸다. 이번에는 마카온이 그 화살에 맞았다. 부상병을 치료하던 의사 마카온의 부상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는 즉시 전차에 실려 네스토르의 막사로 옮겨졌다.
목숨을 잃지 않은 대부분의 그리스 장군들은 부상을 당하고 싸움터를 떠나 있었다. 그런데 트로이아 군의 창병들이 다시 몰려왔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동안 아킬레우스는, 자기 배의 위로 불쑥 솟은 고물 위에 선 채 싸움의 진행 과정을 살펴볼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카온이 부상당해 네스토르의 전차에 실려갈 때는 달랐다. 그는 친구인 파트로클로스를 불러 마카온의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고 오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카온을 잃는다면 부상병 치료는 누가 한단 말인가? 큰일이군."
파트로클로스가 달려갔다. 마카온은 네스토르의 막사에서 그의 여종인 헤카메데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헤카메데는 마카온이 원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포도주에다 치즈를 풀어 먹이고 있었고, 또 하나의 시중드는 사람은 화살을 뽑아 내고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마침 네스토르가 젊은 전사 시절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뛰어들고 싶었지만 파트로클로스는 노장군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문지방에 선 채로 애를 태웠다. 노장군의 이야기가 끝나자 파트로클로스는 마카온의 용태를 물었다. 마카온 자신이, 죽지는 않겠지만 부상병을 며칠동안 돌보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파트로클로스가 돌아서서 나오려는데 네스트로가 그를 불러 세우고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말을 했다.
"자네 나라 사령관 아킬레우스에게 가서 전하게. 아직까지도 화가 덜 풀려 싸움터에 나올 수 없다면 다른 장군에게 지휘를 맡겨서라도 뮈르미돈 군사들을 내보내라고 말일세. 자네 는 아켈레우스와 키가 비슷하니까 만일 자네가 그의 갑옷을 입고 나서면 트로이아 군은 아킬레우스가 나온 줄 알고 혼비백산할 것이네. 누가 감히 아킬레우스와 대적하려고 하겠는가."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가 있는 곳으로 내달았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그의 걸음을 지체하게 했다. 지휘관 중의 하나인 에우뤼폴로스였다. 에우뤼폴로스는 장딴지에 화살을 맞고는 절뚝거리며 자기 막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창을 내 어깨에다 걸고 거기 매달리게."
파트로클로스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를 막사까지 데려다 주었다. 친구이기도 한 에우뤼폴로스가 함께 있어 달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파트로클로스는 단검으로 화살촉을 파내고 상처를 씻어 준 다음 통증을 가라앉히는 고약을 붙여 주었다.
그리스 선단을 둘러싼 싸움
헥토르는 최전선 부대에게 그리스 군 방어선 앞의 도랑을 건너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전차 끄는 말들이 도랑 앞에서 그 너비와 깊이를 가늠해 보고는 무서운지 힝힝힝 울었다. 도랑을 넓고 깊기도 하려니와 바닥에는 끝이 뾰족하게 깎인 말뚝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결국 트로이아 전차병들은 전차는 건너편에다 두고 다섯 명씩 짝을 지어 지휘자의 뒤를 따라 도랑을 뛰어넘었다. 헥토르와 파리스, 헬레노스와 아이네이아스, 그리고 사르페돈을 앞세운 트로이아 연합군은 밀집 대형을 이루었다. 그런 다음 수많은 소가죽 방패로 방벽을 만들어 세우고 그리스의 방어벽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리스 전차들이 드나드는 방어벽의 문은 열려 있었다. 말하자면 그 문은 싸움터에서 후퇴한 병사들을 위한 퇴각로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스 병사들은 서로 엉킨 채 문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트로이아 군에서 고집세기로 이름난 아시오스가 그 문을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정면을 향해 밤색말을 몰아갔다. 그러나 먼 북쪽 나라에서 온 두 라피타이 창병이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문 양쪽의 방어벽 위에서 돌덩이와 창을 던지는 전우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시오스의 공격은 두 창병의 창끝에서 좌절됐다. 문 앞은 여전히 퇴각하는 병사와 도망치는 병사들로 어지러웠다.
같은 방어벽의 다른 문 앞에서는 선봉을 맡고 있던 헥토르의 부대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제우스의 새인 독수리가 그들 머리 위를 날다가 부대 한복판에다 살아 있는 핏빛 뱀 한 마리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나쁜 징조로 받아들였다.
공격을 다음 날로 미루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그들에게 말했다.
"가장 좋은 징조가 무엇인지 말해 주랴? 그것은 바로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트로이아 군의 사기는 이 말 한 마디로 되살아났다.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헥토르의 뒤를 따랐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싸움판에서는 시르페돈이 친구이자 전우인 글라코스외 함께 산사자처럼 방어벽으로 달려갔다. 트로이아 연합군은 물밀 듯이 그 뒤를 좇았다. 그들은 마침내 방호벽에 구멍을 뚫었다. 더구나 글라코스가 팔에 화살을 맞는 바람에 화살촉을 뽑을 때까지 퇴각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어벽의 나무에는 무수한 핏자국이 찍혔다. 어느 지점이 되었든 방어벽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나 고함소리와 창칼 부딪치는 소리로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헥토르 부대는 있는 힘을 다해 나무 문짝을 부수고 방어벽을 허물고자 했다. 그러나 방어 벽 안에는 그리스 군이 방패로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방어벽이 있었다. 방어벽 위에서는 화살과 창이 어지럽게 트로이아 군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헥토르는 커다란 바위(두 사람이 힘을 합해도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바위였지만 제우스 신은 그 바위를 양털보다 가볍게 만들었다)를 번쩍 쳐부서지면서 목재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헥토르는 부하들에게 따라오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자신이 먼저 뛰어들었다. 트로이아 귄의 표효는 둑 터진 산골짝의 물소리를 방불케 했다. 그들은 문을 지나 양쪽에 서 있는 방어용 말뚝 울타리로 접근했다. 밀물 간은 트로이아 군의 굥격에 그리스 군은 뒤쪽에 정박해 있던 배 안으로 들어갔다.
트로이아 군이 그리스 전영 한복판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한 제우스 신은, 검은 겔리온 선고물에서 벌어지는 싸움판에서 눈길을 거두고 다른 일을 생각했다.
그러나 바다의 신이자 지진의 신인 푸른 머리카락의 포세이돈은 그리스 군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모른 체하지 않았다. 그는 수레에다 바람같이 빠른 말을 매고는 바다 밑에 있는 궁전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돌고래가 뱃머리와 나란히 달리듯 바다의 괴수들이 그와 나란히 달려나왔다. 마치 해변으로 밀려드는 흰 파도처럼 포세이돈 일행이 물 속에서 솟은 곳은 그리스 진영의 바로 옆이었다.
포세이돈은 지상으로 솟구치자마자 말과 마차는 그 자리에 두고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모습을 감춘 채로 트로이아 군에 밀리고 또 밀리는 그리스 군 사이로 들어가, 그들의 사기를 북돋우면서 한 발도 물러나지 말라고 응원했다. 누구의 격려를 받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이로써 힘을 얻은 그리스 군은 철벽 같은 저항을 했다. 포세이돈 신의 힘이 그들에게 흘러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트로이아 군을 밖으로 밀어 내고 검은 선단을 둘러샀다.
밀고 밀리는 어지러운 싸움의 와중에서 헥토르와 아이아스가 만났다. 아이아스는 배의 용골판 굄돌 구실을 하는 바위를 집어 번쩍 쳐들고는 헥토르에게 던졌다. 바위는 방패를 들고 있는 팔 위와 투구 끈 바로 밑을 때렸다. 헥토르는 백정의 도끼에 맞은 황소처럼 무너져 내렸다. 들고 있던 방패와 창이 쓰러진 그의 몸 위로 떨어졌다.
트로이아 군이 재빨리 그를 둘러쌌다. 군사들이 좌우 양쪽과 뒤쪽을 방패로 가려 길을 내자 몇몇 병사들이 그를 싸움터 밖으로 부축해 내었다. 용맹스러운 장수 헥토르가 죽은 듯이 끌려나가는 것을 본 그리스 군(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포세이돈 신은 그 때까지도 그들 속에 있었다)은 바다위로 휘몰아치는 폭풍 소리보다 더 큰 함성을 지르면서 트로이아 군을 방어벽 너머로, 도랑 너머로, 이윽고 평원으로 밀어 내었다.
제우스 신이 다시 토로이아를 내려다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제우스는 평원으로 밀리는 트로이아 군과 병사들의 부축을 받고 크산토스 강가에 이른 헥토르가 피를 토하고 있는 걸 보게 되었다. 그는 그것이 자기 아우 포세이돈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포세이돈이라면 제우스에게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힘으로 보아도 결코 제우스에게 뒤지지 않는 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제우스는 태양의 신이자 활의 신이며 인류에게 공포를 불어넣은 신 아폴론을 불러 내었다. 그리고는 지상으로 내려가 헥토르에게 새로운 생명과 헥토르 자신도 일찍이 보도 듣도 못한 정도의 힘을 불어넣어 주고 오라고 말했다.
아폴론은 태양의 눈으로부터 새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지상으로 날아내려갔다. 헥토르는 부하들로부터 찬물 찜질을 받고 있었다.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새로운 생명과 신성이 깃든 힘을 불어 넣어 주어다. 그러자 헥토르는 벌떡 일어나서 갑옷을 찾아 입고는 다시 싸움터로 되돌아갔다.
그리스 병사들의 눈에 폭풍우같이 밀고 들어오는 헥토르의 모습이 보였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을 본 그ㄹ리스 병사들은 혼비백산했다. 무수한 그리스 병사들이 선단 쪽으로 후퇴햇지만, 아이아스와 최전선의 투사들은 인간 방패를 만들고 헥토르를 대적했다. 그러나 헥토르는 트로이아 전차 부대를 이끌고 천둥치는 소리를 내면서 달려와, 던져진 창이 가죽 방패를 뚫듯이 갓 만들어진 방패를 돌파했다. 최전선이 무너지면서 그리스 병사들이 풍비박산했다. 평원과 도랑과 방어벽 문 앞에서는 무수한 인간이 무수한 인간을 죽이는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
트로이아 병사들이 시체에서 갑옷을 벗기려 하자 헥토르가 외쳤다.
"지금은 그까짓 전쟁 쓰레기를 챙길 때가 아니다. 선단으로 공격해 들어가라. 뒤에서 얼쩡대는 놈이 있으면 죽여서 개들에게 던져 주리라!"
헥토르는 채찍을 어깨 위로 높이 쳐들었다가 말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그 뒤를 따르는 전차들이 제우스 신의 벼락 같은 소리를 내면서 지축을 흔들었다. 병사들이 내던지는 창은 흡사 제우스 신이 던지는 번개 같았다.
트로이아 군은 도랑 앞으로 전차를 몰고 갔다. 이번에는 말들고 도랑 바닥에 끝이 뾰족하게 깎인 말뚝이 촘촘히 박혀 있었는데도 흠칫거리지 않았다. 전차가 도랑을 뛰어넘는 모습은 마치 가라앉아가는 배 위를 뛰어넘는 파도 같았다. 전차는 바닥에 걸리적거리는 시체 더미는 물론이고 막사의 똇장 지붕과 울타리까지 뛰어넘고는, 앞을 가로막던 그리스 군을 빗자루로 쓸어 버리듯이 내몰며 나갔다. 창칼과 도끼를 휘두르면서 그들은 선단 속으로 진입했다. 그리스 군은 겔리온 선 갑판에 비둘기 무리처럼 오구구 모여 해전 때나 쓰는 긴 갈고리를 들고 트로이아 군에 대항하려고 했다.
가장 격렬하고 중요한 전투가 계속될 동안, 신으로부터 신통한 힘을 나누어 받은 헥토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싸움터에 있었다. 싸움으로 인한 광기로 그의 눈은 벌겋게 이글거리고 있었고 입기에는 양털 같은 게거품이 묻어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영웅의 광휘가 횃불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는 전차를 달리면서도 끊임없이 고함을 질렀는데, 그 소리는 온 싸움터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불을 질러라! 검은 선단에 불을 질러라!"
병사들은 먹을 것을 조리하던 모닥불 불씨로 횃불을 만들어 들고는, 말꼬리 같은 연기가 나는 불꽃을 머리 위로 흔들면서 헥토르의 뒤를 따랐다. 죽은 자들이 켜를 이루며 두껍게 쌓여 있었다. 산 자들은 헥토르의 지휘 아래 시체의 산을 딛고 배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갑판에서는 그리스 군이 필사적으로 트로이아 군의 승산을 저지했다
트로이아 군이 맨 앞에 있는 겔리온 선을 지나 물밀듯이 밀려들자 아이아스가 부하들에게 소리 쳤다.
"힘을 내라. 힘을 내 헥토르를 막아라. 저놈이 우리 선단 사이를 누비면서 하는 짓거리. 그것은 춤이 아니다."
아이아스는 이갑판 저갑판으로 뛰어다니면서 키 큰 사람의 서너 길은 족히 되어 보이는 갈고리로 적군을 찍었다. 그 모습은 흡사 네마리의 말을 몰면서 이 말잔등에서 저 말잔등으로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기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연기와 불꽃이 솟구쳐 오르면서 소금물에 절여져 있던 배의 널빤지가 우지직우지직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헥토르의 전령은 계속해서 외쳐대었다.
"불을 질러라! 검은 선단에다 불을 질러라!"
파트로클로스가 싸움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따라서 그리스 지영 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에우뤼폴로스의 막사를 나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파트로클로스가 보기에 선단의 반은 불길에 휩싸인 것 같았다. 전투는 선단을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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