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일리어드2
by 송화은율일대일 결투에 나서다
열이틀째 되는 날, 벼락의 신 제우스가 올림포스 산 위로 돌아왔다. 테니스는 제우스에게 다려가 트로이아 군에게 한 차례 승리를 안겨 달라고 탄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왕 아가멤논과 그리스 연합군의 장군들이 자기 아들 아킬레우스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게 해 달라고 빌었다. 제우스는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테티스의 부탁이니 들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곰곰히 생각했다. 그러다 그 날 밤. 나무로 지은 막사에서 잠을 자고 있는 아가멤논으로 하여금 가짜 꿈을 한 토막 꾸게 했다. 가짜 꿈에서는 현명한 노장군 네스토르가 대왕의 침대 옆에 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왕 중의 왕이신 전하, 군대에 전투를 준비하게 하십시오. 제우스 신께서는, 만일 대왕께서 내일 트로이아를 공격한다면 전화의 군대에게는 승리, 트로이아 군대에게는 슬픔과 죽음을 안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가멤논이 꿈에서 깨어난 것은 희붐한 새벽 빛이 문간을 밝히고 있을 때였다. 그는 꿈을 떠올리자 기대로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나 새벽 빛이 빛줄기로 변할 즈음부터는 꿈이 사실과 반대일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가멤논은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갑옷을 입고 부하들에게 전투 준비 명령을 내리는 대신 여느 때 입는 헐거운 겉옷과 망토를 걸치고 손에는 대왕을 상징하는 금장식이 수놓인 올리브 나무 지팡이를 쥐었다. 그런 다음 왕과 장군들을 소집하여 꿈 이야기를 들려 주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 보았다. 걱정스러워하는 대왕의 마음이 전해지자 듣고 있던 군사들 중에서도 싸우자고 고함을 지르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염려스러운 듯이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왕이 엉뚱한 제안을 했다. 연합군의 정신 상태를 시험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연합군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포위 공격전을 너무 오래 끌어왔으니 이제는 배를 바다 쪽으로 도리고 막사는 모두 불태워 버리고 그리스 본토로 돌아가겠다고 말이다. 만일 자신의 말을 곧기 듣고 배 쪽으로 달려가는 병사들을, 그들이 미처 배에 이르기 전에 지휘관들이 다시 돌려 세운다면 분위기가 좀더 살아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포위 공격전은 실제로도 너무 지루하게 끌어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고향 땅과 두고 온 처자식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아가멤논의 말을 듣자마자, 서풍 앞에서 파도를 일으키는 바다처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성을 지르며 배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 뒤로 먼지 구름이 일었다. 지휘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만은 바위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지휘관들에게 대왕이 농담 삼아 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그렇게 오래도록 공격해 온 트로이아를 두고 떠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외쳤다. 그는 외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지휘봉 삼아 흔들면서 마치 양치는 목동처럼 병사들을 제자리로 내몰았다. 병사들은 모두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지만 낙심천만이었다. 사기가 오를 리가 없었다.
병사 중의 한 명이 항의했다. 테르사테스라는 이름의 안짱다리 병사였다. 그는 무리 가운데서 앞으로 나와 장군들을 조롱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지휘관들을 욕보이는 한편, 병사들에게 따를 만한 가치가 없는 지휘관들을 떠나 싸움터에서 도망치라고 말했다.
오뒤세우스는 서둘러 테르사테스의 입을 막지 않으면 병사들의 마음이 흔들릴 것으로 판단하고는, 그를 붙잡아 왕위를 상징하는 지팡이로 흠씬 두들겨 주었다. 테르사테스는 피를 흘리면서 어린애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오뒤세우스는 데르사테스를 땅바닥에다 내동댕이친 다음 실컷 비웃어 주었다. 가까이 있던 이들도 모두 그를 비웃었다. 웃음은 무리 속으로 퍼져갔다.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 체 따라 웃었다. 그들은 창칼을 높이 치켜들고는 오뒤세우스를 환호했다. 오뒤세우스와 백발의 네스토르는 대왕을 대신해 전투 준비를 외쳤다.
그리스 군은 각 부대별로 자기네 왕과 장군과 지휘관들의 명령에 따라서, 사로잡은 말에 마구를 채워 전차를 끌게 했다. 그리고는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물밀듯이 들판을 휩쓸고 나아갔다. 그 모습은 마치 짝짓기 철이 되어 먼 땅에서 원래 살던 늪으로 돌아오는 두루미떼 같았다.
아킬레우스가 싸움터에서 등을 돌렸다는 소식에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트로이아 연합군은 그리스 연합군을 맞기 위해 성에서 몰려 나왔다. 포위전이 시작된 이래 실로 처음으로 두 군대가 맞붙은 것이었다.
두 개의 긴 전투 대열이 서로 마주 보고 섰다. 트로이아 군에서는 파리스가 거들먹거리며 평원으로 나왔다. 그는 어깨에 표범 가죽을 걸치고, 손에는 두 개의 청동머리 장식이 박힌 창 두 자루와 큰 활을 들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 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누구든지 나와서 자기와 일대일로 싸우자고 말이다.
헬레네의 지아비인 메넬라오스는 먹이감을 앞에 둔 사자처럼 좋아했다. 그는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갑옷이 햇빛에 번쩍거렸다. 그러나 자기와 싸울 상대가 누구인가를 알아 낸 파리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섭기도 한 데다 몹시 부끄러워진 그는 트로이아 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헥토르는 파리스를 겁쟁이라고 놀려준 뒤, 어떻게 하든 그의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했다. 파리스가 다시 용기를 내자, 헥토르는 그리스 군에게 파리스와 메넬라오스와 일대일 싸움으로 전쟁을 아예 끝내 버리자는 제안을 했다. 그의 제안은 곧 사생결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헥토르는 만일 그 싸움에서 파리스가 지면 헬레네를 금은보석과 함께 첫 지아비인 메넬라오스와 그의 군사들에게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반대로 메넬라오스가 그 싸움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헬레네는 트로이아에 그대로 남고 그리스 연합군은 빈손으로 바다를 건너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리스 군은 이에 동의했다. 헥토르는 신들도 이 일대일의 조건부 대결을 용납할 것인지 그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트로이아 성안으로 사람을 들여보내 제물로 쓰일 양 두 마리를 몰아 오게 했다.
이윽고 두 마리의 양이 도착했다.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파리스는 갑옷을 빌어 이었다. 번쩍거리는 가슴 가리개와 다리 보호대를 하고, 꼭대기에 말총이 촘촘히 박혀 움직일 때마다 바람에 나부끼는 큼지막한 투구도 썼다. 태양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면서 날씨가 몹시 더워졌다. 그리스 군과 트로이아 군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갑옷을 벗고 방패에 기댄 채 일대일의 싸움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한편,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베틀로 보라색 겉옷감을 짜고 있던 헬레네는 파리스와 자기의 첫 지아비 사이에 결투가 벌어진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헬레네는 베틀에서 일어나 머리에 너울을 쓰고 가까운 성루 위로 올라갔다.
프리아모스 왕은 몇몇 원로들과 함께 벌써 그 곳에 올라와 있었다. 왕은 평원과 그 평원에서 마주 진치고 있는 양쪽 군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헬레네가 올라오는 것을 본 원로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놓고 싸우는 것은 수치가 아니지만, 만일 헬레네가 자신의 첫 지아비에게 돌아간다면 트로이아로서는 무척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느냐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헬레네를 늘 자애로 거두어 주던 프라이모스 왕은 헬레네가 원로들의 수군거림에 흠칫하는 것을 보고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가까이 오게 하고서 이런 말을 해주었다.
"얘야,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만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너희 나라와 우리 나라 백성들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다 신들의 뜻이 아니겠느냐"
헬레네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저에게 늘 자애로우십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남편과 자식을 두고 떠나기 전에 죽어 버렸어야 했는데……. 뻔뻔스럽게도 파리스를 따라와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하다니, 저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프리아모스 왕은 헬레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성루에서 뛰어내릴 것 같았던지, 그녀를 가까이 끌어와 곁에 두고 그리스 진영의 장군들을 가리키며 이름을 물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딴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나란히 선 채로 한동안 평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나라의 군대 사이로 가로놓인 평원에 간단한 제단이 마련되었다. 양쪽 장군들은 양을 죽여 그것을 제물로 삼아, 두 사람의 일애일 싸울 결과가 어떻게 나든 간에 반드시 승복하겠노라고 맹세했다. 곧 네모닌 싸움터가 마련되었다. 심판관으로 뽑힌 병사들이 투구에다 두 개의 나무조각을 넣고 제비뽑기에 들어갔다.
누가 먼저 창을 던지느냐, 그것을 결정하는 제비뽑기였다. 헥토르가 투구를 흔들었다.파리스의 제비가 잘 다져진 싸움터 바닥에 떨어졌다. 모두들 침을 삼키고 결과를 기다렸다.
"파리스다! 파리스가 먼저 창을 던진다!"
파리스가 창을 뒤로 한껏 젖혔다가 던졌다. 그러나 파리스의 창끝은 메넬라오스의 방패에 박힌 사마귀 모양의 징에 맞고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메넬라오스가 그 우렁찬 목소리로 신들의 아버지 이름을 불렀다.
"위대한 제우스시여! 제 식탁에서 소금을 함께 먹고, 제 지붕아래에서 함께 잤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배반하게 한 못된 짓을 저지른 이 자에게 그 값을 치르게 하소서!
그는 마음을 속에 쌓인 원한을 있는 대로 실어 힘껏 창을 던졌다.
창끝은 파리스의 방패와 가슴 가리개를 뚫고 윗옷까지 뚫었다. 그러나 파리스가 몸을 옆으로 비튼 덕분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메넬오스는 고함을 지르고 큰 칼을 흔들면서 파리스에게 돌진해왔다. 그러나 그의 칼은 파리스의 투구 위에 달린 빗살 모양의 구리 장식에 맞으면서 네 조각으로 부러졌다. 부러진 칼날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메넬라오스는 쓸모 없게 된 칼을 버리고는 마치 먹이를 공격하는 표범처럼 파리스를 덮쳤다. 그리고는 투구 위에 달린 말총 장식을 거머쥐고 그리스 진영으로 끌고가려고 했다. 그러나 아프로디테 여신은 파리스의 턱 밑에 묶여 있던 투구의 턱끈을 끊어 버렸다. 메넬라오스는 말총 장식만 한 줌 거머쥐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말총 장식을 잡고 파리스의 투구를 공중에서 한 차례 돌리고는 그리스 진영의 한복판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런 다음 싸움을 끝장내기 위해 다시 파리스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트로이아의 왕자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아프로디테 여신의 파리스를 겉옷으로 감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한 뒤, 프리아모스 왕의 궁전 중에서 가장 높고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메넬라오스가 사라진 적을 찾아 고함을 지르면서 길길이 날뛰고 있을 동안, 그리스 군사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자신들과 트로이아군 사이에 했었던 약속대로라면 이제 헬레네는 자기네 진영으로 돌아올 것이고, 그러면 헬레네와 함께 모래톱 가까이에 있는 배로 달려가 오래 전에 떠나온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프리아모스 왕에게 손을 잡힌 체 설루에서 평원을 내려다보던 헬레네도 그리스 진영의 병사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아프로디테 여신이 헬레네의 곁으로 다가갔다. 내리꽂히는 제비처럼 눈깜짝할 사이였기 때문에 여신이 거기에[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헬레네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네가 거처하던 곳으로 가자. 네 지아비 파리스가, 손님을 맞는 큰 방에서 너를 부르고 있으니....."
그러자 헬레네가 대답했다.
"파리스는 이제 저의 지아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지났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저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헬레네가 거절한다고 해서 물러설 사랑의 여신이 아니였다. 여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네 마음은 잘 알지만. 이 날 이 때까지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 주었던 사랑을 증오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너를 증오하던 그리스 인들을 마음돌리기가 어렵지 않은 것처럼 트로이아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 역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곧 두 나라 사이의 참혹한 주검을 보게 됙 것인즉, 이게 바로 네가 바라던 바가 아닌가."
헬레네는 겁이 났다. 그녀는 너울로 얼굴고 가리고 여신을 따가 파리스의 살던 집으로 갔다. 파리스는 넓은 방 안의 침대 가에 앉아 있었다. 무장을 벗은 그의 모습은 목에 남아 있는 투구끈에 죈 자국만 아니라면, 싸움터에서 왔다기보다는 잔칫집에서 방금 돌아온 사람 같았다.
성난 얼굴을 하고 그 앞에 선 헬레네가 소리쳤다.
"네 그래요, 싸움터에서 돌아왔다, 이거죠? 그렇다면 내 인사를 받으셔야지요.
내 인사는 이렇답니다. 두나라 군대 사이에서 차라리 나의 첫 지아비, 네넬라오스의 손에 죽어 버리지 그랬어요?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분처럼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을 거예요."
그러자 파리스가 일어나 헬레네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말하지 마오. 싸움터에서 막 돌아온 사람에게 그렇게 모진 말을 하는 법이 아니라오. 메넬라오스와는 또 한 차례 싸울 때가 올 거요. 어쨌든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쏟아온 사랑을 잊지 말아 주오."
"당신이나 두 나라 사이의 맹세를 잊지 마세요. 그 맹세로 인해 나는 다시 메넬라오스의 아내가 되었어요. 나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여자가 아니에요."
헬레네는 한 차례 파리스를 쏘아보고는 돌아서려고 했다. 그러나 아프로디테 여신은 알고 있었다. <예쁜 뺨>헬레네가 자기 나라의 백성들에게 돌아가면 전쟁은 날 테지만 트로니아 왕국은 결국 패배자가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되면 파리스에게 했던 약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고, 자신은 신들의 눈에 우스꽝스러운 여신으로 보일 것이 아닌가. 아프로디테 여신은 헤라와 아테나늬 조롱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여신은 헬레네에게 마법을 걸어 그녀의 앞에서 서 있는 파리스를 십 년 전의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 배를 항구에 기다리게 하고 스파르타의 올리브 숲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던, 바로 그 때에의 파리스로 말이다.
헬레네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트로이다 성의 그 방에서 파리스와 함께 살기로 했다.
트로이아 왕가의 여인들
전쟁은 그 날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해도 두 진영의 휴전 협정이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에 숨돌릴 여유는 있는 셈이었다. 따라서 그 틈을 이용해 평화회담을 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리스 연합군 편에 서 있던 아테나 여신은 그 휴전 협정을 깨뜨리기로 마음먹었다.
아테나는 트로이아 연합군에 참전하고 있던 왕자 중의 하나인 판다로스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스의 장군 중에서도 빼어난 장군인 메넬라오스를 활로 쏘아 죽이면 멋지소 근사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판다로스는 큼직한 자기 뿔활에다 화살을 하나 먹여 힘껏 당겼다가는 깍지손을 놓았다. 화살은 똑바로 날아가 메넬라오스 왕의 가슴 가리개를 꿰뚫었다. 왕의 가슴에선 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아우인 메넬라오스가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가멥논은 몹시 불안해 했다. 만일에 메넬라오스가 죽는다면 그리스 군의 사기는 떨어질 것이라고, 그리스 연합군은 귀국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트로이아 연합군은 메넬라오스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출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메넬라오스는 놀란 말을 진정시키듯 아가멤논을 안심시키고는 이런 말을 했다.
"병사들에게 겁을 주면 안 됩니다. 보십시오. 화살이 깊게 박히지는 않아서 화살촉만 뽑으면 싸우는 데 별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리스 진영의 의사 마카온이 와서 화살촉을 뽑았다. 과연 상처가 그리 깊지는 않았다.
그러나 휴전은 깨어지고 병사들은 벗었던 갑옷을 다시 입었다. 전투 준비를 알리는 뿔나팔이 울렸다. 십 년만에 처음으로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질 모양이었다.
양쪽 군대는 일제히 가운데 있던 평원으로 진격했다. 트로이아 연합군은 각기 저희 나라 말로 갈가마귀 떼처럼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 연합군 사이에서는 죽음처럼 고요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마침내 양쪽 군대가 격돌했다. 방패와 방패가 맞부딪쳤다. 마치 산골짝물이 콸콸 소리는 내고 흘러내리면서 무수한 바위를 굴리는 것과 비슷한 광경이 벌어졌다. 치고 받고 밀고 당기느라고 싸움터가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다. 양측이 만나면서 길게 형성되어 있던 전선은 두 줄기의 산골짝물이 만났을 때처럼 소용돌이와 역류가 일었다. 각각의 소용돌이마다 작은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 보병들 사이에서건 전차병 사이에서건 눈에는 눈, 칼에는 칼이었다.
한 병사가 쓰러지면 그 병사의 시체를 둘러싸고 전리품으로 갑옷을 벗기려는 적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칼을 휘두르며 함께 싸웠던 전우의 명예를 지키려는 병사 사이에 또 한 차례의 싸움이 벌어지고는 했다. 자옥하게 인 먼지가 달라붙어 병사들의 모습이 하얗게 보였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과 돌멩이에 병사들은 차례로 무너져 갔다.
그 싸움터를 <우레목> 디오메데스는 흡사 전투에 휘한 사람처럼 누비고 다녔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시체가 쌓였다. 그 모습은 마치 홍수가 지나간 자리에 부러지고 찢긴 나무 등걸이 쌓이는 것과도 비슷했다.
헥토르는 뤼키아 왕 사르페돈의 도움을 받으면서 천신만고 끝에 그리스 연합군을 검은 선단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뒤세우스와 디오메데스의 반격을 받고 다시 뒤로 밀려 나야 했다.
해가 기울고 불볕 더위가 사그러들 무렵, 치열하던 전투는 그리스 연합군에게는 유리하게, 트로이아 연합군에는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트로이아 연합군은 어느 새 자기 진영의 성문을 등지고 싸워야 할 정도로 그리스 연합군의 공격에 밀려나 있었다.
바로 그럴 즈음 트로이아에서 가장 용하다는 점쟁이가 헥토르를 찾아왔다. 점쟁이는 전사자들 사이에 서서 헥토르에게, 지휘권을 잠시 아이네이아스에게 맡겨 두고 성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만나 보라고 했다.
점쟁이의 말은 이랬다.
"왕비님께 이렇게 말씀 드리십시오. 시녀를 불러 보석이 박힌 옷가지를 모두 모으게 한 뒤, 아테나 신전으로 올라가 여신의 무릎에 놓으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 연합군을 돕는 손길을 잠시 멈추고 트로이아 백성에게도 자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시라고요. 트로이아 백성 또한 여신의 백성이 아니겠습니다?"
헥토르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이네이아스에게 지휘권을 넘겨 주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어찌나 서둘러 잰 걸음으로 걸었던지 그가 등에 맨 소가죽 방패가 자꾸만 발 뒤꿈치와 뒤통수를 찍을 정도였다.
성 안으로 들어간 헥토르는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의 왕궁이 있는 성채로 달려갔다. 그의 어머니는 잔 가장자리까지 남실남실하도록 따른 포도주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헥토르에게 어서 마시고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헥토르는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어머니. 싸움터에서 오는 길이라 몸이 이렇게 지저분합니다. 저의 손은 너무 부정을 탄 손이라서 신들에게 제물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바로 싸움터로 돌아가야 할 처 지여서 지체할 여유가 없습니다."
점쟁이의 말은 전한 헥토르는 어머니를 남겨 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가 그 길로 싸움터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헬레네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 때문이었다. 그는 왕궁 안뜰을 가로질러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이 파리스에게 내어 준 집으로 갔다.
파리스는 그 집의 맨 위에 있는 방에 있었다. 파리스는 무장하고 싸움터로 나갈 생각은 않고 활을 가지고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방 한 구석에서는 헬레네가 베틀에 앉아 시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큼지막한 벽걸이를 짜고 있었다. 헬레네는 등을 보이며 앉아 있었지만 방 안 분위기는 냉랭했다.
문간에 선 채로 헥토르가 아우에게 소리쳤다.
"성벽 아래에서는 십 년 전 네가 저지른 못된 짓 때문에 수많은 부하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제 일어나거라. 무기를 가지고 하는 장난은 당장 집어치우고 갑옷을 입고 부하들과 합류하도록 해라."
파리스는 웃었다. 사람의 분노를 일시에 가라앉게 하는 미소였다. 그는 일어나 가슴 가리개를 집으면서 말했다.
"형님, 거칠기는 합니다만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제가 겁쟁이라서 여기에 이렇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한 짓을 생각하고 마음이 약해진 나머지 잠시 뜰을 들이고 있었을 뿐입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다시 힘이 돌아올 것이고, 그러면 나가서 병사들과 합류할 생각입니다. 형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보십시오. 헬레네는 싸움터로 나가라는 말 한 마디 없이 저러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갑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헬레네가 돌아다 보지도 않고 말했다.
"신들이 조금더 자비로우셨다면, 저는 여자가 등을 떠밀어야 싸움터로 나가는 사람의 옆에는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헬레네는 그제서야 일어나, 옆에 있는 의자 위에 놓여 있던 물들인 양털 깔개를 판판히 퍼 주고 헥토르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그러자 헥토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지금 달려가서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 합니다. 그러자면 시간이 없습니다. 저 친구에게 빨리 무장하고 나가라고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서두르면 내가 성문을 나갈 때 함께 나갈 수 있을 겁니다. "
밖으로 나온 그는 자기 집으로 내달았다. 그러나 아내 안드로마케는 집에 없었다. 하녀의 말에 따르면, 트로이아 군이 밀리고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를 굳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아기를 안은 시녀를 데리고 성문 위로 올라갔다는 것이었다.
헥토르는 성문 위로 올라가 보았다. 아내는 성채 지붕 위에 있었다. 옆에는 아들 아쉬튀어낙스를 어르는 시녀가 서 있었다.
안드로마케가 달려와 남편의 손을 잡고 울면서 싸움터로 돌아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가면 못 돌아오십니다. 저희들에게는 다시는 못 돌아오십니다."
"아마도 그럴테지. 그래서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이라오."
안드로마케는 섧디섧게 울었다.
"저에게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습니다. 오빠 일곱은 한 날 한 시에 저 암흑의 저승, 하데스의 나라로 갔습니다. 당신은 그 동안 저에게 아버지와 오빠, 사랑하는 지아비 노릇을 해주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당신마저 잃을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와 당신의 아들을 가엾게 여겨 주세요. 싸울 만큼 싸우셨으니 이젠 저희들과 함께………."
헥토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투구의 말총 장식이 싸움터 쪽으로 쏠렸다.
"그대와 함께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소. 또 하나의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오.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오. 아니고말고, 나는 트로이아가 멸망할 때가 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이 일로 인한 내 슬픔은, 그 날이 와서 그대가 노예로 끌려가 남모르는 아낙네의 집에서 베를 짜고 낯선 우물에서 물을 나르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는 슬픔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오. 그 날이 오면 나는 아마도 죽어서 흙에 묻혀 있겠지. 그래서 그대가 끌려가면서 지르는 비명 소리도 듣지 못할 테지."
그는 손을 내밀어 어린 아들을 받아 안으려 했다. 그러나 아기는 몸을 움츠렸다. 말총 볏이 출렁거리는 구리 투구가 무서워서 그러는 것 같았다. 안드로마케는 슬픔에 젖어 있는 데도 헥토르는 웃고 있었다. 그는 투구를 벗어 바닥에다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아들 아스튀어낙스가 웃으면서 그의 품에 안겼다. 헥토르는 아기를 한 차례 어르고 뺨에 입을 맞춘 다음 신들에게 아들의 앞날을 부탁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런 다음에야 아들을 안드로마케에게 넘겨주고 무엇을 했으면 좋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 둘을 한꺼번에 껴안고는 가만히 있었다.
"울지 말아요. 시녀를 데리고 내려가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 하도록 하시오. 전쟁은 남자들의 일이라오."
헥토르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투구를 집어 쓰고 그 자리를 떠났다.
아가멤논 대왕이 보낸 사절단
파리스는 형과 합류했다. 두 사람은 험한 말을 나눈 사람들 같지 않게 나란히 성문을 나와 싸움터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이 돌아오자 트로이아 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싸움터는 다시 트로이아 성벽에서 앞으로 앞으로 옮겨갔다. 그리스 군은 뒤로 밀려 조만간 검은 선단을 세워 둔 해변가까지 이를 지경이었다.
올림포스 산정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아테나 여신의 눈에도 그 날의 참상은 눈뜨고 못 볼 정도였다. 그래서 여신은 트로이아 성채에 있는 자기 신전 앞에 바쳐진 보석 옷을 거들떠보지는 않았지만, 그 날의 전투는 그것으로 끝내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아테나 여신은 헥토르로 하여금, 해가 지기 전에 한 차례의 일대일 결전을 끝으로 그 날 전투를 마무리 지을 생각을 하게 했다. 그가 생각하는 일대일 결전이란 파리스가 시작했던 메넬라오스와의 일대일 결전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벌였던 어중간하게 끝나는 그런 결전은 아니었다.
헥토르는 그리스 군을 추격하는 트로이아 군대를 불러들이고 아가멤논에게 사절을 보내어 자기 뜻을 전하게 했다. 양쪽의 군사들이 빈 평원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을 때, 그는 앞으로 나서서 그리스 진영을 향해 자기와 싸울 사람을 내보내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메넬라오스가 그 날 두 번째 도전도 자신이 받아들이겠노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대왕 아가멤논은 허락하지 않았다. 메넬라오스가 용장 헥토르와 비교해 아무래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진영에서는 다시 한 번 나무 조각을 투구에 넣고 흔들어 제비를 뽑았다. 뽑힌 사람은 그리스 중에서 키가 가장 크고 힘도 제일 센 살라미스 사람 아이아스였다.
그 날 들어 두 번째로 평원에는 네모진 싸움터가 만들어졌다. 아이아스는 그 싸움터 안으로 전쟁신 만큼이나 씩씩한 모습으로 헥토르를 맞으러 들어섰다. 그는 청동에다 소가죽을 일곱 겹이나 입힌 큼직한 방패를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싸우기 전에 으레 그렇게 하듯이 한 차례씩 상대를 조롱하고는 창 던질 자세를 잡았다.
헥토르가 먼저 창을 던졌다. 그의 창은 청동과 여섯 겹의 소가죽을 뚫고는 일곱 번째 소가죽에 박혔다. 이번에는 아이아스가 창을 던졌다. 아이아스의 창은 헥토르의 방패를 뚫고 가슴 가리개에 꽂혔다. 창이 꽂히는 순간, 헥토르가 목을 뒤튼 바람에 그 창끝도 헥토르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두 사람은 투창을 들고 어울려 서로 상대를 몰아 부쳤다.
아이아스의 창날이 헥토르의 목줄을 베었다. 헥토르의 목에서는 금방 검붉은 피가 콸콸 쏟아졌다. 헥토르도 투창으로 찌르고 들어갔다. 그러나 아이아스가 몸을 비켜 창끝은 아이아스가 들고 있던 방패의 장식에 스쳤을 뿐이었다.
헥토르는 투창을 버리고 가까이 있던 바위를 하나 집어들어 아이아스의 방패를 향해 던졌다.
아이아스는 뒤로 물러서면서 그보다 더 큰 바위를 찾아들고는 있는 힘을 다해 헥토르를 향해 던졌다. 헥토르는 바위를 막다가 방패가 부숴져 버려 그만 무릎에 힘이 빠지고 땅바닥으로 벌렁 쓰러져 버렸다.
헥토르는 세상이 가물가물하고 빙빙 도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 힘을 차리고 일어나 칼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아이아스도 칼을 뽑아들었다. 둘은 한 덩어리처럼 붙어 서서 칼질을 주고 받았다. 그러자 양쪽 진영에서 전령이 달려나와 두 장군에게 싸움을 중단하라는 뜻을 전했다. 두 사람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용맹을 떨친 듯한 데다가 벌써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을 집고 선 헥토르의 눈이 석양으로 붉게 물들었다. 헥토르는 트로이아 연합군 사령관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아이아스에게 말했다.
"오늘 싸움은 이 정도로 끝내자. 신들이 누구에게 승리를 안기는지, 나중에 다시 싸워서 확 인해 보기로 하자. 날이 저물고 있으니 싸움은 여기에서 일단 멈추고 밤을 맞는 것이 좋겠다."
"당신의 말이 옳다."
아이아스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헥토르가 말을 이었다.
"그대와는 싸움터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해어지되 서로 선물 을 주고 받고 헤어지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면 뒷날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은 적으로서 싸우다가 헤어질 때는 친구가 되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헥토르는 부하에게 손잡이가 은으로 세공된 칼 한 자루를 가져오게 해서 아이아스에게 주었다. 아이아스는 답례로 넓직한 보라색 허리띠를 주었다. 두 사람은 헤어져 각자 자기네 진영으로 돌아갔다.
옛 무덤과 잡목수풀 위로 밤이 내렸다.
다음 날 양측은 잠시 휴전하기로 했다.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아 연합군은 전사자들이 시체를 모아 평온에서 화장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 날 밤과 그 다음 날 내내 그리스 군은 자기네 진영 주위에다 말뚝을 밖고 뗏장을 켜켜이 쌓아 방어벽을 세웠다. 방어벽 앞에는 어떤 전차도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 넓고 깊은 도랑을 파 놓았다. 그리고 양쪽에는 높게 솟은 자리를 만들어 그 곳에서 창을 던지고 활을 쏠 수 있게 했다.
해가 떠오르자 전투는 다시 시작되었다. 이리 치고 저리 몰리기를 수없이 거듭한 길고 처절한 하루였다. 헥토르는 전차병이 둘이나 바로 자기 옆에서 차례로 전사하는 바람에 그 때마다 새 전차병을 뽑아야 했다. 그는 새 전차병에게 거친 말의 고삐를 쥐어 주고 자신은 닥치는 대로 적을 무찔러 나갔다.
디오메데스가 그리스 연합군을 몰아 트로이아 성벽 밑까지 트로이아 군을 밀어부치게 되었다. 그런데 신들의 왕 제우스가 이것을 보고는 하늘의 소나기 구름이라는 소나기 구름은 다 한곳에 모았다. 땅을 울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디오메데스의 말 바로 앞으로 떨어졌다. 섬광이라 유황 냄새에 놀란 디오메데스의 말들은 뒤로 돌아서서 아군 속으로 뛰어들면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해 저물 녘이 되자. 그리스 군은 도랑과 방어벽 뒤로 물러갔다. 그들의 뒤를 막아 주는 것은 검은 선단뿐이었다. 절망감 때문에 그리스 군의 사기는 형편없이 떨어져 있었다.
그 날 밤, 트로이아 연합군은 성 안으로 철수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성 밖에 말을 묶어 두고 성 안으로 사람들을 들여보내 포도주와 먹을 것을 내어오게 했다. 트로이아 병사들은 평원에다 모닥불을 피웠다. 이렇게 피워진 모닥불의 수는 하늘의 별보다도 많은 것 같았다.
오십 명씩 한 부대를 이룬 트로이아 군은 말에게는 흰 보리를 먹이고 저희들은 먹고 마시고 음악을 즐기기까지 하면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다음 날에는 자신들이 승리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한편, 그리스 진영에서는 낙담한 아가메논이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벼락의 신 제우스가 그리스 군에게서 등을 돌린 이상, 헬레네니 트로이아 정복이니 하는 생각은 다 부질없는 것이니 이젠 그만 두자고 말했다. 진영을 불사르고 밤을 틈타서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말에 디오메데스는 온 진영에 다 들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여기에서 더 싸울 용기가 없는 모양이니 대왕이나 고향으로 돌아가시게 합시다. 나머지 사람은 싸워서 기어이 트로이아를 장악합시다."
대왕이 포위를 풀자는 말을 한 것은 사실 그 날이 처음이었다. 연합군의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디오메데스의 이 말 한 마디는 전사들의 사기를 다시 북돋우면서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퇴각함으로써 전사한 전우들을 욕보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지휘관들은 디오메데스와 뜻을 함께 하고 원하던 것을 얻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소리쳤다.
원로들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노인인 네스토르 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어떤 대가를 치루든 아킬레우스를 다시 싸움터로 돌아오게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
네스토르는 아가멤논 대왕이 아킬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처녀 브리세이스를 돌려 준다고 약속하고, 황금 덩어리와 말 여러 필을 선사함으로써 전날 그를 모욕했던 것을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킬레우스가 돌아와 우리와 함께 싸운다는 소문이 적에 귀에 들어가면, 그들은 아킬레우스가 전차에 타기도 전에 사기를 잃고 말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적을 몰고 가 예전처럼 성벽 안에 묶어 둘 수 있을 것이오. 아니, 그보다는 농부가 수수를 베듯 아주 요절을 내어 다시는 성문 밖으로는 나서지 못하게 하면 더욱 좋겠지요."
아가멤논이 검은 수염을 뽑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 역시 네스토르의 지혜로운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아킬레우스와는 가까운 친구 사이인 오뒤세우스와 아이사스, 그리고 아킬레우스가 테살리아 산의 케이론에게 맡겨지기 전까지 그를 가르친 적이 있는 스승 포에니쿠스는 그리스 진영의 맨 끝 해변으로 끌어올려져 있던 아킬레우스의 검은 선단으로 찾아갔다.
아킬레우스는 지붕을 뗏장으로 덮은 막사 문간에 앉아 가로대가 은으로 만들어진 하프를 켜고 있었다. 파트로클로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투구를 닦으면서 다소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그 하프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다가오는 전우들의 모습을 본 아킬레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파트로클로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어오게 했다. 잠시 후, 오래간만에 만난 전우들은 아뮤 일도 없었던 것처럼 먹고 마셨다.
술자리가 끝나자 나머지 사람들을 대신해서 오뒤세우스가 말했다.
"우리가 온 까닭은 밝히겠다. 대와 아가멤논이 전에 자네를 모욕했던 일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해 달라기에 이렇게 오게 되었다네. 대왕은 처녀 브리세이스를 돌려주고 자네 명예를 되찾는 데 필요한 황금과 여러 필의 말, 노예를 선물로 주겠다고 했네. 그리고 귀국하면 넑은 땅을 주고 공주와 혼인시키겠다는 약속까지 했지. 이제 자네는 화를 풀고 싸움터로 돌아와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네."
옆에 서 있던 파트로클로스의 가슴은 기대로 부풀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어서 그 자신조차도 삭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뒤세우스의 말이 끝나자 아킬레우스가 말했다.
"대왕의 약속 한번 번드르르하군. 하지만 그가 왜 그런 약속을 했겠는가? 하나뿐인 귀중한 내 목숨을 저 싸움터에 내 맡기라고 그러는 것일 테지. 그런 대왕을 따를 바에는 아침 물길에 배를 몰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네.
그는 화가 났던지 화덕 앞에 놓인 땔감 하나를 걷어 차고는 말을 이었다.
"대왕의 선물 따위는 필요 없어. 아내도 내가 골라서 얻겠네."
그 때 포에니쿠스가 일어섰다. 노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장군이 어릴 당시 나는 장군에게. 분노를 잘 다스리고 용서할 때가 되면 용서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 했습니다. 지금까지 장군에게 쏟아진 비난이 근거 없는 것이었던만큼.
장군이 화나 있는 건 장군의 명예에 비춰볼 때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대왕은 지금 그것을 수습하려고, 그래서 장군의 절친한 친구들을 보내어 이렇게 용서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분을 삭이십시오. 장군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 하는 전우들에게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아이아스도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게다 한 여자 생긴 일인데 대왕은 그 여자를 장군에게 돌려보내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아이아스. 오뒤세우스. 그리고 포에니쿠스. 나의 친구들이여. 아가멤논에게로 돌아가 내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나는 헥토르가 트로이아 군을 몰아 여기에 있는 나의 검은 선단을 공격할 때까지는 싸우지 않을 거라고 말이오. 그 때가 돼서야 나는 창을 들어 핵토르에게 창이라는 것이 어떻게 써야 하는 물건인지를 가르쳐 줄 것이오."
이 말 한 마디를 듣고서 세 명은 사절은 대왕 아가멤논의 막사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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