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일리어드1
by 송화은율전쟁의 씨앗이 된 황금 사과
아득한 옛날, 사람이 신들만큼이나 영웅스럽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뮈르미돈의 왕 펠레우스는, 발이 아름다워서 <은빛 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바다의 요정 테티스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이들의 혼인 잔치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고, 저 높은 올림포스 산의 신들도 초대되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가는 참인데 초대되지 않은 손님 하나가 불쑥 그 자리에 나타났다. 누구인가 하면 바로 불화의 여신 에리스였다. 에리스는 어디에서든 불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 혼인 잔치에도 초대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에리스가 그 자리에 나타나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선 자기가 당한 모욕을 복수하겠노라고 벼르는 것이었다.
복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에리스가 한 일은 겨우 잔칫상을 향해 황금 사과 한 개를 던진 것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처음엔 별 일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에리스는 손님들을 향해 숨을 한 번 크게 쉬고는 곧 사라져 버렸다.
에리스가 던진 사과는 과일 접시와 포도주 잔 사이에 놓여 있었다. 손님 중 하나가 허리를 구부리고 그 사과를 집어 올렸다. 사과의 한 귀퉁이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그러자 여신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세 여신이 그 사과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헤라 여신은 자기가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의 아내이자 모든 신들의 왕후되는 여신인 만큼 그 사과는 마땅히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테나 여신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혜의 아름다움은 다른 모든 신들이 지닌 지혜의 아름다움보다 앞서는 만큼 그 사과는 당연히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아름다움의 여신을 젖혀 놓고 감히 그 사과의 주인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세 여신 사이에는 입씨름이 벌어졌고, 이 입씨름은 말싸움으로 발전했다. 말싸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치열해졌다. 세 여신은 그 곳에 모인 손님들에게, 그 사과가 누구의 것이 되어야 마땅한지 심판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신들의 부탁을 들어 주지 않았다. 어느 여신을 편들어 주든, 나머지 두 여신으로부터 원한을 사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세 여신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신들의 궁전이 있는 올림프스 산으로 돌아갔다. 신들 중에는 이 여신을 편드는 신이 있는가 하면 다른 여신을 편드는 신들도 있었다. 신들은 이렇게 편이 갈린 채로 오래오래 싸웠다. 얼마나 오랜 기간이었는가 하면 이 말싸움이 시작되던 당시 인간 세상에서 태어난 아기가 자라 전사, 혹은 목동이 될 때까지였다. 신들은 모두 죽지 않는 존재들이라서, 때가 되면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세월은 알지 못했다.
에게 바다의 북동쪽 해안에는 트로이아라고 하는 도시국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트로이아는 바닷가 언덕 위에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도시 국가였다. 이 도시가 이렇게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트로이아의 가까운 해협을 통해 비옥한 흑해 연안을 오르내리는 장삿배로부터 통행세를 걷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도시 국가의 왕 프리아모스는 넓은 영토와, 갈기가 유난히 긴 말을 많이 가진 임금이었다. 그에게는 아들도 많았다. 신들 사이에서 황금 사과를 두고 말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할 무렵 프리아모스의 왕비 헤쿠바는 막내 아들을 낳았다. 프리아모스 왕 내외는 이 막내 아들에게 파리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막내 왕자의 탄생은 트로이아의 커다란 경사여야 했다. 그러나 왕비 헤쿠바가 파리스를 배고 있을 때 왕궁의 점쟁이들은 왕비가 장차 트로이아를 잿더미로 만들 말썽꾸러기를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 일이 있었다. 마침내 헤쿠바에게서 아들이 태어나자 왕은 하인 하나를 불러 왕자를 데리고 나가 빈들에 버리라고 명했다. 하인은 왕의 명령대로 따랐다. 그러나 달아난 송아지를 찾으로 다니던 한 목동이 버려진 왕자를 발견하고는, 데리고 가서 자신의 자식 삼아 기르게 되었다.
왕자는 키가 훤칠하게 힘이 세고, 아주 잘 생긴 청년으로 자라났다. 달음박질과 활쏘기라면 그를 당해 낼 장사가 인근에는 없었다.
그는 이다 산 기슭의 떡갈나무 숲과 고원 지대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 곳에서 숲의 요정 오이노네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오이노네도 청년을 사랑했다. 오니노네에게는 사람이 입은 상처는 아무리 지독한 상처라도 말끔히 낫게 해주는 재능이 있었다. 청년과 오이노네는 숲속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그 황금 사과를 두고 아옹다옹하던 질투심 많은 세 여신은 올림프스산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이다 산 기슭에서 목동 노릇을 하는 키가 크고 잘 생긴 청년을 보게 되었다. 세 여신은 모르는 것이 없는 신들이라서 그 청년이 자기 정체를 모른다면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공정하게 심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세 여신은 이제 황금 사과를 두고 입씨름하는 데도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세 여신은 사과를 청년에게 던졌다. 파리스는 엉겹결에 손을 내밀어 그 사과를 받았다. 세 여신은 풀잎 하나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뿐히 땅 위로 내려서서는, 누가 황금사과의 주인이 될 만큼 가장 아름다운 셋 중에서 고르게 했다.
먼저 아테나는 여신이 눈부신 갑옷을 차려 입은 모습으로 앞에 나섰다. 아테나는 칼날 같은 잿빛 눈으로 파리스를 바라보면서 자기에게 그 황금 사과를 던져 주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지혜를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다음에 헤라 여신은 신들 궁전의 왕후에 어울리는 차림으로 나서면서 자기에게 그 황금 사과를 준다면 어마어마한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주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깊은 바다처럼 파란 눈을 가진 아프로디테가 꼬아 놓은 금실 같은 타래 머리를 하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면서 앞으로 나왔다. 아프로디테는 자기에게 황금 사과를 던져 주면 자기만큼 아름다운 아내와 짝을 지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파리스는 그 여신만큼 아름다운 아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지혜와 권력을 주겠다는 두 여신의 약속을 잊고 말았다. 심지어는 떡갈나무 숲에 두고 온 <검은 머리> 오이노네도 잊어 버리고 말았다. 파리스는 그 황금 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던졌다.
그 순간 아테나와 헤라는 황금 사과를 자신들에게 던져 주지 않은 파리스에게 앙심을 품었다. 잔칫날 손님들이 예측했던 그대로였다. 두 여신은 아프로디테에게도 원한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디프로디테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트로이아 왕자인 그 목동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로 마음먹고는 자리를 떠났다.
아프로디테는 어느 보름날 밤에 프리아모스 왕의 부하들로 하여금, 파리스가 치는 소떼의 임금격인 가장 크고 아름다운 황소 한 마리를 훔치도록 조화를 부렸다. 파리스는 그 소를 찾기 위해 산을 내려와 트로이아로 갔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어머니인 헤쿠바가 우연히 파리스를 보게 되었다. 헤쿠바는 청년이 자기의 다른 아들들과 닮은 것을 확인한 데다 나름의 느낌도 있고 해서, 그 청년이 바로 아주 어릴 때 자기 품을 떠났던, 그래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막내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헤쿠바는 너무 기뻐 울면서 그 청년을 왕 앞으로 데리고 갔다. 막내 왕자가 살아 있는 데다 그처럼 훤칠한 대장부로 자란 것을 본 사람들은 점쟁이들의 예언을 잊고 말았다. 프리아모스 왕은 막내 아들을 왕궁으로 맞아들이고 트로이아의 다른 왕자들에게도 그랬듯이 살 만한 집을 내주었다. 파리스왕자는 그 집에 살면서 이따금씩 사랑하는 오이노네가 기다리는 이다 산의 떡갈나무 숲으로 되돌아가고는 했다. 한동안은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한편, 에게 바다 건너편에서는 또 하나의 혼인 잔치가 있었다.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와 헬레네 공주의 혼인 잔치였다. 헬레네를 두고 남자들은 <예쁜 뺨> 헬레네라고 불렀다. 그녀는 인간 세상의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헬레네의 아름다움은 온 그리스땅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많은 왕과 왕자들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했다. 험한 바위섬 왕국 이타카 왕 오뒤세우스도 그러한 왕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헬레네의 아버지는 수많은 구혼자들 중에서 메넬라오스를 사윗감으로 골랐다. 그는 그 많은 구혼자들이 어쩌면 사윗감으로 선택되지 못한 데 앙심을 품고 자기 사위를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사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헬레네를 위해서라도 일제히 돕겠다는 맹세를 하게 했다. 오뒤세우스는 헬레네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하고 헬라네의 사촌인 페넬로페와 혼인했다. 하지만 바로 이 때 한 맹세에 따라 헬레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달려가 도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헬레네가 아름답다는 소문은 그리스 땅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이윽고 아프로디테 여신이 짐작했던 것처럼 트로이아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파리스는 그 소문을 듣는 순간, 사람들의 말대로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인지 아닌지 직접 가서 제 눈으로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오이오네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와 함께 있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파리스는 막무가내엿다. 그는 더 이상 떡갈나무 숲에 있는 오이오네의 동굴로 올라가지도 않았다. 파리스는 바라는 것이 있으면 기어이 손에 넣고야 마는 성미였다. 그는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에게 배를 한 척 빌려 줄 것을 요청했다. 파리스와 뱃사람들은 프리아모스 왕이 내어 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섰다.
에게 바다가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은 순조로웠다. 마침내 그리스 반도에 이른 그들은 해변을 따라 올라가 배를 대고, 무수한 언덕을 넘어 요새 같은 메넬라오스 왕의 왕궁에 이르렀다.
노예들이 파리스 일행을 맞았다. 그들은 우선 오랜 항해로 인해 몸에 달라붙은 소금기와 먼지를 말끔히 씻었다. 그리고는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왕을 만나기 위해 큰 접견실로 들어갔다. 접견실 한가운데에는 화로가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왕의 발치에는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사냥개들이 웅크린 채 엎드려 있었다. 메넬라오스 왕이 말했다.
"어서들 오시오. 나그네들이여. 누구신지 어디에서 오셨는지, 나의 왕궁으로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들어 봅시다."
"저는 바다 건너에 있는 머나먼 나라 트로이아의 왕자인데 이름은 파리스라고 합니다. 먼 나라가 보고 싶어 이렇게 왔습니다. 메넬라오스 전하의 명성은 트로이아의 해변에까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훌륭한 임금이시며 나그네에게 너그러운 분이시라고요."
파리스가 대답했다.
"자, 그러면 앉아서 무얼 좀 드시겠소? 그렇게 먼 데서 오느라고 퍽 고생하셨겠구료."
메넬라오스가 파리스 일행에게 자리를 권했다.
파리스 일행이 자리에 앉자 고기와 과일과 황금 술잔에 찰랑거리는 포도주가 앞에 차려졌다. 그들이 먹고 마시면서 여행중에 겪은 일을 주인에게 들려 주고 있는데, 왕비인 헬레네가 접견실로 들어왔다. 헬레네의 뒤로 두 명의 시녀가 따라 들어왔다. 한 명은 헬레네의 딸을 안고 있었고, 또 한 명은 짙은 보라색 털실이 감긴 상아 실톳대를 들고 있었다. 화로 저쪽, 왕비 자리에 앉은 헬레네는 실을 감기 시작했다. 실을 감으면서 헬레네는 나그네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순간순간 파리스의 눈길과 헬레네의 눈길이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자옥한 연기 속에서 마주치곤 했다. 파리스는 메넬라오스의 왕비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헬레네는 옥수수 대궁처럼 매끈했고 들꿀처럼 향기로웠다. 한편 헬레네의 마음을 끈 것은 나그네 왕자가 젊다는 점이었다.
메넬라오스는 헬레네의 아버지가 자기 취향에 따라 선택해 준 사람이지 헬레네 자신이 선택한 사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메넬라오스는 헬레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메넬라오스의 수염에는 벌써 흰 올이 나타나기 시작한 터였다. 그러나 파리스의 금빛 수염에는 흰 올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의 눈은 반짝거렸고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파리스를 바라보는 헬레네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헬레네는 감고 있던 보라색 실을 잡아챘다.
파리스와 그 일행은 여러 날 동안 메넬라오스 왕의 손님으로 궁전에 머물렀다. 오래지 않아 파리스는 왕비 헬레네를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가엾은 오이노네는 파리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파리스는 오로지 헬레네 생각만 했다. <예쁜 빰> 헬레네를 두고 떠날 생각을 하니 파리스는 눈앞이 아득했다. 날이 감에 따라 파리스 왕자와 헬레네 왕비는 궁전 안의 서늘한 올리브 숲 속과 흰 꽃이 핀 편도나무 가지 밑을 함께 걷기도 했다. 파리스는 보라색 실을 감으며 그 나라 민요를 부르는 헬레네의 발치에 앉아 있기도 했다.
드디어 메넬라오스 왕이 사냥을 떠나는 날이 왔다. 파리스는 핑계를 대고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스 일행은 궁전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왕이 떠나 궁전이 호젓해지자 파리스와 헬레네는 단 둘이서 은빛 올리브 나무 그늘을 거닐었다. 파리스의 부하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왕비의 시녀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파리스는 자기가 여기까지 온 것은 오로지 헬레네를 만나 보기 위해서였고, 만나 보는 순간 온 가슴으로 사랑하게 되어 혼자는 돌아갈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런 소리는 하는 게 아니에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래요. 첫째는, 나는 아미 다른 남자의 아내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당신의 그 말 때문에, 당신이 떠난 뒤에 내가 더 견디기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에요."
헬레네가 대답했다.
"사랑스러운 헬레네여. 내 배가 바닷가에 있답니다. 나와 함께 갑시다. 마침 당신의 지아비인 메넬라오스 왕은 먼 곳으로 가 있습니다. 우리, 당신과 나는 남남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줄기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덩굴이랍니다."
파리스는 조르고 헬레네는 망설이고 ………. 귀뚜라미 우는 한나절, 두 사람은 몇 번이고 밀고 당기기를 거듭했다. 하지만 헬레네의 상대는 파리스였다. 그는 자기가 바라는 것은 기어이 손에 넣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헬레네의 가슴 깊은 곳에서 파리스를 따라가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헬레네는 지아비와 딸과 명예를 등졌다.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시녀들을 등진 채, 파리스는 부하들과 함께 헬레네를 데리고 배가 대기하고 있는 바닷가로 갔다.
이로써 파리스는 아프로디테가 약속한 신부를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 일 때문에 무서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읽었다
나는 책이라는 것은 어떤 시기에 읽었느냐에 따라서 그 책의 맛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책의 맛은 물론 저자가 의미하는 것을 포함한 다양한 것들을 말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인 스키마(배경지식)에 따라서 그 책이 담고 있는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하고 또 다른 측면에서 더 나아가 저자보다 한 수 위(?)이거나 아니면 저자가 의도했던 것들과 동떨어진 것들을 그 책이 담고 있는 함의를 유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책은 어릴 시절 나에게는 귀중한 지식의 보고였다. 당시 나에게는 책 속에 활자로 찍힌 것들은 사실로 항상 각인되었고, 그 책 속의 인물처럼 살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책이 내게 주는 의미의 수준은 지금 생각해 보면 읽을 당시의 지적 수준을 넘지는 못하는 것같았다. 우리 집의 조그만 골방에서 읽었던 책들을 지금도 소장하고 있는 데, 그 소장한 책들을 다시 한번 꺼내서 보면 또 다른 세계로 그 책은 다가 왔었다.
그러나 사실 산다는 것은 우리같은 이에게는 그처럼 한가하게 읽었던 책을 다시금 보게 하는 여유는 주지 않고, 나 역시 그런 부류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보고, 또 언제 보아도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주는 책을 선택하라고 하면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일리어드 이야기를 주저하지 않고 들 수 있겠다.
신들과 영웅이 혼재하던 시대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는 한낱 어린이들 이야기거리로 전락했지만, 따지고 보면 지금도 그런 시대의 연장인지 모른다. 트로이아전쟁의 원인이 얼마나 단순한가? 물론 여러 가지 관점과 해석이 있을 수 있고, 역사라는 것의 이면적 측면을 모르기에 말도 안 되는 해석일 수도 있지만, 하여간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가 헬레나라고 하는 빼어난 미녀와 사랑에 빠져 남편을 버리고, 아이조차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트로이아로 가 버리는 일이 오늘날에는 없는 것일까? 그런 관계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무분별한 사랑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인명이 죽었으며, 한 국가가 초토화되었는가? 그러나 그것을 무분별이라고 하기에는 그 남녀에게는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거기서 신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한 신들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황금의 사과를 가지면 무엇이 달라진다고 이렇게 인간의 세상을 만드는가? 나는 신이 아니기에 그들의 뜻을 모르는 것일까? 명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하찮은 것들을 다른 이들은 목숨을 걸고 있고? 세상은 무엇이 진실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원죄는 없어지는가? 에리스는 단지 파티에 초대되지 못했다는 그 이유만으로, 이런 일들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는가?
책을 이렇게 다양하게 읽다 보면 삶의 다양성에 대해 보다 관대해짐을 느낀다. 우리는 책을 통해 세상의 맛을 엿 볼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
그리스 선단들 집결하다
사냥에서 돌아온 다음에서야, 메넬라오스 왕은 왕비가 트로이아 왕자와 함께 도망치고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암담한 슬픔과 함께 열화 같은 분노를 느낀 그는 곧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트로이아 왕자의 잘못을 알리고 형인 아가멤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검은 수염〉아가멤논은 그리스 모든 도시 국가의 왕들 위에 군림하는 대왕이었다.
사자의 문이 있는 황금 시대 뮈케나이의 궁전에서 아가멤논은 모든 군사와 배를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퓔로스의 노왕 네스토르에게도 명령이 떨어졌다. 들비둘기가 나직하게 울어대는 티스베에도 그 명령이 전해졌다. 험악한 땅의 우레 같은 고함소리로 유명한〈우레목〉디오데메스, 험한 바위섬 이타카를 다스리는 꾀주머니 왕 오뒤세우스, 심지어는 크레타 섬의 이도메네오스에게까지 명령이 전해졌다.
크레타에서, 아르고스에서, 이타카에서, 본토와 섬에서 검은 배들이 꼬리를 물고 몰려 나오기 시작했다. 도시 국가의 왕들은 농사를 짓고 있던 부하, 고기잡이를 하고 있던 부하들을 불러들여 활과 창으로 무장하게 했다. 병사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하루 속히〈예쁜 뺨〉헬레네를 되찾고, 그녀를 꾀어낸 왕자의 죄를 물어 트로이아에 복수할 것을 맹세했다.
아가멤논은 아울리스 항구에서 자신의 배에 탄 채 선단이 집결하기를 기다렸다. 배가 모두 집결하자, 아가멤논은 마침내 선단을 이끌고 트로이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단에는 마땅히 합류했어야 할 장군이 하나 빠져있었다. 그 일의 내력은 이렇다. 파리스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은빛 발〉이라 불리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펠레우스 왕의 아들을 낳았다. 펠레우스 왕과 테티스 왕비는 이 아들의 이름을 아킬레우스라고 지었다. 신들은 왕비 테티스에게 만일 아킬레우스의 몸을 저승 세계를 흐르는 강 가운에 하나인 스튁스 강물에다 담그면, 그 거룩한 물의 영험으로 전쟁터에서도 죽지 않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테티스는 기꺼이 신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나 아들을 머리부터 그 검고 쓰디쓴 강물에 담그자니 발목을 담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테티스의 손이 닿은 아킬레우스의 발목만은 그 스튁스 강물에 적셔지지 않았다. 테티스가 그것을 깨달은 건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다. 스튁스 강물에 담그기는 한 번밖에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테티스는 이 일이 있는 후부터 늘 아들을 걱정하게 되었다.
아킬레우스가 소년이 되자 아버지 펠레우스는 나이가 몇 살 더 많은 파트로클로스를 친구로 딸려 아들을 테살리아의 케이론에세 보냈다. 케이론은 가슴 위쪽은 사람이고 아래쪽은 말인 켄타우로스이며, 그들 중에서도 가장 현명한 켄타우로스였다. 케이론은 아킬레우스를 다른 소년들과 합류하게 하고, 말 타는 법(케이론 자신의 등이 곧 말 잔등이었다), 칼과 창과 활 쓰는 법, 하프 켜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케이론은 이러한 것들을 다 가르친 다음에야 아킬레우스를 아버지 펠레우스의 궁전으로 돌려 보냈다.
그러나 아가멤논의 소집 명령이 떨어지고 검은 선단이 발진하자 테티스는 아킬레우스를 스퀴로스 섬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 섬의 뤼코메데스 왕에게, 자기 아들에게 처녀 옷을 입혀 그 섬나라 공주들 사이에다 숨겨 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을 전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킬레우스 같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의 이런 터무니없는 요구에 고분고분할 수 있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테티스는 오로지 아들의 안전만을 생각하느라고 무슨 마법을 걸지 않았나 싶다. 배가 집결할 동안 아킬레우스는 뤼코메데스 왕의 딸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부터 아들은 보호하기 위해 꾸민 테티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선단이 물결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던 도중, 선단의 병사들이 마실 물을 싣기 의해 스퀴로스 섬에 상륙했던 것이다. 그 섬에서는 아킬레우스 왕자가 숨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뤼코메데스 왕은 군대의 상륙을 환영하면서도 아킬레우스 왕자 같은 사람은 알지도 못한다면서 딱 잡아떼었다. 상륙 부대의 지휘관은 낙심첨만이었다. 왜냐하면 점쟁이 우두머리 칼카스가 아킬레우스 없이는 트로이아를 함락시킬 수 없다고 예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공연히 꾀주머니 장군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수염과 눈썹을 검게 물들이고 머리카락을 붉은 모자 속으로 감춘 다음 장사꾼 옷을 구해 입고 방물장수로 변장했다.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등에는 커다란 봇짐을 짊어진 채 그는 뤼코메데스의 왕궁으로 들어갔다.
궁전 앞마당에 방물장수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왕의 딸들이 우루루 몰려 나왔다. 아킬레우스도 처녀처럼 너울을 쓰고 그들 사이에 묻어 나와 방물장수의 봇짐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방물장수가 봇짐을 풀자 왕의 딸들은 제각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금관을 집는 처녀, 호박색 목걸이를 집는 처녀, 하늘빛처럼 푸른 옥 목걸이를 집는 처녀, 붉은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수놓은 치마를 집는 처녀도 있었다. 처녀들이 모두 하나씩 집고 나니 방물장수의 봇짐은 곧 바닥이 났다. 봇짐의 맨 바닥에는 자루에 황금 징이 박힌 큼지막한 청동검이 하나 들어 있었다. 너울로 얼굴을 가린 채 다른 처녀들이 물건을 다 고르고 돌아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듯한 마지막 처녀가 앞으로 걸어나와 그 칼을 집었다. 그런데 잡는 것부터가 아무리 보아도 그런 무기를 많이 다루어 본 솜씨였다. 예전에 익숙했던 솜씨로 칼을 잡는 순간, 어머니 테티스가 아킬레우스에게 걸었던 마법이 풀렸다. 아킬레우스 왕자는 너울을 풀어헤치면서 외쳤다.
“이것이야말로 내 것이다!”
그러자 선단의 왕들과 장군들이 달려와 아킬레우스 주위로 몰려들면서 좋아했다. 그들은 아킬레우스가 입고 있던 여자 옷을 벗기고, 전사에게 어울리는 짧은 킬트 치마와 소매 없는 외투로 갈아 입힌 다음 허리에는 칼까지 채워 주었다. 연합군 장군들의 부탁을 받은 아킬레우스는 아버지 펠레우스 왕의 궁전으로 되돌아가 선단에 합류할 군대와 배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어머니 테티스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랑하는 너를 안전한 곳에다 두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이제 네 운명은 네가 선택해야 한다. 네가 여기에 머물면 오래,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군 대를 따라간다면,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사람들의 이야기에 네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의 명예를 얻을 수는 있으나 네 수염에 흰 올이 생길 때까지는 살지 못한다. 다시 아버지의 왕궁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 저는 오래 살지 못해도 명예로운 삶을 택하겠습니다.”
아킬레우스가 손가락으로 칼을 어루만지면서 대답했다.
아버지 펠레우스 왕은 아킬레우스에게 군대를 실은 배 오십 척과 친구 겸 전우로 파트로클로스까지 딸려 보냈다. 어머니는 울면서 아들의 몸에다 지아비 펠레우스의 갑옷을 입혀 누었다. 그것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펠레우스를 의해 손수 만들어 준 갑옷이었다.
마침내 아킬레우스는 선단을 이끌고 트로이아로 향하는 연합군 선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의 갈등
그리스 선단의 항해는 순조롭지 못했다. 폭풍이 선단의 진로를 방해하는가 하면 난데없이 나타난 적의 함대와도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연합군의 선단은 트로이아 성이 보이는 해안에 까지 이르렀다.
이 때부터 선단에서는 트로이아에 누가 먼저 상륙하는가를 두고 겨루기가 벌어졌다. 노잡이 들은 서로 먼저 상륙하고 싶었던 나머지 노젓는 속도를 높였다. 그 바람에 뱃머리가 바다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이 겨루기에서 승리한 것은 프로테실라오스 왕자가 지휘하던 배였다. 그러나 왕자가 해변에 발을 딛는 순간, 트로이아 진영에서 날아온 화살 하나가 왕자의 목줄기를 꿰뚫고 말았다. 왕자는 모래톱 위로 쓰러졌다. 이로써 프로테실라오스 왕자는 그리스 최초의 상륙자이자 기나긴 트로이아 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나머지 그리스의 군사들은 그의 뒤를 이어 트로이아 군을 휘몰아쳤다. 트로이아 군은 잘 훈련 된 그리스 연합군에 대한 방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했다. 그리스 군사들은 해가 떨어졌을 때도 해변의 모래 언덕, 트로이아 평원의 갈대밭, 거친 들풀 위에다 재빨리 잠자리를 마련할 줄 아는 선수들이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배를 해안에 끌어다 붙이고, 배 앞에서 집회장도 만들고 오두막도 얽어 놓았다. 트로이아 해변의 삽시간에 작은 항구 도시 비슷한 마을로 변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전쟁이 계속되는 몇 해 동안 뗏장과 목재로 얽어 세운 그 마을에 살면서 긴 싸움을 치뤄 내었다.
아홉 번이나 야생 편도나무가 꽃을 피웠고, 아홉 번이나 트로이아 성 밑의 가파른 바위 사이로 돋은 떨기나무 가지를 말렸다. 배의 재료로 쓰였던 나무들이 썩어갔고 조국을 떠나올 때 병사들이 지니고 있던 그 뜨거운 야망도 점차 무디어져 갔다.
그리스 연합군은 포위 공격전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성 주위에다 참호를 팔 줄도 몰랐고 트로이아 동맹국의 보급품과 군대가 지나는 길목을 지킬 줄도 몰랐다. 그들은 또한 성문을 부술 줄도, 성벽 위로 올라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늙은 왕과 늙은 신하들이 지휘하고 있던 트로이아 군대 역시 성 안에서만 죽치고 있다가 이따금씩 성문을 열고 나가 작은 접전을 벌일 뿐이었다. 트로이아 군대의 지휘관 중에서 시도 때도 없이 성문을 열고 나가 그리스 진영을 짓밟는 장군은, 트로이아 군의 사령관이자 왕의 맏아들인 헥토르뿐이었다.
그러나 트로이아 주위의 작은 해안 도시들은 그리스 군대에게 무참히 짓밟혀야 했다. 검은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건넌 그리스 연합군은 이런 작은 해안도시들을 급습하여, 가축은 양식으로 삼고 말은 전차를 끌게 했으며 여자들은 잡아서 조예로 삼았다.
편도나무가 열 번째로 꽃을 피울 즈음, 이런 해안 지방의 소도시를 기습한 그리스 연합군은 아름다운 그 두 처녀를 포로로 잡아왔다. 전쟁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그뤼세이스와 브리세이스가 바로 그 두 처녀였다. 크뤼세이스는 전리품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하는 대왕 아가멤논에게 주어졌고, 브리세이스는 그 기습 공격을 지휘했던 아킬레우스에게 상으로 주어졌다.
태양신 아폴론을 섬기는 사제였던 크뤼세이스의 아버지는 그리스 진영으로 와서 몸값으로 금을 낼 터이니 딸을 돌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이를 거절하고 노인을 잔뜩 욕보이고는 돌려보냈다. 겉으로 보기에 이 문제는 이것으로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직후에 그리스 진영에는 열병이 돌았다. 많은 병사들이 열병으로 죽었고,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밤이고 낮이고 해변에 자옥했다. 절망에 빠진 그리스 연합군은 점쟁이 칼카스에게 열병이 퍼진 원인을 알아보게 했다. 그는 하늘을 나는 새들을 관찰하고 모래판에다 그려가며 점을 쳤다. 칼카스는 태양신 아폴론이 사제가 당한 모욕을 대신 분풀이해주느라고 은으로 만들어진 활로 연합군 진영에다 열병의 화살을 쏘아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크뤼세이스 처녀를 아버지에게 돌려 보내지 않는 한 아폴론의 분노는 누그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들은 아가멤논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장군들은 그에게 처녀를 돌려 보내자고 말했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주어진 브리세이스를 차지하게 해준다면 크뤼세이스를 돌려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 즈음 아킬레우스는 이미 브리세이스에게 정이 들어서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보호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브리세이스를 위해서라면 칼을 뽑는 것도 사양하지 않을 기세였다.
그러나 아프로디테카 파리스와 트로이아를 편드는 것에 맞서 그리스 연합군의 편을 들기로 작정하고 있던 아테나 여신은, 아킬레우스의 마음 속에 대왕과 맞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품게 했다. 그래서 아킬레우스는 자기가 대왕과 맞서는 순간 전쟁은 연합군의 패배로 끝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장군 네스트로가 그들을 화해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의 불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나이는 젊지만 그리스 연합군의 장군 중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하고 성질이 급했던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 대왕을 가리켜 얼굴은 마치 개와 같고 가슴은 겁쟁이 사슴같을 뿐아니라 욕심 많은 비겁자라고 욕했다.
"대왕은 전투에서는 별 활약도 하지 않으면서 전투가 끝나면 다른 사람이 차지한 전리품까지도 차지하려고 합니다. 전리품뿐만 아니라 명예까지도 독차지하려고 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 대왕에게는 그럴 만한 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아가멤논의 표정은 비구름이라도 낀 듯이 어두워지면서 어롷게 응수했다. "나는 대왕이다. 네 말마따나 나에게는 그럴 만한 권력이 있다. 이것을 잊어 버려선 안 된다. 너는 또한 대왕으로서 그럴 만한 권리도 가지고 있다. 너는 많은 왕자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라."
두 사람의 싸움은 나날이 험악해져 갔다. 다른 장군들로서는 그 싸움을 말릴 수가 없었다.
결국 막말을 한 사람은 아킬레우스였다.
"아가멤논 장군. 당신은 내 명예를 더럽혔소. 따라서 신들 앞에서 맹세하거니와 더 이상 당신을 위해서 싸울 수 없소. 나는 명예가 회복될 때까지 트로이아를 상대로 싸우는 싸움에서는 어떠한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오."
아킬레우스는 회의장을 뛰쳐나가 자기 부대의 진영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뒤로는 자기 부대, 자기 나라의 검은 선단 밖으로는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지휘를 받던 군대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가멤논은 불같이 오르는 화를 삭이면서 아폴론 신에게 제물로 받칠 집짐승과 함께 크뤼세이스를 자기 배에 싣게 했다. 그리고 오뒤세우스에게 명령을 내려 처녀를 아버지에게 되돌려 주도록 했다. 배가 떠나자 아가멤논은 부하를 보내어 아킬레우스의 진영에 있던 브리세우스를 자신의 막사로 데려오게 했다.
처녀가 울면서 아가멤논의 부하들에게 끌려가고 있었지만 아킬레우스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저 선 채로 가만히 지켜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처녀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아킬레우스는 차가운 바닷가로 달려가 모래톱에 주저앉아 대성 통곡하기 시작했다.
바다 밑 수정궁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통곡소리를 들은 바다의 여신 <은빛 발>테티스는, 바다위를 오르는 바다 안개처럼 물 위로 솟구쳐 올랐다. 테티스의 모습은 아들의 눈에만 보였다. 테티스는 아들 옆에 앉아 머리카락과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슬퍼하느냐? 네 가슴에 맺힌 슬픔이 무엇인지 나에게 말해 보아라."
아킬레우스는 울먹이면서 자신이 통곡하고 있는 사연을 말했다.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한 그는 어머니에게 부탁을 했다. 신들의 아버지인 벼락의 신 제우스에게 탄원해서 트로이아가 한번만 승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이다. 트로이아가 이기게 되면 아가멤논은 자기 휘하 장국 중의 하나인 아킬레우스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 뒤 되돌아와 달라고 애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테티스는 아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곧바로 제우스에게 탄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들의 아버지가 다른 일로 세계의 반대쪽 끝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테티스와 아킬레우스는 제우스 신이 올림포스 산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아킬레우스는 열이틀 동안이나 자기 배에서 기다리면서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 동안에 오뒤세우스는 격식에 맞는 제물과 기도문, 죄를 닦는 데 필요한 제사용구들과 함께 크뤼세이스를 그녀의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내고 해변으로 돌아와 있었다. 크뤼세이스의 아버지는 아폴론 신에 의한 열병의 저주는 이미 풀렸다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연합군에 생기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브리세이스는 아가멤논 대왕의 진영에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배 안에서 가슴 속에 사무친, 장미 송이처럼 붉은 분노를 다독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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