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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노래 - 베를렌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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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노래 - 베를렌

 

 

가을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단조로운 우울로

내 마음 쓰라려.

 

종 소리 울리면

숨막히고,

창백히

옛날을 추억하며

눈물짓노라.

 

그리하여 나는 간다.

모진 바람이

날 휘몰아치는 대로

이리저리

마치 낙엽처럼.


 요점 정리

 작자 : 베를렌 / 역자 민희식

 갈래 : 자유시

 제재 : 가을

 주제 : 가을날에 느끼는 우수와 비애를 노래

 특징 : 청각과 시각적 심상을 구사하여 시적 화자의 내면적 정서를 드러냄.

 내용 연구

 1연의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과 2연의 '종 소리'는 모두 가을날에 시적 화자가 느끼는 쓸쓸한 심회를 드러내고 있다. 3연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을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에 견주고 있는데 여기서 '낙엽'은 시적 화자의 '유랑하는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가을의 노래'는 릴케의 '가을날'처럼 가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면서도 인간의 보편적인 고독감을 노래한 '가을날'과 달리 개인적인 애상과 고독감을 노래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베를렌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베를렌은 처녀 시집 '사튀르니앵 시집'에서부터 상징주의의 경향을 찾아 볼 수 있다. 상징주의자들은 시에서 음악성을 상당히 중요시했는데 이는 사물에 뚜렷한 이름을 붙이는 것이 시흥의 4분의 3을 말살하는 것이라고 말한데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음악성은 '암시'를 통해서 발현되고 이 암시는 곧 상징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시도 가을날의 쓸쓸한 심정을 표현하는데 상당한 음악적 요소가 보이고 있다. 인간 심연의 바닥에 깔린 감성을 음악적인 상징으로써 이끌어 내고 있는데,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은 화자 내면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 주는 역할을 해내고 2연의 청명이 울리는 '종소리'는 옛날의 기억 속에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와 같은 청각적 심상과 가을 이미지의 일치는 음악성을 통한 시적 효과를 충분히 느끼게 한다.

 심화 자료

 베를렌(Paul (-Marie) Verlaine)

 

1844. 3. 30 프랑스 메스~1896. 1. 8 파리.

 

프랑스의 서정시인으로 처음에는 고답파와 관계를 맺었지만 그후 상징파 시인의 지도자로 알려졌다. 그는 스테판 말라르메, 샤를 보들레르와 함께 이른바 데카당(Decadents)을 이루었다.

 

생애

 

베를렌은 육군 장교의 외아들로 태어나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무례한 성품은 분명 응석받이로 자란 환경 탓이었을 것이다. 그는 파리의 보나파르트 고등학교(지금의 콩도르세 고등학교)에서 재능과 게으름을 동시에 보여주었고, 14세 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 중 최초의 시인 〈죽음 La Mort〉을 거장 시인 빅토르 위고에게 보냈다. 1862년에 라틴어 번역에서 탁월한 성적을 받아 대학입학자격인 '바칼로레아'를 딴 그는 보험회사 사무원을 거쳐 파리 시청의 공무원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시를 쓰는 한편, 작가들의 단골 카페와 객실에 자주 드나들면서 고답파의 주요시인들이나 그밖에 재능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말라르메와 빌리에 드 릴라당 및 아나톨 프랑스도 거기에 끼어 있었다. 이윽고 그의 시가 그들의 평론지에 실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발표된 시는 〈프뤼돔 씨 Monsieur Prudhomme〉(1863)였다. 3년 뒤 동시대 시인들의 작품집인 〈현대의 파르나스 Le Parnasse contemporain〉(고답파 시인을 가리키는 프랑스어 '파르나시앵'은 여기서 유래한 명칭임) 제1집에는 베를렌이 기고한 8편의 시가 실려 있었다.

 

같은 해 그의 첫번째 시집이 나왔다. 이 〈토성시집 Poemes saturniens〉에는 보들레르와 르콩트 드 릴을 능숙하게 모방한 작품 이외에, 사촌 누이 엘리자에 대한 사랑과 우수가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엘리자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 뒤 1867년에 죽었다(이 시집의 출판 비용을 대준 사람이 바로 엘리자였음). 〈사랑의 향연 Fetes galantes〉에서는 이탈리아의 가면희극인 코메디아 델라르테, 바토와 니콜라 랑크레 같은 18세기 화가들의 세련된 전원 풍경, 또는 같은 시대에 활동한 화가 아돌프 몽티셀리의 분위기있는 그림에 나오는 장면과 인물들을 섬세하고 교묘하게 환기시키는 구절로 자신의 개인 감정을 감추고 있다. 1869년 6월 베를렌은 16세 소녀인 마틸드 모테와 사랑에 빠져 1870년 8월에 결혼했다. 약혼 기간에 쓴 달콤한 시들〈좋은 노래 La Bonne Chanson〉에서 그는 마틸드를, 그를 잘못된 길에서 구해줄, 오랫동안 기다려온 구세주로 열렬히 찬미했다. 반란자들이 정권을 잡고 파리 코뮌을 세웠을 때, 베를렌은 혁명위원회 밑에서 홍보 담당자로 일했다. 이때문에 제3공화정에서 보복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그가 나중에 자유분방한 방랑생활을 하게 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그는 아내와 성격이 맞지 않았고, 1871년 9월 그의 집에 와서 머물던 젊은 시인 아르튀르 랭보에게 열중하면서부터 아내와는 더욱 사이가 나빠졌다.

 

베를렌은 1872년 7월에 아내와 어린 아들 조르주를 버리고 랭보와 함께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를 방랑하면서 다음 시집인 〈무언가 Romances sans paroles〉를 위한 '인상주의적' 단편들을 썼다. 두 사람은 9월 런던에 도착하여 망명한 코뮌 동지들뿐만 아니라 흥미와 즐거움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도 많이 발견했다. 거기서 베를렌은 〈무언가〉를 완성했는데, 특히 첫 부분은 프랑스 문학에서 보기 드문 순수한 음악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그의 가장 앞선 작시법적(作詩法的) 실험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주제는 대개 풍경이나 후회, 또는 사이가 멀어진 아내에 대한 질책이다. 이 시집은 1874년 그의 친구인 에드몽 르펠티에가 출판했다. 저자 자신은 1873년 7월 10일에 브뤼셀에서 랭보와 심한 언쟁을 벌인 끝에 랭보에게 총상을 입혔기 때문에 2년 금고형을 선고받았고, 이 시집이 나왔을 당시에는 벨기에의 몽스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었다.

 

뉘우침과 감옥에서의 금욕 및 경건한 독서(그는 셰익스피어와 디킨스를 연구하며 감탄하는 동시에 프랑스어뿐 아니라 영어로 된 종교 서적도 열심히 읽었음) 결과, 아내와 별거한 1874년 여름, 그는 충실한 로마 가톨릭교도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1875년 1월 감옥에서 나온 그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서 잠시 칩거 생활을 한 다음, 랭보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슈투트가르트로 갔다. 이때 랭보는 그를 난폭하게 거절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영국에 피난처를 구하여 1년 남짓 링컨셔 주의 스틱니와 보스턴 및 햄프셔 주의 보른머스에서 프랑스어와 그림을 가르치며 품위와 경건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테니슨과 스윈번 및 영국성공회 찬송가 작가들 같은 영국의 여러 저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77년에 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1880년 10월에 베를렌이(그 이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자비로 출판한 〈예지 Sagesse〉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 이 시기(1873~78)에 쓴 작품들이다. 여기서는 감정의 오랜 방황만이 아니라 단순한 가톨릭 신앙도 탁월한 시적 표현을 얻고 있다. 그는 비로소 문학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1882년에 발표된 그의 유명한 〈시법 Art poetique〉(이 작품은 8년 전에 감옥에서 썼던 것으로 보임)은 젊은 상징주의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후 그는 상징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부인했는데, 그것은 주로 그들이 그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전통 형식을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압운은 그가 생각하기에 프랑스 운문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였다. 1880년에 베를렌은 총애하는 제자 뤼시앵 레티누아와 그 소년의 부모와 함께 농사를 지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1883년 4월에 뤼시앵이 죽고 베를렌이 몹시 사랑했던 그의 어머니마저 1886년 1월에 세상을 떠났으며, 아내와 화해하려는 모든 노력이 실패로 끝나자 '품위'를 지키려는 의지도 모두 무너져버렸다. 그는 술과 방탕한 생활로 다시 빠져들었다. 이제 유명한 동시에 악명이 높아진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글을 쓰기는 했지만, 옛날과 같은 영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옛날과 얼마 전 Jadis et naguere〉은 대부분 여러 해 전에 써두었지만 신중하게 분류한 이전의 시집에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미처 발표하지 않았던 '시법' 같은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행 Parallelement〉은 대부분 그의 '고상한' 작품들과 같은 시기에 씌어졌고 기법도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하지만, 자유분방하고 관능적인 작품들도 있다. 베를렌은 자신의 성격과 시적 영감을 이루는 2가지 본질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사랑 Amour〉에 수록된 새로운 시들은 여전히 예전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뤼시앵 레티누아의 죽음을 애도하는 구절은 테니슨의 〈인 메모리엄 In Memoriam〉을 다소 모방한 것이 분명하며 테니슨의 작품에 비하면 깊이가 부족하다.

 

산문작품으로는 〈저주받은 시인 Les Poetes maudits〉이 있는데 말라르메와 랭보를 비롯한 6명의 시인의 생애를 다룬 짤막한 전기이다 . 그당시 작가들의 짧은 전기인 〈오늘의 사람들 Les Hommes d'aujourd' hui〉은 대부분 1886년에 발표되었다. 〈나의 병원생활 Mes Hopitaux〉은 병원에 입원했던 경험을 이야기한 것이고, 감옥생활을 이야기한 〈나의 감옥생활 Mes Prisons〉에는 1874년 그가 '회심'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그리고 〈고백, 자서전적 기록 Confessions, notes autobiographiques〉은 그 자신을 위시하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동시대 작가들을 다시 보게끔 했다(그는 1886년에 랭보의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을 출판하여 랭보를 유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했음). 그러나 이밖의 작품들, 즉 그가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쓴 나머지 운문과 산문은 읽어볼 가치가 거의 없다. 그는 데카당파 시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필로멘 부댕이나 외제니 크란츠 같은 나이든 창녀들과 함께 산 때가 많았는데, 아무리 글을 써도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자주 병원에 입원했고, 의사들은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고 우정을 베풀어주었다. 영국 런던과 옥스퍼드 및 맨체스터에서는 젊은 숭배자들이 그를 환대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비평가 아서 시먼스는 1893년 11월에 그의 영국 강연여행을 주선해주었다. 프랭크 해리스와 크랜머 빙은 베를렌이 〈포트나이틀리 리뷰 The Fortnightly Review〉와 〈세니트 The Senate〉에 발표한 평론과 시를 모아서 출판했다. 숭배자들(1894)과 국가(1895)가 준 생활보조금도 걸핏하면 지급이 늦어지거나 액수가 충분하지 못했지만, 이만한 혜택도 실은 그가 시인으로서 받은 존경을 인정한 결과였다. 그는 1896년 1월에 외제니 크란츠의 셋방에서 죽었다.

 

평가

 

프랑스의 시인들 가운데 가장 순수한 서정시인의 한 사람인 베를렌은 근대 언어 음악의 선구자였고, 낭만주의에서 상징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한다. 그의 훌륭한 시들은 대부분의 선배 시인들한테서 볼 수 있는 과장된 수사법을 버리고, 지성을 무장해제함으로써 독자를 사로잡는 암시와 떨리는 듯한 막연함을 통하여 일상적인 상투어를 포함한 프랑스어가 인간 감정의 새로운 이면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는 낱말들이 단순히 그 소리만으로 사용되어 좀더 미묘한 음악, 즉 낱말의 일상적인 의미보다 훨씬 더 강력한 마법의 주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에는 명쾌하고 지적인 또는 철학적인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프랑스어의 내밀한 음악성을 발견한 것은 분명 본능적인 것이었지만, 가장 창조적이었던 시기에는 자신의 독특한 재능을 개발하고 프랑스 문학의 시적 표현을 '개혁'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의식있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V.P.Underwood 글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상징주의 象徵主義 (symbolisme)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상징파(象徵派)의 예술운동과 그 경향으로 일반적으로 상징파는 고답파의 객관주의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일어났고, 분석에 의하여 포착할 수 없는 주관적 정서(主觀的情緖)의 시적 정착(詩的定着)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A.티보데는 고답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롱사르로부터 위고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시 전반에 대해서 상징파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풀이하였다. 티보데가 말하는 상징파의 새로운 바람이란 다음의 세 가지 점이다.

 

① 자유시: 그 시작은 민중적인 노래의 형태를 필요에 따라 채용한 랭보의 《지옥의 계절》이다. 이에 대해 의식적 ·계통적으로 자유시를 발전시킨 것은 G.캉이었다. 이후 프랑스의 시인은 정형(定型)을 채용하는 자와 자유시 형태를 쓰는 자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② 순수시(純粹詩): “음악에서 그 부(富)를 빼앗는다”라는 말라르메의 말로 요약되는 순수시의 개념은 상징파에서 비롯된다(이 경우의 음악은 주로 바그너의 음악이다). 시 속에서 산문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시적인 것을 찾으려는 의식적 노력은 바그너의 영향 아래 말라르메에서 시작되어 발레리에서 완성되었다. ③ 문학적 혁신과 발전의 개념: 상징파는 처음으로 젊은 세대에게 전세대(前世代)의 문학개념을 부정하는 권리와 의무를 인정했다. 전위(前衛: 아방가르드)의 개념이 탄생한 이후 문학은 ‘전통적 문학’과 ‘전위문학’으로 나누어졌고 유파(流派)의 수도 늘었으며, 선언(宣言)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상이 티보데가 말하는 상징파의 특징인데 이 경우, 순수한 문학사적 의미에서 상징파는 1890년에 전성기에 달했고 1902년에 종지부를 찍은, 대략 15년간에 걸친 일군(一群)의 시인들의 활동을 지칭한다. 즉,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시인들이다. G.캉, J.라포르그, A.사맹, F.잠, E.뒤자르댕 등을 들 수 있다. 외국인으로서 여기에 호응한 사람은 벨기에의 조르지 로당바크, E.베르아렝 등이다. 앙리 드 레니에, 장 모레아스는 일시적인 상징파 동지였으며, 그런 의미에서의 상징파 비평가는 레미 드 구르몽이었다. 티보데는 말라르메, 베를렌, 랭보, 코르 비에르, 로트레아몽을 상징파의 선구자로 보았으며 발레리를 그 후계자로 보았다.

 

만일 이 해석이 옳다면 상징파는 선구자와 후계자에 필적할 만한 대시인(大詩人)이 없다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말라르메를 비롯하여 티보데가 말하는, 선구자를 포함한 상징주의적 시인들이 활약한 15년간이라는 운동기간을 떠나, 좀더 넓게 상징주의를 문제삼을 필요가 있다. 즉, 보들레르를 선구자로 말라르메, 베를렌, 랭보에 의하여 전개되었으며 발레리, 잠, 클로델에게 계승되어 마침내 완성된 시적(詩的) 세계와 그 이론을 생각하게 된다. 보들레르는 하나의 시적 혁명(詩的革命)을 일으켰다 하겠다.

 

첫째로 그 의식적 방법에서, 이윽고 이것은 말라르메를 탄생시켜야 했다.

 

둘째로 원죄의식(原罪意識)에서 베를렌을 탄생시켰다.

 

셋째로 그 감수성(感受性)과 대응(對應)의 이론에서, 이것은 마침내 랭보를 탄생시켰다. 또한 말라르메와 발레리, 베를렌과 잠, 랭보와 클로델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렇게 하여 결정되는 상징주의적 세계의 분석에 샤를 뒤보스, 자크리비엘, 에른스트 로베르트 쿠르티우스 등의 비평가가 따랐다. A.지드도 여기에 넣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징파 시인들의 세계와 밀접하게 교류한 M.프루스트도 이 세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프랑스 이외의 나라에서는 독일의 S.게오르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또 M.릴케도 다소간 상징파의 영향을 받아들인 것은 분명하다. 영어(英語)를 사용하는 시인에게서는 독일의 시인처럼 확실한 영향은 찾아볼 수 없으나 A.시몬즈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뛰어난 이해자였다.

 

서양미술에서의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의 실증적 표현에 대한 대립 및 저항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즉 형상화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 내면(內面), 관념 등을 상징 ·우의(寓意) ·표징 등의 수법으로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려 하였다. 1891년 비평가 A.오리에는 회화에 대해 처음 상징주의라는 말을 썼고 P.고갱 등을 상징파로 보았다. 나비파(派)의 M.드니도 상징파로 자처했으며 그들은 생(生) ·사(死) ·불안 ·사랑 ·성(性) ·꿈 ·환상 등을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고갱은 자신의 그림이 상징주의적인 것은 주제 때문이 아니며 화면의 형태와 색체의 음악적인 배치 때문이라고 하였다. 19세기 상징주의는 주제적 ·문학적 측면과 서로 대립된 순수조형적 구성이라는 관념에서 이해해야 하며, 이것이 ‘세기말(世紀末)’ ‘아르 누보’와 복합되면서 널리 파급되었다.

 

상징주의의 명작으로는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1897), G.클림트의 《물뱀》, F.호들러의 《밤》, E.뭉크의 《절규》 등이 있다. 이 밖에 P.퓌비 드 샤반, O.르동, 벨기에의 장미십자그룹, 러시아의 파란장미그룹, 영국의 라파엘전파(前派)의 후기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 이런 경향은 1910년대까지 계속되다가 20세기 초 포비슴과 큐비즘의 출현으로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한국에서의 상징주의 문학은 김억(金億) ·백대진(白大鎭)이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 제6호와 제7호에 베를렌의 《거리에 내리는 비》, 예이츠의 《꿈》 등 상징파 시인의 작품을 게재하면서 처음으로 이 이론이 소개되었으며 잇따라 베를렌의 《작시론》 등을 비롯하여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창조》 《백조》 《폐허》를 통해 번역, 게재되었다. 김억 ·황석우(黃錫禹) ·박종화(朴鍾和) ·박영희(朴英熙) 등의 작품에서는 비록 내면적 깊이는 얕지만 상징주의적 작풍이 짙게 풍기고 있다.

 상징주의 시의 이해

1880년대 프랑스 시인들이 시 속에 담으려고 한 감정은, 낭만주의 시인들이 추구했던 보편적이고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타인에게 이해되는 감정의 표현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보편성에서 벗어나고 개인의 의식 속에 깊이 숨어 있는 감정이었다. 그러므로 그 감정은 타인에게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심층 의식의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심층 의식의 세계를 시의 내용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때까지의 시인들처럼 지성에 의지하는 표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1880년대의 시인들은 그것을 '상징'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이를테면, 시인이 어떤 꽃을 보고 감동을 느끼는 경우, 그 꽃과 조금도 닮지 않았으면서 그 꽃과 그 꽃을 피우는 나무를 연상하게 하는 시어들을 하나의 구조 속에서 나열하는 것이다. 이것이 상징의 기법인데, 이러한 상징의 기법에 의하여 심층 의식의 세계를 노래한 시를 상징주의 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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