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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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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 라블레(Rabelais, Francois, 1483∼1553)/ 민희식 옮김

제1서 가르강튀아

(전략)

제40장

왜 수도사들은 세상 사람이 싫어하는가!

또 무엇 때문에 그 중 어느 녀석들은 코가 그처럼 큰가?

"정말이지! (외데몽은 말했다) 이 수도사의 멋에는 반해 버릴 수밖에 없군. 옆에 있는 사람을 다 즐겁게 해 주니. 한데 도대체 왜 수도사라는 자는 술자리의 흥깨는 녀석처럼 여겨지고 어느 모임에서나 쫓겨나 마치 호박벌이 꿀벌집에서 쫓기는 것과도 같은 꼴을 당하는 것일까요? (마로도 말하지만) '호박벌, 게으른 피조물, 그들은 꿀벌통에 가까이하지 않는다.'라 씌어 있지 않소."

여기에 대해서 가르강튀아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가사(袈裟)나 두건 외투가 세상 사람들에게서 욕설·저주를 받는 것은 마치 북동풍이라는 바람을 비구름이라고 부르는 사실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로 말하면, 그 녀석들이 이 세상의 오줌 똥, 즉 악업(惡業)으로 먹고살기 때문인데, 제기랄 그 녀석들은 그들의 은둔처에 숨어버리거든. 그 은둔처란 수도원이나 승원(僧院)인데 한 집에 변소가 본당(本堂)과 떨어져 있듯 그들도 사회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요. 하지만, 그대가 왜 원숭이가 가정에서 항상 조소의 대상이 되고 학대를 받는가를 안다면 수도사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이유도 알겠지요. 원숭이 녀석은 개처럼 집을 지키는 일도 하지 않고, 소처럼 쟁기도 끌지 않고, 양처럼 젖이나 털도 제공치 않고, 말처럼 짐을 지지도 않지요. 하는 일이라고는 닥치는 대로 오줌 똥을 싸고 나쁜 장난만 할 뿐.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의 조소의 대상이 되어 몽둥이로 얻어맞게 되지요. 이처럼 수도사는(보통 수도사의 뜻이지만) 농군처럼 땀을 흘리지도 않고, 무사(武士)처럼 국토를 지키지도 않고, 의사처럼 화자를 치료하지도 않고, 뛰어난 복음 전도사나 교육자처럼 세상 사람들을 교환하거나 그들에게 설교하는 일도 하지 않고, 상인(商人)들처럼 국가 사회에 필요한 물건을 운반하지도 않지요. 그래서 만인이 조소하고 피하지요."

"그것은 그렇지만,(하고 그랑구지에가 말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신에게 기도를 하지."

"당치 않은 말씀이에요.(하고 가르강튀아는 대답했다.) 종을 함부로 쳐서 주위의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이 고작이에요."

"정말 그렇지요,(하고 수도사는 말했다.) 미사도 아침 기도도 저녁 기도도 종소리로 기분만 맞추면 반 끝난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요."

"녀석들은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는 [성도전(聖徒傳)]이나 [시편(詩篇]을 아무렇게나 많이 외우고 묵주를 제멋대로 만지며 오랫동안 '아베 마리아'를 부르지만 마음이 거기에 없을 뿐 아니라 그 말의 뜻도 모르지요. 그러기에 이것은 기도가 아니고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우리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그것도 빵이나 기름진 고깃국을 못 먹을까 두려워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면 신의 가호도 받으련만, 신분(身分) 여하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어느 때에나 참된 그리스도 신자는 모두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리기 때문에 예수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 드려, 하느님은 모두 구원하게 되지요. 그런데 수도사 장이야말로 그러한 분이지. 고로 누구나 이 수도사와 같이 있기를 희망하지요. 그는 위선의 신도는 아니니까요. 다 찢어진 옷을 입고 고행(苦行)을 팔고 다니지는 않지요. 마음은 바르고 쾌활하고 과감하며 즐거운 분이지요. 이마에 땀을 흘리고 노고도 싫어하지 않으니까요. 학대받는 자를 돕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고 괴로워하는 자에게는 원조를 아끼지 않고 승원의 포도밭을 지키는 분이니까요."

"저는, (하고 수도사는 말했다.)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왜냐 하면 아침 기도나 경(經)을 외면서도 저는 활끈을 만들거나 크고 작은 화살을 닦거나 토끼를 잡는 올가미나 그물을 만들 터이니까요. 잠시도 놀지는 않지요. 그것은 그렇구, 참 술맛 좋군, 술 좀 가져오게! 과일도 가지고 오고. 이것은 데스트록스의 숲의 밤[栗]이로구나. 이것은 새로운 명주(酩酒)와 함께 선생을 방귀쟁이로 만들어 줄 거요. 선생은 아직도 명정(酩酊)에 젖어 있지 않군요. 정말이지, 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축배를 듭니다. 또 회계원의 말처럼 어느 여울물도 마셔 버리지요!"

짐나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장 선생, 코 끝에 늘어진 그 콧물을 씻는 게 어떠신지."

"아, (수도사는 말했다.) 코가 흠뻑 젖기로서니 내가 익사할까 두려운가요? 염려 없어요. 왜? 그 이유는 제아무리 이 코에서 물이 줄줄 흘러도 속에 들어가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포도주로 소독도 충분히 되어 있으니까요. 이 코가죽으로 만든 겨울 장화라도 신으면 마음놓고 굴도 딸 수 있겠지요. 이러한 장화라면 결코 물이 새지는 않을 테니까."

"그것은(그랑구지에가 대답했다.) 하느님의 뜻이 그렇기 때문인데, 신은 마치 도자기공이 항아리나 접시를 만드는 것처럼 그 성스러운 뜻으로 하나의 형상이 하나의 목적에 맞도록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이지."

"그것은(포노크라트가 말했다.) 이 수도사가 코 시장(市場)에 제일 먼저 달려갔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제일 크고 멋진 놈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지요."

"어어!(수도사는 말했다.) 수도원 전래의 정통 철학(正統哲學)에 의하면 저의 코가 멋진 이유는 저의 유모의 가슴이 말랑말랑했기 때문이지요. 유모의 젖을 빠는 동안에 마치 버터 속에라도 기어들어가듯 저의 코가 유모의 가슴을 찔렀으니까요. 그래서 그대로 접시에 올려놓은 반죽처럼 부풀어올랐지요. 유모의 가슴이 단단하면 사자코의 아이가 되지요. 하여간 즐겁군! '코 큰 것으로 서 있는 것의 형상을 안다.'이로다. ──설탕에 절인 과일은 많이 먹지 않겠다. 얘야, 술을 따라라! 포도주에 넣을 국수도 가지고 와."

(후략)

 

요점 정리

갈래 : 연작 소설, 풍자 소설

작가 : 라블레(Rabelais, Francois, 1483∼1553)/ 민희식 옮김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성격 : 풍자적, 우화적

배경 : 16세기 프랑스

제재 : 어느 거인의 세계 순례와 모험

주제 : 당대 현실의 풍자

구성 : 문답식으로 된 복합 구성

줄거리 :

당시의 유행 작품으로서 작자 미상의 '가르강튀아 대 연대기'속편이라는 형식으로 '팡타그뤼엘'(1522년)을 먼저 간행하고, 이에 호평을 받아 전편인 '가르강튀아'(1534년)를 저술하여 이것을 '제1의 書(서)'라 하고, 먼저 저술한 '팡타그뤼엘'을 '제2의서'라고 하여 '제5의 서'까지 계속 출간하였는데, 최후의 서는 라블레의 사후에 출판되었으며(1564년), 문체 등으로 보아 위작의 혐의가 짙다고 한다.

'제1의 서'의 전반은 거인왕 그랑그제의 아들 가르강튀아의 탄생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이며, 후반은 가르강튀아의 파리 유학과, 조국 대 인접국과의 전쟁으로 급히 귀향한 가르강튀아가 수도승장과 힘을 합쳐서 종군하는 전쟁 이야기이다. 이 수도승이 세운 공훈에 대한 포상으로서 '텔레므의 수도원'이 주어지는데, 라블레는 여기서 전반의 중세적 구교육비판과 대조를 이루는 인문주의의 이상을 이야기 하고, 수도원을 그 유토피아(이상향)로 묘사하고 있다.

'제2의 서'에서는 가르강튀아의 자식이자, 마찬가지로 거인인 팡타그뤼엘의 탄생과 프랑스 여러 지방의 대학 편력 및 파리 유학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는 파리에서 알게 되고 나중에 팡타그뤼엘의 부하가 되는 교활하고 겁많은 학생 파뉴르쥬의 활약이 주인공을 능가하여 묘사되고 있다.

'제3의 서'에서는 팡타그뤼엘이 거인의 특성을 거의 잃고, 당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구현된다. 파뉴르쥬의 결혼에 대한 시비가 태반을 차지하는 이 책의 결말은 '행운의 신'의 신탁을 구하려는 항해로 끝이 난다.

'제4의 서'는 그들의 대항해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고 있는데, 유명한 '파뉴르쥬의 양(羊)'의 이야기며 폭풍을 만났을 때의 파뉴르쥬의 겁많은 본성폭로, 그리고 여러 가공의 섬들을 순력하면서 벌어지는 풍자로 독자를 웃기고 있는데, '대항해 시대'와 반영으로서 정확한 지식, 자료를 제법 갖추고 있다.

마지막의 '제5의 서'에서는 '종명도'에서의 가톨릭 교회, 귀족, 법조인들이 차례로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고, 최후에 '행운의 신'을 찾아 신탁을 얻는다.

출전 : [가르강튀아(제1서)](1534)

내용 연구

제기랄, 그 녀석들은 - 멀리 떨어져 있지요 : 이 대목에서 가르강튀아가 수도사의 은둔처를 운운하는 것은 이들이 사회적 현실로부터 격리된 무용한 존재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곧 수도사들은 일상적 현실로부터 떨어져 현실이 어떠한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의 생산 활동에도 참여할 줄 모르며, 사회나 국가를 위해 헌신할 줄도 모른 체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은둔처에서 오히려 아무 때나 종을 쳐 다른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라는 점을 비판하고 잇는 것이다.

그대가 왜 원숭이가 - 이유도 알겠지요 : 이 대목은 수도사들의 부정을 풍자하기 위해 그들을 원숭이의 특성에 비교하고 있는 부분으로 인간인 수도사를 짐승인 원숭이의 위치로 격하시킴으로써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어어!(수도사는 말했다._ - 하여간 즐겁군 : 이 대목은 수도사가 스스로 자신의 위선을 폭로하게 함으로써, 풍자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장면이다. 여기서 수도사는 자신의 코가 잘 생긴에 대해 매우 만족해 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코가 잘 생기게 된 연유가 자신의 유모의 가슴이 말랑말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성적인 것에 의해 희화화시키고 있는 수도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수도사와 원숭이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원숭이가 하는 일 없이 나쁜 장난만 쳐서 사람들의 조소를 받듯이 수도사 역시 오로지 신께 기도드리는 게 고작인 그들은 사람들에게 원숭이와 마찬가지로 조소의 대상이다.

이 부분을 봉산탈춤의 양반과 말뚝이의 대사와 비교하면서 읽어 보자

이 작품가 봉산탈춤은 우스꽝스런 상황을 연출하고 상층 지배 계급의 허위 의식과 가식, 부정 행각 등을 폭로하면서 각각 수도사들과 양반들을 풍자하고 있다.

수도사가 "호박벌과 게으른 피조물, 그들은 꿀벌통 가까이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인용한 의도는 무엇인지 말해 보자.

문학에서 풍자의 기능과 효과에 대해 이해하는 기본적 활동으로 수도사는 꿀벌통에서 쫓기는 것과도 같은 꼴을 당한다고 한 부분을 참고하면 "호박벌과 게으른 피조물, 그들은 꿀벌통 가까이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우선 수도사는 아무런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원숭이처럼 나쁜 장난만 쳐 사람들에게 조소의 대상이 되고 비판받는 존재이다. 꿀벌통이란 것은 달콤한 노동의 대가이기도 한데,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달콤한 결과물만 취하려고 하는 수도사의 위선적인 행태를 지적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한편 호박벌은 자신들은 꿀벌통에 가까이하지 않는 존재, 곧 세속의 욕심을 벗어난 존재라고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의 형태를 보이는 수도사를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르강튀아가 수도사의 행적에 관하여 비판하고 잇는 점들은 무엇인지 정리하여 발표해 보자.

가르강튀아가 어떤 비판의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는지, 가르강튀아에 대한 수도사의 반응은 어떠한지, 이러한 주동 인물과 반동 인물의 대립이 읽는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보자. 수도사들은 은둔하여 사는데, 이는 보통의 생활과 격리되어 있어 현실적인 의미를 발견하기 어렵다. 가르강튀아는 인간 생활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생산 행위에 참여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존재이며, 사회를 지탱하는 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존재가 수도사라고 비판한다. 또한 수도사는 종을 함부로 쳐서 주위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현실적으로 무용한 존재인데, 도리어 생산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현실적 가치를 발견할 수 없는 성당으로 끌어 모으기 위하여 사람들의 의사를 무시하는 이기적인 형태를 저지른다고 보고 있다.

가르강튀아가가 수도사 장을 본받고 싶어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지 가르강튀아의 대사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서 말해 보자.

말해지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말해지지 않은 것, 즉 행간을 얼마나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가일 것이다. 때로는 기존의 가치와 관습적인 것들을 뒤집어 생각해 보거나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생각한다.

현실적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운 종교적 고행 따위에 힘을 쏟지 않으며, 학대 받는 자를 돕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고 괴로워하는 자에게 원조를 아끼지 않는 일은 수도사에세 맡기고 현실적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빵과 기름진 고깃국을 마음껏 먹고 마음을 바로 하며 쾌활하고 과감하며 즐거운 생활을 염원한다. 또한 수도사 장이 회계원의 발을 들어 이야기하는 부분을 보면, 자신의 정당한 몫을 벗어나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생활을 바라고 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수도사가 스스로 자신의 코가 멋진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을 통하여 수도사를 비판할 수 있다면, 그 내용은 무엇인지 말해 보자.

이 소설이 풍자와 비판을 보여 주고 있음을 고려해 보면 수도사 자신의 입으로 위선을 폭로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 일상 생활에서도 스스로 한 말에 얽매여 자신의 논리가 자기 자신을 묶는 경우를 찾을 수 있는데, 이 점에 착안하여 활동을 전개하도록 하자.

타고난 얼굴 형상을 성적인 것에 빗대어 회화시키고 있다. 유모의 젖가슴이 말랑말랑하여 젖을 빠는 동안에 마치 버터 속에라도 기어 들어가듯 하였고, 그대로 접시에 올려놓은 반죽처럼 부풀어 올랐다고 하는 것은 다분히 성적인 반응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이는 수도사라고 하는 신분을 생각할 때 드러내어 말하기 어려운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수도사가 "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축배를 듭니다."라고 말한 뒤, 자신도 회계원 말[馬]처럼 어느 우물물도 가리지 않고 다 마신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수도사와 회계사의 말이 지니는 공통점과 수도사의 성격에 관하여 말해 보자.

수도사 장이 말한 회계원의 말[馬]이 마시는 우물물은 작가인 라블레의 고도의 풍자적 의도에 의해 이중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세 사회가 서서히 막을 내리면서 사람들은 본연의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본연의 인간성속에는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속물 근성' 또한 엄연히 담겨 있 에 유의하며 지도한다.

회계원과 그의 말은 항상 같이 행동하는 존재이다. 회계원은 정상적인 수입이 적어 뇌물이나 선물을 은연중에 바라고, 회계원의 말도 어디서나 물을 마신다고 하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취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자신의 것을 만들려는 속성을 지적한 말이다. 수도사 장이 자신을 회계원과의 말과 같이 어느 여울물도 모두 마셔 버린다고 한 것은 표면적으로 수도사라고 하는 집단의 속성이 회계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는 자기 폭로로 이해할 수 있다. 이면적인 의미를 생각해보면, 수도사 장 자신은 좋은 술이나 음식 따위의 세속적 욕심이 없기 때문에 말이 마시는 여울물이라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마실 수 있따는 점을 자랑스럽게 말하고자 한 것이다.

문답의 방식을 통하여 비판의 대상을 드러낼 때,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 본문의 내용 전개 과정을 참고하여 발표해 보자.

문학에서 비판의 대상이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양상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이 활동에 참여하도록 한다. 비판의 대상이 문답을 주체로서 참여하는 경우, 어떤 방식으로 비판의 내용이 가장 효과적으로 제시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문답의 방식을 통하여 비판의 대상을 드러낼 때 나타나는 효과는 비판의 대상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비판의 주체만 일방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경우와 대비하여 보면 더 명확해진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직접 대화의 주체로서 참여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통하여 자신의 불합리하고 위선적인 속성을 스스로 폭로하게 만드는 상황 설정은 독자들에게 훨씬 더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설득력을 갖게 된다. 김시습의 '남염부주지'에서 저승의 우두머리인 염왕이 등장하여 인간인 박생과 논쟁적 대화를 하다가 결국 염왕 자신의 입으로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드는 방식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사도사 장이 가르강튀아에 의해 훌륭한 수도사로 일컬어지지만, 결국 그의 육성을 통해 자기 자신의 부조리를 폭로하게 되는 것은 등장 인물을 더욱 희화화시켜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한 번 더 비꼬게 되는 효과를 갖는다.(출처 : 홍신선 박종성 김강태 공저 천재교육)

이해와 감상

프랑스 인문주의자인 프랑수아 라블레의 걸작이다. 제2권인 〈팡타그뤼엘 Pantagruel〉(1532)과 제1권인 〈가르강튀아 Gargantua〉(1534)에 이어 제3권(1546)과 제4권(1552) 및 제5권(1564, 라블레의 작품인지 확실치는 않음)이 나왔다. 이 버릇없는 패거리의 여행과 모험을 통해 당시의 어리석음과 미신을 신랄하게 비웃었다. 작품이 외설스럽고 반종교적이라는 이유로 라블레는 당국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 이 작품은 거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정신적·육체적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행위와 정신을 실감나게 그려낸 풍자 문학의 대표작이다.

'팡타그뤼엘'이란 '목마르다'의 뜻이라는데, 그 이름에 못지 않게 주인공 팡타그뤼엘은 술고래인데다가, 주위 사람들에게도 갈증을 느끼게 하는 특기를 가진, 낙천적이며 호탕한 인품이다. 파뉴르쥬는 '교활·겁쟁이'의 전형적인 인물이고, 수도승 장은 무용에 뛰어나고 위선을 싫어하는 호탕한 사나이로서 모두가 프랑스인들의 감정에 영합되는 인물들이다. 그리하여 '팡타그뤼엘리스트'(팡타그뤼엘을 본따 그와 같은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파뉴르쥬의 양과 같은'(파뉴르쥬가 항해 중 다른 배에 탄 양 상인으로부터 강제로 한 마리의 양을 얻어, 감언이설로 이 양을 바닷 속에 뛰어들게 하였는데 다른 양들도 뒤따라 모두 바다 속에 뛰어들었다 줄줄 따라 간다)등의 관용어가 현대 프랑스어에 아직도 잔존하고 있다고 한다.

인용된 부분에서는 가르강튀아와 수도사의 문답을 통해 중세적 종교관에서 맹목적으로 따라야 했던 하나의 관념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수도사의 행태를 비판하는 가르강튀아의 대담한 발언은 이전의 절대적 종교에 대한 도전이며, 변화의 기운이 감도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하여 어떤 생각과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를 함축하고 있다.

심화 자료

라블레 (Francois Rabelais)

필명은 Alcofribas Nasier. 1494경 프랑스 푸아투~1553. 4. 9(?) 파리. 프랑스의 작가.

동시대인들에게는 뛰어난 의사이자 인문주의자였으며, 후세 사람들에게는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걸작 〈팡타그뤼엘 Pantagruel〉(1532)과 〈가르강튀아 Gargantua〉(1534)의 저자로 유명하다

초기생애

라블레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빈약할 뿐 아니라 해석하기도 어렵다. 그는 투렌의 부유한 지주이자 1527년에 푸아투의 '국왕 대리인'을 대행했던 유명한 법률가 앙투안 라블레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블레도 법률을 공부한 것이 분명하지만, 1510년경에 라보메트에서 프란체스코회의 수련수사가 되었다가, 후에 푸아투의 퐁트네르콩트에 있는 퓌생마르탱 수도원으로 옮겼다. 늦어도 1521년에(이보다 더 일렀을 수도 있음) 그는 사제서품을 받고 성직자가 되었는데, 이 진급은 프란체스코회의 전통을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라블레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프란체스코회의 자유주의적 인문주의자 피에르 아미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524년에 두 학자는 그리스어로 책을 썼는데, 지나치게 정통적인 수도원의 상급자들은 그리스어를 '이교도'의 언어로 생각하여 한동안 이 책을 몰수했다. 이 책은 원래의 신약성서를 소개하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겐 같은 그리스의 교부들에 대한 연구를 장려했다. 두 학자는 그들의 수도원에서 잠시 연금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라블레는 그후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특별허가를 얻어, 그의 담당 주교인 조프루아 데스티사크가 원장으로 있는 생피에르드마유제의 베네딕투스회 수도원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이 수도회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고, 후에 프란체스코회의 결점은 가볍게 넘겨버리면서도 베네딕투스회는 신랄하게 풍자했다.

라블레는 파리의 생드니 회관에서 베네딕투스회의 후원으로 의술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1530년에 그는 서원을 깼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환속을 위한 탄원 Supplicatio pro apostasia〉에서, 교구 사제가 입는 법의를 입고 정기적으로 미사를 집전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몽펠리에에서 후원자인 조프루아 데스티사크의 도움으로 의학을 공부했을 것이다. 그는 몇 주일 만에 의학공부를 마친 뒤 유명한 고대 그리스 의사들의 저서에 대해 강의하고, 1532년에는 히포크라테스의 〈격언집 Aphorisms〉과 갈레노스의 〈육아법 Ars parva〉을 직접 편집하여 출판했다. 의사로서 그는 고대의 권위자들에게 크게 의존했고, 히포크라테스의 플라톤 학파를 지지했지만 갈레노스와 아랍의 의학자이자 철학자인 이븐시나도 추종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과부와 관계하여 두 아이(프랑수아와 쥐니)를 낳았는데, 교황 파울루스 4세는 1540년에 이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성을 부여하고 라블레의 합법적인 적출자로 인정했다. 3번째 아이인 테오뒬은 라블레가 친자로 인정했지만 어릴 때 죽었다.

초기소설들

라블레는 나르본에서 잠시 개업의로 일한 뒤, 1532년에 리옹의 시립병원 의사로 임명되었다. 그해에 그는 동시대의 이탈리아 의사인 조반니 마나르디가 쓴 의학 서한들과 라틴어 유서를 편집하여 출판했는데, 유서는 나중에 위조 문서로 밝혀졌다. 11월 30일에 그는 당시의 가장 중요한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에게 열렬한 편지를 썼다. 그가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발견한 것은 이무렵이었다. 그는 저자를 알 수 없는 통속소설 〈거인 가르강튀아의 위대하고 귀중한 연대기 Les Grandes et inestimables cronicques du grant et enorme geant Gargantua〉가 성공한 것에 자극을 받아, 첫번째 장편소설 〈팡타그뤼엘>을 가명으로 발표했다. 이 소설은 그의 이후 작품들보다 길이가 짧고 지적 깊이도 부족하지만, 그때까지 프랑스의 어떤 비슷한 문학 장르에서도 그만큼 뛰어난 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라블레는 언어에서 느끼는 기쁨, 언어 자체의 유희에 대한 탁월한 감각, 익살스러운 상황과 독백 및 대화와 행동에 대한 능숙한 처리, 그리고 언어만으로 환상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이야기꾼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영웅시풍의 기사도 소설의 테두리 안에서 그는 법률의 반계몽주의와 신비주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형의 궤변을 비웃었지만, 그래도 소르본 신학교가 존중하는 스콜라 철학보다는 이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팡타그뤼엘〉 중 특히 한 장(章)은 그 전체적인 진지함으로 인해 두드러지는데, 거기에서 그는 다산적(多産的)인 부부관계를 아담의 타락이 초래한 죽음을 보상하기 위해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서 찬양했다. 그리스도교도는 합법적인 상속자를 낳을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들들이 자신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충실히 비추는 거울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라블레의 주장이었다. 이 작품은 팡타그뤼엘의 나라인 유토피아와 딥소드(그리스어로 '부패한 사람'의 뜻)들의 싸움을 언급하면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를 공공연히 모방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루터파의 교리(신과 천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강제로 복음을 전파할 수 없다는 교리)를 유쾌하게 설교하고 있다. 〈팡타그뤼엘〉은 팡타그뤼엘의 친구인 교활하고 재치있는 건달 파뉘르주가 처음 등장하는 책으로도 기억할 만하다.

그는 이 성공적인 소설에 뒤이어 책력(冊曆)을 우스꽝스럽게 모방한 〈팡타그뤼엘의 예언 Pantagrueline Prognostication〉을 발표했다. 책력들은 특히 1524년에 행성들이 같은 황도(黃道) 위에 줄지어 늘어서는 행성 대결합이 일어난 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점점 더 강하게 사로잡아가던 점성학적 예언들을 반영하고 있었다. 의사로서 라블레는 예언서를 쓸 수 있었고, 실제로 썼다. 그러나 그는 '판단력을 가진'(본질적으로 미래의 운수를 판단하는) 점성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섭리라는 이름으로 점성술을 공격하는 저자들과 합세했다. 여기서 그의 풍자 형태는 독일의 라틴어 저서들을 많이 모방하고 있지만, 질적으로 그것을 앞서고 있다. 라블레는 1534년에 갑자기 시립 병원을 그만두고 파리의 주교인 장 뒤 벨레와 함께 로마로 갔다. 그는 그해 5월에 리옹으로 돌아와, 로마를 묘사한 바르톨로메오 마를리아니의 〈고대 로마 지지(地誌) Topographia antiquae Romae〉를 편집하여 출판했다. 그는 다시 시립병원으로 돌아갔지만, 1535년 2월에 갑자기 그곳을 떠났다. 이것은 아마 미사의 '우상 숭배'를 공공연히 비난하는 포스터가 프랑스 전역에 붙었던 종교개혁 사건인 '벽보사건'(1534. 10)으로 인한 신교도 박해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경의 권위에 의지하여 종교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가톨릭 복음주의자들조차도 '루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고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르강튀아>는 이 무렵에 쓴 작품이다. 제2판은 출판연도가 1535년으로 되어 있다. 초판은 오늘날 1부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속표지가 떨어져나가 출판 연도를 알 수 없다. 이 걸작은 부분적으로는 장 뒤 벨레가 지지하는 왕당파의 대의명분을 지원하기 위해 쓴 것이다. 1535년 5월에 장 뒤 벨레는 주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힘입어 추기경이 되었다. 왕과 추기경, 그리고 추기경의 형제이며 랑제의 영주인 기욤 뒤 벨레는 루터파의 분열을 끝내고 프랑스 교회를 다시 구교로 개혁하려는 교회일치운동을 지원받고 싶어 독일의 신학자 필리프 멜란히톤과 접촉하고 있었다. 한편 소르본 신학교의 완고한 스콜라 학자들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가르강튀아〉는 이러한 대의명분을 촉진하고, 박해 자체를 비난하면서 박해에도 불구하고 확고부동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라블레는 소르본 신학교를 조롱하고 복음주의를 전파했다. 〈가르강튀아〉에서 라블레는 팡타그뤼엘의 아버지인 거인 가르강튀아의 출생과 교육 및 용기를 이야기하면서, 영웅시풍의 모험소설을 계속 탐구하고 있다. 풍자(예를 들면 신비주의적 문장(紋章) 숭배를 시시한 것으로 만드는 무지를 조롱하고, 잘못된 문장학 이론을 비웃는 것 따위)는 대부분 궁정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의 풍자는 대부분 유식한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쓴다. 예를 들어 그는 임신기간이 11개월이나 심지어는 13개월이라고 주장하는 의사와 전통주의적 법률가들을 조롱하고 인문주의자들을 지지한다. 스콜라 철학의 구식 교육법을 조롱하면서 인문주의가 이상으로 삼는 인간상, 즉 예술과 과학 및 기술을 광범위하게 배우고 기사의 무술에도 뛰어난 솜씨를 가진 그리스도교도 군주를 거기에 대비시킨다. 정치에서 라블레는 호전적인 기질에 반대하고 유화정책을 지지하지만, 그리스도교도 군주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유화정책에 성공하지 못하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르강튀아와 그의 이웃인 '성미가 까다롭고 화를 잘 내는' 피크로콜의 전쟁은 한편으로는 라블레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풍자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와 이 제국의 세계정복 계획에 대한 풍자이기도 했다. 가르강튀아는 작전을 지휘하지만, 공적의 일부는 장 수도사(베네딕투스회 수사)가 세운다. 비쩍 마르고 호색적이며 더럽고 무식한 장 수도사는 "이 세상에 진짜 수도승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가 진정한 수도승"이라고 풍자되지만, 그의 동료들이 기도문의 '헛된 반복'에서나 즐거움을 얻는 겁쟁이요 게으름뱅이인데 비하면, 그의 유쾌함과 적극성은 그를 한결 호감가는 인물로 만들어준다. 가르강튀아의 마지막 주요사건은 가난과 금욕 및 복종을 자율의 이름으로 거부하는 텔렘 수도원의 건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수도원은 부자와 명문 집안 태생을 환영하고, 귀족적인 생활을 찬양하며 행복한 결혼을 축복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 수도원은 박해받는 복음주의자들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가르강튀아〉 이후 11년 동안 라블레는 그의 2개의 작품에서 지나칠 만큼 대담한 종교적 의견을 이야기한 대목들을 신중히 수정했을 뿐 새로운 작품은 전혀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장 추기경과 그의 유력한 형제 기욤의 전속 의사로 일했다. 1535년 2월에 시립 병원을 떠난 뒤, 그는 추기경과 함께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그는 '환속'(즉 베네딕투스 수도회에서 허락을 받지 않고 수도원을 떠난 것)을 변명하는 '탄원'을 제출하여 자신의 입장을 합법화하고, 생모르레포세에 있는 추기경의 베네딕투스회 수도원에 들어갈 준비를 갖추었다. 이 수도원은 6개월 뒤에 세속화했고, 라블레는 교구 사제가 되어 의사 일을 계속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537년에 그는 뷔데와 클레망 마로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동료 인문주의자인 에티엔 돌레가 감옥에서 석방된 것을 축하하는 유명한 잔치에 참석했다. 돌레는 라블레의 작품을 수정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도용했기 때문에, 라블레는 나중에 돌레와 싸웠을지도 모른다. 1537년 5월 몽펠리에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히포크라테스의 〈예후집 Prognostics〉을 강의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카를 5세가 프랑수아 1세를 만난 1538년 7월에 그는 에그모르트에 있었지만, 그가 기욤 뒤 벨레를 따라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지방으로 가서 토리노와 페라라를 방문할 때까지 그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1542년 말에 기욤은 리옹으로 떠났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인 1543년 1월에 라블레를 비롯한 여러 의사들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라블레는 이 중요한 사건을 그의 작품에서 2회 언급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이 특별한 전조를 보냈고 죽음의 병상에 누워 있는 기욤에게 예언능력을 부여했다고 믿었다. 기욤의 죽음은 영웅의 상실을 의미하는 동시에 후원자의 상실도 의미했다. 같은 해에 조프루아 데스티사크도 죽었고, 소르본 신학교와 파리 고등법원은 입을 모아 라블레의 소설을 비난했다. 라블레는 국왕의 누이인 나바라의 여왕 마르그리트에게 〈제3서 Tiers Livre〉(1546)를 헌정하여 그녀의 보호를 받으려고 애썼다. 이 책은 왕의 '윤허'(인쇄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지만, 소르본 신학교는 이 책이 나오자마자 이단으로 비난했다. 이에 라블레는 메스(제국 도시)로 달아나 1547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후기작품들

〈제3서〉는 라블레의 가장 심오한 책이다. 이 작품에서 팡타그뤼엘은 스토아 철학과 그리스도교 교리를 따르는 완전무결한 현인으로 성장했고, 자신을 사랑하며 악마에게 현혹당한 파뉘르주는 이제 검은 것을 흰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솜씨를 갖고 있다. 파뉘르주는 망설인다. 과연 결혼을 해야 할 것인가? 아내에게 배신당하거나 얻어맞거나 강탈당하지는 않을까? 그는 훌륭한 플라톤 철학의 예언들과 보다 덜 훌륭한 예언들을 수없이 참고하지만, 어떤 예언도 그의 이기심 때문에 아무 효과가 없다. 인간의 관능에 대한 그의 생각은 '건전한' 히포크라테스의 개념이 아니라 '잘못된' 갈레노스의 개념이다. 그는 박식한 거인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훌륭한 신학자와 플라톤주의 철학자인 의사 및 회의주의 철학자와 의논하지만, '어리석은' 브리두아는 그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브리두아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다룰 때 로마법이 그러하듯이 신의 섭리를 믿고, 제비뽑기로 판결을 내리는 판사이다. 파뉘르주는 아무도 믿지 않고,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신성한 술병'의 신탁을 들어보기로 결심하고, 여행자들은 신전을 향해 떠난다. 브리두아 덕분에 이 소설은 그리스도교의 '어리석음'을 역설적으로 옹호하게 되는데, 이것은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Praise of Folly〉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지만, 그보다는 라블레가 이해하는 바 사도 바울로에게서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제3서〉가 비난을 받은 이유는 아마 고해성사를 조롱하고 결혼문제에서 교회법을 민법에 종속시켰을 뿐 아니라(라블레는 부모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결혼의 법적 효력을 부인했음)수도원 문제에 민간이 개입할 조짐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대마초의 숱한 사용법을 찬양하는 거짓 찬가와 함께 수수께끼처럼 끝난다. 그리하여 이 마지막 부분은 파뉘르주가 심술궂은 말투로 빛을 찬양하는 책의 첫부분과 미학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

1547년부터 라블레는 다시 장 추기경의 전속 의사로서 그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그와 함께 토리노와 페라라 및 볼로냐를 거쳐 로마로 갔다. 리옹을 지나갈 때 그는 인쇄업자에게 아직 완성하지 않은 〈제4서 Quart Livre〉 원고를 넘겨주었는데, 이 책은 마지막 문장이 끝을 맺지 않고 중간에서 끝난 상태로 1548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라블레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이야기가 몇 개 담겨 있지만, 또한 '신인 협력설' 신학(인간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신의 은총과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설)도 옹호하고 있다. 로마에서 그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둘째 아들 오를레앙의 루이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장 추기경이 주도한 '스키오마키'(모의전쟁)를 묘사한 글을 기즈 추기경에게 보냈다. 1551년 1월에 장 추기경은 뫼동과 장베의 사제 자리를 그에게 주었지만, 라블레는 그곳에서 사제 역할을 한 적도 없고 그곳에 거주하지도 않았다. 1552년에 프랑스 교회 내부에서 군주가 사법권을 행사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가 로마와 거의 절교하게 되어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위기가 한창 고조되었을 때, 라블레는 (새로운 서문을 붙여) 그의 가장 긴 책인 〈제4서〉를 완성하여 출판했다. 진지한 글과 우스꽝스러운 글이 모두 풍부하게 담겨 있는 이 책은 칼뱅의 예정설에 반대하여 신인협력설을 선전하고, 피에 굶주린 주교들을 조롱하고, 트리엔트 공의회를 바보들의 비가톨릭적 회의라고 비난하고, '통합주의적' 그리스도교 사상(고대의 지혜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과 성서에 입각한 그리스도교 사상을 결합한 것)을 옹호하고 있다.

이 작품도 역시 프랑스 궁정을 즐겁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으며, 자유주의적인 추기경 오데 드 샤티용에게 거만하고 공격적으로 헌정되었다. 이 책도 왕의 '윤허'를 얻었지만 역시 소르본 신학교의 비난을 받았고, 고등 법원은 1552년 3월 1일에 이 책의 판매를 금지했다.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위기는 지나갔다. 1553년 1월 9일에 라블레는 뫼동과 장베의 사제직을 사임했다. 그가 투옥되었다는 소문(아마 근거 없는 소문이었을 것임)이 돌았다. 그는 그 직후 죽어서 파리의 생폴데샹에 묻혔다.

영향과 평가

라블레의 작품들은 여러 학문, 즉 스콜라 철학의 신학과 성서적인 신학, 의학,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학을 깊이 공부한 사람의 작품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이미 인문학에 조예가 깊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종교적으로 일관성을 갖지 않았지만, 프란체스코회는 라블레를 자기 교단의 작가로 생각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라블레의 작품들을 '금서 목록'에 올려놓았고, 그의 작품들은 오랫동안 프랑스 밖에서만 출판될 수 있었으며, 그렇게 출판된 그의 작품들은 갈수록 신교도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후세의 프랑스 작가들(예를 들면 볼테르와 발자크 및 샤토브리앙)뿐 아니라 스턴과 스위프트 및 트롤로프와 킹즐리 같은 외국의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M. A. Screech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풍자(諷刺 - satire)

주로 문학이나 연극에서 사회 또는 개인의 악덕·모순·어리석음·결점 따위를 비웃음, 조롱, 익살스러운 모방, 반어법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비난하거나 때로는 개선하기 위한 의도로 쓰는 예술 형식.

풍자는 사실 부분적으로는 고대 그리스 희극에서 유래했지만 고대 로마인들, 특히 1세기의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는 자신들이 풍자를 고안했다고 주장했다. 원래 풍자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지만 음미할 만한 줄거리가 거의 없는 미숙한 형태의 연극이었으며, 이 연극은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풍자는 운문이나 산문처럼 딱딱한 전달 형식이 아니라 평소에 말할 때의 자연스러운 말투로 발달했고, 그리하여 시와 일상 언어, 우화와 기록문화, 대화와 독백에서 모두 가능하게 되었다. 20세기의 나이트 클럽 같은 데서 공연되는 익살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장르의 초기 형태로 되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풍자라는 단어가 1960년 무렵부터 서양에서 다시 널리 쓰이게 되었을 때(그 이전의 영국과 미국 평론가들은 대체로 이 용어를 시대에 뒤떨어져 있거나 고풍스러운 말로 생각했음), 영국의 〈That Was the Week That Was〉나 미국의 〈Rowan and Martin's Laugh-In〉 같은 텔레비전 쇼들은 빠르게 움직이는 촌극과 개그, 노래 및 춤(풍자는 원래 거의 이런 형식으로 제시되었음)으로 신랄하고 무질서하며 변화무쌍한 오락 수단을 제공했다. 20세기 영국의 시인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는 풍자 작가들이 고고한 입장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비판한다고 주장해도 결국에는 단순한 화풀이로 끝나기가 쉽다는 점을 지적했다. 1세기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와 18세기 아일랜드의 소설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흔히 그 대표적인 보기로 간주된다 . 그런 경우 풍자는 희극과 비극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BC 1세기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훨씬 더 온건한 어조로 풍자시를 썼고, 제인 오스틴은 어릴 때 쓴 〈사랑과 우정 Love and Friendship〉 같은 작품에서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사람은 분노가 아니라 웃음으로 남을 죽인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체주의 정부시대에 스탈린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러시아의 시인 오시프 만델스탐의 경우처럼 풍자는 남을 죽이는 대신 자신에게 파멸을 가져올 가능성이 더 많다. 서양에서는 영국의 전직 총리인 알렉 더글러스 홈 경이 1963~64년 자신의 내각이 무너진 원인을 1960년대초에 유행한 풍자 탓으로 돌린 적이 있다.

시각예술에서는 만화(예를 들면 19세기 프랑스의 그래픽 아티스트이자 조각가인 오노레 도미에의 작품)가 주요한 풍자 수단이었지만, 18세기 영국의 화가 윌리엄 호가스가 그린 풍속화는 예외이다. 음악에서는 19세기 프랑스의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환상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에서 예배음악인 〈최후의 심판일 Dies Irae〉의 전통적 가락을 풍자적으로 뒤틀어 마녀들의 연회 장면에 이용했다. 무용에서는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키로프 발레단이 병사들의 투구에 악마의 뿔을 달고 무릎을 뻣뻣이 편 채 행진하는 걸음을 발레 스텝으로 안무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공격한 것을 멋지게 풍자했다. 20세기말에 서양에서는 프랑스의 〈카나르 앙셰네 Le Canard Enchaine〉, 영국의 〈프라이빗 아이 Private Eye〉, 미국의 〈내셔널 램푼 National Lampoon〉 같은 정기간행물과 나이트 클럽이나 텔레비전의 코미디언들이 풍자를 널리 보급했다. 소련에서는 〈크로코딜 Krokodil〉이라는 잡지가 언론이 엄격한 통제를 받는 상황 속에서도 가벼운 풍자를 보여준 것으로 유명했다. 한편 악의에 찬 글, 한 개인을 이유 없이 때로는 부당하게 악의로 공격하는 풍자문의 한 종류를 램푼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용어는 17세기 프랑스어에서 유래되어 사용되었지만, 그 예는 BC 3세기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개구리들 Batrachoi〉에서 에우리피데스를 풍자했고, 〈구름 Nephelai〉에서는 소크라테스를 풍자했다. 영국문학에서는 이것이 18세기와 문예부흥기에 특히 유행했고, 그 예로는 존 드라이든, 토머스 브라운 및 존 월크스 등이 사용한 풍자와 익명작가가 쓴 수십 편의 풍자가 있다.

한국의 풍자

한국의 본격적인 풍자문학은 고려시대의 가전체 소설로부터 시작한다. 무신의 집권으로 몰락한 문인들이 중국 당·송의 풍자소설을 모방하면서 시작된 가전체소설은 의인화된 소재를 통해 당시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를 질타했는데, 작품으로는 임춘의 〈국순전 麴醇傳〉, 이규보의 〈국선생전〉, 이곡의 〈죽부인전〉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을 소재로 한 천군류와 의인류가 성행했다.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천군류는 마음을 의인화한 천군(天君)을 중심으로 충신형과 간신형의 인물유형이 천군의 나라를 배경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소설이다. 임제의 〈수성지 愁城誌〉, 이옥의 〈남령전 南靈傳〉, 김무옹의 〈천군전 天君傳〉 등이 있다. 또 사물을 의인화한 의인류에는 남성중의 〈화사 花史〉, 안정복의 〈여용국전 女容國傳〉 등이 있고 동물을 의인화한 〈장끼전〉·〈별주부전〉 〈서동지전 鼠同知傳〉 등이 있다. 꿈의 형태를 빌려 역사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불만을 토로한 몽유류(夢遊類)에는 김시습의 〈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 임제의 〈원생몽유록 元生夢遊錄〉, 작자 미상의 〈운영전 雲英傳〉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제한적으로 나타났던 풍자가 여러 계층의 문학으로 두루 확산되었는데 당대의 풍자문학의 정점은 박지원의 소설이다. 조선 말기에는 풍자소설에서 골계와 해학이 두드러졌고 호색(好色)풍자와 같은 대담한 소재도 나타났다. 1930년대에는 식민지체제의 모순과 부조리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풍자문학이 등장했으며 대표적인 작가는 김유정과 채만식이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풍자의 개념과 방법

풍자는 대상과 주제를 우습게 만들고 그것에 대해 모욕, 경멸, 조소의 태도를 환기시킴으로써 대상과 주제를 깎아 내리는 기능을 한다. 대상에 대해서는 우행의 폭로, 사악의 징벌이 되는 첨예한 비평이 되고 독자에게는 조소와 냉소가 되는 웃음의 현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풍자의 가장 주된 속성은 공격성이다. 공격의 목표는 대체로 작품 자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과녁이다. 대상에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는 부정 그대로의 공격인 것이다. 그러므로 과녁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웃음이 파생될 뿐이지, 웃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중략) 풍자의 공격성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상의 파괴와 폐기에 있지 않다. 풍자는 교정과 개량을 위해서 대상을 비판하고 공격한다. 온건해서 공감을 주는 '호라티우스적 풍자'이든, 신랄해서 인간 사회에 대한 모멸에 찬 '주비널적 풍자'이든 모두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여 부정의 형식을 통해 긍정의 '건강한 사회'를 창조하려는 노력하는 것이다.(출처 : 한용환. 소설학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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