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南曲(강남곡)
by 송화은율江南曲(강남곡)
人言江南樂(강언강남락)이나,
我見江南愁(아견강남수)라.
年年沙浦口(년년사포구)에
腸斷望歸舟(장단망귀주)라.
사람은 강남의 즐거움을 말하나,
나는 강남의 근심을 보고있네.
해마다 이 포구에서
애타게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요점 정리
지은이 : 허난설헌
형식 : 오언절구
운자 : 수, 주
대구법 : 기와 승구
주제 : 남편을 그리워함, 남편과의 이별을 슬퍼함
내용 연구
년년 : 해마다
사포 : 물가의 나룻터, 갯벌의 어귀
단장 : 창자가 끊어짐, 곧, 대단히 애통함을 이름.
이해와 감상
나루터에서 떠나는 배를 보고 이별을 슬퍼하여 쓴 것으로 시인의 섬세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그 섬세한 마음이 비록 자신의 환경에 의해서 억압되고, 눌리고 있다는 것이 시로 나타나지만 말이다.
심화 자료
친필과 앙간비금도
출처: '허난설헌연구', 허미자
묵조도
출처: '한국여류한시문선', 김지용, 대양서적, 1973
권장 사이트 :http://kenji.chungnam.ac.kr/my/chohee/초희 허난설헌
다음 글은 그녀와 관련된 신영복님의 허난설헌의 무덤에서 띄우는 엽서의 글입니다.
강원도 명주군 사천리에 있는 애일당(愛日堂) 옛터를 다녀 왔습니다. 이곳은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서 그리고 소설「홍길동」의 작자로서 널리 알려진 교산(蛟山) 허균이 태어난 곳입니다. 지금은 작은 시비 하나가 그 사람과 그 장소를 증거하고 있을 뿐이지만 시비에 새겨진 누실명(陋室銘)의 한 구절처럼 정작 허균자신은 그곳을 더없이 흡족한 처소로 여기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환로(宦路)에서 기방(妓房)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두량 넓은 학문의 세계로부터 모반의 동굴에 이르기까지 그가 넘나들지 않은 경계는 없었습니다. 당대사회의 모순을 꿰뚫고 지나간 한줄기 미련없는 바람이었습니다. 비극적인 그의 최후에도 불구하고 양지바른 언덕과 시원하게 트인 바다 그 어디에도 회한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애일당 옛터에서 마음에 고이는 것은 도리어 그의 누님인 허난설헌의 정한(情恨)이었습니다. 조선에서 태어난 것을 한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던 그녀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무덤을 찾을 결심을 한 것은 오죽헌을 돌아 나오면서였습니다. 오죽헌은 당신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율곡과 그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를 모신 곳입니다. 사임당은 마침 은은한 국화향기속에 앉아 돌층계위 드높은 문성사(文成祠)에 그 아들인 율곡을 거두어 두고 있었습니다. 율곡선생은 이조 최대의 정치가이자 학자로서 겨레의 사표임에 틀림이 없고 그를 길러낸 사임당역시 현모의 귀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봉건적 미덕의 정점을 확인케 하는 성역이었습니다. 극화(極化)된 엘리뜨주의는 곧 반인간주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곳은 분명 어떤 정점이었습니다.
나는 교산을 찾아보고 오리라던 강릉행을 서둘러 거두어 서울로 돌아온 다음 오늘새벽 일찍이 난설헌 허초희(許楚姬)의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자욱한 새벽 안개속을 물어 물어 찾아왔습니다. 오죽헌과는 달리 허난설헌의 무덤은 우리의 상투적이고 즉각적인 판단이나 신빙성이 있어보이는 판단에서 한발 물러나 그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당신이 힘들게 얻어낸 결론이‘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철폐는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일과 직접 맞물려 있다’는 것이라면, 그리고 한 시대의 정점에 오르는 성취가 아니라, 그 시대의 아픔에 얼마만큼 다가서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애를 읽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도 와야 합니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죽음, 그리고 존경했던 스승 이달(李達)의 좌절,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사임당의 고아한 화조도(花鳥圖)에서는 단 한점도 발견할 수 없었던 봉건적 질곡의 흔적이 난설헌의 차거운 시비(詩碑)에는 곳곳에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의 진실이 그대로 역사의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연마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대리현실을 창조하는 문화속에서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만날 수 있기는 갈수록 더욱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가 해체되고, 자신은 물론 자식과 남편마저 <상품>이라는 교환가치형태로 갖도록 강요되는 것이 오늘의 실상이고 보면 아픔과 비극의 화신인 난설헌이 설 자리를 마련하기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시대를 고뇌했던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가 청산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항상 역사서의 둘째권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죽헌을 들러 지월리에 이르는 동안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역사의 다음 장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의심스러워집니다.
시대의 모순을 비켜간 사람들이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는 우리의 현재에 대한 당신의 실망을 기억합니다. 사임당과 율곡에 열중하는 오늘의 모정에 대한 당신의 절망을 기억합니다. 단단한 모든 것이 휘발되어 사라지고 디즈니랜드에 살고 있는 디오니소스처럼 <즐거움을 주는 것>만이 신격의 숭배를 받는 완강한 장벽 앞에서 작은 비극 하나에도 힘겨워하는 당신의 좌절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지월리로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 남매의 무덤앞에 냉수 떠놓고 소지올려 넋을 부르며“밤마다 사이좋게 손잡고 놀아라”고 당부하던 허초희의 음성이 시비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감수성과 시대가 선포되고 과거와 함께 현재의 모순까지 묻혀져가는 오늘의 현실에 맞서서 진정한 인간적 고뇌를 형상화하는 작업보다 우리를 힘있게 지탱해주는 가치는 없다고 믿습니다.
중부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이 쉴새없이 귓전을 할퀴고 지나가는 가파른 언덕에 지금은 그녀가 그토록 가슴아파했던 두 아이의 무덤을 옆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정승 아들을 옆에 거두지도 못하고, 남편과 함께 묻히지도 못한 채 자욱한 아침 안개속에 앉아 있습니다.
열락(悅樂)은 그 기쁨을 타버린 재로 남기고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준다던 당신의 약속을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서 지켜야 합니다. (1995년 12월05일【4회】 )
출처: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기획연재-중앙일보 컬러기획), 신영복
다음 글은 연세대 교수·사회학 교수 조혜정님의 글입니다.
달동네와 골목길 - 허난설헌 무덤 - 여성국극
미래로 향한 또 하나의 ‘삶의 흔적’
전통문화 찾기 붐의 뒤안에는 두가지 동기가 작용한다.하나는 급속하고 파행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자기'를 발견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화가 전지구적 시장을 휩쓸고 있는 시대에 고부가가치를 지닌 문화상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경제적 측면에서다.
그러면 무수한 옛것들중 지금 시대상황에 필요한 것들을 취사선택 해야 하는데 그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나는 1차적으로 미래지향성에 둔다.무작정 좋아보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하기에 지정한다는 것이다.
지금 문화유산에 대한 개념은 상당히 정태적이고 과거보존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또한 '영화로운' 과거를 상기시키는 유물이 중심이라 자연 지배층으로 기울고 있다. 게다가 시기적으로도 근대 이전의 것이어야 하고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통념은 사실상 남성중심적 민족주의와 복고주의적 성향을 띤 이들의 생각이다.
내가 여기서 살려야 할 문화유산으로 달동네와 골목길, 허난설헌의 무덤, 여성국극이라는 특이한 항목들을 든 것은 바로 문화유산에 대한 기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문화유산을 근대 이전에 국한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서구사회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불리는 것들도 실은 근대화 과정에서 재창출됐다는 점은 학계에서 이미 10여년전부터 지적됐고 또 공인됐다. 우리사회 역시 2세기 가량의 근대화 과정을 거쳐왔으며, 이 과정에서 전통의 개념도 끊임없이 새롭게 재규정돼왔다. 내가 달동네를 부각시키는 이유는 문화유산을 근대 이전으로, 또한 민족의 자부심을 외부에 과시하려는 어떤 것으로 한정하려는 통념을 깨기 위해서다.
생활의 지혜갖춘 도시의 공간
식민지적 근대화를 해야 했던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고달프고 가난했다. 이를 잊기 위해 위대한 문화유산을 강조하는 것이 감정적 만족을 준다면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과 경복궁을 아무리 비교해도 안타까움은 남을 것이다.
나는 '큰 것'과 '위대한 것'을 숭상하는 경향이 자기소외를 증폭시켜온 식민지적 근대사에 주목하면서 우리의 가난했던 삶 그 자체를 받아들일 것을 권한다. 일제시대 이후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지혜는 이른바 판잣집에, 그리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산꼭대기에 겹겹이 지은 집과 골목길, 그리고 두어평 남짓한 공간에 온갖 살림살이를 다 갖추고 안채와 사랑채와 침실과 식당의 구분까지 하고 사는 공간활용의 미학과 정치학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아직 남아 있는 달동네는 몇 군데 없겠지만 늦지 않았다. 봉천동 같은 산동네나 종로와 광화문 뒷골목, 교동과 계동의 골목등은 늦기 전에 문화유산화해야 하는 곳들이다. 이곳은 아마도 외국인들이 보고 싶어하는 인기 관광지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제 가난한 제 3세계를 여행하며 자국 화폐의 위력을 느끼고 싶어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보다 '콘크리트' 도시에서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인간'을 느끼고 싶어 여행을 떠난다.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있는 방, 동네사람들의 싸움과 화해의 흔적, 그리고 실제로 사람은 얼마나 적은 것을 소유하고도 즐겁게 살 수 있는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공간. 달동네와 골목길은 이런 이유로 우리가 보존해야 할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이 '몹시 인간적인' 삶의 공간은 머지않아 용인민속촌 못지 않게 후대들이 줄을 이어 방문할 곳이라고 나는 자신한다.
두번째로 나는 허난설헌의 생가 마을과 무덤을 꼽는다. 단지 옛 것이라고 해 모든 것이 살려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성이라는 인구 절반의 희생을 바탕으로 지탱되는 가부장적 전통은 살려내선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대는 신분제와 불합리한 차별을 철폐하면서 생긴 문명이고, 근본적으로 정의와 평등과 자유를 향한 열정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우리 전통 속에 숨쉬는 여성주의자의 흔적에 주목한다. 남동생 허균과 함께 역사를 이야기하고 신분제의 모순을 고민하던 옛 시인이자 단명할 수밖에 없었던 지식인 허난설헌의 부활이 이 시대 여성들에게 갖는 의미는 크다.
딱히 허난설헌의 무덤 뿐만 아니라 역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슬프게 죽어간 여성주의자들의 무덤을 역사화하고 그들 삶의 흔적을 돌아보는 순례코스로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8세기 영국 소설가 브론티 자매의 고향에는 얼마나 많은 여행객들이 몰리는가.
벌써 많은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적 문화유산을 남긴 이들의 유적을 찾아 국경을 넘어 여행하고 있다. 허난설헌의 무덤을 시작점으로 하는 페미니스트 문화유산 순례 행로가 조만간 이 땅에서 만들어지고, 또 인터넷에 올라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
이 시대의 스펙터클 가능성
세번째로 내가 여성국극을 들고 나서는 이유는 그것이 근대적 유물이면서 또한 이 시대의 흥미로운 스펙터클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 지금 그러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달 나는 김경수여성국극예술단이 무대에 올린 '호동왕자'를 관람했다. 여성국극은 근대화가 어느정도 진행돼 라디오도 듣고 연극도 보기 시작한 관객을 위해 만들어진 '한국적' 뮤지컬이다. 근대 초기에 완성된 판소리와 서구에서 들어온 흥행성 예술을 접합해 만든 종합대중예술이다.일본의 '다카라즈카'(총)처럼 여자들만 등장해 여성팬을 더욱 확보한 인기 공연물이다.
나는 텔레비전시대에 밀려난 이 국극이 새로운 대중문화시대에 접어들면서 다시 한번 재기하기를 바란다. 일본의 '가부키'(가무기)나 중국의 '경극'이 현대적 예술품으로 새롭게 일어나듯 국극에서 그 가능성을 보기 때문이다.
대단한 시대적 예술가가 있다면 국극을 대단히 흥겹고 의미있는 대중문예작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고,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부나 뜻있는 기업가들의 지원이 필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무성영화 변사의 재등장도 내가 즐겁게 관람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공연물이다.
문화유산은 적극적 문화생산을 위해 내가 요리하고자 하는 '거리'며, 특히 내가 지금 보고 싶은 것, 지금 삶에서 되살려내 힘을 얻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나를 만들어갈 비전이어야 한다.
- 조혜정, 연세대 교수·사회학
출처: 내 마음속의 문화유산 중 허난설헌 관련(내마음속의 문화유산 8, 중앙일보 970330, 24면(문화) 기획) .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燈)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에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허난설헌은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에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다.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에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가는 등의 비극이 연속되었다.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 묵)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계속된 가정의 참화 때문에, 허난설헌의 시 213수 가운데에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허난설헌의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난설헌집≫은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 (文台屋次郎)가 간행하여 애송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다. 국한문가사 〈규원가 閨怨歌〉와 〈봉선화가 鳳仙花歌〉가 있다. 그러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지었다고도 한다고 하고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蘭雪軒詩集, 역대여류한시문선(김지용 편역, 대양서적, 1975), 許筠全集(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81), 女流詩人 許蘭雪軒考(朴鍾和, 成均 3, 成均館大學校, 1950), 許楚姬의 遊仙詞에 나타난 仙形象(金錫夏, 國文學論叢 5·6合輯, 檀國大學校, 1972), 허난설헌연구(문경현, 도남조윤제박사고희기념논총, 1976).(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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