垂 楊[수양] / 김영랑
by 송화은율垂 楊[수양] / 김영랑
─南方春信[남방충신] · 4
동백(冬柏)은 잎마다 소복소복 햇발을 지니고도 성하게 푸르다.
양지쪽이면 이 그믐께 그 싱하게 붉은 꽃도 터져 나오리라. 하늘에 총총 박
힌 별이 모두 진홍일진대 우리의 마음이 어떨꼬. 동백꽃은 숲이 그 가슴에
꼭꼭 박아놓은 붉은 별들이다. 떨어지는 날은 비창(悲愴)할 수까지 있다.
돌담에 얼크러진 연한 뿌리를 찾아낼 수가 없다. 잡초라 무심히 메일까 두
려워 그리 깊이 간직했는가. 잡초는 그대로 있을 데 있어 좋아 보이고 어울
리거늘.
금렵구(禁獵區) 안의 참새떼들이 오늘은 유난히 재재거리는 것이 마치 아
침 저자에서 나던 소리다. 심동(深冬)을 삼경사경(三更四更) 흉하게 울던
올빼미놈이 줄기만 앙상하니 뻗어 있는 기평 나뭇가지에 멍하니 앉아 까치
의 조롱감이 되고 있다. 퍽은 어리석어 보이는 귀 달린 새, 고놈이 밤중에
쥐를 잡아내는 품이 고양이와 다를 게 없다. 눈과 귀가 그 소리와 같이 흉
하게 된 새다.
원적(原籍)과 거주계(居住屆)가 다같이 이 금렵구 안에 있는 까마귀떼. 이
번 큰 눈에 산과 들에 먹을 것을 못 찾고 구장(區長)의 남향 초가지붕을 마
구 헤치는데는 긴 간짓대로 날키러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좀해서 날아가려
고도 않는 것을 보면 검은 까마귀도 그리 미울 것도 없어 파도 안 나오면
갈 것을 기다리기로 한다.
큰 기평나무 세 그루가 그들 백자천손(百子千孫)의 보금자리요, 큼직한 대
삽이 그들의 안방이다. 대가족주의가 반포효도(反砲孝道)에서 생겼거니 싶
어 은근히 경의를 표할 때도 없지 않다.
까마귀까지 참새는 이 금렵구에서는 개 닭보다도 나와 사이가 가까웁다고
해야 옳은 말이다. 개 닭을 여러 번 죽인 뒤 더 안 치는 까닭도 있지만 근
본의 벽이 없어 잘 치지를 못한 때문이다. 참새는 내 섰는 앞 일채창(一釆
窓) 안에서 아무 위구심도 없이 예사 잘들 돌보면 작은 미물이지만 관심이
아니 갈 수 없다. 해조(害鳥)의 낙인이 찍힌 탓으로 더러 그것들의 발목이
베어지는 것을 보고 젊은 주인은 이 터 안을 금렵구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
뒤 소년 총사(少年銃士)는 물론 실없는 놈팡이 이사(狸師)들도 접근을 안
시킨다.
텅 빈 하늘빛은 비로 쓸 만치 뿌옇다. 몇 날 안 가서 보드레한 에메랄드가
깔릴 것을 생각한다. 아무래도 수양(垂楊)이 초봄의 초신호(初信號), 부는 듯
마는 듯한 미풍에도 설레나니 기어코 파르스름한 초봄을 적시고 만다.
앞으로 5, 6일이다. 하루 한 번씩 수양을 바라보아 봄의 숨소리와 걸음걸이
를 뒤따를 수 있다. 이 몇 날이 가장 중요한 봄의 생리(生理) 기간이라 이
동안만은 점심을 굶더라도 지켜야 한다. 수양의 생리를 지켜야 한다.
처(凄)가 나들이를 차리고 나선다. 이건 남의 옷, 모자까지.
“왜 또 이러오?”
“K주(州)를 같이 가실거나. 중(重)이한테를 가실거나.”
“마음을 그만 가라앉히래두.”
“오늘은 꼭 가겠어요.”
작정을 단단히 한 셈 같다. 중(重)이를 그 눈 속에 묻고는 나만 한 번 눈
을 헤치고 가 보았지, 처는 핑계핑계하여 못 가게 해놨던 것이다. 날씨가
확 풀린 봄이요, 중이 생각이 불현듯 치밀어 나선 사람을 막을 수도 없고
하여 K주(州)는 작파(作罷)하고 중이를 찾아가기로 한다.
3마장 논둑길, 별로 말도 없이 간다.
“울지 말우.”
대답이 없다.
“울 테요.”
벌써 처의 안면(顏面) 근육이 이상스러진다. 다행히 논두룩에 아직 일꾼은
안 나오는 때니 들킬 것은 없지만 자식을 묻고 뫼 찾아가는 우리 내외를 먼
빛으로도 짐작할 수도 있는 처지라 시하(侍下) 사정도 있고 남의 눈에 뜨일
것이 좋을 것도 없고 하여 첫번은 내 혼자 다녀왔던 것이다.
중(重)이 생각이 나는가 하면 중이 그 두 눈이 먼저 보여져서 아찔해진다.
살리어 주기를 애원하는 두 눈, 중이는 특히 두 눈이 잘 생겼던 아이다. 10
년 전에 처음 둘째아이를 놓쳐 봤고 이번 중이를 보내는데 간(肝)이 어찌
안 썩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죽음 중에 영아(嬰兒)의 죽음이 가장 불
쌍하지 않을까.
나도 눈물을 좀 냈다. 처는 목이 메이었다. 중이가 묻히던 밤, 반시간 앞
서 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두 주일 동안 천지가 눈으로 덮여 버렸으니 죽
은 애가 척설(尺雪) 그 밑에 꽁꽁 언 땅 속에 그대로 눈물 내고 보채고 하
는 것만 같이 안타까울밖에 없다.
이번 갔다 오면 처도 웬만히 잊을 터이다. 그러므로 어린애 죽음이 더 불
쌍하다. 두 번을 다 아이를 놓치고 나면 봄이 찾아오게 된 탓으로 항상 마
음이 서언하다.
《朝鮮日報[조선일보]》 1940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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