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유치환의 삶과 문학
by 송화은율거제 둔덕 유치환의 삶과 문학
유치환은 1908년 음력 7월 14일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에서 아버지 유준수와 어머니 박우수의 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은 극작가인 유치진이다.
“둔덕은 통영읍 나루터에서 목선을 타고 한 시간 가량의 거리에 있는 커다란 섬으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분지와 같은 곳이다. 마을 앞에는 폐왕성이 있는 우두봉이 가로막고 뒤에는 산방산이 받치고 있어서 마치 삼태기 같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한촌이 바로 둔덕골이다.”
한일합방 되던 해(1910)에 유준수는 가솔을 이끌고 처가가 있는 통영읍으로 이사를 하였다. 유치진은 5살, 유치환은 2살이었다. 유치환의 외가는 통영에서도 손꼽는 갑부로 한약방을 경영하고 있었다. 유치환은 외가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고 하겠다. 외할아버지가 연 한문서당에서 한문 지식을 익히다가 10살 때에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어린 시절의 그는 말이 통 없는 소년이었다. 학교 종이 울리더라도 뛰어가는 법이 없이 조용히 걸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갔다.
그가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의 내성적 성격은 중학 시절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는 대신에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 열중했다.
일본에 간 이듬해 관동대지진을 맞이했고, 그때 일인들에 의해 무고한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신문을 보냈다. 그 소녀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권재순이다. 도요야마 중학 4학년 때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그는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1928년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진명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권재순과 결혼한다. 그 당시로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이 결혼식 때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던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훗날 시인이 된 김춘수이다. 그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는 1931년 문예월간에 「靜寂(정적)」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온다. 이때 청마는 비슷한 또래의 통영 문학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의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던 아내는 시아버지와 청마를 설득하여 거처를 평양으로 옮긴다. 청마는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내 걷어치우고 시작에만 전념한다. 그의 아내는 청마에게 평양의 신학교 진학을 권유했으나 그는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1934년 부산 초량으로 이주하였다. 부산화신연쇄점에 근무한다. 그는 청마시초라는 시집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사실 나는 광복 이전에는 문단적 교유나 교섭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한때 米鹽(미염)으로 벌이하던 和信(화신) 관계로 부산에서 趙碧岩(조벽암)과 접촉하던 외에는 간간이 서울 가면 주배를 나눈 이로서 素雲(소운), 芝溶(지용), 李箱(이상) 제씨가 기억에 남아 있을 뿐. 따라서 현재 내가 가진 문단의 선배, 동배의 교분은 거개가 광복 후에 비로소 맺어진 것이다.”
어느날 김소운은 충청도 서천에 계시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화신에 근무하던 청마를 불러내었다. 다방에서 청마와 마주앉은 소운은 청마 앞에 전보를 내밀었다. 청마는 전보를 읽고는 얼마면 되느냐고 물었다. 소운은 수중에 돈이 있긴 있느냐고 물었다. 청마는 자신에겐 가진 것이 없고 아내에게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권재순의 유치원 보모 월급이 40원이던 시절이다. 청마는 20원을 구해 소운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다시 통영으로 돌아온다.청마의 첫 시집 靑馬詩抄(청마시초)가 나온 것은 1939년 12월이다. 이 시집은 김소운의 주선으로 화가 곱추 화가 具本雄(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출판사 靑色紙社(청색지사)에서 나왔다. 시집의 본문 용지는 파지를 이용한 것이었다. 여기에 <깃발> <일월> 같은 시가 들어 있다. 시 <깃발>은 유치환이 29세이던 1936년에 조선문단 1월호에 발표한 시이고, <생명의 서>는 동아일보 1938년 10월 19일자에, <일월>은 1939년 4월 문장 3호에 발표한 작품이다.
1940년 봄,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 煙首縣(연수현)에서 정착하여 농장 관리인으로 일하던 그는 광복 직전인 1945년 6월 돌연 귀국한다. 청마가 북만주 언 땅에 외아들 일향을 을 묻고 고향 통영으로 귀환한 것은 아내 권재순의 강권 때문이었다. 아내는 꿈마다 할아버지가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손짓을 한다고 남편을 채근했다. 그들이 귀국하고 두 달 뒤에 광복이 되었다.
당시 문학청년이었던 김춘수는 친구와 함께 고향의 대시인을 방문했다. 점심 무렵이었는데, 청마는 柳(유)약국집 마루에 혼자 앉아 파쌈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켜고는 파쌈을 고추장에 찍어 입에 연신 집어넣고 있었다. 결벽증이 있던 문학청년의 눈에 청마의 모습은 너무나 ‘세속적’으로 비쳐 실망감이 컸다. 김춘수는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김춘수가 청마를 방문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15일 「통영문화협회」가 결성되었다. 청마가 대표가 되고 윤이상, 전혁림, 김춘수 등이 간사를 맡았다. 문맹자를 위한 한글 강습, 시민 상식 강좌, 농촌 계몽 연극 공연 등을 하는 계몽적인 예술운동단체였다.
45년 10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부인은 일본인에게서 물려받은 문화유치원을 운영하였다. 유치원 한켠에 영산장이란 서재를 마련하고 지냈다. 47년 이영도와 만남. 가사 선생. 당시 초정 김상옥도 같이 근무함.
이윤수 시인 등과 함께 竹筍(죽순) 동인을 한 것은 1946년이다. 대구 서문로에서 名金堂(명금당)이라는 시계점을 내고 있던 이윤수는 1946년 5월 1일자로 광복 이후 최초의 시동인지인 죽순 창간호가 나오자 점포 앞에 ‘죽순시인구락부’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해 11월이 다 저물 무렵 대구 명금당에 나타난 청마는 동인들과 사나흘 같이 지내다 집으로 돌아갔다. 청마가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죽순 동인을 통해서이다. 당시 통영여중 교사로 있던 이영도는 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혼자였다.
한국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난하여 문총구국대를 조직해 종군했던 청마는 53년 휴전과 함께 통영으로 돌아와 교육 및 시작에 전념한다. 55년 경주고 교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만년의 10여 년을 경주 대구 부산 등에서 교육가로서 보낸다.
그 뒤 청마는 경북대학교 문리대에 자리를 얻어 시론을 강의했다. 청마는 향촌동에 있던 백구세탁소 2층에 세들어 살았다. 추운 겨울이면 방안에 있던 잉크병이 얼기도 했다.
1960년 이른 봄 시인 허만하는 대구 경북여고 부근 육군 관사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청마의 집을 방문했다. 청마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실직 상태였고, 한쪽 다리는 신경통으로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이다. 햇볕이 따뜻한 마루 끝에 걸터앉은 허만하는 얘기 끝에 청마에게 물었다. “선생님,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셨겠습니까?” 청마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아마 천문학자가 되었을끼라.”
청마가 세상을 뜬 것은 1967년 2월13일이었다. 그날은 고교 후기 입시날이었다.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청마는 학교 일을 마치고 예총 일로 몇몇 문인을 만났다. 그들과 어울려 몇 군데 술집을 들렀다. 청마는 고혈압 때문에 술 대신 사이다를 마셨다. 술값을 치르고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청마는 좌천동 앞길에서 한 시내버스에 치여 부산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절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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