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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져 내일이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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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져 내일이야

 

 

아아, 내가 한 일이야, 그리워할 줄을 몰랐던가

있으라고 했더라면 가겠는가마는 제가 굳이

보내고 그리워 하는 마음은 나도 모르겠구나.

 

 

아! 내가 한 일이 후회스럽구나. (막상 보내 놓고) 이렇게도 사무치게 그리울 줄을 미처 몰랐더냐?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으라고 말렸더라면) 있으라 했더라면 임이 굳이 떠나시려 했겠느냐마는 (내가) 굳이

보내 놓고는 이제 와서 새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 자신도 모르겠구나.

요점 정리

작자 : 황진이(黃眞伊)

갈래 : 평시조, 단시조

성격 : 감상적. 애상적. 여성적 편향. 연정가. 이별가

표현 : 도치법. 영탄법

제재 : 보내고 그리워하는 정

주제 :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 이별의 정한

출천 : <진본 청구영언(珍本靑丘永言)>

내용 연구

어져 : 감탄사로 그리움의 정서를 집약적으로 환기시킴 / 화자는 임을 보내고 그리는 자신에 대해 한탄하는 심정을 읊고 있다. '어져'는 임을 보낸 자신을 한탄하고,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는 심경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감탄사라고 할 수 있다.

모로더냐 : 몰랐더냐, 몰랐던가

제 구태여 - 중의적 표현 [ ① 제 = 임 : 임이 굳이 (가겠는가마는) - 도치법 ② 제 = 나 : 내가 굳이 (보내고) - 행간 걸침

 

있으라고 말했더라면 임이 '나'를 떠나갔겠는가 하는 후회의 마음이 나타남.

보내고 그리는 - 나도 몰라 하노라 : 자존심과 경솔함으로 임을 보내 놓고 그리워하며 어찌할 줄 모르는 안타까운 심정이 담겨 있다.(심리적 갈등이 우리말의 절묘한 구사를 통해 섬세하고 곡진하게 표현되었다.)

이해와 감상

 

자존심과 연정의 사이에서 겪는 오묘한 심리적 갈등이 우리말로 절묘하게 표현된 작품으로 임을 떠나 보낸 후의 회한(悔恨)을 진솔하게 나타내고 있는데, 애틋한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하여 정결하게 표현하였다.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외롭고 약한 서정적 자아의 마음이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황진이의 시조는 기녀(妓女)들의 시조가 애정을 노래함으로써 시조의 영역이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표현 기교까지 고도로 세련되었음을 말해 준다. 초장의 '어져'라는 감탄사는 소박한 탄성이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그리움에 대한 인식이 내포된 것이고, '저 구태여' 같은 경우도 의미의 함축성을 극대화한 좋은 예이다. 이 외에도 '동짓달 기나긴 밤을~'에서 시간을 공간으로 치환시키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심화 자료

황진이(黃眞伊)

 

생몰 연대 미상으로 조선 중종대 개성의 기생, 시조시인.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3절(松都三絶)이라 일컫는다.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황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영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서경덕이 처사(處士)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했으나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지 않아 친구 이달에게 의논했다. 이달은 "진이의 집을 지나 누(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한 곡을 타면 진이가 곁에 와 앉을 것이다. 그때 본 체 만 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진이가 따라올 것이나 다리를 지나도록 돌아보지 말라"하고 일렀다. 벽계수는 그의 말대로 한 곡을 타고 다리로 향했다. 황진이가 이때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라는 시조를 읊었다. 이것을 들은 벽계수는 다리목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졌다. 황진이는 웃으며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다"라고 하며 돌아가버렸다고 한다.

 

소세양이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나는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황진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이별하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 〈송별소양곡 送別蘇陽谷〉을 지어주자 감동하여 애초의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고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해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 길에 묻어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한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부임하는 도중 황진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면서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가 전한다. 그녀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로 시작하는 시조를 포함해 모두 8수가량의 시조를 남겼고 〈별김경원 別金慶元〉· 〈영반월 詠半月〉·〈송별소양곡〉·〈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박연 朴淵〉·〈송도 松都〉 등의 한시를 남겼다. 〈식소록 識小錄〉·〈어우야담〉·〈송도기이 松都紀異〉·〈금계필담 錦溪筆談〉·〈동국시화휘성 東國詩話彙成〉·〈중경지 中京誌〉·〈조야휘언 朝野彙言〉 등의 문헌에 황진이에 관한 일화가 실려 전한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여류 시조의 문학사적 의의

 

여류 시조는 그 작자가 대부분 기녀들이었다. 비록 천민에 속하는 계급이었지만, 그들의 교양은 선비들에 견주어 어느 면에서도 손색이 없었다. 이들의 시조는 여성만이 지닌 섬세한 감정으로 진실하면서도 절실하게 사랑을 노래한 까닭에 더욱 감동적이다. 특히 재도지기(載道之器)의 역할을 했던 사대부들의 시조와는 달리 여성 특유의 우아한 정서를 전달하고 있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시적 언어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들 작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시조에 얽힌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어 그들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기녀시조시인(妓女時調詩人)와 고려 가요의 관계

 

기녀 시조는 상실의 상황에서 노래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시조 담당층인 사대부 시조와 비교된다. 말하자면 황진이의 시적 정서와 사대부의 시적 정서는 판이하다는 것이다. 한편 기녀 시조는 이별이 제재라는 점에서 고려 가요와 상통하는데 고려 가요가 이별의 순간을 노래한다면 기녀 시조는 이미 벌어진 이별의 상황을 노래한다. 시적 화자의 의식면에 있어서도 고려 가요가 님과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보고 있다면 기녀 시조는 수평적 관계로 보고 있다. 또, 발화의 차이에서도 고려 가요는 이별의 순간에 발화하는 것으로 직접적이고 절박한 발화가 이루어지는가 반면, 기녀 시조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므로 자아를 성찰하고 더불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며 간접적으로 발화한다. 요약해 말하자면 기녀 시조는 이별 상황, 언술 방식, 태도, 갈등의 해결 등은 고려 가요의 전통을 잇고 있지만 그것을 변용시킨 셈이라 할 수 있다.

기녀시조시인(妓女時調詩人)

 

조선시대 기녀(妓女) 출신의 시조작가들을 말하고 있고, 기녀를 둔 목적이 경기(京妓)나 지방기(地方妓)를 막론하고 공사(公私)의 연향(宴享)에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들은 춤·노래·악기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어야 했고, 장악원(掌樂院)에서 일정한 교육과정을 두어 이들을 가르쳤다. 기녀의 활동형태는 대개 3가지로 나뉜다. 첫째, 궁중이나 관청의 연향에 동원되는 경우, 둘째, 민간의 연회에 초청되어 가무(歌舞)를 제공하는 경우, 셋째, 기방(妓房)을 차리고 찾아오는 고객을 상대로 술과 가무를 파는 경우이다. 조선 후기로 올수록 2번째와 3번째의 활동형태가 주목된다. 영조 때의 가객(歌客)으로 유명했던 이세춘(李世春)의 집단이 가무에 능한 기녀와 함께 민간의 초청에 의해 영업을 했던 것이 그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조선시대의 시조는 주로 연회에서 불렸던 성악(聲樂)의 가사로 창작되었던 것이었으므로, 그 연희의 주역이었던 기녀가 시조의 창작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최동원(崔東元)의 연구에 따르면 기녀작가의 이름이 전하는 경우는 황진이(黃眞伊)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기명(妓名)을 쓰고 있다. 이들 모두를 통틀어 〈역대시조전서 歷代時調全書〉에 실린 기녀작가의 수는 28명, 작품의 수는 56수인데, 신빙성이 희박한 것을 제외하면 25명에 44수가 된다. 기녀의 작품은 일반작가들에 비해 전승이 불완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로 첫째, 이들의 작품이 연회석상에서 불려 작품의 내용보다는 음악의 창사(唱詞)로서의 구실이 더 중요했고 유흥이 끝나면 부른 사람의 이름을 굳이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는 경향이 짙었다는 점, 둘째, 출신이 천한 이들이었으므로 당시의 시조집 편찬자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라는 점, 셋째, 기녀 자신들 역시 자기 작품에 대한 전승의식이 희박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실제 고시조 중에서 성(性)을 주제로 한 작품이나 여성화자(女性話者)의 작품은 상당수가 기녀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녀시조로서 가장 오래된 작품은 성종(成宗) 때의 소춘풍(笑春風)이 지은 "당우(唐虞)를 어제 본 듯 한당송(漢唐宋) 오늘 본 듯"으로 시작되는 작품이나, 이 작품은 상투적 문구를 늘어놓았을 뿐 형식도 안정되어 있지 않다. 기녀시조로 가장 우수한 작품은 조선 중기에 와서 황진이·매창(梅窓)·홍랑(紅娘) 등에 의해 창작되었다. 황진이의 작품으로 확실한 것은 6수인데,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로 시작되는 작품이 절창으로 손꼽힌다. 이들의 작품은 주로 애정과 이별을 주제로 하되 참신한 시상(詩想)과 표현으로 당시 매너리즘에 빠진 사대부시조를 자극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송이(宋伊)·매화(梅花)·명옥(明玉)·천금(千錦) 등의 기녀시조시인이 등장했으나, 작가가 남성으로 표기되는 등 특정한 작가의 작품으로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대개의 내용은 역시 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애정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기류 작품

 

조선 시대 기생들이 쓴 작품으로 시문, 서화에 뛰어 나고 절색(絶色)을 구비한 기문(妓門)의 여인을 기류라 했는데, 대표적인 기류로는 황진이·이매창·문향·매화·홍랑·소백주·구지·명옥·다복·소춘풍·송대춘·송이·강강월·천금 등 15명이며, 그들의 시조 작품 22수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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