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사전 / 닳아지는 살들 / 이호철 단편 소설

반응형

 

순간 벽시계가 열두 시를 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일제히 시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안이 술렁술렁해졌다. 시계를 쳐다보던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 늙은 주인 쪽으로 향했다. 코 앞의 사마귀를 만지던 늙은 주인이 어리둥절하게 아들과 며느리와 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복도로 통한 문이 열리며 방안의 불빛이 복도 건너편 흰벽에 말갛게 삐어져 나갔다. 열두 시가 다 쳤다. 네 사람의 시선이 그 쪽으로 옮겨졌다. 조용했다. 왼편 벽으로부터 서서히 식모가 나타났다. 히히히히 하고 이상한 웃음을 띄우고 서 있다. 제딴에 미안하다는 뜻인 셈이었다.

 

“벤소에 갔었시유.”

 

하고 말했다.

 

순간 영희가 발작이나 일으킨 듯이 아버지 쪽으로 달려갔다. 한 손으로 식모를 가리키며, 한 손으로는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쪼개지는 듯한 큰 소리로 말했다.

 

“아부지, 자 봐요. 언니가 왔어요, 언니가 ······ 정말 열두 시가 되었으니까 언니가 왔어요. 이제 정말 우리 집 주인이 나타났군요. 됐지요? 아부지 자, 어때요? 됐지요? 아부지.”

 

식모가 이번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말이에요. 아부지, 저렇게 언니가 왔어요. 그렇게도 기다리시던 언니가 왔어요.”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서도 식모를 내다보는 영희의 눈길은 적의(敵意)로 타오르고 있고, 아버지는 영희의 부축을 받으며, 저리 비키라는 것인지, 혹은 어서 들어오라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게 한 손을 들어 허공에다 대고 허우적거리고, 성식과 정애도 엉거주춤하게 의자에서 일어서 있었다.

 

꽝 당 꽝 당

그 쇠붙이 소리는 밤내 이어질 모양이었다. (결말부)

* 감상 : 영희의 일가족은 항상 거실에 모여 앉아 이북으로 시집가서 돌아오지 않는 맏딸을 기다 리고 있는데, 그녀가 언젠가 찾아 들어올 문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정작 그 문을 열고 나가 기 다리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신경을 자극하는 꽝당꽝당하는 쇠붙이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 소리 는 60년대 이후 진행된 근대화의 물결과 그 바람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영희 일가족은 이 쇠붙 이 소리에 아무 희망없이 숨어지내며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다.

 

* 등장인물

· 아버지 : 은행장으로 있다 은퇴한 70노인으로 반 백치(白痴)가 다 된 인물.

· 영희 : 항상 불안하게 소리치며 지껄이는 딸

· 성식과 그의 아내 : 말수가 적고 안경만 번쩍이는 성식과 아내는 아버지와 거의 같이 백치가 되어 가고 있는 인물

· 선재 : 일상에서 속물적으로 살아가는 인물로서 사랑없이 영희와 약혼함

 

* 배경 : 공간적-한 집안(거실), 시간적-어느날 저녁~자정

⇨ 공간적 배경의 한정 : 어떤 희망도 밖의 현실에서는 발견하지 못하는 암담한 시대 상황의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