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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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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ㅅ마음 날가치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업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히 맺는 이슬 가튼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엇다 내여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ㅅ마음 날가치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어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ㅅ마음은.

 

 

 

원시 보기

 

(하윤옥선생님 제공)

 

 요점 정리

 지은이 : 김영랑(金永郞)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순수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낭만적, 유미적, 서정적, 여성적

 어조 : 여성적 호소의 어조

 표현 : 비유와 상징, 가정과 자문자답(自問自答)하는 형태

 구성 :

   1연  임의 존재에 대한 가정         (가정 - 기)

   2연  임에게 바칠 내 마음            (결론  / 다짐 - 승)

   3연  임의 존재에 대한 회의         (물음 / 회의 - 전)

   4연  임의 부재에 대한 안타까움  (대답 / 안타까움 - 결)

 제재 : 내 마음

 주제 : 미지의 임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과 회의,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회의

 특징 :

① 가정(假定)과 자문 자답의 형식을 보임.

② 여리고 섬세한 여성적 어조 /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내 마음'을 형상화함.

③ 조화된 언어 / 세련된 언어를 사용하여 서정적인 사랑의 정서를 표현함.

④ 3행과 4행의 교체로 형태미, 균형미 조성

⑤ 3음보, 4음보의 부분적 배치

 출전 : <시문학> 3호(1931. 3)

 

 내용 연구

내[시적 화자]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ㅅ마음 날가치[나같이 / 의도적으로 'ㄹ'을 덧붙여 리듬감을 형성]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그래도'라는 시어를 통해 회의적 가정임을 암시. / 부재하는 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내 마음을 알아  주는 임을 찾기가 어렵다는 현실 인식이 돋움에 깔려 있는 표현. 3연의 물음과 짝이 된다.] - 내 마음을 알아 줄 임에 대한 기대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어리는] 티끌[번민과 고독]과

속임 없는 눈물[순수/ 진실 ]의 간곡한 방울방울['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은 고뇌와 슬픔을 의미한다. ‘내 마음에는 곱고 순수한 사랑의 보람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들도 존재하며, 이러한 고뇌와 슬픔까지 함께 나누어야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 혹은 화자는 자신의 깨끗하고 평화로운 마음에도 때때로 더러움('티끌')이 생기며, 자신이 이를 후회와 반성의 눈물로 씻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푸른 밤 고히 맺는 이슬 가튼 보람[삶의 가치]을

보밴 듯 감추엇다 내여 드리지.[내 마음의 번민과 고독(티끌), 순수(눈물 방울), 삶의 모든 가치(이슬 같은 보람)를 받들어 바치겠다는 의미이다. / 이때 이 모든 것을 임에게 주는 것은 헌신적인 의미가 아니라, 화자의 내면세계를 임이 이해하고 공감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임에게 내 마음을 내어 드리겠다는 다짐

 

아! 그립다.[감정의 직설적 표현]

내 혼자ㅅ마음 날가치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현실에 부재 / 내 마음을 알아 줄 그런 임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극적 현실 인식에 근거한 표현(1연과 대응)이다. / 꿈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회의적 물음] - 임의 존재에 대한 회의

 

향 맑은 옥돌[순수하고 은근한 사랑]에 불[열정]이 달어[향 맑은 옥돌 의 이미지는 화자의 사랑을 선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불에 붉게 달구어져 맑게 보이는 옥돌처럼 한꺼번에 타오르는 사랑이 아니라 은은하게 그 사랑을 간직하겠다는 내면화된 심미 의식이 드러난 표현이다. 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불에 달아 오른 옥돌처럼 뜨거우면서도 깨끗하리라는 표현이다.]

불빛[화자의 사랑]에 연긴 듯 희미론['ㄹ'이 주는 부드러움을 살리 위한 표현 / 희미한] 마음은,[ 연기와 같이 사라지고 말 것처럼 보이는 서정적 자아의 안타까운 심정. 임은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 존재로 결국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슬픈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희미론'이라는 표현은 우리말의 의미부와 형태부의 적절한 사용인 시적 허용이다. 의미부를 통해 전달된 의미는 손상을 입지 않고 형태부의 변형으로 음악적 효과를 거둔다.]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ㅅ마음은.[결국,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을 알아 줄 이가 현실에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표현으로, 이 시가 근본적으로 꿈과 현실의 갈등 구조로 되어 있음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내 마음을 알아 주는 사람은 꿈에서나 아득히 보일까말까 한 희미한 존재이고 현실에서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갈등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 도치법으로 내 마음을 알아줄 이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자료 검색

어법에 어긋난 표현

이 시에서는 우리말을 조탁하여 시어의 음악성을 살리고 시적 정서와 표현 기교를 섬세하게 가다듬어 시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있다. ‘날같이(++같이)’, ‘어리우는(어리++)’, ‘하오련만(++련만)’에서는 모음이나 유음을 첨가하여 부드러운 낭독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였다. ‘희미론 희미한이지만 희미-’ ‘-롭다의 관형사형 어미 ‘-로운을 축약시킨 듯한 ‘-을 사용하여, 유음의 부드러운 음악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심미적 효과

이 시는 여성을 화자로 설정하여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감각적 시어를 사용하여 그려 내고 있다. ‘내 마음은 화자의 섬세하고 고운 서정의 세계를 표현하고, ‘티끌 눈물’, ‘보람은 각각 내적 고뇌와 내면적 슬픔, 곱고 순수한 사랑의 보람을 의미함과 동시에 섬세하고 고운 서정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한 향 맑은 옥돌을 통해 순수하고 은근한 사랑을, ‘불빛에 연기라는 표현을 통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섬세한 서정을 표현하고 있다.

시적 허용

시적 허용이란 시에서 어법이나 문법에 어긋난 표현을 쓰는 것이 허용되는 것을 말한다. ‘먼 산 머언 산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해와 감상

 김영랑은 박용철과 더불어 <시문학>지를 창간, 주재함으로써 1930년대 이 땅의 서정시 운동을 본격화하였다. 그는 시의 본도(本道)가 서정에 놓아야 하며, 그것은 언어의 섬세한 조탁(彫琢)에 의해 미학적 수준으로 상승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 같은 서정에 대한 재인식과 시어의 미적 구조성에 대한 재발견은 이 땅의 시를 생경한 관념이나 도시적인 이데올로기의 수준에서 예술적인 차원으로 상승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시는 나의 마음을 알아 주실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슬픔이 응결된 결정체를 보배처럼 간직했다가 내어 드리겠다는 연가(戀歌)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문자답(自問自答)의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 줄 임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극적 세계 인식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이것은 마지막 연에서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이 되어 결국 임이 존대하지 않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따라서, 이 시는 자문자답의 형태를 통한 기대와 좌절의 갈등 구조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제 1∼2연은 '가정(假定)-결론(結論)'의 관계로 시작된다. 내 마음을 아실 임이 '어데나 게실 것이면' 진심을 보여 드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임은 미지(未知)의 임이다. 그래서 그 임은 꿈에나마 아득히 보이는 존재일까 하는 강한 의문만 남고 이러한 아련한 그리움은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이 되어 결국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아쉬운 추단(推斷)에 이르게 한다.

 

이해와 감상2

 1연은 '내 혼자의 마음을 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처럼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는 내용의 가정으로서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서 내 마음을 아실 이가 없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암시되어 있다. 2연은 1연에 대한 응답으로서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은밀한 심정을 티끌, 눈물 방울, 이슬 같은 보람 등의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했다. 역시 이런 심정의 세계를 이해해 주는, 그래서 보배처럼 귀한 마음을 전해 드릴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3연은 진실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분을 그리워하며, 그런 분이 꿈의 세계에서도 아득히 멀리에서나 보게 될 수 있는 지를 묻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사실상 그러한 소망도 불가능한 것임을 암시적 의미로 담고 있다. 4연에서는 이제까지 갈구해 온 사람이 참으로 있다면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타오르듯이 내 사랑이 불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런 대상은 현실적으로 없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담긴 대목이다.  

 

이해와 감상3

 이 시는 시인이 추구한 서정성과 음악성을 ‘그리움’이라는 전통적 정서와 결합시킴으로써 맑고 투명한 감성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우리말의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은 여성적 정조(情調)와 어울려 임을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언어적 장치를 이루고 있다. 모음과 유음 계통의 시어가 음악성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으며,‘이슬 같은’의 영롱한 이미지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의 열정적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적 화자의 내적 독백으로 전개되는 이 시는 스스로에 대해 묻고 대답하면서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1연에서는‘내 마음을 아실 이가 있다면’이라는 가정의 이면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임을 찾기가 어렵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2연에서는‘티끌’, '눈물', '보람' 등의 시어를 사용해 내 마음을 아실 이에게 내어 드릴 ‘내 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3연에서는 그러한 '내 마음'을 알아줄 임을 만나고 싶은 충동과 함께 그러한 임을 꿈에서나마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회의적 물음을 제기한다. 4연에서 '향 맑은 옥돌', ‘불'의 이미지는 다시 시적 화자의 사랑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요컨대 이 시는 꿈과 현실, 소망과 좌절의 갈등구조로 되어 있으며, 가정과 자문자답(自問自答)은 그러한 갈등 구조를 표현하는 시적 장치가 되고 있다.(출처 : 김병국외 4인 공저 한국 교육미디어 문학)

 

심화 자료

 김영랑과 '시문학파'

 김영랑은 1930년대 일제의 문화적 탄압이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모국어의 가치를 보존하고 다듬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인 1930년대의 시단은 많은 시인들이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찾아 다양한 실험을 거듭하던 시기로, 그는 섬세한 서정을 세련된 언어와 율동적인 음조로 표현하였다. 그는 전라도 지방의 서정을 수용하면서 토속어와 의성어, 의태어 및 부사어와 사투리를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가능성을 넓혔다.

 

 1930년 박용철에 의해 창간된 순수시 동인지 <시문학(詩文學)>은 순수시 운동의 모태로, 3호까지 간행되었으며 <문학>, <문예 월간>으로 계승되었다. 김영랑은 이 <시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박용철,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파’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이들은 우리말을 조탁(彫琢)하여 시어의 음악성을 살리고 시적 정서와 표현 기교를 섬세하게 가다듬어 시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시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와 사회 현실을 외면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받고 있다.

 김영랑 시의 특징

 김영랑의 시가 발휘한 음악성의 탁월함은 다양한 사건의 반복 현상이 시의 음악성을 살리는데 얼마나 효과적인 것인지를 시인이 인식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리듬이란 본래 등시성을 가진 사건의 반복적 재현으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영랑의 시에는 바로 이와 같은 사건의 반복이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김영랑의 시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건 단위의 반복으로 말미암아 음악성이 고조된다. 첫째, 음소 단위의 반복적 재현, 둘째, 음절 단위의 반복적 재현, 셋째, 단어 혹은 어절 단위의 반복적 재현, 넷째, 문장 구조의 반복적 재현, 다섯째, 시행과 연 단위의 반복적 재현, 여섯째, 다양한 음수의 반복적 재현 등이 그것이다. [(출처 : 정효구, ‘1930년대 순수 서정시 운동의 시대적 의미’, 김은전 외, <한국 현대시사의 쟁점>(시와 시학사, 1991) ]

 김영랑과 순수시

 우리 나라의 순수시는 1930년대 박용철이 주재한 <시문학>(1930)을 중심으로 김영랑, 정지용, 신석정, 이하윤 등에 의해 지향되었다. 이 중에서도 박용철과 김영랑이 중심 인물이었다.

 

 박용철은 그 자신이 적지 않은 시를 쓰기도 하였지만 작품보다는 순수시 운동을 뒷받침하는 이론에서 더 중요한 활동을 보였다. 그가 내세운 이론에 어울리는 작품으로서의 뛰어난 성과는 김영랑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영랑은 우리말을 다루는 언어 감각에서 김소월 이후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서, 섬세하고 은은한 서정시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로 인하여 '북도에 소월(평북 출생), 남도에 영랑(전남 출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이 주장한 순수시란 시에서 일체의 이념적, 사회적 관심을 배제하고 오직 섬세한 언어의 아름다움과 그윽한 서정성을 추구하는 시란 뜻이었다. 그 결과 지나치게 개인의 내면 세계에만 편중되면서 말을 다듬는 데에 빠졌다는 결함은 있으나, 이들에 의해 우리의 현대시가 시의 언어와 형식에서 좀더 세련된 차원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우리 시사(詩史)에 빛나는 업적이라 하겠다.

 

 한편 <시문학> 동인들에 의해 주도된 순수시 문학 유파를 '시문학파'라 이르는데, 이들은 문학에서 교훈적 계몽주의나 정치적 목적 의식을 철저히 배제하고 언어의 기교, 순수한 정서를 중시하였으며 특히 정지용에 와서 우리 시는 완전히 현대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김영랑의 생애와 시 세계

 김영랑(金永郞) 1903년 전남 강진에서 5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아명을 채준이라 불리다가 윤식(允植)으로 개명함. '영랑'은 필명으로 시문학 창간호에 처음 사용하였다. 그의 고향 강진은 산수가 유명하여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과 소박한 습속을 소재로 한 것이 초기시에 많이 나타난다. 그는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1909년에 강진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915년에는 졸업을 하였으나 부친의 반대로 진학을 하지 못했다. 1916년 결혼을 하고 모친의 배려로 서울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영어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최초의 비운인 아내와의 사별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후에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19년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대구형무소에서 1년을 생활하게 된다. 1920년에는 일본 청산학원에 들어가 음악을 공부하려다가 무산되고 1922년에 도일하여 영문과로 전과하였다. 이 때가 시인 김영랑으로는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박용철이 그의 자질을 보고 시를 쓰도록 권유하였고 공부하며 예이츠와 쉘리와 같은 상징파 시인들에게 경도되었다. 영랑은 외향적인 면이 강한 사람으로 다분히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가능성을 지녔었으나 그의 시는 당대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은 배제되었다. 이는 영시(미의 추구나 찬미)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1923년에는 여름방학을 통해 귀국하였다 관동 대지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 시기에 사회주의적 분위기에 젖어 문학활동에 전력하였다. 1926년에는 재혼을 하여 이후 박용철과 서신으로 주고받는 일에 전념하게 되며 귀국 후 신경향파 문사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이를 통해 한국현대시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을 고심하다가 결국 순수문학적 이론을 정립하였다.

 

 영랑의 성장기는 그의 문학 습작기를 포괄하는 기간으로서 그의 세계관 정립 및 시 세계의 지향을 시사해 준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시문학기(1930-1935) : 초기시 시대로서, 시문학의 간행 이때의 영랑은 한국 근대시사에 획기적이었는데, 시인으로서의 출발인 동시에 자신을 정립하게 된다. 37편의 시를 발표할 만큼 시작생활에 의욕적이었는데, 발표지면은 극히 한정되어 그가 주재하는 시문학과 문학지에만 시가 실렸다. 이는 영랑의 결벽성이나 다른 시인에게 설득력이 없었다는 것이 원인이었다. 1935년에 이미 발표된 37편의 시와 새로 쓴 시 17편을 합쳐 <영랑시집>을 발표하였다. 당대 문단은 영랑시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영랑의 초기 시세계는 당대 어두운 식민지 현실에 의한 '비관적 세계인식'과 민족의 장래에 대한 영랑의 이상적 신념에 의한 '이상세계 지향'으로 요약된다. 시정신은 지상 삶의 고통스러움과 슬픔 때문에 '태양과 천상의 세계에로의 지향'으로 나타난다.

 

 저항문학기(1938-1940) : 중기시 시대로서, 이 시기에는 2년간의 휴지기가 있었는데 이는 시대 상황 에 대한 평정의 인식이 무너지면서 시 창작의 유기성에 혼돈과 균열이 생겨 서정성과 내밀성을 유지해가기 어려워 중기시는 서정의 가락보다는 '죽음'과 '좌절감' 등으로 점철되어진 비판적 세계인식 또는 저항정신으로 전환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일본침략정책의 극렬화로 망국민의 비애와 좌절감의 팽배 그리고 청년들의 징병과 징용 등의 당대 현실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가 어떤 자세로 응전하였는가를 보여준다. 문인들에 대한 것은 문인보국단을 만들어 우리 작가들로 하여금 앞잡이 노릇을 강요하였다. 영랑은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 창씨개명반대 등 저항의식을 보여주었고 저항의지가 확고한 작품을 남겼다. 대상 세계와 미래에 대한 끝없는 절망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시정신이 조국과 민족의 장래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냐는 물음에 대해 회의적인 대답을 하였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후 식민지 말기의 극한 상황으로 또다시 휴지기를 갖게되었다.

 

 광복문학기(1946-1950) : 후기시 시대로서, 이 시기는 삶의 강한 의욕과 환희로 충만된다. 초기시의 섬세한 감각, 서정의 정조와는 전혀 다른 적극적 사회참여의 일면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6.25 전란 중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고 9월 29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시기의 시작품은 <영랑시선>에 수록된 19편이며 그밖에 5편의 시론과 산문이 있다. 이 작품들은 현실참여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편 이념적인 이론과 갈등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사회현상을 개탄하는 등 희망과 절망의 교차를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새벽의 처형장절망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후기시는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하나는 생경한 감정의 분출로 인해 영랑시의 한계를 보여 주었다. 시인의 감정이 시정신속에 여과. 정제되지 않은 채 그대로 분출하였다. 둘째는 희망과 절망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김영랑(金永郞 1903-1950)

 시인. 본명은 윤식(允植). 전남 강진(康津) 출생.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3·1운동 때에는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여 중학부와 영문과를 거치는 동안 C.G.로제티, J.키츠 등의 시를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1930년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永郞詩集)>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창씨 개명(創氏改名)과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저항 자세를 보여 주었고, 8·15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의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하다가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김영랑論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준 김영랑

김영랑(1903-1950)의 본명은 김윤식으로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강진 보통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휘문 의숙을 다니다가 3.1운동으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이 일로 휘문 의숙을 중퇴한 김영랑은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강진의 자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강진에서 무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영랑에게 송정리의 벗 박용철이 찾아와 시 전문지를 같이 내자고 제안했다. 박용철은 오랜 숙의 끝에 사재를 털어 [시문학] 창간호를 1930년에 발간하게 된다.

 

1930년은 김영랑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 해 3월에 간행된 [시문학] 창간호에 13편의 시를 한꺼번에 발표하며 시단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나온 [시문학] 2호에 9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20편이 넘는 작품을 1930년 두 달 동안에 한꺼번에 발표했던 것이다.

 

김영랑의 시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카프를 중심으로 쓰여진 경향시는 생경한 사상성과 경직된 목적 의식을 주로 드러냈기 때문에 당시의 시단은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주는 김영랑의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써 시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변화하였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법적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경향시 위주였던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시에 대한 인식 변화시켜

김영랑의 시에는 '내 마음'이라는 어휘가 유달리 많이 보이는데 그가 이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은 내면의 순결성을 표현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직접 제시하지 않고 대부분 자연의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그의 초기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은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것들이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에 제시된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은빛의 강물, [제야]에 제시된 맑은 샘물과 밤의 심상, [가늘한 내음]에 제시된 보랏빛 노을의 고요한 아름다움, [내 마음 아실 이]에 나오는 향맑은 옥돌의 심상 등은 모두 마음의 순결성을 나타내는 예들이다. 이렇게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김영랑 서정시의 출발은 바로 이 순결성에 있었다. 이 순결성이 그의 시를 아름다운 해조와 서정주의의 극치로 몰아간 것이다. 그 순결한 마음은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대응되므로 분명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순결성은 꽃가지의 은은한 그늘이나 봄날의 미미한 아지랑이처럼 모호한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영랑은 자연의 맑고 깨끗한 정경을 통해 마음의 순결성을 보여 주었는데, 자연의 정결한 모습에 집중하게 되면 자연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황홀감을 갖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본래 자연을 통한 순결성의 추구는 현실 세계의 추악함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이때에 자연은 현실과 대립적 위상에 놓이게 된다. 현실은 고통과 비애가 교차되는 장소로 인식되는 반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은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을 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의 많은 시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연의 어느 한 순간이 가져다주는 극치의 아름다움은 그의 정신을 몽롱케 할 정도로 황홀감을 안겨 준다. 저녁놀이 물드는 보랏빛 하늘, 밤 깊이 흐르는 물소리와 찬란한 별떨기, 은색으로 황홀히 빛나는 달빛, 맑은 가을날의 고요한 정경, 이 모든 것이 자연미의 한 정점을 보인 것이어서 시인은 그 황홀감에 가슴 설레며 몸둘 바 몰라 한다.

 

그런데 이 황홀한 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모란이 한번 흐드러지게 피어 그 찬란한 빛을 불태웠다가 천지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쉽게 소멸하는지 모른다. 자연의 순결성도 현실 세계의 혼탁함 때문에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으며, 자연의 황홀한 아름다움 또한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면 영랑의 자연 인식은 비극적인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그 비극성이 그의 심혼을 긴장시키고 그의 서정시를 가능케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모란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마음에 비탄과 상실의 감정이 남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뚝뚝'이라는 시어를 통해 모란이 무정히 사라져 버리는 정경을 소리로 나타내는가 하면, '떨어져 누운 꽃잎마져 시들어버리고'라는 시행을 통해 처절한 상실의 순간과 상실 뒤에 오는 형언할 수 없는 비탄의 정서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삼백예순 날을 계속 울고 지낸다는 과정적 표현을 배치하여 그리움의 정도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한편으로 영랑의 자연에 대한 인식이 시인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적 장단과 호응을 이루며 하나의 정경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오롯한 미의 원광을 두르게 된다. 가령 영랑의 [오월] 같은 시는 봄 들판의 약동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인데 시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구사하여 심미감을 높이고 운율의 변화를 통하여 흥겨운 율동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서정적 표현의 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우리 시의 역사에서 귀중히 간직하고 전수해야 할 표현 상의 백미(白眉)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판단한다.

 

 

맑고 깨끗한 자연의 정경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 표현

김영랑의 시에서 인생과 사회에 대한 발언이 중심을 이룬 작품은 아주 적다. 현실에 대한 반응을 보인 예로는 [거문고]라든가, [독을 차고], [우감(偶感)], [춘향] 등의 작품을 들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점 때문에 현실주의적 시각을 가진 사람은 김영랑의 시가 우리에게 어떤 효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앞에서 말한 [오월]처럼 자연의 정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일관한 작품은 그런 지적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만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관련이 없는 듯한 자연에 대한 상상도 우리의 감정을 풍요롭게 하며, 새로운 비유와 표현의 구사도 언어사용의 폭을 넓힘으로써 실제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연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와 절묘한 기법으로 표현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영랑의 시는 그 나름의 충분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출처 : 이숭원 / 서울대 국문과졸, 현 서울여대 교수)

 '내 마음'을 노래한 영랑의 시들

 김영랑의 시 세계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내 마음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외부 세계(현실)와의 연결을 완전히 차단한 채 내면 세계에 몰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남긴 70여편의 작품 중에 '내 마음'이라는 시어가 등장하는 작품이 약 60 편이 넘는다는 사실에서 그가 '내 마음'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사행시', '가늘한 내음', '독(毒)'을 차고', '언덕에 바로 누워', '땅거미', '오매 단풍 들것네' 등이 있다.

 내 마음을 아실 이에 나타난 꿈과 현실, 소망과 좌절의 갈등 구조

 시적 화자의 내적 독백으로 전개되는 이 시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면서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1연은 '내 마음을 아실 이가 있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 가정은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다. 2연에서는 '티끌, 눈물, 보람' 등의 시어를 사용해 내 마음을 아실 이에게 내어 드릴 '내 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3연에서는 그러한 '내마음'을 알아줄 임을 만나고 싶은 충동과 함께 그러한 임을 꿈에서나마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회의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4연에서는 사랑의 열정은 타오르건만 끝내 내 마음 속 사랑을 아실 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슬픈 결론에 이르고 만다. 요컨대 이 시는 꿈과 현실, 소망과 좌절의 갈등 구조로 되어 있으며, 가정과 자문자답(自問自答)은 그러한 갈등 구조를 표현하는 시적 장치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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