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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시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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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金永郞, 1903-1950, 본성명 김윤식·允植)

 

· 시인. 전남 강진 생. 지주의 아들로 태어남. 강진 공립 보통학교 졸

· 서울 휘문고보 졸. 3·1운동 때 6개월간 복역

· 출옥 후 동경 청산학원 영문과 수학.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귀국

· 22세(1925)에 결혼

· 27세(1930) 정지용, 정인보와 함께 [시문학] 동인지 발간

- 예술적 최고의 미(美)인 ‘순수미’를 추구(‘북의 소월, 남의 영랑’이란 칭호)

· 1945년 강진에서 우익운동 주도, 강진대동청년단장으로 활동

· 1948년 가족과 함께 서울 신당동으로 이사, 공보처 출판국장 역임

 

· 작품 경향

(1) 시의 음악성 강조,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

(2) 짧은 형식의 시행 채택. 섬세한 정서의 흐름.

(3) 영랑의 시는 ‘흐름’과 ‘떨어짐’으로 인한 <유동성>을 지님. 곧, 정지적(靜止的)이고 객 관적이 아니라 “유동적, 가변적”임

 

- 영랑의 이러한 표현은 김소월의 <풀따기>에서 그리움을 자라나는 ‘풀’과 흐르는 ‘냇물’ 에 비유한 것과 유사하다. 이 흐름 속에서 삶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

- <가늘한 내음>에서 3연의 ‘흐르는 마음’이란 구절에서도 상실감에 젖은 마음의 유동성 을 노래하고 있다.

- <춘향>, <독을 차고> 등에서는 민족의 매서운 정신을 형상화함

 

· 6·25전쟁 때 포탄에 맞아 숨짐

· 시 81편(이 중 60여 편은 강진에서 씀)

· 첫시집 [영랑시집](1935), 시와 산문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 유적지

1) 생가(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

2) 시비(생가) : ‘모란이 피기까지는’ 새김

3) 묘(서울 망우리 묘지 내) : 위치 확인 불명

4) 김영랑시비(광주 광주공원) : ‘모란이 피기까지는’ 새김

---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가늘한 내음>, <꽃>,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내 마음을 아실 이>, <오월>, <독을 차고>, <두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돌담에 소색이는(속삭이는) 햇발같이>

---  문학이론 <시문학파>, < 신적정>(시의 변모에서의 두 시인의 유사점)

 

▲ 강물

 

꿈에 본 강물이라 몹시 보고 싶었소.

무럭 무럭 김 오르며 내리는 강물 //

언덕을 혼자서 거니노라니

물오리 갈매기도 끼륵끼륵 //

강물을 철철 흘러가면서

아심찬이 그 꿈도 떠실코 갔소. //

꿈이 아닌 생시 갖인 서름도

작고 강물은 떠실코 갔소.” //

 

󰏐 유홍준, 남도답사 일번지(2) ‘영랑생가 답사’

 

영랑생가는 동산 중턱 양지바른 쪽 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터에 본채와 사랑채가 널찍이 자리잡고 있다. 화단에는 방문객을 위함인지 그를 기리기 위함인지 모란꽃을 가득 심어 놓아 그 작위적 발상이 가상스러운데, 한쪽에는 1988년에 세운 영랑시비가 육중하고 촌스러운 자태로 이 집의 운치를 다 망쳐 놓았다. 오직 볼 만한 것은 뒷담 쪽으로 빽빽이 들어선 대밭의 싱그러움과 해묵은 고목이 된 동백나무 여남은 그루가 있어 아리땁고 그윽한 남도의 정취를 보여 주고 있음이다. 그러께는 이 집을 지방문화재 89호 지정하여 사랑채를 초가로 올려 복원해 놓았는데 나는 이 영랑생가 초가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나에게 있어서 영랑은 누구인가를 한번쯤 생각해 보았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시 중략)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같은 영랑의 시를 생각하면 나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 속에 만연한 인간적 상실과 좌절을 뼛속까지 느끼게 된다. 영랑의 시가 향토적 서정과 민족적 운율을 동반한 영롱한 서정시라는 것은 문학사가들의 해설이 없어도 알겠고, 또 실수 없이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서정의 발현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리하고 맥빠질 수 있겠는가? 모란이 피기까지 그가 기다린다는 것은 고작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다. 그런 식의 정서 발현이란 감상의 과소비밖에 안 될 것이니, 클리넥스 홑껍질보다도 근수가 덜 나갈 이 가벼움을 티없이 맑다고 표현하기는 싫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개화·신문화 운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1925년이 되면 KAPF를 비롯한 진보적인 문예운동이 일어나다가 1930년대 들어서면 국내는 진보적 운동이 결정타를 맞고 그 대신 남만주와 북간도에서는 항일 게릴라와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하고 있을 때이다. 이때 우파의 문학·예술인들은 맥없이 순수예술을 주장하다가 그래도 그중 괜찮다는 사람들이 일말의 양심 내지 자존심에서 좌파가 내세운 민족성·현실성의 가치 중 고작해서 향토색이라는 이름으로 흡수되어 갔다. 그것이 문학에서 국민문학파이고, 미술에서 오지호·김용준 등의 향토색 논쟁이며, 김중현·김종태의 향토적 서정주의 그림이다. 그리고 음악에서 홍난파 같은 작곡가를 낳았다. 속알갱이는 송두리째 일제에 빼앗겨 버리 식민지적 현실을 극복할 비전과 의지는 상실한 채 형식에서만 향토적 빛깔과 맛을 찾으면서 그것이 민족적 아이덴티티라고 믿으려고 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랑의 시에서 차라리 측은한 인간적 상실과 좌절의 비애가 느껴지는 것이다.

 

󰏐 김영랑의 시 세계

 

“아름다움은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키이츠(Keats, 1795-1821)의 말에 큰 영향을 받은 바 있다. 특히 [초기시]의 고요하고 미세한 감각과 내면의 세계가 보여준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는 이것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순결한 삶에의 욕구가 자연과의 내적 연관을 통해 잘 드러났던 것이다.

 

그의 [후기시]가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함으로서 정갈한 시적 구조와 예술적 가치의 약화를 초래했으나 이 역시 순결한 삶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낳은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현실 참여에 바탕을 둔 시를 발표할 때도 자신이 추구한 서정시의 본령을 끝까지 실천코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 제1회 영랑문학상 대상에 시인 장호씨

 

월간 순수문학사가 永朗 김윤식 시인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제1회 영랑문학상의 대상수상자로 시인 章湖씨(본명 金長好․동국대 명예교수)가 뽑혔다. 수상시집은 「신발이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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