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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암에 대하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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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암

 

이 바위에 대해 경상도 지리지영이지적(靈異之跡)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을 남쪽 37리에 포가 있는데 개운포라 하며, 가운데 한 바위가 있어 이를 처용암이라 한다. 신라 때 사람이 그 바위 위에서 나왔는데 용모가 기괴하여 사람들이 처용옹이라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울산군 처용암조를 보면,

고을 남쪽 39리 개운포 가운데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 사람이 있어 그 위에서 나왔으며 모양이 기괴하고 가무(歌舞)를 좋아하며 그 때 사람들이 처용옹이라 하였다. 지금도 향악에 처용희가 있다.”

동국여지승람』「울산군 고적를 보면,

세상에 전하기를 처용이 바위 아래에서 나왔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바위는 처용설화와 관련 있는 돌섬이다.

다음은삼국유사』「처용랑과 망해사조(處龍郞望海寺條)에 관련된 설화이다.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無一 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大王遊開雲浦. [在鶴城西南今蔚州.] 王將還駕. 晝歇於汀邊. 忽雲霧冥?. 迷失道路. 怪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勅有司, 爲龍璡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現於駕前. 讚德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其妻甚美. 疫神欽慕之. 變爲人. 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京明期月良夜入伊遊行如可入良沙寢矣見昆脚烏伊四是良羅二?隱吾下於叱古二?隱誰支下焉古本矣吾下是如馬於隱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神現形, ?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公之形容. 不入其門矣. 因此國人門帖處容之形. 以僻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海寺. 亦名新房寺. 乃爲龍而置也. 又幸鮑石亭. 南山神現舞於御前. 左右不見. 王獨見之. 有人現舞於前. 王自作舞. 以像示之. 神之名或曰祥審. 故至今國人傳此舞. 曰御舞祥審. 或曰御舞山神. 或云. 旣神出舞 審象其貌. 命工摹刻. 以示後代. 故云象審. 或云霜髥舞. 此乃以其形稱之. 又幸於金剛嶺時. 北岳神呈舞. 名玉刀鈐. 又同禮殿宴時. 地神出舞. 名地伯級干. 語法集云. 于時山神獻舞. 唱歌云. 智理多都波都波等者. 盖言以智理國者. 知而多逃. 都邑將破云謂也. 乃地神山神知國將亡. 故作舞以警之. 國人不悟. 謂爲現瑞. 耽樂滋甚. 故國終亡.

 

49대 헌강대왕 대에는 서울에서 동해변까지 집들이 맞닿았으며 담장이 서로 이어졌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 길가에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풍우가 사철 순조로왔다. 이에 대왕이 개운포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홀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이상히 여겨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점성관이 이것은 동해의 용이 변괴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하였다. 유사에게 칙령을 내려 용을 위하여 이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마자 안개가 흩어져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 명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대왕의 덕을 칭송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 아들 하나를 딸려서 서울로 보내어 왕의 정사를 돕도록 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처용이었다. 왕은 미모의 여자로 아내를 삼아 주고 그의 뜻을 사로잡기 위하여 급간의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너무나 아름다워 역신이 탐을 내고 사람으로 변신하여 밤에 몰래 그 집으로 들어가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 처용가(향찰) 생략 ---

 

이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노하지 않으니 그 미덕에 감복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맹세하겠습니다.” 하였다.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경사스런 일을 맞는다 하였다.

 

왕이 궁중에 돌아와 영취산(문수산의 한 지맥) 동쪽에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짓고 망해사 혹은 신방사라 했다. 이는 용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으나 옆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므로 왕이 직접 신이 추는 춤을 추어서 그 원형을 보여 주었다.

 

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 춤을 전해 오면서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한다. 혹은 이미 산신이 나와 춤을 추므로 그 모습을 본따서 공장이를 시켜 조각하게 하여 후세에 전했기 때문에 이름을 상심무 또는 상염무라 한다 하는데 이것은 그 모양을 이른 말이다. 또 금강령에 행차했을 때 북악의 신이 춤을 바쳤으니 옥도근이라 한다. 또 동례전에서 잔치할 때에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니 이름은 지백급간이었다.

 

어법집에 이르되 그때 산신이 나와 춤을 올리며 노래를 부르되 지리다도파도파라 한 것은 대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릴 자들이 미리 알고 많이 도망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하리라는 말이었다. 이에 지신과 산신이 나라가 망할 춤을 추어 깨우쳐 준 것인데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상서로움이 나타났다고 더욱 탐락에 빠져 나라가 끝내 망한 것이라 한다.

 

다음으로삼국사기』「신라본기 권 제11 헌강왕조를 보면,

“ ... 3월에 왕이 국동의 주군을 순행할 새, 어디서 온 지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앞에 나타나 가무를 하였는데, 모양이 해괴하고 의관이 괴이하여 시인이 산해(山海)의 정령이라 하였다. (고기<古記>에는 '왕즉위년'이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경주부 고적 월명항을 보면,

금성 남쪽에 있다. 신라 헌강왕이 학성에 유람하고 개운포에 이르니, 홀연히 한 사람이 기이한 형상과 괴상한 의복으로 임금의 앞에 나아가 노래 부르고 춤추며 임금의 덕을 찬미하였다. 임금을 따라 서울에 들어와서 스스로 처용이라 이름짓고 밤마다 시가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나 마침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신이라 하였고 그가 가무하던 곳을 뒷 사람들이 월명항이라 이름하였다. 인하여 처용가와 처용무를 만들어서 가면을 쓰고 연출하였다.”

 

이상이 처용과 관련된 내용이다. 그리하여 울산에는 온산면에 처용리가 있고 상개동을 상개운, 하개동을 하개운, 황성동을 개운포라 부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동해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온 곳이 황성동 세죽마을 앞바다에 있는 바위 밑이라 하여 이 바위를 처용암이라 불러왔다.

 

이러한 처용의 설화에 얽힌 처용암은 온산면 방도리의 목도와 함께 이 지방의 아름다운 명승지로 되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온산의 석유화학단지로 인하여 공해가 심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

 

<다 같이 돌자 울산 한 바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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