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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리스토텔레스,정약용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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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리스토텔레스,정약용        

   사람을 소개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너무나 평범한 나머지 이름 석자 빼고는 특징적인 면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사람을 소개해야 하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이와는 정반대로, 특이하고 뛰어난 점이 너무 많은 사람인 나머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을 얼마만큼 소개해야 할지 막막한 경우이다.

   여기 소개할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소개하기가 정말 어려운 학자이다. 앞서의 두 번째 이유에서 그렇다. 그의 생애 자체가 TV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자로서의 업적도 '한자(漢字)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책을 쓴 사람'으로 평가받을 만큼 방대하기 때문이다. 그는 무려 500여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고, 그 내용도 철학, 문학, 정치, 경제, 법률, 지리, 역사, 의학, 기계 설계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그는 철학자로 본다면 철학자, 행정학자로 본다면 행정학자, 기술자로 본다면 기술자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다채로운 면모를 갖춘 사람이다. 이 때문에 정약용이라는 인물 자체가 하나의 '학문'이 되기도 한다. 다산학(茶山學)이 그것으로 이는 이미 한국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어떤 학자들은 그를 '조선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약용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분야에 걸친 방대한 저술을 남긴 사람이다. 이러한 외적인 공통점 외에도 이 둘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학문함이 단순히 공허한 이념에 그쳐서는 안되며, 반드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정약용은 '학문은 모름지기 현실에 적용되어야 하며 유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실학(實學) 사상가라고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자연관에 기초하여 고대 그리스 철학을 '완성'한 사람으로 평가되듯이, 정약용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관점에서 조선의 유학을 새롭게 해석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문제의식을 갖춘 영재"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경기도 초부면 마재(현재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해남 윤씨는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었다고 하니, 그의 천재성은 어느 정도 타고난 것인 듯도 싶다.


   어린 시절 정약용은 확실히 '될성싶은 떡잎'이었다. 네 살 때 천자문을 떼더니 일곱 살 때는 산술(算術:수학)과 역학을 익혔고 아홉 살 때는 경서(經書)와 역사를 공부했으니 말이다. 나아가 열 살 무렵에는 이미 자신의 시문집(詩文集)까지 낼 정도였으며 열 세 살 때는 사서삼경과 제자백가를 섭렵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영재였음에 틀림없다. 이런 그가 지금 세상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영재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각종 학원을 다니느라 정신없는 나머지 책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반쪽 짜리 천재가 되어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제대로 된 '영재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아버지의 무능(?)이 큰 역할을 했다.
   아버지 정재윤은 정직하고 부지런한 관리였으나, 승진을 위해 필요한 수완은 부족했던 듯 싶다. 중앙 관직에 자리잡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의 생애를 지방관으로 떠돌았는데, 이것이 어린 정약용에게는 오히려 '약'이 된 것이었다. 중앙 관청의 관리와는 달리 지방관은 백성을 직접 접하고 돌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아버지를 통해 그는 백성의 빈곤한 삶과 세상의 현실을 보고 느끼면서 이를 공부와 연결시키는 '산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그는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 뜻도 모르면서 열심히 사서삼경을 외우기만 하는 여느 양반집 자제들과는 달랐다. 그는, 민초(民草)들의 고단한 삶을 접하면서 학문의 목적은 자구(字句) 해석과 과거 시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기치인(修己治人:자신을 잘 닦고 사람들을 훌륭하게 다스림)에 있음을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후에 그는 진정한 선비란 "도(道)를 익히며 위로는 임금을 섬기면서 아래로는 백성에게 혜택이 가도록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단지 머리만 좋았던 어린이가 아닌, '문제의식을 갖춘 영재'였던 셈이다.

실학(實學)과의 만남                            

   영재 소년 정약용은 일찍 결혼하던 당시의 풍습에 따라 열 네 살 때 결혼한다. 그리고 잠시 관직을 그만두었다가 다시 제수(除授)를 받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는데, 이것은 지방 수재에 불과했던 그에게 세상과 학문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은 영·정조 시대라는 '르네상스'를 맞고 있었다. '탕평책(蕩平策)'으로 극심했던 당파싸움은 다소 잠잠해진 상태였고, 농기구와 수리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량도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화폐 이용이 늘어나고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상공업도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조선이라는 꺼져 가는 불꽃의 마지막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해진 듯했지만 당쟁은 암투의 형식으로 오히려 격화되고 있었고, 생산량이 늘었음에도 관리들의 수탈은 더욱더 심해져서 백성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해지고 있었다. 사상적으로도 '조선의 국가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자학은 본래의 비판적이고 건전한 정치 이념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채 명분과 예법만을 중시하는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전락해 버린 나머지 끊임없는 당쟁의 빌미만 될 뿐이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이 '정치의 중심지'로 올라온 젊은 정약용에 눈에 안 보였을 리 없다. 그는 사회를 변혁하고 백성을 구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는데, 이런 가운데 그의 눈에 뜨였던 것이 바로 청나라로부터 전파되어 왔던 실학(實學)과 성호 이익의 경세치용(經世致用) 사상이었다. 이로써 현실의 삶에 바탕을 두는 그의 학문체계는 비로소 그 기초를 갖추게 되었다.

 난세(亂世)에 관직에 진출하다                

   1782년(정조 6년), 스물 두 살에 정약용은 회시(會試)에 합격하고 태학(성균관)에 들어간다. 그는 처음부터 임금에 눈에 들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정조가 태학에 내린 [4·7이기론에 있어서의 퇴계와 율곡의 차이]에 관한 80개의 물음에 젊은 정약용이 율곡에 입장에서 아주 빼어난 답을 내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정조에게 [중용강의]를 지어 바쳤고, 이후에도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드라마틱한 삶'에는 항상 가장 잘 나가는 시기에 이미 몰락의 징후가 복선처럼 깔리는 법, 그는 이 시기에 친척의 권유로 서교(西敎:천주교)에 접하게 되는데 이 것이 결국 그의 '기구한 삶'의 시작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그는 1789년, 28세에 나이로 마침내 대과(大科)에 합격하여 관직에 들어서게 되고,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 경기 암행어사, 사간원 사간, 동부승지, 좌부승지, 병조참지, 부호군, 형조참의(38세 때)를 거치는 관료로서의 화려한 10년간을 보낸다. 이 시기에 그가 남긴 업적에는 지금도 우리 눈에 쉽게 띠는 것이 있다. 너무나도 유명한 수원의 상징 수원성이 바로 '홍문관 수찬 정약용'이 설계한 것이니 말이다. 또, 그가 기중기를 직접 설계하고 이를 수원성 공사에 활용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또, 그는 암행어사를 하면서 피폐한 백성들의 삶과 관료들의 부패를 눈으로 확인하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는 부패의 궁극적 원인은 농사를 짓지 않는 이들이 농지를 소유하면서 농민들의 생산물을 착취하는 데 있다고 보고, 토지의 공동 소유, 공동 재배, 그리고 노동 시간에 따른 수확량 분배를 큰 틀로 하는 여전제(閭田制)를 주장한다. 실현 가능성은 둘째치고라도 이런 그의 주장은 봉건적 농지 소유가 일반적이었던 그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것이었다. 나아가, 후에 그는 [탕론(蕩論)]에서 그는 '민본주의적 정치론'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획기적인 군주관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에 따르면, 임금은 본래 다스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있는 존재이다. 즉, 왕자(王子)의 정치란 "수리정책을 잘 펴서 가뭄과 홍수가 없도록 하고, 나무를 많이 심어서...곡식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며, 각종 가축을 기르도록 장려해서 농민을 튼튼하게 하고 노인을 잘 봉양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이를 잘 해낼 수 없는 덕이 없고 무능한 임금은 하늘(天)에 뜻에 따라 새로운 임금으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서양의 '사회계약론'에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그의 생각이 얼마만큼 혁신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18년간의 유배:"폐족(廢族)도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의지는 미쳐 펼쳐보기도 전에 꺾여 버리고 만다. 1800년, 정약용이 속한 남인(南人) 세력의 정치적 바람막이였던 정조가 갑자기 죽어 버린 것이었다. 이윽고 어린 나이에 순조가 즉위하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자 그 동안 소외되어 왔던 노론 세력의 일대 반격이 시작되었다. '천주교도'라는 낙인이 찍혀 있던 남인 세력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상황은 정약용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1801년 벌어진 신유사옥(辛酉邪獄)때 천주교 신자라는 혐의를 쓰고 두 형(정약전·약종)과 함께 체포된 것이다.


   그는 이 무렵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조심조심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자세로도 당쟁의 회오리를 피할 수는 없었나 보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고, 유배 생활은 그 후로 무려 18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긴 유배생활은 후세대인 우리들에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그 동안의 연구와 관료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의 그의 대표작들과 500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들은 대부분 이 기간 동안 쓰여진 것이다.


   그는 참으로 진정한 유학자였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 힘든 순간에도 자신을 닦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는 수기치인의 자세를 결코 잊지 않았으니 말이다. 수기(修己)의 자세는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구절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어째서 스스로 포기를 하려하느냐, 영원히 폐족(廢族)으로 지내버릴 것이냐? 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다 하더라도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뿐만 아니라 (이런 상황 때문에 오히려) 과거 공부에 매달리는 사람이 빠지는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을뿐더러, 가난하여 고생하다 보면 마음을 단련하고 지혜와 생각을 넓히게 되어 인정(人情)과 사물의 진실을 옳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선비의 의무라고 생각했기에 치인(治人)에 대한 고민도 그치지 않았다. 이런 그의 고민은 백성을 직접 상대하는 지방관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행실을 다룬 [목민심서]에 잘 담겨져 있다. 목민(牧民)은 백성을 잘 다스리고 기른다는 뜻이다. 그럼 심서란 무슨 뜻일까? 정약용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목민 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으로나마 행하고 연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권력에 대한 욕심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수기치인의 유교적 이념에 충실했던 그에게 관직이란 권리가 아닌 사회 지도층인 선비의 진정한 의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민심서]라는 책 이름 자체가 관직에 나갈 수 없음에도 이에 대한 책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진정한 유학자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실사구시(實事求是)는 도덕성 위에서 이루어진다."    

   1818년, 57세의 정약용은 마침내 긴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마재 고향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긴 유배생활 내내 유지했던 경건하고 성실한 유학자적 자세는 고향집에 돌아와서도 흩으려지지 않았다. 그 이듬해 봄에도 유배시절과 똑같이 성실한 자세로 관리의 부정을 방지하고 형법의 올바른 실행을 강조한 '흠흠심서(欽欽心書)' 30권을 썼고, 그 해 가을에는 '아언각비(雅言覺非)' 3권을 잇따라 저술했으니 말이다. 그 후에는 그때까지의 무리한 창작 활동으로 쇠약해 졌는지 창작 활동은 다소 뜸해지지만 유학자로서의 면모만은 끝까지 잃지 않았다.


   1836년(헌종 2년), 그는 파란만장했던 74세의 긴 생애를 마치고 눈을 감는다. 그 후로 50여년 뒤 고종은 그의 저작집인 '여유당전서'를 베껴서 내각에 보존하게 했다. 나아가 1910년, 순종 황제는 그에게 정2품 증헌대부 규장각 제학이라는 직위를 추증(追贈)하고 문도공(文度公)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배척받은 관리였지만 그의 뛰어난 학적 업적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음을 잘 보여주는 사후평가라고 하겠다.


   그의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자세는 지금도 학문하는 이들에게 있어 이상적인 학자의 모습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실사구시'는 결코 '돈 되고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좋은 것'이라는 식의 천박한 실용주의는 결코 아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유학자였다. 그는 진정한 유용성은 도덕성의 바탕 위에서 나오며, 또한 도덕적인 것은 결국 유용한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가슴에 안고 평생을 수양하는 자세로 살았던 것이다. '실용성'이 모든 다른 가치를 누르고 제 1의 덕목이 되어버린 현대 사회임에도 오히려 더욱더 그의 실사구시의 자세가 강조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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