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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시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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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金素月, 1902-1934, 본성명 김정식·廷湜) : 1920년대 민요조 서정시인

 

· 시인. 평북 정주 출생

· 오산중학 시절 스승인 김억(金億, 김안서)의 추천으로, [창조(創造)] 5호에 <낭인(浪人)의 봄> 등 5편 의 작품을 발표

· 1922년부터 김억의 주선으로 [개벽(開闢)]지를 통해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 <못잊어> 등 발표

· 1923년에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1924년 김동인 등과 함께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동

· 민요조의 고운 가락, 그리움의 애달픈 정서 표현

· 1934년 12월 사업의 실패와 세상에 대한 실의로 고민하다 자살

· 1925년 그의 생전에 [진달래꽃] 출간

· 그의 사망 후 1939년 김억의 주관 하에 [소월시초(素月詩抄)] 발간

---  시 <길>, <초혼>, <산>, <가는 길>, <금잔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개여울>

--- < 김억>(김억과 소월 관계),

 

󰏐 전국에 문학비 총 3백16기

 

**** 김소월 시비가 16기로 가장 많아 ****.

 

시인이자 사진 작가인 김구림씨가 이 땅에 세워진 문인들의 문학비를 모두 조사한 「한국의 문학비를 찾아서」(문학아카데미 간)를 펴내 화제다.

 

저자가 10년동안 현장을 답사하며 각 문학비의 위치와 설립경위, 비문내용 등을사진을 곁들여 소개한 이 책에 따르면 전국에 문학비가 세워진 문인은 총 2백 5명이며, 문학비는 3백16기로 드러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비는 48년 3월 대구에 세워진 이상화의 시비. 시인이자 번역문학가인 김소운은 해방전 영변 약산을 둘러보며 그곳에 김소월의 시비를 세우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었다. ---  < 김소운>

 

그러나 해방이 되고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영변에 세우려던 소월시비 건립은 무산되고 대신 이상화의 시비를 세운 것이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3백16기의 문학비를 문인별로 살펴보면 김소월이 16기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은 유치환(10기), 한용운(8기), 서정주, 조지훈, 박목월(7기)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사망문인으로는 김소월, 생존문인으로는 서정주의 시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또 문학비가 세워진 2백5명의 문인중 생존자는 54명으로 집계됐으나 제주조각공원 등 집단건립에 속한 33명을 제외하면 13명의 문학비가 세워진 것으로 집계됐다.

 

저자는 "문인들은 사라져도 그들의 작품은 남아 두고두고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리고 그 추모의 마음들이 모여 세워진 것이 문학비"라면서 "그러나 그리운 문인들을 추모하는 진심으로 세워야지, 누구의 비나 함부로 세워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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