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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생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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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생애

 

김소월(金素月) 시인 본명 정식(廷式) 평북 관산에서 출생 .곤관 공주 성도 의 맏아들.외가에서 태어나 100일이 지난후 본가로 갔다.2세때 아버지가 정주 솬산간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 사람 목도군에게 얻어 맞아 정신 이상 증세를 일으켜 부농인 조부의 훈도 아래 성장 .

 

고향에서 남산 보통학교 졸업.같은 해 홍단실과 결혼.오산학교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 졸업후 일본 도쿄상대에 입학앴으나 중퇴하여 귀국했다. 그의 오산학교 시절의 성적은 우수했고 주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일도 있었다. 그의 시제는 오산학교 은사였던 김억의 지도와 영향에서 있다. 1920년 그가 18세때 <창조>에 발표한 시 낭인의 봄’‘야의 우적’‘오과의 읍’‘그리워’‘춘강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같은 해에 학생계 창간호에 먼 후일’‘죽으면’ ‘허트러진 모래 등으로 등을 발표했다.그후 1922년 그가 20세때 배재고보에 편입한 해에 대표작 금잔디’‘엄마야 누나야 8편을 <개벽 19>에 발표하였고,떠나는 임의 앞날을 산화로 축복하는 불후의 명시 진달래꽃 (개벽 25)’을 발표하면서 천재적 시재를 봉 중앙문단의 각광을 받는다.

 

이어 설움과 애환의 민요적 정서가 깃든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했고 이듬에 1924년에는 조부의 광산일을 돕기 위해 고향에 있었고 한때 영변을 다녀왔으며 김동인,김찬영,임장화 등과 <영대(英坮)> 동인으로 활동 자연과 인간의 영원한 거리를 보여준 <영대3>에 시산유화를 비롯하여 밭고랑’‘생과 사 등을 발표하였고,이 해에 처가가 있는 구산군 서산면 지평동으로 이주,이어 동인지 <영대 5>에 시 옛님을 따라 가다가 꿈 깨어 탄식함이라’‘무언(無言)’을 발표 했고,시온의 음영과 정조를 강조한 유명한 그의 유일한 시론을 <개벽> 시혼발표.이 애에 그의 유일본 시집이요,후세에 30여종 이상의 이본이 발행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이후에도 <조선문단><문예공론> 등에 시를 발표했꼬,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며 관산에 있는 조부와 어머니를 졸라 땅을 처분하여 운영자금을 마련하기도 했으나 지국 경영은 실패했으며,인생에 대한 회의와 실의에 빠져 술을 드는 빈도가 많아졌고 끝내는 통음(桶飮)했다.

 

이 해 9년만에 곽산에 있는 선조의 무덤을 찾아갔고 이듬에 장에 가서 아편을 구해온 것을 가족들은 보았으면서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본 사람이 없었고,12 23일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데 이틑날 음독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1934 12 24일 예수처럼 33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사인은 아편을 먹은 탓이라고 되어 있다. 생활에 치졌던 천재 시인이 스스로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서구의 번역시가 유행하고 윤내내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산문체의 신시들이 1920년대 한국시단을 장식하고 있었으나 신시는 새로운 지식인들의 사랑방에서 벗어나 대중속으로 번져 나가지를 못했다. 벗어버린 율문(律文)의 구속이 작가들에게는 시원애도 그 노래를 불러야 할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고 정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 

 

소월은 이때 등장했다. 1922 <개벽>에 발표된 진달래꽃이 비로소 신시에 한국적인 생명을 불어 넣은 것이다.고 박목월 시인은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그 내용이 그를 저버리고 가는 에 대하여 꽃을 뿌려 산와의 축전을 배출려는 것이다.그를 버리고 떠나는 임에게 원망도 슬픔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꽃을 뿌려 축복이라도 하자고 했다. 이 심정이야 말로 그의 사랑이 무한에 미쳐 축복으로써 임과의 이별할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 것이다. 이것은 육체와 육체가 결합한 사랑이거나 , 눈앞에 있는 대상에 대한 타오르는 감정의 사랑이 아니다.오히려 그런 것을 체념함으로써 심화되고 확대된 사랑 -  하늘 같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혹은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슬픈을 억제하고 은근히 미소조차 띄우려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 조차 억누르려는 마음이다.이것은 김춘수 시인이 말한 대로 속에서는 울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아니 보이는 것이 한국적 원형 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체념함으로써 심화 -확대할수 있는 사랑은 한국적 또는 동양적인 사랑의 세계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 실려 있는 정서의 세계임이 분명하다. 또한 시의 형식에 있어서도 3-4-5 조간 중심이 되어 있다.즉 소월의 진달래꽃은 한국의 전통적인 형식으로 노래한 작품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통적인 시와 일단 결별한 한국의 신시가 서구의 근대적인 자유시를 수입하여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모방하던 시대,그야말로 시의 황금시대라기 보다는 외래 조류의 화려한 시의 도금시대를 이룬 1920년대 초기에 소월이 커다란 곡선을 그으면서 그 전통으로 다시 환원시킨 것이다.’ 또한 서정주 시인은 소월이 고향이 부르는 소리에 쏜살 같이 돌아온 귀향자라고 말했다. 모든 문학이 자기의 전통적인 기반 위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기본적 자세가 서구 모방주의가 팽팽하던 60여년전 소월에 의해 경고되고 되찾아지게 된 것이다. 소월의 시가 불멸의 가치를 한국의 시에 불어 넣고 소박한 민요로 읆볼이던 우리의 심성을 되살려 , 제 자리를 찾게 한 것은 우리 문학사에 끼친 그의 지대한 공로일 것이다. 민족시인 소월은 젊은날에 서구모방의 혼돈속을 방황하던 우리 시를 구원한 시인이다. 그의 유족으로는 월남한 유일한 진자 정호는 그의 3남이고,숙모 계회영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 김영삼이 지은 <소월정전> 소월 시집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하동호 백순재 공편의 <못잊을 그 사람>등이 간행되었고 1968 3월 한국일보사에서 서울 남산에 소월 시비를 세웠다. 33세로 요절한 그가 남긴 154편의 작품은 거의 20세 전후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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